지금은 미국의 대통령도 흑인이지만 얼마 전까지만 해도 흑인들은 식당에 마음대로 들어가 식사를 할 수도 없었고 버스를 타도 제대로 앉을 수 없었다. 흑인이 클래식 연주회장에 설 수 있게 된 것도 오래 되지 않았는데 그것은 마리안 앤더슨(사진·1897~1993)이라는 한 위대한 여성에 의해 힘들게 개척된 길이다. 그녀는 한 맺힌 애절함이 배어 있는 흑인영가로 흑인들의 상처받은 영혼을 위로하며 흑인영가를 예술가곡의 수준으로 다시 태어나게 한 전설적인 성악가이다.역사상 최고의 알토로 추앙되는 앤더슨은 필라델피아에서 가난한 흑인 얼음장수의 딸로 태어난다. 교회성가대에서 노래하는 여섯 살 어린 소녀의 뛰어난 실력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여덟 살에는 교회 사람들이 돈을 모아 개인콘서트를 열어 줄 만큼 유명해진다.
가난과 피부색 때문에 음악학교조차 다니지 못했지만 앤더슨은 뉴욕 필이 주최한 오디션에서 신비스런 목소리로 당당히 1등을 차지한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살 때의 일이다. 성공이 눈앞에 다가온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그녀의 행로는 인종차별과 싸우는 가시밭길의 연속이었다.
뛰어난 재능에도 불구하고 인종차별과 편견의 희생양이 된 그녀는 서른세 살에 미국을 떠난다. 장학재단의 도움으로 영국과 독일에서 공부한 후 가진 베를린에서 데뷔 공연은 대성공을 거둔다. 첫 무대에서 호평을 받기 시작한 그녀는 유럽 순회공연의 기회를 가지게 되고 토스카니니는 "100년에 한 번 들을 수 있는 음성"이라고 극찬을 할 만큼 세계적인 성악가로 발돋움한다. 그녀는 유럽 전역을 돌며 150차례 이상 공연을 가졌고 스웨덴의 왕 구스타프, 덴마크 왕 크리스티안이 직접 그녀를 접견할 정도로 유럽의 대스타가 된다.
하지만 앤더슨에게 미국공연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노예의 후손인 그녀에게 클래식공연장에서의 음악회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다. 그녀는 항의의 표시로 링컨기념관 광장에서 연주를 하게 되고 그녀에 대한 지지로 무려 7만5000명의 청중이 운집한다. 그만큼 그녀는 음악적인 능력뿐만 아니라 흑인들을 위한 노력과 따뜻한 성품으로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었다. 많은 흑인들에게 기회의 문을 열어준 이 공연은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음악회로 아직도 기억된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쉰여덟 살 때 그녀는 드디어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극장 무대에 선다. 인종차별의 벽을 깨고 미국무대에 서기까지 무려 30년이란 긴 세월이 필요했다. 공연은 비록 5회로 끝났지만 그녀의 큰 발자취 덕분에 그 후 세계 오페라하우스에서는 그녀의 뒤를 잇는 흑인 프리마돈나들의 진출이 활발해진다.
"차별과 고통은 처음엔 좌절을 주지만 나중엔 나를 강인하게 합니다." 연주여행 도중 스케줄이 잡힌 호텔에서 투숙을 거부당하기 일쑤였고 식당을 들어가지 못해 식사를 거르고 무대에 서기도 했지만 앤더슨은 이런 어려움 속에서도 항상 감사하며 긍정적으로 사람들을 대했다. 미국 내에서 명성을 얻은 후에도 부와 명예를 추구하지 않고 장학재단을 설립하여 자신의 뒤를 잇는 많은 흑인 가수들의 무대를 마련하는데 온 정성을 기울였다. 또한 그녀는 마틴 루터 킹을 도와 흑인의 인권과 평등을 호소하는데 앞장섰다. 예순한 살의 앤더슨은 아이젠하워 대통령에 의해 인권옹호위원회 대표로 유엔에 파견돼 인권 외교 방면에도 활약한다. 20세기에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100인의 여성 중 예술분야에서 최고로 꼽힌 그녀는 세기의 음악가이기 이전에 위대한 인권운동가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된다.
부산시립교향악단 부지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