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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자유로운 음악창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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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1,642회 작성일 11-10-19 1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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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르네상스와 자유로운 창작
 
‘르네상스’라는 말은 ‘거듭난다’는 뜻이다. 이 말은 처음에는 중세교회의 억압에서 벗어나 그리스 문화를 되찾자는 뜻으로 쓰였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그 뜻이 넓어졌고, 쓰임새 또한 다양해졌다. 중세는 사람들의 생활과 생각이 크리스트교 신앙에 따라야만 했으며, 학문과 예술도 교회가 정해 주는데 따르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였다. 그런 중세를 사람이 사람답지 못하게 살았던 ‘암흑의 시대’라고 비판하면서 사람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되찾자는 운동이 바로 르네상스운동이다. 이 르네상스 운동은 이탈리아의 피렌체를 중심으로 미술가들과 문학가들한테서 시작되었다. 그 대표적인 사람들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단테나 보카치오 등이다.
음악은 누가 앞서서 르네상스 음악 운동을 벌인 것이 아니다. 세상이 달라짐에 따라 자연스럽게 민속 음악들이 음악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으며, 자유스러운 음악 표현도 나타났다. 즉, 아르스 노바(새로운 예술) 운동이 모든 음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 넣은 것이다.
중세의 교회 음악과 르네상스 음악을 비교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시의 내용을 뚜렷이 살린 노래들이 나타났다. 시의 운율이 음악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② 음악도 시처럼 느낌을 살리려고 애를 쓰게 되었다.
③ 악절과 악절이 뚜렷이 구분되는 음악 형식으로 정리되었다.
④ 소리의 울림과 높낮이가 다양해졌다.

2. 인간 중심의 음악
 
흐르는 듯 부드럽게 나아가는 그레고리오 성가에 비해 르네상스 음악은 약간 무디고 딱딱한 느낌을 준다. 그러나 여러 소리가 풍부하게 어울려 음악을 듣는 즐거움을 준다는 특징이 있다. 뿐만 아니라 악기들이 쓰이게 되었으며, 노래가 빠진 악기만을 위한 기악곡도 나타났다. 그렇지만 여전히 종교적인 주제를 가진 음악들이었다. 성가 역시 새로운 음악의 영향을 받아 크게 탈바꿈했다. 이어서 종교 개혁이 일어나자, 신교도들은 완전히 새로운 음악 형식에 따라 찬송가를 만들어 부르게 되었다. 민속 음악들은 여전히 민속 음악의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예전처럼 민속 음악을 천박하게 여기거나 멀리하는 일은 없었다. 사람들의 일상생활 속에 민속 음악이 자연스럽게 자리잡아 모두 음악을 즐길 수 있게 되었다. 종교 음악과 민속 음악이 나란히 놓이게 되자, 그 두 가지를 골고루 섞은 음악인 창작 음악이 나타나 음악도 미술이나 문학과 함께 예술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예배의 한 부분에 들었던 종교 음악과 오락을 위한 민속 음악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 작곡법이 나타났고, 작곡가들은 자기의 뜻과 느낌을 또렷하게 나타낼 수 있게 되었다. 또 신에게 바치는 음악이 아니라, 음악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위해서 아름답고 감정이 흘러넘치는 음악을 만들었다.
르네상스 음악가들의 작품은 밝고 균형이 잘 잡혀 있다. 꾸밈음이나 떨림음, 당김음들을 장식음이라고 하는데, 민속 음악에는 장식음이 많지만 르네상스의 창작 음악들은 장식음이 거의 없었다. 그것은 듣는 이들에게 기쁨, 즐거움, 힘, 슬픔 따위의 감정을 억지로 안겨 주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그러나 사람들의 마음과 깊은 정신이 깃들인 시를 주제로 하는 일이 많았다. 그 시의 내용과 형식을 음악으로 살려내기 위해 장식음들을 멀리하고 균형을 중요하게 여겼던 것이다.
르네상스 음악은 반주가 없는 합창이나 같은 악기들의 합주곡이 많다. 그러나 듣고 있노라면 전혀 다른 악기들을 모아 합주하는 듯이 들리며, 합창도 여러 높이의 소리들을 다 존중해 주고 있는 까닭에 매우 다양하게 들린다. 그런 르네상스 음악을 대표하는 두 갈래의 흐름이 있었는데, 부르고뉴 악파와 플랑드르 악파이다.

3. 던스터블과 부르고뉴 악파
 
유럽 음악사에서 영국은 그다지 큰 구실을 하지 못했다. 다성 음악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던스터블과 뒷날의 헨리 퍼셀을 빼면, 사람들이 흔히 알고 있는 음악가들 가운데 영국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영국은 그 어느 나라보다 예로부터 민속 음악이 발달한 나라였다. 섬나라였기에 로마 교황의 간섭도 약했고, 대륙으로부터 받아들이는 종교 음악이 영국 사람들에게 맞지 않았던 데도 이유가 있었다. 영국의 다성 음악은 유럽 대륙과는 달리 민요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 일찍부터 화음이 있는 음악을 즐기고 있었기 때문에 잘 발달된 화음 음악과 종교 음악을 하나로 하다 보니 다성 음악이 태어나고 말았던 것이다. ‘포부르동’이라는 이 영국의 다성 음악이 유럽 대륙으로 건너갔다.
존 던스터블(1370?~1453)은 15세기 유럽을 대표하는 음악가였다. 그는 영국에 르네상스 음악의 바람을 일으킨 사람이었으며, 부르고뉴 악파가 이루어지게 한 주인공으로, 음악가이면서 천문학자, 수학자이기도 했다. 피타고라스를 닮은 그의 됨됨이는 르네상스 바람에 너무나 잘 어울렸다. 던스터블은 불협화음과 당김음을 교묘하게 이용하여 매우 힘차게 운동하는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가 만든 음악들은 정선율을 충분히 자유스럽게 이용해 마치 많은 장식음을 이용한 듯한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 게다가 그는 악기의 반주가 있는 노래도 작곡했다. 그는 또 종교 음악 외에 샹송이라고 하는 유행가도 작곡해 많은 사람들을 즐겁게 했다. 샹송은 프랑스에서 발라드라고 하는 민속 춤곡에 이어 나타난 노래로, 독창이 높은 소리를 맡고 반주 악기가 2가지 높이의 소리를 맡는 형식이다. 그래서 3가지 높이의 소리가 한꺼번에 들리게 된다.
부르고뉴 악파는 던스터블의 영향을 받아들여서 새로운 음악을 만든 프랑스 부르고뉴 지방의 음악가들을 말한다. 질 뱅슈아(1400?~1460)와 기욤 뒤파이(1400?~1474)가 대표적인 사람들이다. 그들이 작곡한 샹송은 마치 그림을 그리듯 거리의 모습, 전쟁 장면, 숲등을 음악으로 보여 주었다. 그리고 그레고리오 성가를 다성 음악 형식으로 바꾼 다음 장식음을 섞고 리듬까지 변화시킨 디스칸투스 미사곡도 만들었다. 디스칸투스 미사곡을 들으면 그레고리오 성가의 본래 소리를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그들은 민속 춤곡인 발라드를 발전시켜 궁정의 춤곡으로 만들기도 했다. 부르고뉴 악파는 플랑드르 악파의 아버지뻘이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4. 플랑드르 악파
 
플랑드르 지방에서 번성한 플랑드르 악파는 네덜란드 남부의 일부지방을 포함해 네덜란드 악파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 플랑드르 악파는 부르고뉴 악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그들은 선배 악파들과는 달리 감정을 음악에 드러내지 않았다. 그보다는 수학공식에 가까운 어려운 음악을 만드는데 몰두했던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악보를 보는 연주자는 수학 문제를 풀 듯 노력을 기울여 연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게르만 족의 음악과 라틴 족의 문화를 조화시켜 매우 부드러운 음악을 만들어 냈다. 그들이 음악을 어렵게 작곡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사람들이 더불어 살려면 서로 피해를 입히지 않도록 질서가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그것이다. 올바른 질서는 사람의 행동이 올바른지 아닌지를 판단하게 해 주는 과학적인 것이기 때문에 감정이 섞여서는 안 된다고 그들은 주장했다. 음악 역시 사회와 모든 사람들이 올바르게 살아가는 데 따라야 하기 때문에 과학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으로 작곡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음악은 매우 어렵긴 하지만 질서가 뚜렷하고 그러면서도 부드럽게 연주된다.
플랑드르 악파의 대표적인 사람들은 오케겜(1430?~1495), 오브레히트(1450?~1505), 이자크(1450~1517), 조스캥 데 프레(1450?~1521)등이다.
오케겜은 플랑드르 악파의 시조라 할 수 있다. 그는 훌륭한 인격과 뛰어난 음악적 재능으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아 사람들은 오케겜을 ‘음악의 왕’, ‘부활한 오르페우스’라고까지 불렀다. 그의 음악의 거의 3박자로 매우 부드럽다. 또 베이스와 같은 낮은 소리를 처음으로 합창과 기악곡에 넣어 음악을 더욱 풍부하게 했으며 무게감을 주게 되었다. 그는 장식음을 많이 썼는데, 특히 당김음과 반박자를 많이 썼다. 그가 작곡한 ‘신에게 감사’는 36가지 높이의 소리가 4부로 나뉘어 부르는데, 처음부터 끝까지 끊임없는 다른 소리들이 나타나도록 작곡되어 있다.
오브레히트, 이자크, 조스캥은 오케겜의 복잡하고 세밀한 작곡법을 마지막까지 발전시킨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오케겜은 옛 음악을 버리지 못했던 것에 비해, 그들은 용감하게 옛 음악에서 벗어나 르네상스 운동에 참여했다.
오브레히트는 2박자를 많이 사용했으며, 박자의 강약의 매우 뚜렷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자크는 모든 음악 형식을 있는 대로 자유롭게 활용한 작곡가였다. 그는 플랑드르에서 뿐 아니라 이탈리아에서도 음악 활동을 했으며, 프랑스어로 샹송을 작곡하기도 했고 독일어로 독일 가고(리트)을 작곡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 카톨릭 교회에서 쓰이는 있는 ‘콘스탄체 코랄집’을 만든 사람이다.
프레는 플랑드르 악파의 막내인 셈이다. 그래서 그의 음악은 오케겜의 음악과 가장 멀어져 있다. 선배들에 비해 그는 훨씬 간단하고 단순하게 작곡했지만, 더욱 잔손질이 많이 간 작품을 만들었다. 그는 오늘날의 화성 음악의 길을 튼 주인공이었다. 감정을 누를 수 있는데 까지 눌렀던 선배들의 작품에 비해, 그의 작품은 우아하고 밝으며 흥분된 힘이 그대로 드러난다.

5. 후기 르네상스의 음악
 
르네상스에 힘입어 유럽의 여러 민족들이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게 되었다. 그 동안 크리스트교의 지배 아래서 자기가 어느 민족이며, 어느 나라 사람인지를 거의 잊은 채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자기네 말로 노래하고 시를 쓰게 되었으며, 자기 나라 백성들의 삶을 그림으로 옮기게 되었다. 16세기에 들어서서 이탈리아의 보카치오, 영국의 셰익스피어, 에스파냐의 세르반테스 등이 앞장서 자기 나라말로 문학을 창작했다. 그리고 레오나르도 다 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등이 미술 작품을 통해 자연속에서 신앙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 삶의 고통과 기쁨, 슬픔과 즐거움을 솔직하게 나타냈다.
플랑드르 악파의 새로운 음악의 이탈리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그 영향을 받아 베네치아 악파와 로마 악파가 태어났다. 자기 민족의 성격을 그대로 음악에 담았던 그들은 스스로 르네상스를 이어받은 ‘후기 르네상스’라고 했다. 게다가 독일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은 교회 음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독일 사람들은 그것만으로도 중세 암흑의 시대를 벗어나 새로운 시대로 들어선 것이 되었다. 종교 개혁에 반대하는 로마 카톨릭 교회 역시 신교에 맞서 교회 음악을 새롭게 정리하였다.
16세기 음악을 대표하는 것은 ‘마드리갈’ 이라는 남녀의 사랑을 주제로 하는 음악이다. 이 마드리갈은 매우 아름답고 자유스러우며 독특한 음악인데, 민속 음악이 아닌 귀족들의 음악이었다. 그래서 품위를 잃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서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다룬다던가 해서 억지 슬픔을 자아내기도 한다. 플랑드르 출신의 베르들로(1480~1545), 그리고 아르카델트(1514~1567)와 이탈리아의 페스타(1490?~1545)는 유명한 마드리갈 작곡들이다. 아르카델트의 ‘아베마리아’는 오늘날까지 애창되는 노래이다.

6. 르네상스 음악의 가는 길
 
한편, 16세기에 들어서자 반주 악기의 사용이 두드러졌다.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의 대성당에 있는 파이프 오르간들이 바로 그때 설치된 것들이다. 악기를 사용하면서 나타난 것이 ‘2중 합창’이었다. 악기와 사람의 목소리가 서로 대화하듯 어울리고 다투는 진행을 본딴 것이다.
2중 합창을 처음으로 만들어 베네치아 악파의 시조가 된 사람이 빌라르트(1490?~1562)이다. 그는 제자들과 함께 새로운 음악을 찾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빌라르트의 제자 가운데 오늘날까지 잘 알려져 있는 사람은 안드레아 가브리엘리(1510~1586)와 조반니 가브리엘리(1557~1612)이다. 베네치아 악파를 이룬 이들은 화음을 모자람 없이 이용했으며, 반음계를 많이 써서 매우 환성적인 음악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들은 마치 미술처럼 내용을 상세하게 전달하려고 ‘음화법’을 개발했다. 그런 노력으로 얻어진 결실이 곧 ‘2중 합창’이었다.
안드레아 가브리엘리의 음악에는 자유 도시 베네치아의 분위기가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화려한 축제를 생생하게 그려내게 위해 화음을 다양하게 사용했으며, 악기들과 사람들의 목소리가 낼 수 있는 모든 소리들이 다 나타나기도 하는 그의 음악이다. 합창과 기악이 잘 어울리는 ‘신성 교향곡’은 교향악의 시조이기도 하며, 오라토리오나 칸타타의 모범이 되기도 한다. 그의 오르간 음악은 아직까지 연주되고 있다.
조반니 가브리엘리는 스승 빌라르트의 음악 정신을 가장 높은 데까지 끌어올린 사람이다. 호화 찬란하고 리듬과 빠르기가 다양한 그의 음악의 베네치아 악파의 대표로 여겨지고 있다.

7. 르네상스와 독일 음악의 발전
 
르네상스 음악에서 독일의 음악은 거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러나 르네상스 음악이 꽃을 피우고 끝으로 열매를 맺게 되는 곳이 바로 독일이다. 19세기에 이르러 독일 가곡을 찬란하게 꾸민 슈베르트야말로 르네상스 음악의 마지막 후계자였기 때문이다.
독일에서는 일찍부터 독창 가곡(리트)이 발달해 있었다. 민네쟁거와 마이스터징거의 음악은 다성 음악이기도 했지만, 독창으로 부를 수 있는 음악이었다. 15세기 독일에서는 글로가우 가곡집, 로하머 가곡집이 출판되었다. 그리고 몇 개의 가곡들을 한데 묶은 매우 재미있는 우스개 가곡집 쿼들리베트가 시민들에게 널리 불려지고 있었다. 독일의 가곡 작가로서 플랑드르 악파의 이자크를 들 수가 있는데, 그의 ‘인스부르크여, 안녕’은 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널리 불려지는 가곡이다.
독일 음악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종교 개혁이었다. 종교 개혁은 1517년 독일에서 마르틴 루터가 카톨릭 교회에서 반대해서 일으킨 새로운 종교 운동이었다. 교황청을 중심으로 한 교회의 권력에 반대하고, 오직 성서와 신앙만이 구원의 힘이라는 루터의 주장은 카톨릭 교회로 보면 엄청난 혁명이었다. 종교 개혁으로 이룩된 신교(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중세 이후 전해져 내려오는 종교 음악을 버리고 새로운 교회 음악을 찾게 되었다. 신교 교회는 게르만 민족의 성격과 민속 음악, 가곡을 써서 찬송가를 만들었다. 이것을 코랄이라고 부른다. 날이 갈수록 신교가 넓게 퍼지자 카톨릭 교회는 위협을 느꼈다. 그들은 신교에 대항하기 위해 카톨릭 자체를 탈바꿈시켜야 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교회 음악을 바꾼 것이었다. 카톨릭은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음악을 바탕으로 새로운 성가를 만들었다. 그들은 모든 학교에서 새로운 성가를 부르게 했으며, 세계 곳곳으로 선교사들을 보내 새로운 성가를 보급했다. 종교 개혁으로 새로운 찬송가가 만들어진 것은 루터자신이 음악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이다. 루터는 음악에 대한 깊은 지식을 지니고 있었으며, 고대 그리스 인들의 음악 정신을 지지하고 있었다. 루터는 친구들의 도움을 얻어 20년 가까이 꾸준하게 “종교 가곡집”을 만들어 냈다. 그 가곡집에는 그레고리오 성가를 독일어로 번역한 것도 있지만, 민속 음악에 종교적인 가사를 단 가곡 등도 들어 있다. 이 가곡집의 노래들은 누구나 쉽게 부를 수 있으며 언제 어디서나 부를 수 있는 가곡들이다. 루터 자신이 작곡한 합창곡도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곡이 ‘주는 나의 강한 성’이다. 찬송가에 대한 루터의 노력은 그 후 독일 음악에 큰 영향을 미쳤다. 바흐를 비롯한 독일 음악가들에게 가장 중요한 기초를 마련해 준 것이 루터의 합창곡(코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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