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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부터 1600년까지를 음악사에서 보통 르네상스시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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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1,750회 작성일 11-10-19 11: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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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50년부터 1600년까지를 음악사에서 보통 르네상스시대라 부른다. 고대문화 특히 그리스의 연극, 문학의 재생을 의미하는 르네상스 운동은 음악에 있어서는 다른 예술분야보다 약간 늦게 일어났다. 미술과 문학은 고대 그리스의 규범이 있었기 때문에 고대예술의 부활과 재생이 가능했지만 음악은 그 추상적 성격 때문에 그 규범으로서 그리스 음악은 남아있지 않았다. 따라서 음악에서의 르네상스 운동은 고대 그리스 음악의 재생이라기 보다는 그리스 인들의 인간정신(humanism)의 부활이며 억압되지 않은 인간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려는 예술운동이었다. 

종교가 세계를 지배하고 있던 것에서부터 현세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본주의적 세계관의 반영으로 볼 수 있는 것들 즉, 음악가의 개인적인 감정이 중요시되기 시작하였고, 엄격한 형식의 소멸, 음악과 가사의 긴밀한 결합, 음에 빛깔을 부여하는 반음계의 사용, 기악음악의 발달 등에서 보여지는 괄목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음악은 미술이나 문학보다 조금 늦은 15세기초 영국의 던스터블과 부르고뉴악파에 의해 그 터전이 마련된 후 플랑드르악파에 의해 계승되어 화려한 꽃을 피우면서 전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부르고뉴악파(Burgandy School).
 
15세기초 초기 르네상스음악의 중심은 프랑스 중동부에 위치한 부르고뉴 지방이었다. 부르고뉴 지방은 포도주의 명산지로서 비옥한 토지를 갖고 있었고 영국과 프랑스간 백년전쟁으로 프랑스 국력이 약해진 사이에 부르고뉴 공국은 축적된 부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정치, 경제, 문화적 존재를 과시했다. 당시 이 지역은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독일 사이의 무역이 교차하는 지점이었으므로 각자의 훌륭한 문화가 자연스럽게 융합되었다.
영국의 던스터블(Dunstable)은 부르고뉴악파의 시조격인 인물로 영국과 프랑스간의 백년전쟁을 통해 영국음악이 자연스럽게 프랑스로 유입되었고 프랑스 특유의 섬세함과 융화되어 부르고뉴악파라는 새로운 대륙 음악양식을 만들어냈다. 부르고뉴의 선량한 필립공(Philip the Good)은 대단한 예술의 후원자로서 그의 치세에 수많은 예술가들을 그의 궁정으로 불러들여 부르고뉴공국의 위엄과 영화를 자랑하였다. 부르고뉴악파를 대표하는 음악가로는 뒤파이(Dufay)와 뱅수아(Binchois) 2사람이다. 뱅수아는 거의 일생(26년간)을 선량한 필립공의 궁정악장으로 보낸 사람으로 그가 남긴 미사, 모테트, 샹송 중 세속음악 특히 샹송에 그의 음악성이 훌륭하게 드러나고 있다. 뱅수아보다 더 국제적 명성을 누린 뒤파이는 세속음악과 종교음악 전 분야에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미사곡은 그의 음악적 수법이 가장 다양하게 발휘된 장르로서 장대하고 위엄이 가득차 있다.
미사 통상문 5개 악장을 하나의 정해진 선율(정선율, Cantus firmis)을 사용하여 미사 전체에 통일감을 주도록한 정선율미사를 발전시킨 점이다. 오늘날 남아있는 8곡의 미사중 5곡이 정선율 미사곡이며「미사 보라 주님의 여종」, 「미사 하늘의 여왕」은 그의 대표작이다. 그리고 정선율로 그때까지 관행처럼 사용되어온 그레고리오성가 대신에 당시 널리 유행하던 세속 곡을 정선율로 사용한 최초의 작곡가가 뒤파이다. 무장한 사람 (L'homme arme)은 그당시 가장 유명했던 세속선율로 17세기초까지 수많은 작곡가들이 이것을 정선율로 사용해 작곡했다. 그외 뒤파이는 기지와 매력이 넘치는 약 90곡의 샹송을 남겼는데 그의 음악은 분위기가 밝고, 낙천적이고 친숙하기 쉬워 15세기의 모짜르트로 불리워지고 있다. 뒤파이의 음악사에 끼친 공적은 무엇보다도 모테트 양식을 발전시켜 르네상스 음악의 근간이된 폴리포니 음악을 싹트게 한데 있다. 부르고뉴악파 작곡가들의 창조적 활동은 15세기 중반까지 계속되었으나 15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부르고뉴악파는 플랑드르악파로 승계되어 그후 플랑드르악파가 주도적 역할을 하게된다.

플랑드르악파(네델란드 악파)

당시 플랑드르 지방은 모직업, 금속세공업, 무역업등으로 경제적 번역을 누리고 있었다. 그 중 암스테르담, 앤트워프, 브뤼게 등은 세계 제 1급의 도시로 발전 되었다. 당시 플랑드르 지방은 현재의 북 프랑스로부터 북해연한에 걸치는 오늘날의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델란드까지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었다. 이들의 음악적 기법은 전 유럽에 퍼졌고 1450-1550년까지 전 유럽을 지배하는 음악학파가 되었다. 이시기 유럽의 중요한 도시의 성당이나 궁정악장은 거의 모두가 플랑드르 출신 음악가가 차지하고 있었다. 음악적으로 플랑드르악파는 부르고뉴악파의 영향을 받았지만 전혀 다른 길을 걸었다. 선배격인 부르고뉴악파가 형식이 자유로운 세속음악에 강한 면모를 보인 것과는 달리 플랑드르악파는 세속음악보다는 종교음악에 더 힘을 기울여 감정을 음악에 드러내지 않는 엄격하고도 정교한 폴리포니음악을 만들어 냈다. 플랑드르악파의 대표적 인물은 오케겜(Ockeghem), 오브레히트(Obrecht), 조스캥 데프레(Josquin des Prez), 이자크(Isaac), 라수스(Lassus) 등이다.
플랑드르악파의 시조격인 인물인 오케켐의 미사 「플로라티오눔(Missa Prolationum)」에서 그의 치밀하고도 정교한 폴리포니기법은 플랑드르악파 음악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 플랑드르악파가 장기로한 폴리포니기법은 각 성부는 종속적인 관계가 아니라 평등하게 취급되었고 각 성부는 고유의 리듬을 갖고 성부가 복잡하게 서로 엉켜져 있었다. 서로 복잡하게 엉켜져 있었기 때문에 독립된 각각의 성부를 하나의 동기에 의해 통일하기 위해 모방수법으로 악곡 전체를 구성해 가는 통모방양식은 조스캥에 의해 절정을 이룬다. 그리고 종래의 3성부 중심의 기법 대신에 그때까지 최저 성부였던 테노르 성부보다 더 낮은 바수스가 추가되어 4성부가(16세기 후반에는 5성부) 표준적으로되어 음악은 보다 풍성한 울림을 획득하게 되었다.르네상스 작곡가들은 당시 획일적으로 사용되던 플랑드르악파의 폴리포니기법에 그 지역 특유의 음악어법을 가미했기 때문에 각 지역마다 독특한 다양한 민족양식의 음악이 발달되고 새로운 음악기법과 장르들이 생겨나게 되었다. 대륙과 떨어진 영국은 일찍이 부르고뉴 시대이전부터 3도, 6도 같은 음정을 사용하는등 영국 특유의 음악이 발달되었고, 대중에게 친근한 류트가곡(Lute song), 버지날(Virginal)과 같은 기악음악이, 이탈리아에서는 마드리갈(Madrigal)과 플로톨라(Frotolla)와 같은 이탈리아 특유의 경쾌한 음악양식이 발달하였다. 스페인에서는 특히 비우엘라(Vihuela), 오르간과 같은 기악음악이 발달하였고 비얀시코(Villancico)와 로만세(Romance)와 같은 그나라 특유의 음악장르와 기법이 발생되었다. 독일에서는 뒤늦었지만 이자크, 젠플(Senfl), 라수스에 의해 게르만적 특질이 넘치는 다성가곡의 음악양식을 만들어 후일 독일가곡(Lied)의 모체가 되었고, 프랑스에서는 프랑스 시민정신에 부합되는 자유스러운 샹송이 중요한 양식으로 자리잡았다. 그러나 기악음악의 꽃은 보다 많은 세월이 필요했으며 바로크시대 후반에 가서야 그 결실을 보게된다.
종교개혁. 르네상스 음악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은 1517년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에 의한 종교개혁이다. 이 운동은 종교적, 정치적으로 대변혁을 일으켰지만 음악사에도 커다란 변화를 일으켰다. 종교개혁으로 인해 교회는 가톨릭교회와 루터파 교회로 분리되었으며 음악에 있어서도 코랄이라는 루터파 교회의 새로운 양식이 생겨났다. 종교개혁가 루터(1483-1546)는 음악에 깊은 관심과 이해를 갖고 있던 인물이었다. 류트와 플루트를 잘 연주하였고 합창에서는 테노르 파트를 불렀고 약간의 작곡도 남겼다.「내주는 강한성」, 「고뇌의 깊은 심연으로 부터」등은 루터자신이 작곡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확실한 것은 알수 없다. 당대의 유명한 음악가들과도 친교가 깊었고 그는 신학 다음으로 음악에 필적할 만한 학예(Ars)는 존재않는다는 것, 신학만이 할수 있는일, 즉 영혼을 위로하고 기쁘게 하는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에 의하면 음악은 “신의 선물”이었다. 이러한 루터의 음악관 때문에, 또 만인이 사제라는 그의 전례관 때문에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음악을 의외로 중요하게 여겼다. 독일어를 음악과 긴밀하게 일치시켰으며, 회중이 쉽게 노래할 수 있는 음악을 이상으로 하였다. 이러한 요청에 의해 복음교회 회중가로서 코랄이 성립하게 되었다. 코랄은 원래 회중가로서 단선율 형식으로 제창으로 불리워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한편 성가대와 음악적 소양을 가진 사람을 위해 폴리포니 기법에 의한 코랄도 필요하게 되었다.
루터의 음악적 협력자였던 요한 발터(Johann Walter 1496-1570)는 많은 다성 코랄을 작곡했는데 이곡들은 플랑드르풍의 폴리포닉한 전개를 하고 있다. 그 후 루카스 오시안더(Lucas Osiander)는 다성 코랄은 종래에 주선율을 테노르(중성부)에 두던 것을 최상성부에 두어 4성의 호모포닉한 화성으로 작곡하여 누구라도 일제히 부를 수 있게 하였다. 16세기말부터 17세기초에 걸쳐 한스 레오 하슬러(Hans Leo Hassler, 1564-1612), 미하엘 프레토리우스(michael Praetorius, 1571-1621) 등은 대규모 모테트풍의 코랄을 작곡하였다.이 시기의 독일 프로테스탄트 작곡가들은 수난곡을 잘 작곡하였느느데 요한 발터의 「마태 수난곡」은 개인이 말하는 부분은 레시타티브 풍의 단선율 악구를, 군중이 말하는 부분은 단순한 호모포닉 합창을 할당하는 형식으로 구성되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으로 당시 음악적으로 미개하였던 독일 음악은 비로서 독립할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고, 그후 독일 프로테스탄트 음악은 17세기 하인리히 쉬츠(Heinrich Schutz, 1585-1672), 헤르만 샤인(hermann Schein, 1586-1630), 요한 세바스챤 바하(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 등으로 이어지는 바로크기의 독일 음악의 도도한 전개를 이룩하게 된다.
영국의 종교개혁은 신학적인 문제가 아닌 헨리 8세의 이혼문제로 인한 교황과의 대립으로 1554년 수장령의 발표와 함께 영국 국교회(성공회)가 성립되어 독자의 예배형식과 그것에 맞는 교회음악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아직 영어가 국교회의 공용어로 확정되어 있지않아 영어가 아닌 라틴어로 작곡되는 경우가 많았고, 여기에 정치적 상황이 얽혀 음악가들은 국교회와 가톨릭 사이를 왔다갔다 하는 경우도 적지않았고, 양교회 모두를 위해 작곡하기도 했다. 가톨릭의 미사에 해당하는 예배음악인 서비스(Service)와 가톨릭의 모테트에 해당되는 앤섬(anthem)이 태어났으며 서비스는 또 대위법적이고 장식적인 선율을 사용하는 대서비스(great service)와 단선율적이고 수직화성 선율을 사용하는 소 서비스(short service)가 생겨났다. 앤섬도 짜임새가 대위법적이고 합창단이 부르는 완전 앤섬(full anthem) 과 기악반주를 동반하는 독창과 합창이 교대로 부르는 운문앤섬(verse anthem)이 생겨났다.
토마스 탈리스(Thomas Tallis)는 라틴어에 의한 미사, 모테트와 영어에 의한 서비스, 앤섬등 양쪽 교회를 위한 작품을 남겼다. 전체적으로 초기 작품에는 폴리포닉한 기교적 경향이 강하며 종교개혁이후의 작품에는 전례의 개혁 지침을 반영하는 단순한 화성적구성의 작품이 많다. 「그대외에 바램없도다」(Spem in alium)는 8개로 나누어진 5성부 합창단이 서로 모방해 나가는 도합 40성부를 위한 대규모작품이다. 여기에 비해 만년의 2곡의 「예레미아 탄가」는 대위법적 중후한 색체적 화성이 균형을 이룬 주목할 만한 작품이다. 탈리스의 제자인 윌리엄 버드(William Byrd)도 스승과 마찬가지로 영어와 라틴어에 의한 2종류의 종교작품을 남겼다. 3성, 4성, 5성을 위한 각각 1곡씩의 미사를 남겼는데 모두가 그의 대표작이다. 그외「종교곡집」(Cantione sacrae),「그레듀아레」(Graduale) 등의 곡집에 수록된 60곡 이상의 라틴어 모테트에는 버드의 폴리포니기법이 종횡으로 전개되고 있다. 특히 4성의 「주님의 성체」(Ave verum corpus), 6성의 「오늘이야 말로」(Haec dies) 등은 특히 유명하다. 버드는 국교회를 위한 서비스도 4곡 썼으며, 버드에 의해 영국음악은 비로서 대륙의 음악과 비교할 수준이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있다.
16세기 전반까지에도 종교음악이 유럽 전체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플랑드르악파의 폴리포닉한 종교작품은 높은 기술적 완성을 추구한 나머지 가사의 전달이 불분명한 점등 전례음악으로서의 결함을 내포하고 있었다.이런 상황은 교회당국에 의해서 어떤 형태든지 개혁을 필요로 하였다. 마침내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이 파문을 진정시키기 위해 1545-1563년 사이에 북이탈리아의 트렌트 공의회가 열렸다. 여기에서는 가톨릭교회의 교리뿐만 아니라 교회음악에 대한 여러 가지 지적이 있었는데 세속적인 정선율의 사용, 악기의 과다한사용, 불분명한 가사의 사용에 대한 지적이 있었다. 결국 “신의 집이 진정한 기도의 집” 이 될수 있도록 불결,음란하고 세속적인 음악과 비교육적 언어는 교회내에서 자제하라는 것이었다. 16세기 후반에 바로 이와같은 시기에 르네상스 전기간을 통해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서 교회음악의 왕자로 칭송되고 있는 팔레스트리나(Palestrina)가 출현하였다. 순수한 이탈리아인이었지만 그의 음악적 기조는 역시 플랑드르악파의 폴리포니 기법에 의거하고 있다. 확실히 그의 작품에는 플랑드르악파의 특징인 선율이 중단됨이 없이 흐르는 통모방양식의 특징을 지니고 있다. 특히 초기 미사곡에는 정선율을 테노르 성부가 독점하고 있으며, 기교적으로 카논을 많이 사용하고 있는 등 플랑드르적 수법이 강하게 보인다. 그러나 팔레스트리나의 경우 기계적인 엄격한 모방은 아니고 선율을 다소 변형함으로써 화성적인 효과를 높이고 있으며, 또한 트렌트 공의회의 개혁안을 적극 수용하여 가사의 정확한 전달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으며 다성적인 짜임새(폴리포니)가 가사의 전달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였다. 화성적인 충실을 극히 중요시하여 가급적 반음계 사용을 회피하여 그의 음악은 다른 작곡가보다 부드럽고 투명한 음향을 갖는 소위 “팔레스트리나 양식”을 만들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스캥의 음악과 비교해 들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베네치아 악파
 
16세기 후반 베네치아는 로마와 함께 이탈리아 교회음악의 중심지였다. 13세기 이래 유럽 유일 항구로서 동양으로부터 면사, 향료, 주단등을 수입하였고 북구의 은, 주석, 모직물을 수출하여 부를 누리고 있었고, 로마의 영향에서 벗어나 독자의 정치경제적 번영을 누리고 있었다. 베네치아의 모든 정치, 종교, 문화적 행사는 산 마르코 성당과 그 광장에서 거행되었으며 각종 행사 때 사용되는 음악은 교회와 도시의 위엄을 과시할 수 있도록 화려하고 장엄하였다.
1527년 플랑드르 음악가 아드리안 빌라르트(Adrian Willert)가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취임하여 플랑드르 악파의 폴리포니 기법 베네치아에 전파하였다. 빌라르트는 복합창(cori spezzati)와 반음계법을 사용하여 새로운 음악을 개척하였다. 빌라르트는 비잔틴 건축양식에 의해 2개의 오르간과 합창대를 위해 회랑이서로 대치되는 산 마르코 성당의 특이한 내부구조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종전에 없던 음악에 색채적이고도 화려한 극적 표현을 만들었다. 그를 뒤이어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한 안드레아 가브리엘리(Andrea Gabrielli, 1561-86)와 그의 조카 조반니 가브리엘리(Giovanni Gabrielli, 1553-1612) 등의 활약에 의해 베네치아 악파는 더욱 번영의 길을 걸었다. 안드레아 가브리엘리는 교회작품에 오르간이나 관악기를 사용하여 그 색채감과 극적 표현력을 증대시키려 하였으며, 그의 조카이자 제자였던 조반니 가브리엘리는 강약의 대비, 에코 효과등을 의식적으로 사용하여 음악에 극적이고도 화려함을 더하였다. 이와 같은 가브리엘리의 음악기법속에서 곧이어 태동할 바로크 음악이 성숙되고 있었다. 1613년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으로 부임한 몬테베르디(Monteverdi)의 교회작품에도 르네상스적인 폴리포니기법에 의한 제1작법과 바로크적인 협주양식(Concerto)내지 오페라양식의 제2작법이란 2가지 음악적 유형이 공존하고 있었다. 특히 제 2작법에 의한 그의 음악에는 바로크적인 양식이 성숙되어 있었다.
베네치아는 플랑드르적인 폴리포니 종교음악을 받아들여 여기에다 오르간이나 관악기를 덧붙인 색채적인 옷을 입혀 바로크풍으로, 또 피렌체와 만토바에서 시작된 오페라와 로마와 볼로냐에서 시작된 기악합주등에 독특한 양감과 표현력을 덧붙여 전유럽 음악계가 받아들일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르네상스에서 바로크에 이르는 음악사의 대변동은 베네치아라는 도시를 축으로 전개되어 갔으며 바로크 시대로 이어지는 100년 이상을 이탈리아가 유럽음악을 주도하게 된다.

세속음악
 
르네상스시대의 본격적인 세속성악곡은 이탈리아에서 개화한 16세기 마드리갈이라 할 수 있다. 초기 마드리갈은 이탈리아에서 활약하던 플랑드르 작곡가에 의해 주도되었고 폴리포니 기법을 도입하여 귀족들을 위한 음악으로 작곡되고 애용되었다. 1530년대부터 50년대까지 마드리갈은 3성, 4성이 많았고 모방수법과 호모포닉한 기법이 절충되어 있었다. 16세기 후반이 되면서 마드리갈 작곡의 주도권은 이탈리아인으로 옮겨지게 되었고 이때 활약한 작곡가들은 페스타(Festa), 아르카델트(Arcadeft)이다. 초기 마드리갈은 프로톨라처럼 사랑을 주제로 하지만 가사가 지나치게 장식적, 감상적이고 경박한 것에 대한 반동으로 귀족적 취향을 갖고 있었지만 아랫 성부는 화성반주에 지나지 않는 수직화성적 짜임새를 갖고 있다. 1540년대부터 마드리갈의 중심지는 당시 가장 부유한 도시의 하나였던 베네치아로 옮겨가게 되는데 이곳 산 마르코 성당의 악장이자 베네치아 악파의 시조인 빌라르트가 중기 마드리갈을 시작하였고 그의 후임이자 제자였던 데 로레에 의해 계승되어 중기 마드리갈의 특징을 이루게 된다. 로레(Cipriano de Rore)의 마드리갈은 플랑드르의 대위법에 바탕을 둔 4-5성부 곡으로 모방기법이 많이 사용되었고, 무엇보다도 각 단어를 음악적으로 묘사하여 시 전체의 의미를 표현하기 위해 반음계적인 변형을 효과적으로 사용했다.
16세기말, 17세기 초는, 이탈리아 마드리갈의 전성기로 이탈리아 작곡가들이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 마렌치오(Luca Marenzio, 1553년경 - 1599), 제주알도(Don Carlo Gesualdo, 1561-1613)와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 1567-1643)등이 이시대의 대표적 작곡가이다.
마렌치오의 마드리갈은 균형잡힌 폴리포니기법이 중심이 되어있지만 이탈리아 풍의 명쾌하고 뚜렷한 리듬과 선율이 뛰어나다. 특히 마렌치오의 작품에 일관에 나타나는 기품과 격조있는 표현의로 인해 르네상스 이탈리아 마드리갈은 고전전 완성에 도달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당시 마렌치오의 마드리갈은 이탈리아 뿐만아니라 플랑드르, 영국, 독일에서도 출판되어 국제적으로 애창되었다. 마렌치오의 마드리갈은 특히 엘리자베스 1세, 제임스 1세 통치하의 영국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고, 영어고유의 악센트와 영국적 기질이 반영되어 영국 마드리갈의 황금기를 구가하게 된다. 최초의 영국 마드리갈 작곡가로는 윌리엄 버드와 그를 이은 토마스 몰리(Thomas Morley, 1557-1602)이다. 1593년 간행된 몰리의 <3성 칸초네트 곡집>에는 이탈리아기법이 영국 특유의 낙천적이고 명랑한 표현과 일치되어 있다. 더욱이 유명한 「이제 5월이 왔다」(Now is the month of Maying), 「나의 연인은 사랑스럽다」(My bonny lass she smileth) 등을 포함한 1595년에 출간된 「5성 발렛토곡집 제 1권」(The First Booke of Balletts to five voices)에는 이탈리아의 발렛토가 완전히 영국의 토양에 동화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발렛토 특유의 “파라라”의 후렴은 빠른 악구와 느린 악구와의 교대, 흐르는 듯한 경쾌한 선율, 각 성부간의 짧은 모티브에 의한 모방 등 모든 요소가 영어의 정확한 억양에 뒷받침되어 새로운 모습으로 나타나 있다. 몰리에 이어 수많은 영국 마드리갈 작곡가들 파나비(Farnaby), 죤 파머(John Farmer), 필킹턴(Pilkinton), 토마스 톰킨스(Tomkins), 죤 윌비(John Wilbye), 토마스 윌크스(Thomas Weekes) 등에 의한 마드리갈 곡집이 차례로 출판되어 엘리자베스 왕조기 영국 마드리갈의 황금시대가 형성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윌크스는 마렌치오풍의 약간 중후한 표현을 장기로 하는 작곡가로서 그의 「오 근심이여 빨리 떠나라」(O Care, thou wilt dispatch me)은 “파라라”와 같은 경쾌한 후렴을 갖고 있지만 효과적인 반음계와 불협화음의 사용에 의해 어두운 탄식의 세계를 훌륭하게 표현하고 있다. 그외 소박한 민요풍의 작품을 보이는 파머, 필킹턴이 있고, 폴리포닉한 처리에 훌륭한 톰킨스, 윌비 등은 각각 독자적인 매력을 가진 가작을 많이 작곡했다. 이시기의 영국 마드리갈의 융성은 눈부신바가 있다.
이탈리아 후기 마드리갈 작곡의 끝을 맺는 몬테베르디의 마드리갈은 르네상스에서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의 변화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의 마드리갈중 첫 4권은 르네상스적인 무반주 다성 성악 앙상불의 곡이고, 다음 2권은 바로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인 것이며, 콘체르토(Concerto)라고 제목을 붙인 마지막곡집인 제 7집은 기악반주를 갖는 독주, 이중주곡으로 뚜렷이 바로크적인 양식상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의 후기 마드리갈은 초기 마드리갈과 달리 음악 동기가 레시타티브와 같이 낭송적이며, 짜임새도 다성적이 아니라 베이스의 화성적 반주를 갖는 이중주적인 것으로 이미 바로크 경향이 무르익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몬테베르디의 위대함은 르네상스의 전통적 음악서법(제 1작법)에서 출발하여 자신의 독창성으로 바로크(제 2작법) 세계를 개척했다는 점이다. 몬테베르디의 손에 의해 이탈리아의 마드리갈은 공전의 극적 표현력을 획듬함과동시에 붕괘점에 도달한 르네상스 마드리갈은 몬테베르디에 의해 바로크 양식의 아리아 내지 칸타타로 변화되어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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