람메르모어의 루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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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1,456회 작성일 11-10-26 1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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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이란 무엇인가, 왜 우리는 사랑하는가에 대해 누가 명쾌한 답을 내릴 수 있을까요? 플라톤의 <향연>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수많은 해답을 내리고 있지만 어느 것도 정답은 아닙니다. 사랑이란 다 저마다의 색깔로 채색되는 것이기도 하니까요.
그중에서 <람메르모어의 루치아>에 등장하는 사랑은 플라톤이 말한 ‘사랑은 일종의 미친 상태’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플라톤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이성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평가하고 그 결과까지 예측하면서 사랑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이고 감각이고 직관이기 때문이지요.
평소 이성적인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일순간 이성을 잃고 마는 걸 우리는 도처에서 봅니다. 수십년 쌓아올린 명예, 재산,가족과 친구,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지독하고 잔인한 것이 사랑에 배신당한 질투의 화신입니다.
루치아와 에르가르도의 사랑 역시 미친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가족은 원수집안인데다 루치아의 오빠는 집안의 쇠락을 막으려고 루치아를 정략결혼시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그것도 원수집안이라는 걸 알고는 분노합니다.
결국 그는 에르가르도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로채고, 나중에는 가짜편지까지 만들어가면서 두 사람의 사이를 끊어놓습니다. 에르가르도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루치아는 오빠의 간계에 이끌려 결혼식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때 나타난 에르가르도 역시 루치아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해 미친 듯이 분노합니다.
끝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루치아는 정신이상이 되어 신랑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마음 곳에 자리잡은 분노와 절망감,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다른 인격체로 변하게 해 감히 살인에 이르게까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루치아는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절창인, 저 유명한 ‘광란의 아리아’를 부릅니다. 가장 고통스러울 때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나온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어쩌지 못할 아이러니겠지요.
에르가르도도 루치아의 일을 알고 나서 역시 분노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맙니다.
살인과 자살은 정신과적으로 동일합니다.살인과 자살이 같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결국 세상을 죽이는 것이므로 두 사람은 그런 방법으로 서로를 헤어지게 만든 세상에 복수한 것이지요.
안타까운 것은 두 사람이 좀더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자신들의 사랑에 좀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 사랑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좌절과 분노를 좀더 현명하게 다스려 그토록 처참한 비극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물론 그랬다면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미칠듯한 비장미는 다소 김이 빠졌겠지만요. 가슴을 찢게 만드는 루치아의 아름다운 아리아도 들을 수 없었을 테구요. 아마도 그래서 동서고금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는 대개 다 비극으로 끝나는 모양입니다.
그중에서 <람메르모어의 루치아>에 등장하는 사랑은 플라톤이 말한 ‘사랑은 일종의 미친 상태’라는 구절을 생각나게 합니다.
플라톤의 말이 아니더라도 사랑은 이성적인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이성적으로 평가하고 그 결과까지 예측하면서 사랑에 빠질 수는 없습니다. 사랑은 감정이고 감각이고 직관이기 때문이지요.
평소 이성적인 사람도 사랑에 빠지면 일순간 이성을 잃고 마는 걸 우리는 도처에서 봅니다. 수십년 쌓아올린 명예, 재산,가족과 친구, 인간관계를 파괴시키기도 하고 심지어 목숨까지도 버립니다. 그런가 하면 가장 지독하고 잔인한 것이 사랑에 배신당한 질투의 화신입니다.
루치아와 에르가르도의 사랑 역시 미친 사랑의 시작과 끝을 보여줍니다. 두 사람의 사랑은 처음부터 많은 문제를 안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가족은 원수집안인데다 루치아의 오빠는 집안의 쇠락을 막으려고 루치아를 정략결혼시킬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가 동생에게 사랑하는 남자가 있고 그것도 원수집안이라는 걸 알고는 분노합니다.
결국 그는 에르가르도가 동생에게 보내는 편지를 가로채고, 나중에는 가짜편지까지 만들어가면서 두 사람의 사이를 끊어놓습니다. 에르가르도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한 루치아는 오빠의 간계에 이끌려 결혼식을 하기에 이릅니다. 그때 나타난 에르가르도 역시 루치아가 자신을 배신했다고 생각해 미친 듯이 분노합니다.
끝내 괴로움을 이기지 못한 루치아는 정신이상이 되어 신랑을 살해하기에 이릅니다. 마음 곳에 자리잡은 분노와 절망감, 버림받음에 대한 공포가 그녀의 이성을 마비시키고 다른 인격체로 변하게 해 감히 살인에 이르게까지 한 것입니다.
그리고 루치아는 아름답다는 표현으로는 부족할 만큼 절창인, 저 유명한 ‘광란의 아리아’를 부릅니다. 가장 고통스러울 때 가장 아름다운 음악이 나온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삶의 어쩌지 못할 아이러니겠지요.
에르가르도도 루치아의 일을 알고 나서 역시 분노와 절망감을
이기지 못해 자살하고 맙니다.
살인과 자살은 정신과적으로 동일합니다.살인과 자살이 같은 현장에서 일어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입니다. 자신을 죽이는 것은 결국 세상을 죽이는 것이므로 두 사람은 그런 방법으로 서로를 헤어지게 만든 세상에 복수한 것이지요.
안타까운 것은 두 사람이 좀더 인간적으로 성숙하고 자신들의 사랑에 좀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하는 것입니다. 그랬더라면 그 사랑이 아무리 절망적일지라도 좌절과 분노를 좀더 현명하게 다스려 그토록 처참한 비극에까지 이르지는 않을 수도 있었을 테니까요.
물론 그랬다면 이 작품을 이끌어가는 미칠듯한 비장미는 다소 김이 빠졌겠지만요. 가슴을 찢게 만드는 루치아의 아름다운 아리아도 들을 수 없었을 테구요. 아마도 그래서 동서고금의 유명한 사랑 이야기는 대개 다 비극으로 끝나는 모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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