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사랑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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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1,238회 작성일 11-10-26 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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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사랑은 인간을 구원할 수 있는가
오페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을 비춰보는 이 사람이 사는 법, 오늘은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통해 인간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주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오페라는 바그너가 빚쟁이들에게 쫓겨 아내와 런던으로 도망가다가 만나 폭풍우의 경험과, 하이네의 <폰 시나벨레 보르스키씨의 회상>속에 나오는 유령선의 전설에서 줄거리를 빌려온 것이라고 합니다.
7대양을 영원히 떠돌아다닐 운명에 부딪힌 네덜란드인에게 생사를 함께 할 참된 여자가 있다면 그 저주가 풀리고, 7년 만에 한번씩 육지에 상륙해 그런 여자를 찾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저주받은 네덜란드인은 자신을 그 저주에서 풀어줄 여자를 찾기 위해 육지에 상륙했다가 달란트라는 선장을 만납니다. 그에게는 젠타라는 딸이 있는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주는 보물에 눈이 먼 그는 딸을 내어주기로 합니다.
젠타 역시 네덜란드인에 대한 전설을 듣고는 그를 저주에서 풀어주는 역할을 기꺼이 맡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엔리코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씁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이야기를 들은 네덜란드인은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 저주가 풀린 네덜란드인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오페라는 바그너의 또다른 오페라 <탄호이저>와 더불어 ‘인간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가?’하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와 이 오페라에 나오는 젠타는 모두 죽음으로써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구원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를 잘 알지만 젠타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전설과 그의 초상화만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하리라 결심합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엔리코를 뿌리치고.
여기서 한 가지 대단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여자들은 위태위태한 남자들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람의 정신세계에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전의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의식은 많은 정보를 가진 또하나의 세계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인 개인 무의식의 세게라면, 인류가 생긴 이래 경험한 모든 것이 대대로 전해져 오는 집단무의식의 세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위대한 어머니 콤플렉스’입니다. 이 세상 모든 여성에게는 대지와 같은 위대한 어머니로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보듬어 감싸주고 구원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 정도가 사람들마다 다를 뿐입니다. 컴플렉스가 강할수록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젠타 역시 위대한 어머니 콤플렉스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자들에게는 마더컴플렉스가 있습니다.남자들이 구원의 대상으로 여성을 찾는 것도 이 마더컴플렉스에서 기인합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처럼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고 사랑해주고 기꺼이 자기를 위해 죽을 수도 잇는 여성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젠타의 결합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잇습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서로를 모른 채 단지 자신들의 무의식적인 욕구와 필요에 의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어머니는 단순히 어머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대지인 어머니와 동등한 것들, 혈연, 부족, 가족 등 우리의 고향과 뿌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뜻에서 구원이란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바그너는 두 사람이 승천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맺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오페라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의 모습을 통해 우리 삶을 비춰보는 이 사람이 사는 법, 오늘은 바그너의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을 통해 인간의 구원은 어디에서 오는가라는 주제를 생각해보겠습니다.
이 오페라는 바그너가 빚쟁이들에게 쫓겨 아내와 런던으로 도망가다가 만나 폭풍우의 경험과, 하이네의 <폰 시나벨레 보르스키씨의 회상>속에 나오는 유령선의 전설에서 줄거리를 빌려온 것이라고 합니다.
7대양을 영원히 떠돌아다닐 운명에 부딪힌 네덜란드인에게 생사를 함께 할 참된 여자가 있다면 그 저주가 풀리고, 7년 만에 한번씩 육지에 상륙해 그런 여자를 찾는 것을 허용한다는 것으로 이야기는 시작됩니다.
저주받은 네덜란드인은 자신을 그 저주에서 풀어줄 여자를 찾기 위해 육지에 상륙했다가 달란트라는 선장을 만납니다. 그에게는 젠타라는 딸이 있는데,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이 주는 보물에 눈이 먼 그는 딸을 내어주기로 합니다.
젠타 역시 네덜란드인에 대한 전설을 듣고는 그를 저주에서 풀어주는 역할을 기꺼이 맡기로 결심합니다. 한편 그녀를 사랑하는 남자 엔리코는 어떻게 해서든 그녀의 마음을 돌려보려고 애를 씁니다.
두 사람이 다투는 이야기를 들은 네덜란드인은 그녀의 사랑을 의심하고, 그녀는 자신의 사랑을 증명하기 위해 바다에 몸을 던집니다. 그리고 저주가 풀린 네덜란드인과 함께 하늘로 올라갑니다.
이 오페라는 바그너의 또다른 오페라 <탄호이저>와 더불어 ‘인간의 사랑으로 우리는 구원을 얻는가?’하는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탄호이저>의 엘리자베트와 이 오페라에 나오는 젠타는 모두 죽음으로써 자기가 사랑하는 남자를 구원합니다. 그러나 두 사람의 모습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엘리자베트는 탄호이저를 잘 알지만 젠타는 방황하는 네덜란드인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단지 전설과 그의 초상화만 보고 사랑에 빠집니다. 그리고 그를 구원하리라 결심합니다. 자신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엔리코를 뿌리치고.
여기서 한 가지 대단히 흥미롭고 재미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왜 여자들은 위태위태한 남자들을 사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사람의 정신세계에는 의식과 무의식, 그리고 그 둘을 연결하는 전의식이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무의식은 많은 정보를 가진 또하나의 세계입니다. 한 사람이 태어나서 지금까지 경험한 모든 것인 개인 무의식의 세게라면, 인류가 생긴 이래 경험한 모든 것이 대대로 전해져 오는 집단무의식의 세계도 있습니다.
그런데 여자들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이 ‘위대한 어머니 콤플렉스’입니다. 이 세상 모든 여성에게는 대지와 같은 위대한 어머니로서, 세상의 모든 문제를 보듬어 감싸주고 구원하고자 하는 무의식이 자리잡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그 정도가 사람들마다 다를 뿐입니다. 컴플렉스가 강할수록 그것에 의해 지배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젠타 역시 위대한 어머니 콤플렉스의 전형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남자들에게는 마더컴플렉스가 있습니다.남자들이 구원의 대상으로 여성을 찾는 것도 이 마더컴플렉스에서 기인합니다. 그리하여 어머니처럼 자기를 편안하게 해주고 사랑해주고 기꺼이 자기를 위해 죽을 수도 잇는 여성을 찾아 헤매는 것입니다.
방황하는 네덜란드인과 젠타의 결합 역시 같은 맥락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잇습니다. 그러고 보면 두 사람이 서로를 모른 채 단지 자신들의 무의식적인 욕구와 필요에 의해 서로 사랑에 빠지는 것도 그다지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또 한 가지, 여기서 어머니는 단순히 어머니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대지인 어머니와 동등한 것들, 혈연, 부족, 가족 등 우리의 고향과 뿌리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그런 뜻에서 구원이란 우리가 태어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아마도 그래서 바그너는 두 사람이 승천하는 것으로 이야기의 결말을 맺고 있는 지도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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