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ia Callas(마리아 칼라스, 1923 - 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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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ALM 댓글 0건 조회 1,355회 작성일 12-07-20 0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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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라스는 '41년 아테네 오페라단의 정식단원으로 입단한다. 무한한 가능성을 인정해 주었고, 그녀가 약점을 고쳐 '45년 미국땅을 다시 밟은 그녀는 일자리를 찾아 여러 오페라 극장문을 두드리지만 80kg이 넘는 거구의 그녀는 빛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47년 이탈리아 베로나 오페라단의 음악감독 조반니 제니텔로(Giovanni Genatelo)의 초청으로 칼라스는 이탈리아에서 「라 지오콘다」를 공연, 대성공을 거둔다. 베로나에서 그녀는 당대의 대지휘자 툴리오 세라핀(Tulio Serafin)과 만난다. 정통 이탈리아 오페라의 재현에 심혈을 기울이던 그는 처음 칼라스를 '그란데 보찬자'라 불렀다고 한다. '소리는 큰데 못난 소리'라는 뜻이다. 세라핀은 그녀에게 '영혼으로 음악을 들으며 음악에 충실 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그후 만나게 된 연출가 루키노 비스콘티는 그녀에게 연극적인 모든것을 가르쳐 주었다. 이 두사람의 스승을 만남으로 인해 오페라와 연극을 결합한 칼라스의 예술세계는 힘찬 도약의 날개를 펴게 된다. 그리고 이 당시 만난 또 한사람의 중요한 음악적 동반자가 조바니 메네기니 였다. 부유한 사업가이자 오페라광이었던 메네기니는 그녀보다 23세나 연상이었으며. '49년 그들은 결혼하였고 칼라스의 헌신적이고 절대적인 후원자가 된다. 칼라스는 '51년 12월 스칼라에 데뷔한다. 당시 최고의 여가수였으며 이후 황금의 라이벌관계를 이루게 될 레나타 테발디(Renata Tebaldi)가 갑작스런 병으로 오페라 '아이다' 무대에 서지 못하게 되자 스칼라측은 칼라스를 대역으로 요청했다. 스칼라에 입성한 그녀는 이로부터 50년대를 화려하게 수놓는 오페라 인생의 전성기를 맞게 된다.
그러나 한창 전성기 무렵 칼라스는 화려한 축하 파티에서 남편 메네기니와 함께 참석했다가 그리스의 선박왕 오나시스를 만나고 남편 곁을 떠나게 된다. 오나시스와 함께 있는 동안의 화려한 생활 속에서 차츰 갈고 닦은 예술인으로서의 고귀한 열정은 힘을 잃어가게 된다. 아기를 유산하고 자살기도까지 할 정도로 황폐해진 그녀는 오나시스가 케네디의 미망인 재클린과 결혼해 버리자 40대 초반의 나이에 예술도 사랑도 잃어버린 채 홀로 남게 되고 '65년 42세의 한창 나이에 코벤트 가든에서의 '토스카'를 마지막으로 은퇴를 선언한다.
무대를 떠난 칼라스는 줄리어드에 나가 마스터클래스를 열기도 했으며 영화에도 출연했다. 전성기 때의 콤비 쥬세페 디 스테파노와 함께 '73 '74년 전세계 콘서트 투어를 가지기도 했으나, 이미 한번 시든 칼라스의 예술은 다시 피지 못한 채 순회연주 이후 파리의 한 저택에서 칩거 생활에 들어간다. 고독한 오랜 생활 끝에 그녀는 '77년 9월, 54세의 길지 않은 나이에 우울증과 수면제 과다복용이 원인이 되어 심장마비로 극적인 생애를 마감한다.
오페라 연출가 프랑코 제피넬리가 '오페라에서의 BC는 Before Callas(칼라스 이전)'을 의미한다고 회고할 만큼 그녀는 노래와 연기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독창성과 카리스마적인 면모를 인정받았다. '하루에 12시간씩 연습하는 것이 습관'이라고 그녀 스스로 밝혔듯 그녀의 성공은 타고난 재능과 함께 최고가 되겠다는 집요한 의지의 결정이었다. 한 여인으로서는 비극적 일생을 살았으나 예술인으로서 남겨놓은 이글거리는 불꽃의 목소리는 어떤 유혹에도, 어떤 외로움에도 젖지 않고 오랜 세월 빛을 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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