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미국/최유혜] 황구 > 이민문학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이민문학


 

소설 소설: [미국/최유혜] 황구

페이지 정보

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434회 작성일 10-04-30 22:02

본문

[미국/최유혜] 황구

지난 주말 신문에 껴 온 주간지를 들친다. 큰 활자들을 훑어본다. 재벌 누구와 정치인 누구 극비리에 만났다.라는 선거철 전야의 흔히 있던 커다란 글귀는 당연히 외면당한다. 다음 장 그리고 또 다음 장을 넘기자 주말이면 흑인 병사들 이태원에 몰리는 이유?라는 큰 활자가 눈에 들어왔다. 왜에? 하는 호기심에 별 뜻도 없을 주간지를 읽어 가기 시작했다. 중간 크기의 활자다. 젊은 여성들에게 흑인 병사들의 강한 섹스 인기, 에이즈 걸려도 좋아! 그 다음 작은 활자들을 읽기에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그 짓 하는 사진이 버젓이 검은색이 많이 들어간 좀 진한 흑백사진으로, 그래서 더 섹시해 보이는 여러 장의 사진들이 나열되어 있어 굳이 돋보기 껴가면서 작은 글씨를 읽지 않아도 알아차릴 일이었다. 주간지를 막 접으려는데 남편이 한 마디한다.황구()


화장실에서나 보는 주간질, 뭘 아침부터 그런 걸 방에서 펼치고 그래.
나는 쑥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슬그머니 일어나 잠옷을 벗고 편한 차림을 한다.
커튼을 젖히자 창 밖엔 파란 아침이 있었다.
당신 공원에 가서 멕시칸 한 명만 데리고 와. 잘 골라 오라구. 몸집 좋다고 다 일 잘하는 건 아니니까.
남편은 인부 구하는 건 내게 맡기고 청바지 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진한 커피를 좋아하는 남편은 아침이면 늘 한인 타운에서 제일 가까운 맥도널드에 조간 신문을 들고 다녀온다. 오는 길에 거기서 한국 사람 하나 데려다 쓰지 싶지만. 아침부터 여자가 잔소리한달까 봐 말을 접는다.
남편이 나가자 나는 엊저녁 남은 밥으로 야채 죽을 쑨다. 이렇게 아침 식사를 마친 나는 주간지며 부엌 쓰레기들을 들고 아래층으로 내려가는 길에 아래층 한의원 대기실 테이블 위에 늘어져 있던 어제 신문들까지 모두 주차장 쓰레기통에 넣었다. 내가 들고 나오는 게 먹을 건 줄 알고 돌이가 꼬리를 흔들며 짖다가 실망한 듯 꼬리를 내린다. 한두 달째 유난히 잘 먹더니 살이 찐 것 같다. 돌이의 진돗개 족보에 기록된 본래의 이름은 복돌이였으나 쉽게 돌이로 부른다. 복돌이, 진돌이, 악돌이, 차돌이 이렇게 네 남매 중에 유일한 암놈이다.


집을 나선 나는 포장된 인도를 따라 두 블럭쯤 걸었다. 내 집과 아드모어 공원은 엎어지면 코 닿을 때였다. 이른 아침의 공기가 상큼한 게 풋사과 같다. 길가 어느 집의 라일락꽃에서 향기가 은은히 콧속에 스민다. 조금 더 걷다가 주의하지 않았더라면 개똥을 밟을 뻔했다. 시선을 멀리 두자 저 앞 가로수들 자카란다가 연보라색으로 거리를 아름답게 한다. 언제 봐도 가슴에 적시고 싶은 색깔이다. 고목이 온통 보라 꽃이다.
오랜만에 걷고 있는 나는 혼자서 봄의 축제를 즐기고 있는 것 같다. 봄이라 그런가. 여자. 아니, 여자라서가 아니라 인간으로서 계절을 애틋하게 사랑하는 거다. 나이가 들수록 맞이하는 계절에 대한 애정이 더해 간다. 계절이 특색을 잃지 않고 늘 성실하게 찾아온다는 게 새삼 신기하고 고맙다.
길을 건너자 서울국제공원이란 푯말 앞에서 멈추었다. 주변엔 무궁화가 많이 심어져 있다. 한참 물이 올라 초록잎이 무성하다.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조경을 생각지 않은, 그냥 넓은 터 같은 공원이었다. 십여 대 정도가 주차할 수 있는 주차장을 지나면 놀이터가 있고, 이 공원의 진짜 몸체엔 철조망이 처져 있었다. 철조망 안으로 널따란 잔디밭에는 이른 아침부터 히스패닉들의 축구 시합이 한창이었다. 나는 공의 위력을 피하여 철조망 바깥쪽에 있는 어린이 놀이터 주변의 둘레만 맴돌듯 걷기 시작했다. 한인이라고는 나 외엔 한 사람도 눈에 뜨이지 않았다. 축구를 하는 잔디밭 가장자리를 활기차게 걷고 있는 두 여인도 히스패닉으로 보인다.
이방인처럼 혼자서 놀이터 쪽에서만 걷고 있던 나는, 축구 시합을 하면서 이따금씩 소리를 지르는 그들의 언어를 낯설게 익히고 있었다.
문득, 어릴 적 효창 운동장에서의 평안 북도 도민회가 있을 때 아버지를 따라갔다 보았던 그 장면, 그 소리가 생각나 자애스런 눈으로 틈틈이 보아 주고 있다. 그러면서도 쉬지 않고 빠른 걸음으로 걷는다. 걸음에 속도가 붙어야 콜레스테롤이 빠진다는 충고를 기억하면서.
어느 사이 놀이터 그네 위에는 책 보따리로 보이는 검은색 백팩이 놓여져 있었다. 둘러보지만 주인이 없다.
다시 한 바퀴를 돌아오자 금발의 소녀가 그네 위에 걸터앉아 있다. 등교 시간일 텐데 땡땡이를 치고 있는 것일 게다. 그렇다면 저 소녀의 머리도 노랑 물을 들였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 들었다. 바로 그 때였다. 내 집에 묶어 두고 온 돌이처럼 잘 생긴 진돗개 한 마리가 놀이터 쪽으로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그 놈 뒤로 또 한 마리의 진돗개가 느린 걸음으로 따라 들어오고 있다. 뒤엣 놈은 암놈 같았다. 먹지를 잘 못 했는지, 새끼를 가진 건지 비실거린다. 앞의 놈이 내게로 가까이 오고 있었다. 애처롭긴 하지만 순간 광견병을 생각하고 저리로 가라고 쫓는 시늉을 했다. 피하기 위해 모랫터를 가로지르려고 몇 발짝 내려 걸었다. 언제 들어왔는지 몸집이 비슷한 두 남자 아이들이 소녀가 있는 옆에 자리잡고 있었다.
축구를 하고 있는 그들이 히스패닉인 것은 한눈에 알 수 있는데, 이 소년 소녀들은 아리송할 뿐이었다. 머리에 물을 들인 이유만은 아니었다. 거기에다 그들의 땡땡이는 하루 이틀의 문제 같지가 않은 듯이 초조함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8, 9학년쯤 되어 보인다.
얘들아, 이제라도 학교로 가라고 한 마디하고 싶었지만, 말하는 나만 우스워질 거란 걸 알기에 묵묵히 계속 걷기만 하고 있었다. 아마도 한국 애들이었으면 그 말을 했겠지. 이 때 공원 입구 주차장 쪽에서 한국말이 들려왔다. 목소리가 꽤 컸다. 50대쯤 되어 보인다. 나이 만큼 뱃살이 붙어 있는 사내가 데리고 온 개는 목에 끈을 풀고 자유롭게 뛰고 싶은 모양이다.
이쪽으로 사라!
반갑게도 한국 사람이었으나, 데리고 온 개는 검은 털에 밤색이 섞인 숄티(sheltie) 종류의 애완견이다. 개는 사내를 앞질러 걸어 들어오고 있었다. 이건 또 웬일인지 주인에게 묶인 개마저 목줄의 힘을 다 해 내게로 오는 게 아닌가.
이 개 물지 않아요? 아저씨! 개 줄 좀 당기세요.
아주머니! 개 기르세요? 이 개가 그냥 아무 사람한테나 가는 게 아니에요. 아주머니한테 개 냄새가 나나 봐요.
개 냄새요? 아! 그래요. 우리 집에도 개가 한 마리가 있어.
어! 어! 사라! 가만 있어!
주인의 손에 묶여 있던 개가 막무가내로 목을 뻗치며 가려는 쪽은 공원 한귀퉁이에 있는 쓰레기통 쪽이었다. 거기엔 이미 일곱, 여덟 마리의 개들이 쓰레기통 주변을 뒤지고 있었다. 들개가 되어 자유롭게 거리를 쏘다닐 수 있는 대가로 쓰레기통을 뒤져야 한다. 그쪽이 부러워 몸부림하는 개의 끈을 사내는 힘껏 잡아당긴다.
이 근처에 사세요? 전 아침이면 자주 나오는 편인데 아주머니는 초면인 것 같으네요.
우리는 자연스레 공원 여기저기에 놓여 있는 벤치들 중 가장 가까운 의자를 택해 앉았다. 두어 걸음을 옮겼을 뿐이었다.
예, 여기서 멀지 않아요. 히스패닉 하나 데려다가 일을 시키려고 나온 길에 너무 일러서 좀 걷던 중이에요. 그런데 명칭이 서울국제공원이지, 웬게 거의가 히스패닉이군요.
하긴, 놀만디와 올림픽 코너, 여기가 코리아타운 중심이죠. 거기다 엘에이 시에 로비까지 해서 명칭까지 아드모어 공원에서 서울국제공원이라고 바뀌게 된 건데, 한국 사람들이 모이는 건 일 년에 한 번 한국의 날 뿐이네요. 우리 나라 사람들 얼마나 바쁘게 삽니까. 참 열심히도 살아요. 그런데 저, 담배 한 대 피워도 되겠습니까?
예, 그렇게 하세요. 그런데 제가 문제가 아니라 이제 앞으로는 이 공원에서도 아마 담배를 못 피우게 되실 거예요. 며칠 전 신문을 보니까 그런 안건이 시에 상정돼 있다는데 통과가 되겠지요?
담배에 불을 붙여 한 모금 길게 빨아 삼키던 사내는 실망한 눈빛이 된다.
제가 아침마다 여기 나오는 이유가 이 담배 아닙니까. 이 담배를 정말 끊어야 할 날이 오겠군요. 담배 맛이 달아났습니다. 공원에서도 불가능하다. 참.
사내는 담배를 발로 비비어 끈다. 이래서 공원 어디에나 버려지는 꽁초 때문이라도 금연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사내 몰래 해본다.
오늘 아침에 보니까 한국 사람들 대신 진돗개들이 모이더군요. 버린 개들이 어떻게 여기에 모이는 거죠. 서울 공원인 걸 아는가 보죠? 나는 담배 맛을 잃게 한 게 미안해서 얼른 한 마디를 건넸다.
아! 그건, 언젠가 여기서 진돗개 품평회가 있었어요. 엘에이에도 진돗개 협회가 있지 않습니까. 그 때 기억 때문이겠죠. 저 개들은 여기서 하던 진돗개 행사에 나왔을 만큼 품종이 좋아 보이네요. 진돗개들이 참말로 얼마나 똑똑한지, 집을 나갔다가도 꼭 찾아 들어오죠. 아마도 저 개들은 주인들이 기르다가 경기가 나빠지니까 하우스에서 아파트로 옮기면서 기를 수가 없어서 버린 게 틀림없을 겝니다. 사내는 사라의 머리에서 등까지의 털을 빗질하듯 여러 차례 쓸어 주며 말을 자신 있게 한다. 개의 검은 털에 윤기가 난다.
아니, 어떻게 저런 식으로 버린단 말예요. 시에서 하는 동물 보호소에 데려가면 입양하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나는 마치 사내가 저 모든 개들의 보호자라도 되듯 짜증 섞인 목소리가 되었다.
저렇게 큰 개들은 원하는 사람이 없어 거의 죽이게 되죠. 사람이나 똑같아요. 어린아이 입양하지, 늙은이들 싫다는 거나 같은 현상 아니겠어요.
아이 낳아서 남의 나라에 입양시키는 거 우리 나라가 수위 급인데, 거기다 진돗개는 한눈에 봐도 코리안 도그인 줄 아는 외국인들이 많을 텐데요. 저렇게 무책임하게 길에 버리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거기다 저 진돗개들이 저렇게 굴러다니다가 똥개나 퍼뜨리면 어떻게 하죠? 나는 진심으로 걱정이 되었다.
똥개라도 많이만 만들면 서울에 수출하지요. 뭐 걱정입니까. 보신탕 값 떨어지고 얼마나 좋습니까? 저는 웨스턴 쪽에서 흑염소탕집을 하는데요. 가끔씩 보신탕 생각나서 오신다는 손님들이 더러 있거든요. 저런 놈들 보면 아깝죠. 서울만 같으면. 사내는 곧 입맛을 다실 것 같은 표정을 한다.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세요. 개 앞에 놓고 그런 말씀 마세요. 옛날에 한국이 너나 없이 사람 먹을 것도 귀하던 시절인데 집에 기르던 개가 있었어요. 어른들이 앉아서 말씀들 하시다가 저놈의 개는 죽지도 않아. 하고 무심결에 한 마디하셨는데 개가 슬그머니 나가더래요. 돌아다니다가도 그 날로 돌아오던 개가 이틀이 지나도 오지 않으니까 남자 식구들이 찾으러 다니다 결국 뒷산에서 발견을 했는데요. 지놈을 이뻐하시던 할머니 묘지 앞에서 죽어 있더래요. 동물이라도 개는 돼지하고 달라서 영이 통하는 것 같아요.
어이구 아주머니, 개는 개예요. 우리 지난번에 기르던 개는 잘 놀다가는 우리 딸아이 입을 물어뜯어서 수술을 했는데 언청이 꼴이 됐다구요. 개는 개더라구요. 족보고 뭐고 다 소용 없어요. 그 개가요, 한국애견협회에서 만든 진도견 혈통서라는 족보까지 있던 건데요, 우리 딸애를 지독히도 물어 놔서 어찌나 밉던지 죽이든가 말든가 동물 보호국에 갖다 줬습니다. 지금 이 개는 얼마나 이쁜짓을 하는지 딸아이가 기숙사에서 전화를 해서 딸아이 목소리를 들려주면 전화기를 혀로 핥아요. 지독히도 이쁜짓만 합니다. 우리 딸 대신 딸 노릇 하느라고.
사내의 사라라는 개는 의외로 얌전하게 앉아서 다른 개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자기 말을 하고 있다는 걸 알아듣기라도 하듯 사내의 손을 핥는다.
진돗개들이야 집을 확실히 잘 지키잖아요. 우리는 진돗개를 기르거든요. 황구요. 저 진돗개들이야 얼마나 지독하게요? 작은 고추 맵다고들 하잖아요. 딱 우리 민족처럼 지독해요. 사내는 급한 듯 내 말을 자르고 서둘면서 음성까지 높인다.  재외동포 문학의 창


작은 고추 맵기는, 하하! 아주머니 멕시칸 고추 생걸로 먹어 봤어요? 미국 이민 와서 처음에 멋모르고 먹었다가 야! 그거 수류탄처럼 폭발력이 대단하더라구요. 그걸 모르고 생걸로 먹었다가 죽을 뻔했지 뭐예요. 그래서 여기 한국 여자들이 가끔씩 멕시칸 종업원하고 달아나는 걸 보면 확실히 멕시칸 고추가 매운가 봐요. 그런데 어떻게 남편 분께서는 멕시칸 인부를 여자에게 구해 오게 하는 거죠. 그거 돈 조금 아끼려다 큰일날 일이죠.
전 말예요. 이성을 이성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주래요. 그게 문제라서 저희 남편이 사주 고치게 푸닥거리라도 해야겠다는데요. 저를 보세요. 요즘 여자들 저만큼 퍼질 대로 퍼진 거 보셨어요. 거울 무시한 건 아예 옛날 얘기라니까요. 아무튼 이 동네가 위험하니까 개를 여러 종류 길러 봤는데요, 진돗개가 제일이에요. 어느 날은 고양이도 잡아서 죽여 놓고요. 쥐, 새 같은 건 얼씬거렸단 모조리 죽여서 짓이겨 논다구요. 그것도 주인이 나가서 못 본 것 같으면 입으로 물어다 앞에 놓는다구요. 그러니 동네 사람들 강도에 좀도둑 어쩌고 해도 우리는 안심하고 사는 거죠. 밤에 좀 짖어대면 그게 문제죠. 주위의 아파트 사는 백인들이 당장 쫓아오니까요. 안면 방해로 고소한다고 난리지만 절대 못 없애죠. 그 개가 집 지키는 데는 사람보다 낫다니까요. 거기다 꼭 묶어 놓고 기르잖아요. 끈이 길기는 하지만. 나갔다가 엉뚱한 거 하고 바람필까 봐서. 어디까지나 진돗갠데. 그 개 기른 지 4년이 넘었으니까 사람 나이로 치자면 많이 늙은 거죠. 아직 짝도 한 번 못 지어 줬어요. 종자 좋은 거 찾다가 늦어 버린 거죠. 서울서 구해 가지고 들여온 건데요, 지 만한 신랑감이 없네요. 애초에 한 쌍을 가져오는 건데 그랬다고 남편도 후회를 해요. 저렇게 돌아다니는 진돗개들 보면 제발 섞이지 말아야지 하고 걱정스러워요. 사람이나 개나.
뭐, 그런 것까지 걱정을 하십니까. 다들 저 좋은 대로 사는 거지. 저는 딸자식 하나 있는데도 걱정 안 해요.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요. 더구나 여긴 미국이잖습니까. 아주머닌 아직 젊으신데 왜 그리 생각이 고리타분하세요? 얘기를 듣다가 무심결에 보니 그네에 걸터앉아 있던 계집아이와 사내아이가 키스를 하고 있다. 고개를 돌려 공원 입구 쪽을 보자 그새 하루 품팔이를 구하는 히스패닉들이 꽤 모여들고 있었다.
이제 가야겠어요. 저기 일 구하는 애들이 몰려들기 시작하네요. 사라라고 했나요. 개가 참 영리하네요. 나는 일어서며 개의 머리를 한번 쓸어 주었다.
아이쿠! 저도 가게에 가 봐야겠네요. 자주 운동삼아 나오세요. 그럼 또 뵙시다. 인사를 나눈 나는 일어나 발을 떼기 시작했다.
공원 입구 쪽에 커다란 런치카 한 대가 서서히 들어오고 있다. 한눈에 그것이 음식 장사라는 것을 알 수 있는 건 먹을 것을 그려 놓은 그림 때문이었다. 언제 보았는지 축구를 하던 히스패닉들이 아침을 먹으려고 몰려들고 있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가서 일 잘하게 생긴 일꾼을 눈치껏 고른다. 내가 다가가자 그들도 나만큼이나 눈치가 빠르다.
미! 미! 미!
서로들 자신을 써 달라고 앞을 다툰다. 아침부터 공원에서 축구를 하느라고 런닝 같은 셔츠에 땀이 흠뻑 밴 사내들은 제쳐놓는다. 누군가가 무슨 일을 할 거냐고 묻는다.
가드닝! 하고 내 말이 떨어지자 젊은 사내 하나가 내게 다가오며 삽질을 흉내내더니 팔을 접어 근육을 자랑한다. 알맞게 그을린 게 섹시남 같다. 나는 은근히 장난기가 동하여 남편 말을 되새기며 일도 잘하고, 거기다 잘 생기기까지 한 이 젊은 녀석으로 정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원 모어? 하면서 자기를 써 달라고 소리쳐 본다. 나와 멕시칸 사내는 이미 같은 방향으로 발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왔던 길을 서두르듯 되돌아가고 있었다. 길을 안내하듯 나는 몇 발짝 앞질러 걸었다. 길 하나를 건너 막 아드모어 길로 꺾어졌을 때였다. 암컷 뒤에 붙어 버린 듯 엉킨 수컷의 맹렬한 짝짓기가 한참 진행 중이었다. 교미는 저것들이 하는데 왜 내 얼굴이 화끈거리는지. 순간 나는 뻣뻣이 세운 목으로 하늘을 보고 걷듯 능청을 떨며 그것들 옆을 숨을 졸이며 지났다. 일꾼 앞에서 걷던 여장군인 내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아침 시간이 꽤 길게 느껴졌다. 먼저 온 남편에게 일꾼을 넘겨준다. 낯선 사람을 보자 돌이는, 앞발을 권투선수의 시합 때 모습을 생각나게 할 정도의 공격 태세를 갖추고는 삽을 든 일꾼을 향해 용맹스럽게 짖어 댄다.
돌이의 짖어 대던 소리가 이내 멈춘 것은 남편의 저지 덕분이다.
황구인 돌이는 백인이나 흑인이 주차장에서 내리는 걸 보면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짖어 댄다. 우리 한의원 환자의 대부분이 한인이기 때문에 돌이의 눈에도 익숙한 황인종에게는 짖기를 덜한다. 영리한 녀석!
남편은 환자가 오면 불러 달라고 당부하곤 뒷마당에 쌓아 놓은 약 찌꺼기들을 흙에 섞는 일을 일꾼에게 시키고 있었다. 뒷마당은 주차할 수 있는 공간 외에 여분의 터에는 대추, 감나무, 홍화, 숙지, 익모초 등을 기른다.
보약 달인 찌꺼기를 모았다가 썩인 것을 흙과 섞어 거름으로 쓴다. 봄, 가을에 한 번씩 이 일을 한다.


나는 어제 오후 환자의 약을 달이기 위해 약 달이는 방으로 들어왔다. 한국에서 막 들여온 당귀 냄새가 기분 좋게 콧속에 스민다. 말린 오징어처럼 넓적한 당귀의 한쪽을 찢어 어금니 쪽으로 밀어 넣고 씹기 시작한다. 이번엔 감초도 손에 걸리는 것으로 하나 입 속에 넣는다. 이렇듯 껌을 씹듯이 수시로 감초, 황기 등 약제들을 자주 입에 넣는 덕인지 갱년기가 언제인지도 모르게 순탄했다. 약 달이는 일을 내가 해야 했던 건 아닌데 남편 밑에서 일하던 후배 한의사가 휴가를 얻어 서울로 선을 보러 갔기 때문에 내 일이 늘었다.
식당 개 삼 년이면 라면 끓인다고, 한의사 마누라 30년에 약 맛과 냄새로 약 이름은 물론 성분까지 알 정도가 되었으며, 대기실에서 대접하는 한약 차만으로도 굳이 골프를 치러 다니거나 교회에 나가 사교를 하지 않더라도 나로 인한 보약 손님은 만만치 않았다.
거기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남편은 보조의사 없이도 편안하게 나를 잘 부린다. 처방대로 만들어진 약제가 담겨진 종이 봉투를 그릇에 부어 버린다. 그리곤 물로 한 번 씻어 바구니에 밭인다. 거기다 약을 기계에 넣어 끓일 땐 꼭 식수를 쓴다. 마치 가족을 위해 김치를 담글 때의 정성으로. 그래서 남편도 준비된 약을 내가 달이는 것을 은근히 바란다. 부부 일심동체라고 남편 또한 싼 중국 약보다 값이 월등히 비싸도 한국산만을 고집한다. 특히 인삼은 고려 인삼 6년근, 홍삼은 정관장 6년근을 진열장에 많은 양을 미리 준비해 두고 있다. 마치 일본에 히데요시가 한국 인삼 50곽을 재산 목록에 기록했듯이, 남편의 약장이 그러했다.
약을 다 집어넣고 기계 조절을 끝내고 막 나오려는데 앞쪽에서 벨이 울렸다.
딩동, 딩동
네, 나가요.
아직 9시가 되지 않아서 예약 환자가 일찍 왔나 하고 걸음을 서둘렀다. 앞에 사람이 들어오면 센서가 울리도록 전기 코드를 연결해 두었었다.
대기실엔 아무도 없다. 동쪽으로 난 현관 유리를 통해 들어오는 아침 햇살 때문인가 하고 생각했다. 시계를 보려고 벽 쪽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큰 덩치의 시커먼 도둑과 눈이 마주치는 순간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도둑은 들고 있던 인삼 박스들을 챙겨 든 채로 나를 밀치곤 그대로 현관문을 빠져 나갔다.
딩동, 딩동, 딩동. 하는 요란한 벨 소리가 귀에 울리면서 머리를 더욱 어지럽게 했다. 얼떨결에도 급히 일어난 나는 현관 밖으로 뛰어 나갔다. 도둑놈을 태운 낡은 차는 길가에서 준비하고 있었는지 유유히 달아나고 있었다. 차 번호판을 보려다가 길에 흘린 인삼 박스 하나를 발견하고는 그만 차번호 읽는 것을 놓쳐 버리고 말았다. 콘크리트 바닥 위에 떨어진 깡통 상자는 그새 충격이 심한 듯 구겨져 있었다. 거리엔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후들거리는 다리로 쉬지 않고 현관을 지나 남편이 있는 뒤뜰로 갔다. 도둑, 도둑. 하는 내 말보다, 일을 하던 남편을 놀라게 한 것은 내 덩치에 하얗게 질려 버린 안색이었단다.
인삼, 이 인삼 박스들 다 들고 갔어. 이거는 길에 떨구고.
당신 지금 인삼 얘기할 때야. 죽이지 않은 게 다행이지. 가서 얼른 누워야겠어. 안색이 말이 아닌데.
진찰실 침대 위에 누운 나에게 남편은 안쪽 손에부터 침을 꽂기 시작했다. 긴장을 하고 입을 잔뜩 오므리고 있었는데, 다행히도 인중에 놓지 않을 걸 보면 심하진 않다고 생각한 걸까.
얼마 후 조금 진정이 된 나는 중얼거리듯 입을 열었다.
경찰 불러. 경찰! 또 오면 어떻게 해. 자기는 못 봐서 그래. 얼마나 기겁을 했는지.
그런 사람이 쫓아 나가. 다음에 또 그런 일 있으면 그냥 다 줘. 적선했다고 생각하구. 안 죽인 것만도 다행이라고 생각하라구.
이제부터라도 문을 잠그고 영업을 해야겠다고, 닥터 강은 아예 결혼식을 하고 오려나 하고 혼자서 중얼거리던 남편은 이제 일꾼이 혼자 일하는 뒷마당엔 나가 볼 생각도 않는다.
나는 놀란 가슴과 후들거리는 다리를 겨우 진정하고 접수실에 앉았다. 일을 제대로 하기나 했는지 하루 온종일 놀라고 분한 마음뿐이었다. 거기다 저녁 무렵, 일을 시키는 대로 잘 했거니 하고 나가 보았던 남편까지 한숨을 덧붙여 온다.
멀쩡히 잘 자라는 약초까지 죄다 거름하고 뒤섞어 놨어! 허 참! 남편 말대로 일진이 안 좋았다.
저녁 늦게 잠이 들 때까지도 나는 그 도둑이 머릿속에서 지워 지지 않았다. 눈앞에 보고도 놓친 분한 마음이. 아무래도 내일은 타운 파출소에 가서 신고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잠깐 스친 그 얼굴이 오랫동안 지워지지 않을 것 같았다. 흑인, 20대 초반, 키는 좀 큰 편이고 얼굴은.
하루가 길고 길었다.


어수선한 꿈만 꾸느라 온 밤을 다 망쳐 버렸다. 아래층에 내려가야 한다고 생각 하니까 온몸에 다리까지 저려 왔다.
이제 아침 9시가 다 되어 간다. 아침 첫 예약이 10시에 있다. 그 사이에 은행에 들렀다가 타운 경찰서에 가서 어제의 도난 사건을 신고하려고 마음이 분주했다.
지난 일 주일 동안 입금시키지 못한 수입을 카운터에서 정리하며 입금표에 적어 넣고 있었다. 개 짖는 소리가 끈질기고 크게 들려온다. 정리하던 입금표를 마저 하고 나가 볼 참이다. 그 때 현관 유리문을 밀치며 머리를 박박 깎은 흑인이 들어오고 있었다. 뒤이어 같은 헤어스타일의 흑인이 세 명이 더 들어온다. 나는 그들을 보는 순간 은행에 입금할 수표, 현찰 등을 노트로 덮어 버림과 동시에 바로 뒷방의 원장실에 있는 남편 혼자만 듣기에는 너무 커다란 목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흑인 들어왔어!
그 소리는 마치 옆집 쯤에서 불이야! 할 때 필요한 정도의 에너지였다.
남편은 뛰어 나오고, 나는 남편이 있던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가슴이 쿵쾅쿵쾅 뛰는 와중에도 큰일이 나기 전에 경찰을 불러야 한다고 떨고 있는 손으로 전화기를 들었다. 이 때 밖에서 어둔한 한국말이 들려왔다.
저 여자 왜 저래요?
뜻밖에 한국말이 들려왔다. 이 말이 귀에 닫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그들이 한국말을 알아듣고 할 줄 안다고 짐작이나 했던가. 차라리 불이야 했더라면.
슬그머니 나가 보았다. 남편이 미간에 주름을 잡으며 나만 알아듣도록 모기 소리로 한 마디한다.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해. 쟤 여기 오는 미세스 윌슨 아들이라 잖아. 다리가 접질려서 침 맞으러 왔다는데.
그럼 왜 예약도 안 하고 이렇게 일찍 와. 혼자나 오든지. 앞에 혼자 있다가 얼마나 놀란 줄 알아요. 네 명씩이나. 여기 만져 봐요. 놀래서 아직도 이렇게 뛰고 있잖아. 모기 소리보다도 작게 변명을 하고는 이번엔 내가 죄인이 되어 조심스럽게 자리로 돌아왔다.
차트를 다 쓴 뒤 내게 내밀면서 나를 보는 눈빛이 안 됐다 하는 눈치다. 이왕 왔으니 진료를 받기는 하지만 아침부터 자존심이 많이 구겨졌다는 표정이다. 나는 겨우 마음을 진정시키고는 미안해서 무슨 말인가 해야 할 것 같아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어제 내가 도둑을 맞아서 그 생각하다가 그만. 미안해요.
진료실로 들여보내고도 내내 마음이 영 아니었다. 그애 엄마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다가 생각이 미친 곳이 어제 아침에 보았던 주간지 기사였다.
복잡한 생각에 휘말리어 있다가 진료실을 나온 토마스에게 진료비를 받지 않는 것으로 내 실수의 미안함을 대신했다. 그러고는
오늘 지내 보고 아프면 내일 다시 와요. 내 억양은 그의 엄마 보다 더 따뜻하고 부드러우려고 노력했다.
내일 아침 비행기로 서울 가요. 내 동생하구요. 따라온 친구 중에 하나를 가리켰다. 나이들이 거의 비슷해 보였다.
아깐, 정말 미안했어요. 서울 잘 다녀오고 즐거운 여행 되세요.
그 말을 하면서도 즐거운 여행이 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니 예감이 아니라 서울의 현실이다. 버스나 지하철이라도 탔다가 못 알아들을 줄 알고 흑인이 어떻고 저떻고 욕이라도 한다면, 상처는 오늘보다 심할 것이다. 생각만으로도 가슴이 시리다. 차라리 그 돈으로 유럽 여행이나 하지.
한국말을 사용하지 않은 곳으로. 하기사 어딘들 한국 사람이 없으랴.
안녕히 계세요. 토마스가 인사를 한다. 거구 네 명이 대기실 밖을 나갔다.
토마스가 떠나고 나는 기도하듯 고개를 숙이고 미안해, 미안해를 뇌인다. 그리곤 경찰서에 가서 어제 도둑 맞은 것 신고하려던 것도 포기한다. 이 때 남편이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며 한 마디한다.
당신, 아이들도 아니고 어떻게 그렇게 말을 함부로 해. 명예 훼손으로 고소라도 하면 어쩌려고. 애들이 얼마나 상처를 받았겠냐구.
어제, 그 인삼 박스들 훔쳐 달아나던 흑인을 생각하면 아직도 이렇게 살거죽에 소름이 돋잖아요.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어제 놀란 게 아직 남아 있는데 하필이면 그 순간에 머리 박박 깎은 시커먼 장정 네 명이 넓은 바지에다, 문신이 새겨진 팔뚝 하며 들어오던 그 순간을, 내 입장을 한번 생각해 보라구요. 내 목소리가 내가 들어도 총알 튀기듯 한다.
그래도 그렇지. 애들이 안 됐잖아. 백인들이 당신 볼 땐 황구보다 나은 게 있을 것 같애? 뭐가 그렇게 잘났어? 남에 나라에 와서 살고 있다는 걸 잊은 거야. 좀, 겸손하라구. 핀잔하듯 한 마디 던지곤 남편은 섰던 자리에서 사라진다. 듣고만 있던 나는 남편이 있던 자리를 향해 중풍 맞은 여자처럼 눈과 입을 흘긴다.
그리곤 다시 자리에 앉아 일을 하려는데 어제 아침에 보았던 주간지 내용이 자꾸 떠올라 더 혼란스럽게 한다. 미안하다고 할 사람은 그 애의 엄마였다. 아니야, 그 앤 그렇게 태어난 게 아니야. 아니야. 미안하다. 미안해!
마음은 그러면서도, 여전히 주간지 기사가 머릿속을 집요하게 헤집어 댔다.
과일이 고루 맛있는 건 번식을 위함이라면, 그 짓의 즐거움 뒤의 상처는 누가 끌어안을 것인가! 머릿속이 쉬 정리가 될 것 같지 않았다.
이 때 주차장 쪽에서 개가 끙끙거리는 소리가 민망하게 들려온다. 나는 허둥지둥 뛰어 나가 돌이를 부른다.
돌이야!
돌이가. 돌이가 새끼를 낳고 있었다. 쥐만한 새끼들이 움틀거린다. 새끼들을 양 손에 한 마리씩 안아 든다. 한 마리는 까만 색에 황색이 섞이었고, 다른 한 마리는 황색에 흰 점박이 털이 있다. 또 한 마리는.
나는 떨리는 소프라노로 남편을 부른다.
여보! 돌이가 새끼를 색색으로 낳았어! 얘가 어떻게.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