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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 아이야 도망가 : 황희(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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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856회 작성일 10-04-30 2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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뾰족하게 다듬어진 손톱에 세게 힘을 줘 손등을 힘껏 찔렀다. 마음이 검은 새처럼 죽었을 때 통각도 함께 죽은 걸까. 손톱이 살을 파고들었지만 아프다는 생각조차 들지 않았다. 언젠가 엄마가 물었다. 어째서 손톱을 그렇게 길러 삼각형으로 자르고 다니느냐고. 불량스러워 미치겠다고. 삼각형 뾰족한 손톱은 내 자신을 찌르기 위한 흉기다. 엄마가 미국으로 온 것은 내 공부 때문이 아니라 종교의 자유를 위해서란 걸 나는 알고 있다.
학교에서 돌아와 열쇠로 문을 열자 햇빛을 등져 낮에도 어두컴컴한 아파트 거실이 드러났다. 한 발자국 거실로 들어서는데 어두침침한 실내에 누군가가 현관을 노려보며 앉아 있었다. 순간적으로 오싹했다. 다음 순간 그것이 엄마라는 것을 알았다. 심장이 불쾌하게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엄마가 눈치를 챈 것일까?
“아무리 물어도 대답을 안 해 주시네. 우리주님께서.”
엄마의 시선은 아무데도 보고 있지 않았고 목소리는 깊게 가라앉아 있었지만 신경질적인 날카로움이 감춰져 있었다.
“엄마? 거기서 뭐해?”
“이게 모두 너 때문이야!”
엄마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았다.
“너 엄마한테 지금까지 거짓말을 했어.”
엄마가 노려보자 나는 발끝으로부터 한기가 스며 올라오는 것 만 같았다. 한기는 정강이를 타고 무릎까지 올라가 심장을 마구 흔들어대고 있었다.
“너 학교 급식시간에 한 번도 감사기도를 하지 않았지?”
“해, 했어. 했다고!”
안했어. 한 번도 안했어. 쪽팔리기 싫어서 안했어.
“거짓말! 이년이 어디서 거짓말을 해!”
그래 거짓말이야. 엄마도 거짓말을 하잖아.
“거짓말 아니야! 매일 한 번도 빠지지 않고 감사기도를 했단 말이야.”
두 명의 내가 차례로 소리를 질러대는 것 같았다. 그러나 거짓말을 하는 쪽이 훨씬 셌다.
“아니야. 입 닥쳐. 네가 뭐래도 내가 다 알아. 널 잘 가르치지 못했기 때문에 주님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는 거야. 네 친구들한테 전화해서 다 물어봤어! 기도하는 거 한 번도 못 봤단다. 일루와! 회개해! 회개하고 용서를 구해!”
“싫어! 나는 하느님 안 믿어! 목사들이 먹고 살려고 마음 약한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거래. 할머니가 그랬어. 학교 애들이 날 얼마나 이상하게 보는지 알아? 만날 학교로 찾아오는 엄마 때문이야!”
나는 미리 도망칠 생각부터 하며 현관 벽 쪽으로 바싹 붙어 섰다.
“뭐얏!”
엄만 제 정신이 아닌 듯 마구 소리를 질러대며 나를 향해 닥치는 대로 물건을 집어던졌다.
그것만으로는 분이 풀리지 않는지 거칠게 냉동고 문을 열고 꽁꽁 언 고깃덩이를 꺼내 도마 위에 쿵! 하고 내려놓았다. 막 식칼을 잡으며 바락바락 목에 핏대를 세우는 것을 보던 나는 집이 부서져라 세게 현관문을 닫고 나왔다.
엄마는 언젠가는 나를 버리고 도망칠 것이다. 그런 상황이 오면 어떻게 해야 할지 미리 계획을 세워 놔야한다. 먼저 한국의 할머니에게 국제 전활 걸어야 하고 엄마의 돈을 훔쳐 한국으로 돌아갈 비행기 표를 어떻게 사는지 알아야한다. 택시를 어떻게 부르는지도. 그것 세 가지만 준비해 놓으면 국제 미아가 되진 않을 것 같았다.
쭈그리고 앉아 신경질적으로 숙제를 꺼냈다. 어째서 나는 빨리 자라지 않는 것일까. 한밤 자고 일어나면 어른이 되어 있을 수는 없을까? 빨리 지긋지긋한 여기서 떠날 수 있는 나이가 되었으면 좋을 텐데. 사람들이 기러기 아빠라고 부르는 내 아빠가 그랬다. 어떤 상황에서도 아이들이 해야 할 일은 공부라고. 공부만 잘하면 지긋지긋한 모든 것에서 빠져 나갈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고 했다. 늘 산수 45점. 이번엔 반드시 백점을 받고 말 것이다. 나는 연필을 꼭 잡고는 산수 문제를 노려보았다. 속으로는 “퍽(fuck)”하고 욕을 했다. 영어로 욕을 배우는 건 몹시 쉽다. 가만히 듣고만 있어도 곧바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산수 문제는 아무리 노려보아도 어떻게 푸는 건지 떠오르지 않았다. 엄마한테 물어보면 영어로 된 문제를 엄마가 어떻게 아냐며 수업시간에 잘 듣지 뭐했냐고 쥐어박을 것이다. 그러면서 또 기도를 하겠지. 산수 문제를 계속 노려보자 눈알이 빙글빙글 도는 것 같았다. 문득 산수 문제가 흐릿하게 보인다 싶더니 한국에 있을 때 동네 아줌마가 겁을 주며 해주었던 말이 떠올랐다.
“네 엄말 교회 못 가게 막는 사람은 모두 죽어.”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숙제해야해. 저리 꺼져. 시도 때도 없이 불쑥 불쑥 떠오르는 목소리들은 숙제를 방해하는 악당이었다. 늘 거짓말이 이기듯이 악당들이 이겼고 숙제는 늘 해가지 못했다. 산수 문제에 집중하고 싶었지만 도리가 없었다.
“교회를 못 가게 막는 네 할머니를 슬쩍 밀어 다리를 부러뜨리고 나서는 시치미를 뗐어. 공중목욕탕 바닥이 미끄러워 넘어 진거라고. 그래놓고 시어머니 다리 얼른 낫게 해달라고 새벽기도를 다녔지. 누구든 네 엄마가 교회 가는 걸 막으면 교묘하게 다치게 될 거야. 그러니까 너도 네 엄마가 교회에 가는 걸 막아서는…….”
“그만 해!”
나도 모르게 입이 소리를 냈다. 눈을 질근 감고는 두 손으로 눈을 가렸다. 눈을 가리니 이상하게도 더 잘 보인다. 겁에 질린 내 얼굴을 손가락질하며 앞니 빠진 동네 아줌마가 깔깔깔 웃고 있다. 눈까풀 밑에서.


엄마는 저녁 예배를 보기 위해 떠났다. 엄마의 구두 발자국 소리가 완전히 사라지고 나자 갑작스럽게 집안이 조용해졌다. 지금까지 들리지 않았던 괴상한 노래 소리가 귀속을 파고들었다. 위층 백인 애들이 틀어놓은 음악 소리였다.
-엄마 방금 한 사람을 죽였어. 총을 그의 머리에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어.
진짜 이상한 노래야. 나는 천정을 노려보며 얼굴을 찡그렸다. 부서져라 세게 문을 닫고 자물쇠 3개를 모두 걸어 잠갔다. 문을 잠글 때마다 꺼림칙한 것은 누군가 밖에서 강제로 뜯고 들어온 듯 나무 기둥 쪽으로 움푹 팬 칼자국이었다. 우리가 이사 오기 전에 어떤 사람들이 살았던 걸까. 그 사람들 강도를 당했을까. 그래서 이사를 간 거겠지? 잠시 궁금증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침입하려고 한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들어오는 거지.
-삶은 막 시작되었을 뿐인데.
노래는 계속 들려왔다.
나는 컵라면을 먹고 소파로 와서 손톱을 다듬기 시작했다. 어제 보다 약간 더 길어진 것 같았다. 손톱 줄로 좀 더 뾰족한 삼각형으로 간 다음 검은 색 매니큐어를 칠했다. 하느님이 금지하시는 모든 나쁜 일들이 TV를 통해 사람들에게 전염되기 때문에 집에는 TV도 컴퓨터도 없었다. 컴퓨터를 사용해야 하는 숙제가 주어지면 난감했다. 그때마다 걸어서 트윈브룩 공공도서관으로 가야 했다.
나는 양말을 벗고 발가락을 꼼지락 거려 보았다. 발톱도 손톱처럼 삼각형으로 뾰족하게 다듬고 검은 매니큐어를 칠했다. 사람의 간이라도 파먹을 수 있을 것 같이 뾰족한 손톱과 발톱은 나의 방어수단. 누군가 나를 때리려고 들면 그 인간의 팔과 얼굴을 새빨갛게 할퀴고 말 것이다. 나는 실제로 누굴 할퀴기라도 하는 듯 고양이처럼 손톱을 세우고 허공을 휙 하고 긁는 흉내를 내며 야옹 하고 울었다.
집 밖으로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사이렌은 언제나 사람을 불안하게 만든다. 그건 엄마랑 함께 있을 때도 마찬가지다. 누군가 다쳤다. 누군가 죽어간다. 세상은 살거나 죽거나 둘 중 하나. 죽지 못하면 살아야 하는 일상. 그런 무언의 위협을 주려는 것이다. 사이렌 소리는 언제나 저쪽 끝에서 옅은 소리로 달려와 엄청 큰 소리로 사람들을 불안하게 만든 다음 저쪽 끝으로 사라져간다. 그랬는데 이번에는 달랐다. 점점 가깝게 들려오던 사이렌 소리는 우리 아파트에서 큰 소리로 울려대더니 뚝 끊겼다. 누군가 죽은 걸까? 문을 열고 내다보고 싶었지만 혼자 있는 게 들킬까봐 그렇게 할 수도 없었다. 어둠 속에는 항상 지켜보는 눈이 있기 마련이다. 지켜보고 있다가 누군가 경찰에 신고한다.
문득 현관 밖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갑자기 아찔했다. 노크 소리는 한 밤중이라 그런지 심장이 철렁할 정도로 크게 들려왔다. 불길했다.
입으로 손톱과 발톱을 후후 세게 분 다음 발꿈치로 일어나 슬쩍 블라인드 밖으로 내다보았다. 나와 자주 어울리는 흑인 에니와 그 애의 엄마로 보이는 여자가 서 있었다. 무슨 일일까? 혹시 학교에서 약간 다퉜는데 그것 때문에 엄마까지 데리고 온 것일까? 아무도 없는 척 하고 싶었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체인을 풀지 않고 문을 조금 열었다.
“엄마는?”
어른이 커다란 눈을 굴리며 퉁명스럽게 말했다. 애니의 동그란 눈도 문틈으로 들어왔다. 그럴 줄 알았다. 흑인 여자는 뭔가를 심하게 따지러 온 것이었다. 에니의 겁에 질린 듯, 뭔가에 주눅 든 듯한 눈빛이 모두 말해주고 있다.
“목욕하는데요?”
“좀 나와 보시라고 해.”
“목욕하다가 어떻게 나와요?”
“뭐?”
여자는 약간 인상을 찌푸리며 나를 쳐다보았다.
“그럼 아빠는?”
“아빤 회사에서 아직.”
나는 눈썹하나 떨지 않고 거짓말을 한다.
“너, 혹시 혼자 있는 거 아니니?”
여자가 잠시 말을 멈추고 확인을 하려는 듯 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았다.
“아니라니까! 엄마!”
나는 일부러 엄마를 부르는 척 하면서 욕실로 달려 들어갔다가 흑인 여자가 들으라는 듯 혼자서 엄마와 말을 주고받는 척 연기를 한 다음 다시 달려 나왔다.
“엄마가 중요한 일 아니면 내일 보자는 데요?”
흑인 여자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눈치더니 다시 말했다.
“너 오늘 놀이터 갔었지?”
아파트 놀이터라면 플라워벨리 초등학교 버스가 도착하는 곳이었다. 아이들은 버스에서 내리면 놀이터에서 놀다가 집으로 돌아간다. 대부분의 아이들처럼 나도 놀이터에서 10분 정도 놀다가 집으로 온다. 오늘도 그랬다.
“아줌마가 지금부터 하는 말을 잘 듣고 있다가 네 엄마한테 그대로 말해줘야 해.”
나는 두 눈을 크게 뜨고 고개를 끄덕였다. 따지러 온 게 아니라고 생각되자 눈에 힘을 풀었다.
“앞 동에 사는 여자 아이들 둘이 죽었어. 엄마한테 말하면 “교살”이 뭔지 알아듣기 쉽게 말해줄 거야. 여자 아이 둘 다 밤에 혼자 집에 있다가 그런 변을 당한 거래. 낮에 놀이터에서 군인 모자를 눌러 쓴 상의군인처럼 보이는 남자가 죽은 아이 둘한테 이것저것 묻는 걸 다른 아이들이 봤데. 너한테도 물었다면서?”
나는 무심코 고개를 끄덕이다가 깜짝 놀라 마구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 자리에서 군인과 이야길 했다고 하면 소문이 나서 FBI가 찾아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혼자 있을 때 찾아온다면 큰일이다.
“아뇨. 난 거기 없었는데?”
여자가 인상을 쓰고 나와 에니를 번갈아 보았다. 있었다는 소릴 들었는데 왜 거짓말을 하는 거지? 하고 추궁하는 것 같았다.
“난 거기 없었다고요! 알았어요?”
큰 소리로 소리치고는 여자의 얼굴 앞에서 문을 꽝 닫아버렸다. 그리고 금세 후회했다. 에니의 엄마는 그렇게 말하겠지 ‘저 따위 년이랑은 놀지 마. 못 배워 처먹은 년.’ 쳇, 친구라고는 그래도 에니뿐이었는데.
여자가 가고 난 뒤 재빨리 자물쇠를 모두 걸어 잠그고 창문도 잠겼는지 확인했다. 그다음 방안으로 달려 들어가 이불을 푹 뒤집어썼다. 자꾸 흑인 여자의 말이 생각났다.
‘여자 아이들 둘이 죽었데. 혼자 집에 있다가 변을 당한 거래. 너한테도 물었다면서?’
엄마한테 전화를 할까. 전화해서 무서우니까 와달라고 하면 와 줄까? 나는 고개를 가로 저었다. 와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 기도 중에 전화 받는걸 얼마나 싫어하는데. 생각은 그렇게 하면서도 난 엄마의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나는 신호음이 끊길 때까지 들고 있었지만 결국 엄마는 전화를 받아주지 않았다. 전화를 끊는 동안 새로운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휴대폰이 울리면 번호 확인부터 한 다음, 필요한 전화라고 생각되는 전화만 받고 다른 전화는 무시하는 엄마를 매번 봐왔다. 필요 없는 존재가 된 기분이란……. 땅바닥으로 꺼지고 싶을 뿐이다.
집 앞을 지나가는 사람의 발자국 소리가 아주 크게 들려왔다. 무서워서 몸을 더 웅크리니 의외로 따듯해져 졸음이 왔다. 하지만 자면 안 된다. 다시 두 눈을 부릅떴지만 어느새 끄덕 끄덕 졸고 있었다. 잠결에 불쑥 불쑥 생각지도 못했던 영상들이 튀어나오며 좀 더 깊은 꿈길로 이끌었다. 꿈속에서 나는, 아파트 아이들과 놀고 싶어 놀이터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그러나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가득 차 있던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벗겨진 페인트 밖으로 녹슨 쇳덩어리가 보이는 놀이 기구들만이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 위로 늦가을 밤의 어둠이 짙은 안개를 토해냈다. 얼굴을 돌리자 음산한 안개에 싸인 나무 가지에 덩어리들이 매달려 있었다. 두 눈을 가늘게 뜨고 자세히 보자 덩어리들은 목이 매달린 아이들이었다. 모두 하체가 발가벗겨진 여자 아이들이었다.
비명을 질렀는데 목구멍이 비명을 토해내지 못했다. 갑자기 등 뒤에서 쇠붙이 같은 것으로 벽을 긋는 소리가 났다. 소스라쳐 놀라 돌아보자 칼을 든 군화를 신은 사람이 걷고 있었다. 나는 꿈속에서 그가 살인마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주위엔 개미새끼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는다. 얼굴 없는 남자는 우리 집 아파트 문 밖에 멈춰 서고는 누런 이빨을 드러내며 낄낄거렸다. 목에 건 여러 개의 군번들이 서로 부딪히며 쩔렁쩔렁 소리를 냈다.


내 얼굴을 아는 것들은 죽어야 해……. 혼자 있으면 안 돼. 밤에 혼자 있는 아이들을 모두 죽어.
불을 꺼. 그 놈이 훔쳐보고 있어. 눈에 띄면 안 돼. 엄마가 지금 여기 없다는 걸 눈치 채게 해서는 안 돼.


살인마가 주머니 속에서 만능키를 꺼내들었다. 엄마… 무서워. 나는 혼자 자기엔 너무나도 넓은 퀸 사이즈 침대 시트를 손바닥으로 꼭 움켜잡았다.


요란하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퍼뜩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내 귀는 자동적으로 전화벨이 몇 번 울리는지를 셌다. 등이 식은땀으로 서늘했다. 한 번 울리고 전화가 끊기고 다시 울리면 그건 엄마였다. 그 외의 다른 전화는 절대로 받아서는 안 된다고 엄마가 말했었다. 나는 몽롱한 정신을 차리려고 애를 쓰며 온 신경을 곧추세웠다. 첫 번째 신호가 울린 뒤, 끊겼다가 다시 울리자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엄마?”
“어제 밤에 전화했었니?”
“응”
왜라고 물어봐줘.
“엄마가 선교 봉사하는 노인이 어젯밤에 죽었단다. 오늘 엄마랑 교회 사람들이 노인 가시는 길을 봐줘야해.”
엄마는 왜 전화했는지 묻지 않고 딴 소리만 했다.
“나 혼자 있기 싫어! 무서워. 얼굴 없는 군인이……, 살인마가……, 무서워.”
“무서운 게 어디 있어? 주님이 지켜줄 거야.”
전화기 너머로 울부짖는 소리, 기도하는 소리들이 들렸다. 그러다가 목사가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지영 씨 뭐해. 얼른 와.’ 꽤 다정한 음성. 아빠만이 부를 수 있는 엄마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다니. 나는 화가 나서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눈언저리를 바르르 떨었다. 손톱이 저도 모르게 카펫을 긁고 있었다.
“어제 그 노인 떠나면서 예수님 영접하고 떠나셨어. 기쁜 일이지. 천국 갈 거야. 엄마 얼른 가야 해. 밥 챙겨먹고 가.”
전화는 끊겼다. 목사에게 달려가는 지영 씨의 뒷모습이 생생하게 보이는 것 같다.
‘어째서 지영 씨는 자기 딸 보다 다른 사람들의 영혼과 죽음, 그리고 믿음이 중요한 것일까? 자기 딸도 죽을지 모르는데!’
두 팔을 축 늘어뜨리고 무력하게 앉아 있던 내 눈에 책상 위의 가위가 보였다. 나는 가위를 집어 들고 전화선을 싹둑 잘라 버렸다. 모든 것이 이렇게 전화선 자르듯 싹둑 잘라내 버릴 수만 있다면, 하고 생각하다가 굴러다니는 신문지 위에 교회와 목사와 지영 씨와 얼굴 없는 군인의 얼굴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위로 싹둑 싹둑 아무렇게나 그림을 잘랐다. 통쾌했다.


학교 시작 시간은 9시. 20분 정도 일찍 도착한 나는 가방 안에서 살인 백서를 꺼내 읽기 시작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학교 버스가 도착하는 소리가 들려왔지만 책만 봤다. 살인백서를 읽으면 세상의 모든 미운 것들에 대한 스트레스가 다 사라져 버리는 것 같아서 좋았다. 문득 끈이 풀린 나이키 운동화가 내 발 앞에 멈추었다. 눈엣가시 같은 놈. 샘. 또 날 괴롭힐 만한 소문을 들은 것일까. 샘은 상체를 숙이고는 내 얼굴을 들여다봤다.
“어제 너 네 아파트에서 기집 애 둘이 발가벗겨져 죽었다면서?”
에니의 엄마가 하고 간 소릴, 무슨 새로운 뉴스라도 되는 모양 떠들어대고 있다. 나는 책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그러나 책 밑에 감춰진 열개의 손톱을 갈퀴처럼 오그라뜨렸다. 여차하면 튀어 올라 샘 네 얼굴을 할퀼 거야! 뒤로 아이들이 키득거리며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한국에서 학교를 다닐 때 아이들에게 집단으로 폭행을 당했던 일이 떠올라 아이들이 모이는 건 무서웠다. 집단 폭행을 당한 것도 엄마 때문이었다. 엄마가 서울역에서 믿지 않는 사람을 전도하다가 싸움이 붙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엄마와 전도사 아줌마들이 역 화장실로 끌고 가 두들겨 팬 ‘믿지 않는 사람’은 우리 반 반장의 엄마였다. 여기서도 그런 일이 일어날까봐 내 작은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오늘 밤은 네 차례야. 어머, 무서워.”
샘이 여자처럼 어깨를 움츠리며 두 다리를 바싹 붙이고는 달달 떨자, 지켜보고 있던 남자 아이들이 깔깔대며 넘어갔다. 나는 한대 칠 듯 손을 치켜들고는 샘을 노려보았다. 주근깨로 뒤덮인 밀가루 반죽 같은 샘의 뺨을 후려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는 대신 내 손가락은 지금 막 읽어 내리던 문장 하나를 딱 짚었다. 샘의 시선은 즉시 내 손가락 끝의 검은 문장으로 옮겨졌다.


그는 함부로 지껄여대는 놈의 입을 가로로 10센티 찢어 버렸다. 벌렁거리는 입술 사이로 비명과 함께 피가 튀어나왔다……, 샘……, 아프니? 나도 아프다… 네 눈깔을 빼기 전에 반드시 쇠꼬챙이로 망막 근처를… 찔러 줄게…….


문자를 읽은 샘과 내 시선이 책에서부터 서서히 떠올라 허공에서 마주쳤다. 샘은 얼른 뒤로 물렀다. 내 눈에서 얼음처럼 차가운 살기를 느꼈을 것이다. 오줌을 지리며 바닥에 엉덩방아를 찧는 것 보단 그 편이 훨씬 나았겠지. 으하하하. 그랬다. 그 잔혹한 소설의 희생자 이름은 바로 샘이었다. 나를 괴롭히는 샘의 이름과 꼭 같은 S. A. M. 샘.


엄마는 식료품이 가득 쌓인 카트 안으로 돼지고기를 던져 넣으며 휴대 전화 통화에 열을 올렸다. 할머니는 음식이란 사람의 마음이라고 했는데 엄마의 카트 안에는 냉동 음식과 인스턴트 음식뿐이다.
“엄마가 교회일이 바빠서 음식 만들 시간이 없어. 어차피 구원받아야 할 것은 육신이 아니라 영혼이니까. 우리 영혼만은 깨끗하게 지키자.”
늘 엄마는 전자렌지에서 냉동음식을 꺼내 놓으며 그렇게 말했다. 변명이지. 냉동음식 먹고 얼어버린 육신에 무슨 깨끗한 영혼이람. 엄마는 핑계라는 걸 알고 있으면서 진짜처럼 말한다. 자기 자신의 거짓말에 세뇌당한 거다. 하지만 난 세뇌당하지 않아.
아빠는 기러기로 살자는 것에 대해 완강히 반대했었다. 가족이란 무슨 일이 있어도 함께 살아야 한다.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고 이겨나가도록 힘을 주고받는 것이다, 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나 고통을 나누고 싶은 순간에 전화를 하면 아빠는 항상 회사의 회식, 아니면 노래방에서 핸드폰에다 대고 ‘그것도 알아서 못해?’ 하고 소리쳤다.
엄마는 화가 치밀어 오를 때마다 ‘주여’를 찾으며 한숨을 내 쉬곤 했다. 지금도 아빠가 뭔가 엄마 속을 끓이는 소리를 하고 있나보다. 나는 카트에서 엉거주춤 일어나 엄마의 휴대 전화에 귀를 갖다 댔다. 그러자 엄마는 눈을 흘기며 나를 밀어냈다.
“나는 여기서 잘 지내고 있어요. 공부도 열심히 하고, 하루하루 밝아지고 그 일은 다 잊었나봐. 미국에 있는 게 애한테 정말 좋은 거 같아요. 다 당신 덕분이야. 고마워.”
엄마는 미소 지으며 상냥하게 말한다. 그러나 두 눈은 얼음처럼 차갑다.
“어머, 어머님.”
아빠와 통화를 하고 있던 엄마의 얼굴이 갑자기 일그러졌다. 할머니가 그때쯤 출현 하실 줄 알고 있었다. 늘 하듯 아빠 곁에서 밉살스럽게 통화를 엿듣고 있다가 전화기를 뺏어들었겠지. 그리고 이렇게 말을 하는 것이다. 이년아, 내 아들 뼈 빠지게 일해 번 돈 매달 네년한테 고스란히 보낸다. 내가 더는 못 참겠다. 들어 와. 나는 내 아들 이렇게 사는 거 더는 못 본다. 내 아들이 돈 버는 기계냐? 언젠가 학교에서 돌아 왔을 때,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할머니의 말을 들은 적이 있었고 그 말은 이후로도 조금씩의 토씨만 다를 뿐 거의 같은 내용이 녹음되어 있었다. 할머니가 나를 바꾸라는 것 같았다. 엄마는 휴대전화를 건네주며 내게 입 조심하라는 시늉을 했다. 전화를 받자 다짜고짜 할머니가 소리를 질렀다.
“은별아! 여시 같은 네 어미, 거기서 교회 다니지?”
나는 순간적으로 엄마를 쳐다보았다. 엄마가 매섭게 노려보고 있었다. 머릿속으로는 아뇨, 교회 안가요. 라고 대답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지만 마음속으로는 네. 엄마 여기까지 와서 교회 다녀요. 게다가 냉동 음식만 잔득 사요. 라고 일러바치고 싶었다. 어느 쪽을 택해 대답해야 할까, 1초에 한번씩 마음이 변했다.
“네 어미 교회 나가냐니까!”
할머니가 다시 버럭 소리를 질렀다. 엄마가 아빠와 이혼을 하던지 할머니가 엄마를 내쫓으면 누가 날 먹여 살려줄까. 내 머리는 그 와중에도 계산을 한다. 그것은 당연히 아빠였고 아빠는 할머니의 아들이었다. 그렇다면 할머니에게 잘 보여 둬야 하는 것이다. 엄마는 교회 나간다는 소릴 하면 죽었어. 하고 노려보고 있다. 거짓말하면 지옥 간다고 했는데 엄마는 어째서 거짓말을 하라고 하는 걸까. 엄마의 영혼을 구제하기 위해선, 나라도 교회에 나간다는 것을 일러바쳐야만 했다.
“아뇨. 엄마 교회 안 나가요.”
나는 거짓말을 택했다. 지금 당장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은 엄마였다. 우선은 엄마한테 잘 보여야지. 이제 지옥에 가겠군. 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나 또 다른 마음은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지옥 따위 어디 있다고. 흥.
전화가 일방적으로 끊겨버린 것 같았다. 엄마는 휴대 전화를 닫았다. 엄마의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한국에 있는 동안 시집살이 하면서 생겼던 그 울화증이 다시 치밀어 오르는 것이었다.
“오… 주여, 주여, 엄마 어지러워. 잠시만.”
엄마는 하체의 힘이 모두 빠져버려 걸을 힘도 없는 듯 잠시 시장 바닥에 웅크리고 앉아 자신의 가슴을 텅. 텅. 쳤다. 나는 웅크리고 앉은 엄마를 싸늘한 시선으로 내려다보았다. 나한테 못하기만 해봐. 그냥 할머니한테 일러바칠 테니까. 교회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고 TV 뉴스를 보지 않으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는 엄마. 아빠가 송금을 해주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엄마의 자유는 끝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울화증이 풀리지 않은 엄마는 저녁을 먹는 대신 소주를 마셨다. 그리고는 우두커니 벽에 기대앉아 혼자 중얼거렸다.
“네 외할머니와 외삼촌이 밧줄을 들고 들어오셨어. 그리고는 내 목에 밧줄을 걸고 천정에 매달았지. 그때 얼마나 무서웠는지… 한 집안에 종교가 둘이면 조상님들이 노하셔서 집안을 말아먹게 된다고 조상님들이 눈치 채기 전에 날 죽이려고 했어. 엄마의 목은 죄어들었고 양쪽 관자놀이로 피가 몰려들어 뇌를 터트리기 직전까지 갔어. 단지 숨이 넘어가질 않았을 뿐, 이미 엄마는 죽은 거나 마찬가지였어. 엄만 그 순간, 붉은 빛에 휩싸인 주님의 모습을 보았지. 경험해보지 못한 사람은 몰라. 사람들은 자기가 경험하지 못하면 믿어주지 않아. 주님은 날 사랑한다고 하셨어. 너무나도 사랑하니까, 지금은 목숨을 건지고 봐야 할 때라면서, 거짓 증언을 용서해 준다고 하셨어. 그래서 엄만 할머니에게 맹세했지. 다시는 교회 문턱에도 가지 않겠다고…….”
울먹이는 엄마의 말은 모래시계 속의 모래가 빠져나가듯이 졸린 내 의식 밖으로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어찌되었건 엄마가 교회에 가지 않고 밤중에 같이 있어주니 좋았다. 오늘밤은 얼굴 없는 군인이 나타나지 않을 것 같아 안심이 되었다. 나는 엄마가 도망갈까 봐 엄마의 발을 꼭 잡고는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잠결에 누군가와 통화하는 엄마의 조용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에요……, 울긴. 목소리가 그랬나? 주님께서 날 얼마나 사랑하시는데? 응. 새벽기도 가야지.”
엄마가 가려한다. 팔을 들고 엄마를 잡으려했지만 무거운 눈이 떠지지 않았다. 잠든 내 의식 속으로 형언할 수 없는 불안감이 몰려왔다. 밖에서 누군가 문을 뜯고 있는 소리가 났다. 카펫을 밟고 얼굴 없는 군인이 다가오고 있다. 한 발 한발 거실을 지나 욕실로 향하는 좁은 복도를 지나 욕실 끝의 내 방으로…, 얼굴 없는 군인은 내 침대 맡에 가만히 서 서 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다. 숨을 쉴 때마다 쇅, 쇅, 쇅, 하는 소리가 났고 입에서는 숨결대신 음습한 검은 연기가 피어올랐다. 군화 옆으로 새벽이슬들이 굴러 떨어졌다. 투명한 이슬방울에서 조그만 벌레들이 꼬불꼬불 대가리를 흔들며 태어났다.


‘난 밤에 혼자 있는 아이들만 골라서 죽이는 얼굴  없는 군인이야.’
‘무서운 밤인데도 혼자 있는 아이들은 부모가 버린 것 들이지.’
그것들은 이슬방울에서 나와 공기와 접촉하자마자 시커멓고 징그러운 벌레들로 변해 증식하기 시작했다. 우글거리는 벌레들은 급속도로 침대를 타고 올라 돌돌 말린 이불의 틈 사이로 기어들어왔다. 나는 비명을 내지르며 이불을 걷어찼다. 벌레들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식은땀이 흘렀다. 엄마…, 너무 무서워. 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어깨위에 다닥다닥 붙은 소름은 떨쳐지지 않았다. 텅 빈 방안을 두리번거리며 엄마를 불렀다. 싸늘한 어둠 속, 넓은 침대위엔 엄마의 체온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엄마는 내가 잠든 동안 교회에 가버린 것이다. 엄마의 따듯한 체온 대신 야광 페인트가 칠해진 붉은 십자가만이 어두운 벽 위에 걸려 있었다. 나쁜 엄마. 나쁜 엄마. 나쁜 엄마 계속해서 중얼거리며 울었다.


다음 날,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도착해 열쇠로 문을 열려는데 웬 낮선 여자가 불쑥 얼굴을 들이밀었다. 분명히 엄마는 교회에 가 있는 시간이었다.
“어머 은별이 왔구나. 조용히 하고 네 방으로 들어가.”
교회 집사다. 집사의 어깨 너머로 엄마와 몇몇 아줌마들이 동그랗게 원을 그리고 앉자 두 손을 번쩍 치켜들고는 울부짖으며 기도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원의 한 가운데로 어떤 할머니가 벌벌 떨며 앉아 있었다.
“어서 네 방가.”
집사는 소리가 밖으로 새어 나갈까봐 조심하려는 듯 현관문을 꼭 닫고, 쉿 하며 손가락을 입에 댔다. 나는 문턱으로 올라서며 일부러 세게 가방을 턱 놓았다. 엄마가 돌아봤다. 집사 아줌마는 눈에 쌍심지를 켜고 나를 쳐다보며 조용히 하라고 했잖아! 하는 인상을 지었다. 쳇! 지가 내 엄만가! 나는 입을 튀어내며 더욱 심술궂게 엄마를 노려보았다.
“엄마 나 배고파 밥 줘.”
“귀신들린 신도야. 기도해야 해. 넌 숙제 해. 기도 끝나면 함께 먹자.”
엄마가 교양 있는 여자처럼 조근 조근 말했다. 급속도로 기분이 나빠졌지만 집사가 등을 떠미는 바람에 할 수 없이 방으로 들어왔다. 나는 문을 꼭 닫는 척 한 다음, 다시 조금 문을 열고 밖을 내다봤다.
엄마가 벌벌 떨고 있는 할머니의 입에 재갈을 물리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동그랗게 둘러 앉아 있던 여자들이 입을 꾹 다물고는 갑자기 할머니를 때리기 시작했다. 비명소리나 욕 같은 건 나지 않았다. 툭. 툭. 주먹을 쥐고 머리를 때리거나 퍽. 퍽, 온 몸을 때리고 차는 소리만 났지만 새빨간 아줌마들의 얼굴은 무서울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너무 무서웠지만 또 한편으로는 엄마가 저런 미친 여자들과 함께 어울려 다니며 같은 사람이 되어간다는 것에 화가 났다. 나는 엄마를 꾀어내는 저런 여자들이 싫다. 나는 꽝! 소리가 나도록 문을 닫고는 선반위에 놓여있는 부러진 크레용 통을 꺼내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검은 땅속에 십자가가 거꾸로 파묻혀 있는 교회 그림이었다. 교회 앞에 서서 두 손을 하늘 높이 쳐들고 있는 사람 그림을 그린 뒤 두 눈에 검게 낙서를 하며 소리쳤다.
‘죽어! 죽어! 죽어버려! 진짜 하느님이 재림하시면 너희들부터 벌을 받을 거야.’
악에 받혀 씩씩거리며 사람들의 눈에 검은 구멍을 냈다. 종이를 찢을 듯 낙서를 하다가 스케치북을 확 집어 던졌다. 스케치북은 화라락 날아가더니 벽에 부딪치고는 액자처럼 곳곳하게 방바닥에 섰다. 나는 그림을 노려보았다. 언제나 미술 시간에 그림을 그리면 미술 선생님은 내게만 그림에 대해 꼬치꼬치 캐물었다.
“어째서 공을 그린 거지?”
“어째서 나무에는 잎사귀가 없는 거지?”
“어째서 네가 그린 집은 창문이 없는 거지?”
내가 그린 그림이 해괴하게 느껴졌다. 얼굴은 찌그러진 동그라미고, 코조차 없는 얼굴에, 어떤 얼굴은 이빨만 고스란히 그려 놓은 것도 있다. 머리카락들은 쭈뼛쭈뼛한 작대기 아니면 빠글빠글 파마머리다.
“오, 주여, 주여, 죄를 사해주시고…….”
나는 그림을 보며 엄마 흉내를 내며 히죽 히죽 웃었다.
“나와서 밥 먹어”
방문이 열리고 엄마가 얼굴을 내밀었다. 거실로 나가자 밥을 먹던 아줌마들의 눈초리가 모두 내게로 향했다. 두들겨 맞은 할머니는 산발을 한 채 바닥에 밥그릇만 놓고 손을 벌벌 떨고 있었다. 손과 입에 밥풀이 붙어있었지만 그것을 떼어낼 정신도 없는 것 같아 보였다. 나는 우물거리며 삼겹살을 씹는 아줌마들의 입과 음식물을 꿀꺽 삼키는 목을 쳐다보았다. 쩝쩝 소리를 내며 입술을 혓바닥으로 핥는 모습이 영혼이 비어버린 시커먼 괴물 같이 느껴졌다.
“저 여자들 모두 가라고 그래!”
부엌으로 들어가던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폭발했다. 다시 엄마가 잡아먹을 듯 노려보며 나를 잡으려 했다. 그러자 여자들 중 한명이 조용히 다가와 쪼그리고 앉더니 나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우리 은별이, 왜 화났을까. 아줌마가 하느님께 기도 해 줄게.”
역겨운 냄새가 난다. 짙은 화장품 냄새와 오래되 상한 립스틱 냄새. 김치와 마늘 냄새. 여자가 다정한 표정으로 내 손을 잡았다.
“착한 척 하지 마. 속은 안 그러면서!”
나는 여자의 손을 뿌리치며 얼굴에 퉤 하고 침을 뱉었다. 나머지 여자들이 동그란 눈으로 나를 쳐다보았다. 순식간에 내 주위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는 것이 느껴졌다. 무서웠지만 무섭지 않은 척 아줌마들을 노려보았다. 바로 그 순간이었다. 얼굴에 불똥이 튀었다. 엄마가 눈알이 튀어나올 정도로 내 따귀를 때린 것이다.
“도대체 뭐 이따위 년이 다 있어!”
엄마는 화가 날대로 나 주위를 잊고 욕을 해대기 시작했다.
“할머니한테 일러바칠 거야!”
나는 바락바락 대들었다. 여자들은 당혹스러운 얼굴로 엄마와 나를 쳐다봤다.
“너 다시 말해봐!”
“할머니한테 일러바친다고 그랬어!”
“다시 말해봐!”
엄마는 온 몸에 힘을 주고는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러댔다. 그것은 말이 아니었다. 온 몸을 부들부들 떨며 소리치는 끔찍한 비명이었다.
“확 그냥 대가리를 오도독 뜯어 죽여 버리고 싶어!”
시퍼런 광기를 흘리며 엄마가 소리쳤다.
“너 나가! 나가란 말이야! 왜 날 이렇게 못 살게 구는 거야! 지긋지긋한 인간들 피해 여기까지 왔는데… 어째서 자식까지도!”
엄마는 부들부들 떨다 못해 눈물까지 흘리며 씩씩거렸다. ‘저러다가 은별 엄마 일 나는 거 아냐?’ ‘애가 뭘 안다고’ ‘저게 애에요? 난 저런 악마 같은 애는 보지도 못 했어’ 이런 저런 수군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그때였다. 방안의 화장실에서 변기 물을 내리는 소리가 나더니 아줌마들 중 한명이 놀란 얼굴로 걸어 나오며 호들갑스럽게 말했다.
“저 애 혹시 귀신 든 거 아니에요?”
여자의 손에는 내 스케치북이 들려있었다.
“이것 좀 보세요.”
여자가 스케치북을 사람들에게 보여주려고 했다. 나는 여자에게 달려들어 스케치북을 빼앗았다.
“십자가 지붕은 검은 땅 속에 처박혀 있고 사람들은 모조리 끔찍하게 그려놨다고요. 얼마나 오싹하던지.”
여자가 끔찍하다는 듯 어깨를 부르르 떨며 말했다.
“이리 내!”
엄마가 소리쳤다.
“싫어! 내 거야!”
그때였다. 갑자기 아줌마들이 내게 달려들더니 손목을 비틀며 스케치북을 빼앗으려 했다. 나는 빼앗기지 않으려고 악착같이 버티다가 본능적으로 손톱을 휘둘렀다. ‘악’하고 누군가 비명을 질렀다. 바로 그 순간 스케치북이 좍 찢어졌다. 스케치북을 들고 나온 여자의 뺨에 선명한 손톱자국이 시뻘겋게 나 있었다. 함부로 내 것에 손을 대? 본때를 보여주지. 나는 씩씩거리며 재빨리 벽에 걸린 십자가를 뜯어 부엌으로 달려갔다. 내 뒤를 쫓아 엄마가 부엌으로 달려 들어왔다. 나는 가스렌지에 불을 붙이고는 십자가를 그 위에 던져버렸다.
“이년이 미쳤어! 저 할망구한테 붙었던 귀신이 이년한테 달라붙었어! 오 주님 아버지!”
달려온 엄마는 가스 불을 단번에 끄고는 분을 참지 못하겠다는 듯 내 머리를 세게 때렸다. 나는 엄마의 무지막지한 힘에 단번에 바닥에 쓰러졌고 엄마는 쓰러진 내 머리채를 움켜잡아 일으켜 앉히고는 다시 한 번 세게 때렸다. 끈적끈적한 코피가 입술을 타고 내렸지만 아무도 말리지 않았다.
엄마의 눈동자 속에서 산산이 부서지는 검은 파도가 보였다. 바다를 뒤집는 격렬한 파도는 오랫동안 엄마의 눈동자 속에서 요동쳤다. 그러다가 차츰 가라앉기 시작하더니, 이윽고 잔잔해졌다. 엄마의 표정은 순식간에 돌변했다. 갑자기 온화하고 착한 엄마가 된 척 연기를 시작한다. 눈물을 글썽이며 두 팔을 벌리고 나를 끌어안으려했다. 그러나 나는 엄마의 가슴을 밀치고 뒤로 물러섰다. 궁지로 몰렸을 때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침착해지는 엄마의 저 태연자약한 연기. 거짓말. 내게 남은 것은 불신과 분노뿐이었다.
“죄송해요. 서울 살 때 남편이 바람을 피우고 이혼하자고 하는 바람에 애가 좀 충격을 받았어요. 미국으로 온 것도 그래서…….”
엄마의 거짓말에 웃음이 나왔다.
“저기 자매님, 내가 처녀 때 미술 치료사를 해서 아는데 이렇게 그림 그리는 애들이 좀 위험해. 애가 사탄이 든 거라면 목사님께 알리고 사탄 퇴치를 해야 해. 그 방법뿐이야.”
집사는 진지하게 걱정스러운 얼굴로 엄마를 다독였다.
“네.”
엄마는 무기력하게 대답했다.
“그래 자매님, 우린 일단 갈게. 애 잘 타이르고 저녁 기도에 봐.”
사람들이 모두 가고 나자 엄마는 조용히 문을 닫았다. 엄마는 손바닥으로 불탄 십자가의 거스름을 닦아내고는 다시 벽에 걸었다. 그리고 그 앞에 무릎을 꿇고 말했다.
“기도하자.”
“싫어!”
“좋은 말로 할 때 무릎 꿇고 회개해. 이 미친년아!”
나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엄마의 증오심으로 팽창된 싸늘한 눈빛이 무서웠다. 나는 숨도 쉬지 못하고 엄마의 곁에 무릎을 꿇었다. 엄마를 따라 회개 기도를 하는 동안 엄마의 목소리는 차츰 원래대로 돌아왔다. 엄마는 기도가 끝나자 핸드백과 성경책을 들고는 조용히 일어났다.
“목사님과 네 영혼에 달라붙은 사탄을 퇴치하는 방법을 의논해야겠어.”
엄마가 일어섰다. 아까 할머니처럼 두들겨 패 죽여! 그럼 되잖아. 의논은 무슨 의논? 이라는 말이 목구멍 끝에 달랑달랑 매달렸지만 나는 본심을 숨기고 착하게 말했다.
“엄마 나 옷 꺼내주고 가”
“무슨 옷?”
엄마가 빤히 봤다.
“밤에 잘 때 춥단 말이야. 솜 든 바지 꺼내줘. 나는 높은 데 있어서 못 꺼내.”
엄마는 인상을 쓰더니 성경책을 내려놓고는 창고로 갔다. 나는 밖에 서서 어두운 창고의 불을 켜고 옷을 꺼내기 위해 사다리로 올라가는 엄마를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창고 문을 재빨리 닫고 밖에서 잠금 버튼을 눌렀다. 창고는 엄마가 나를 가둬놓기 위해 문손잡이를 바꿔달아 둔 것이다. 엄마는 이 안에 나뿐만 아니라 사탄이 들었다는 아줌마 아저씨들을 가둬놓곤 했다.
“뭐 하는 짓이니. 문 열어라”
낮게 가라앉은 엄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처럼 겁에 질려 문을 두들기지도 않는 침착한 엄마가 밉다. 그렇다면…, 나는 두꺼비 집으로 달려가 전원을 내려버렸다.
“문 열어!”
머리가 쭈뼛하게 설 정도로 엄마가 크게 고함쳤다. 어릴 적에 교회에 가지 못하도록 광에 갇혔던 경험이 있어 폐쇄된 어둠을 무서워한다는 게 지금 막 떠올랐다. 엄마가 아이처럼 비명을 질러대는 꼴을 보니 그러지 않으려는 데도 자꾸 웃음이 흘렀다. 통쾌한 기분 비슷한 것이 느껴진다. 그 봐 어두운 곳에 혼자 갇히니까 무섭지? 내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좀 당해봐.
“문 열어! 문 안 열어?”
엄마는 문을 꽝 꽝 치며 발악했다. 나는 입을 꾹 닫고는 창고 문을 바라보는 자세로 침대에 누웠다. 문이 금방이도 부서져 열릴 듯 덜컹거렸다.
“은별아, 문 열어. 엄마 어두운 거 무서워.”
엄마가 발톱을 숨기고 금방 나긋해졌다. 목소리가 약간 떨리는 것 같았지만 또 다시 연기다. 그런다고 속을 줄 알아? 내일 까진 안 열어줄 거야. 엄마도 하루 밤이 지나면 문을 열어줬잖아. “우리 은별이 착하지? 문 열어줘”
나는 입을 꾹 닫고 침대에 웅크리고 누웠다.
-목사님과 네 몸에 달라붙은 사탄을 퇴치하는 방법을 의논해야겠어.
엄마가 하던 말이 떠올랐다. 만약 나를 그 할머니처럼 두들겨 패면 손톱으로 면상을 모조리 할퀴어 버리고 도망쳐야지. 그냥 당하고 있지만은 않을 거야.


다음날 아침, 엄마를 가둬놓은 채 학교로 걸어가는 동안 묘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무섭고 크게만 보이던 엄마.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을 것 같던 엄마를 간단하게 가뒀다니. 갑자기 세상이 만만하게 보이기 시작하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샘은 엄마보다 작다. 샘 정도야… 어깨가 우쭐해졌다. 이상하게도 강한 힘이 생기는 것 같아 학교까지 한달음에 달렸다. 정말 사탄이 내 몸에 들어온 것일까?
“모두들 오늘 면담에 부모님들 오시는 것 맞지? 변동 사항 있는 사람 손들어 봐.”
손을 들자, 선생님은 조금은 놀란 듯 한 얼굴로 나를 보더니 ‘알았다.’ 하고 짧게 대답했다. 왠지 선생님의 얼굴에서 이상한 징조가 느껴져 혹시 엄마를 창고에 가둔 나쁜 아이라는 걸 알아챈 게 아닌지 불안했다. 샘은 어제 그 사건 이후로 더 이상 나를 괴롭히진 않았지만 오늘따라 말을 거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게 이상했다. 집단 따돌림이 시작되려는 걸까. 이상한 열기와 증오의 눈초리가 등 뒤에서 느껴진다. 불안했다. 휙 돌아보면 시선들은 이미 숨고 없다. 모두 나를 피하고 있다. 어째서? 아침까지만 해도 힘이 솟았는데. 나는 주눅이 들었다. 나쁜 일이 일어날 것 같다는 예감이 들면서 온 몸과 행동이 위축되기 시작했다. 어디에든 숨고 싶었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복도로 나갈 때 공교롭게도 샘과 마주쳤다.
“넌 버려진 자식이야. 너네 엄만 너한테 관심도 없잖아. 학부모 면담에 안 오는 부모는 한명도 없다고, 도축장에서 일하는 탐 아빠도 그날만큼은 오는데.”
샘은 살짝 상체를 기울이고 속삭인 다음 복도 끝으로 줄행랑을 쳤다. 그리고 곧 바로 교장이 나를 호출하는 교내 방송이 들려왔다.
교장은 학적부를 뒤져 비상시 연락처로 전활 걸었다. 그리고 한참을 전화기를 든 채 기다렸다. 걸어보라지, 누가 전활 받는지. 엄만, 창고 속에 갇혀 어서 문을 열어달라고 하느님께 기도 중일걸. ‘주님께서 행하시는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단다.’ 나쁜 일이건 좋은 일이건 엄마는 모든 일들의 결과를 그 한마디로 일축해 버렸다.
규율 선생이 들어왔다. 나는 규율 선생의 손에 들려있는 책을 보며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내가 분노에 휩싸이거나 누군가를 죽이고 싶을 때마다 꺼내 읽는 살인백서였다. 샘이 일러바친 것이 틀림없었다. 규율 선생은 시선은 나를 불길한 무엇을 보듯 흘끗 보더니 교장의 귀에 뭔가를 소곤거렸다. 언뜻 ‘위험한 아이‘ 라는 말을 들은 것 같다. 교장은 “세상에!“ 라고 외치며 책을 펼쳤다. 책의 내용을 훑으며 페이지를 넘기던 교장은 새하얗게 질린 얼굴로 말했다.
“또다시 끔찍한 일이 일어날 뻔 했군요. 저 아이 칼 같은 것은 숨기고 다니지 않았나요? 가방 조사, 소지품 조사 했습니까?”
규율 선생이 고개를 끄덕이자 교장은 내게 질문했다.
“너희 집에 총 있니?”
나는 교장을 노려보며 입도 벙긋하지 않았다. 하느님이 알아서 해 줄 테니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책은 학교서 보관하고 있으마. 오늘은 이대로 집으로 가거라. 그리고 내일 부모님과 함께 학교로 등교해. 네 부모님이 전화를 받지 않으시는구나. 연락할 다른 번호는 없니?”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긴 네 부모가 오든 오지 않던 너는 무기정학이다. 너는 정말 위험한 아이야. 정학 처리된 동안에는 미국 내 어느 학교에도 갈수 없다. 경찰이 24시간 너를 지켜볼 것이고. 정신과 치료를 받도록 주선하마.”
공부만 잘하면 된다던 아빠 말도 다 거짓말이었고 하느님이 지켜준다는 말도 거짓말이었다. 이제 모든 것은 걷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그리고 싶은 데로 그림을 그렸을 뿐인데 악령이 깃들었다고 몰아대지를 않나 읽고 싶은 책을 읽었을 뿐인데 정신병원에 처넣겠다고 하질 않나. 내 힘으로는 도저히 이겨낼 수 없을 것 같았다. 교장 앞에서는 울지 않았다. 무서운 척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교장실 문을 열고 나서자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왔다.


부슬부슬 내리는 비를 맞으며 집으로 왔다. 부엌으로 들어서자 시커먼 바퀴벌레들이 아침에 만들어 둔 땅콩 샌드위치를 뜯어 먹다가 한꺼번에 도망쳤다. 엄마가 배가 고플 거야. 나도 그랬으니까. 새로 빵을 만들고 우유를 따듯하게 데워 설탕을 조금 넣고 옷 창고가 있는 방으로 갔다. 창고문은 아침과 다름없이 잠겨있었다.
“엄마, 배고프지?”
그렇게 말하고 나니 괜히 눈물이 났다. 나는 이제 어떻게 될 것인가. 학교 따위는 상관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엄마 없는 아이만큼은 되고 싶지 않다. 어찌되었건 엄마를 내게 돌아오도록 만들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이번엔 상자라도 만들어서 꼭 꼭 가둬버리고 휴대전화도 빼앗아 버려야지. 교회에 못 가게 가둬두면 엄마는 내 곁으로, 아빠 곁으로 돌아올 거야. 엄마를 용서해야 하는 건 하느님이 아니라 나야.
엄마는 여전히 대꾸하지 않았다. 화가 단단히 나 있는 것 같았다. 창고 문을 밀었다. 기대했던 엄마의 샤넬립스틱 향기 대신 기분 나쁜 나프탈렌 냄새가 난다. 가슴이 철렁했다. 안에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사라지고 없었다. 나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느끼며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창고로 들어갈 때 엄마의 왼팔에 걸려 대롱대던 핸드백이 떠오른다. 그 안에 있었을 휴대전화. 형언할 수 없는 배신감에 부르르 떨려왔다. 철저하게 버려졌다. 분노와 눈물에 사로잡힌 내 머릿속으로 온갖 단어들이 빙글빙글 돌았다. 엄마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지긋지긋해도 다시 돌아오겠지? 내가 없이는 송금도 오지 않을 테니까.
엄마에게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전화선은 그날 내가 잘라낸 그 모양 그대로 놓여있다. 나는 울면서 잘려나간 전화선을 연결해 보려고 했지만 어떻게 연결하는지 알 수 없었다.
늘 혼자 있었는데도 오늘밤은 왠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얼굴 없는 군인. 그날 놀이터에서 나는 얼굴 없는 군인의 얼굴을 봤다. 그래서 증거를 없애기 위해 여자 애 둘이 먼저 살해당한 것이고 이제 마지막 목격자인 내 차례다. 설명하려 했지만 엄마는 단 한 번도 내 말을 끝까지 들어준 적이 없었다. 아니 어쩌면 설명했다고 해도 하느님이 지켜주니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거야. 라고 했겠지. 왜 이렇게 가슴이 불쾌하게 뛰는 걸까. 조그만 소리에도 심장이 덜컹거린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무슨 일이 일어날 것 만 같다. 꼼짝도 할 수 없다. 갈증이 났지만 물을 마시러 부엌으로 가는 것조차 무섭다. 이럴 때면 읽던 살인백서도 학교에 빼앗겨 버렸다. 의지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누군가 좀 안아줬으면 좋겠다.
한국에 있는 할머니 생각이 난다. 언제나 무서워하면 꼭 안아줬는데. 달력에 적혀있는 긴 번호를 보다가 싹둑 잘려있는 전화선을 봤다. 절대로 다시 이어지지 않을 엄마와 나처럼 보였다. 전화선을 고치면 할머니에게 일러 바쳐야겠어. 엄마가 제일 무서워하는 사람은 할머니니까. 그때 일러바치지 않았다는 사실이 후회됐다. 지옥은 지금 이순간이 아닐까. 그때 거짓말을 해서 지옥에 빠진 것이다. 그때 문득 목덜미로 습기를 가득 머금은 찬바람이 일었다. 누군가 집안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나는 전화선을 꼭 움켜잡았다. 너무 무서워 돌아볼 수 없었다. 하얀 벽에 커다란 그림자가 비쳤다. 그림자는 얼굴 없는 군인을 닮아 있었다.
문 밖으로 사람들의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저벅 저벅 저벅. 한 두 명이 아닌 것 같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중에는 낯익은 목소리도 있었다. 나는 악령퇴치를 위해 교회 사람들을 끌고 오는 엄마의 곁으로 달려가 나란히 걸었다. 엄마는 내가 옆에 있다는 것을 눈치 채지 못했다. 살짝 손까지 잡았지만 그래도 전혀 알지 못했다. 이번엔 ‘저리 치워!’하고 뿌리치지 못하겠지?
“십자가를 태우다니. 그런 불경스러운 짓을 어떻게…….”
그렇게 말한 건 한 번도 보지 못한 여자다. 오늘 악령퇴치를 구경하기 위해 따라 온 것 같다.
“그 아인 그러고도 남을 아이에요. 저번에 구역예배 본다고 잠시 와 있었는데 그때 그 아이의 표독한 눈이랑 행동을 목사님께서 보셨어야 했어요.”
집사가 두 눈을 가느다랗게 뜨며 무서워죽을 뻔했다는 시늉을 했다. 표독한 내 눈이 얼마나 섬뜩했는지를 강조하고 싶은 거지. 오버하고 있네. ‘카아’ 하고 독을 내뿜는 고양이의 날카로운 이빨처럼 나는 새빨간 손톱을 바싹 도사렸다.
“자매님을 창고에 가뒀다는 게 정말이에요?”
엄마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걷고 있던 목사가 말했다.
“밤마다 얼굴 없는 군인이 죽이러 온다며 헛소리를 해댔어요.”
엄마의 마음속에 출렁이는 검은 바다가 보인다. 모든 걸 신에게 맡기고 매시매초 기도를 잊지 않는 엄마의 마음속에 빛 대신 검은 바다?
“어허 악령이 들어도 단단히 들었군요. 그 얼굴 없는 군인이 바로 사탄일 게야.”
목사가 그렇게 확신하는 동안 사람들은 문 앞에서 멈추었다. 엄마가 열쇠를 꺼내들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뉴스가 생각나네. 은별이 집엔 tv없다면서? 그러면 그 뉴스 못 들었겠네?”
“무슨 뉴스요?”
“은별 사는 아파트에서 혼자 집 보던 여자 애들 둘이 목 매달린 시체로 발견 되었데. 나도 언뜻 들어서 자세히는 몰라.”
“세상에 그런 일이 한둘인가요. 종말이 오고 있는 거죠. 살고 죽는 건 모두 하느님 뜻이죠. 뭐.”
그래. 나는 사악한 미소를 짓는다. 하느님 뜻이야. 잠금 장치가 열렸다. 들어와. 들어와 보라고. 진짜 하느님 뜻이 뭔지 보여줄게. 살며시 문이 열렸다. 눅눅한 빗물로 가득 찬바람이 툭 터지듯 밀려든다. 비 소리가 더욱 세게 들려왔다. 은밀한 의식을 치룰 검은 무리들은 문을 닫고 이중 삼중으로 달려있는 잠금 쇠를 단단히 걸어 잠갔다.
나는 흰자위를 치켜뜨고 엄마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체가 벗겨진 채 나뭇가지에 목이 매달려 살해된 소녀들처럼 두 손과 두 발을 축 늘어뜨린 내 몸은, 바닥에서 50센티미터 정도 되는 허공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고 내 목을 칭칭 감고 있는 것은 절단된 빨간색 전화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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