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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꺼꾸로 가는 여행 [미국/장은아] 꺼꾸로 가는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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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202회 작성일 10-04-26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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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꾸로 가는 여행

하얗게 성에가 앉은 겨울 유리창에 나의 따뜻한 둘째 손가락을 꼬옥 눌러서 딱 그 손가락의 온기만큼 녹아 난 유리창을 통해 들여다보는 것과 같은, 창호 문에 침을 묻혀 포옥 뚫어 놓고 그 작은 구멍을 통해 내다본 바깥 풍경과 같은, 둘러서 돌아보면 뒤란으로 통하는 좁다란 뒷벽도 보일테고 왼쪽으로 붙어 있던 넓은 문을 가진 부엌도 보일 터인데 창호 구멍에서는 툇마루와 빈 마당만 보이는 것과 같은. 내 어린 기억들은 그런 식이다. 더 높이도 아니고 더 넓게도 아니고 꼭 내 눈높이 만큼, 꼭 내가 둘러보았던 그 넓이 만큼만 떠오르는 것, 더 아슴아슴 그리운 게 어린 기억이 아닐까거꾸로 가는 여행

연탄재의 추억
서울서 태어났지만 곧 공무원이었던 아버지의 발령지인 양평으로 이사와 그 곳에서 5살 정도까지 자라났다. 그 덕분에 짧지만 어느 정도 시골다운 환경 속에서 자랄 수 있는 행운을 맛볼 수 있었다. 기억을 더듬어 보자면 언덕배기 맨 꼭대기의 가정집에 부식거리나 주전부리거리를 늘어 놓고 팔았던 구멍가게는 아니었지만 구멍가게의 역할을 하던 용기 오빠네 집이 있었고 그 언덕 양쪽으로 쭉 단층 아파트가 늘어서 있었고 우리집은 맨 아래 석 교장 할아버지 댁 아랫채였다. 석 교장 할아버지에 대해서는 잘 생각나는 게 없지만 마당에 있던 우물가에서 틀니를 닦아서는 호물호물한 입매로 싱긋이 웃으며 그 틀니를 내 눈앞에서 통째로 꿀꺽꿀꺽 삼켜 버리는 것으로 나를 놀라게 하던 안채 할머니의 생각은 어렴풋하다. 내가 깜짝 놀라는 모습에 그 할머니는 더 웃었던 것 같다. 그 때의 내가 너무 어렸던 탓에 생생히 기억나질 않는 것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렇기 때문에 더욱 꿈결같이 아름답게 기억되는 동네이다. 노상 지나다녔을 성싶은 흙길도 그 양쪽에 펼쳐졌을 한가롭고 정감 있는 마을 풍경은 하나도 떠오르질 않고 길가 풀섶에 돋아나 있던 우산풀, 햇살이 비쳐 노오랗게 눈이 부시던 이름 모를 풀꽃들만 떠오른다. 노오란 풀꽃 줄기에서 잎을 따 내면 하얗게 진물이 나오던 것이 어찌나 신기하던지. 하얀 액체를 매니큐어처럼 손톱 끝에 바르고 놀았는데 요즘 여름이면 유행하는 French Nail을 나는 30년도 더 전에 이미 하고 다녔던 것이다. 녹이 슨 가시 철조망을 따라 걸었던 것이 설핏 떠오르는 걸 보면 그 길을 따라 왼쪽으로 밭이 있었던 것도 같고, 어쩌다 고개를 쭉 빼어 들면 머얼리 산자락 밑에 바라다보이던 꿈같이 짙은 남보랏빛으로 꽉 차 있던 그 꽃밭은 누군가 꽃을 재배하던 것인지? 아니면 내 상상력이 그려 낸 풍경인지.
두 살 터울로 여동생이 하나 있었고 내가 5살 되던 해에 그 곳에서 막내 남동생도 태어나 어느 새 동생을 둘씩이나 둔 언니가 되고 보니 제법 맏이 티가 났던지 나는 가끔 어른들의 심부름을 다녀오기도 했던 것 같다. 내가 늘 진주 할아버지라고 부르던 할아버지 친구분 댁엘 가끔 다녀오는 것과 같은 제법 먼 거리(?) 심부름도 간혹 했던 기억이 있다. 내가 네 증조 할아버지다라고 나를 놀리셨던 모양인데 난 늘 그 분을 진주 할아버지라고 불렀다. 진주 할아버지는 우리 외할아버지의 친구분이기도 했고 동시에 석 교장 할아버지의 친구분이기도 했다. 어쩌다 다니러 오셨던 외할아버지의 심부름이었던지 아니면 석 교장 할아버지의 심부름이었던지 아무튼 나는 가끔 진주 할아버지를 모셔 오라는 심부름을 하곤 했다. 야트막한 산자락 앞으로 밭이 좀 있었던가 싶고 그 길을 따라 걷다가 왼쪽으로 살짝 모롱이 돌아 내려가면 다리를 심하게 절던 아줌마네 구멍가게가 오른편에 있었다. 그 곳을 지나고도 얼마쯤 더 가서 오른쪽으로 꺾어 논길 밭길 사이로 들어가면 진주 할아버지가 사시는 커다란 기와집이 있는 아랫마을을 만났다. 혹시 그 곳이 윗마을이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상관없는 일이다. 내가 꿈꾸는 내 기억으로는 거기가 분명 아랫마을이니까. 그 집 대청 앞에 서서 진주 할아버지 하고 목청껏 부르면 진주 할머니가 달려 나오든지 진주 할아버지가 달려 나오든지 나를 반겨 맞아 주시곤 했다. 그 무렵 나는 예뻐지는 일에 꽤 관심이 많았던 모양이다. 하얗게 타 버리고 남은 연탄재를 볼 때마다 예사로 보이질 않았다. 그것이 혹시나 우리 엄마 화장대에 놓여 있던 분갑 속의 뽀오얗고 냄새 좋은 분가루의 원자재가 아닐까 싶었던 때문이다.
진주 할아버지 댁으로 가는 좁다란 길은 중간에 움푹 패어진 곳이 있었는데 겨울이면 사람들은 거기에다 연탄재를 내다 버렸다. 움푹 패어진 길을 폴짝 뛰어넘을 때마다 나는 그 연탄재에 묘한 유혹을 느끼곤 했다. 아마 아니겠지. 연탄재로 분가루를 만들 수 있다면 왜 어른들이 연탄재를 곱게 부수어서 분가루로 쓰지 않겠는가. 고개를 저으며 애써 부정하려고 하여도 그 길을 지날 때마다 어쩌면! 하는 마음이 또 냉큼 고개를 빼밀었다. 어쩌면 저 연탄재가 분을 만드는 재료가 된다는 사실을 어른들은 모를지도 몰라. 혹시 또 화장품 회사 아저씨들만 그 사실을 아는 것일지도 모르지. 그도 저도 아니라면 연탄재가 분가루의 원료가 맞긴 맞아도 어떻게 만드는지를 몰라서 그냥 내다 버리는지도 몰랐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연탄재에게 정말로 얼굴을 하얗고 예쁘게 만드는 효과가 있는지 확인해 보기로 결심했다. 폴짝 뛰어넘으려다가 먼저 주위를 살펴서 아무도 나를 보는 사람이 없다는 것을 확인을 한 뒤 길 아래로 버려져 있는 연탄재 중에 제일 하얗고 잘 타고 난 재를 골라 두 손으로 쓱쓱 문질러 댄 다음 나의 양 뺨에 고르게 살살 펴 발랐다. 손바닥을 툭툭 털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다시 길 위로 올라와서 폴짝 걸음으로 진주 할아버지 댁으로 달려갔다. 나는 그 대청 마루 앞에 서서 목소리를 가다듬고 큰 소리로 진주 할아버지이, 진주 할머니를 외쳐 불렀다. 그러자 곧 왼편으로 있던 방 안에서 할머니가 달려 나오시며 아이구 우리 은아가 왔구나아 어서 오너라, 이쁘기도 하지. 하시는 게 아닌가.
아! 역시 연탄재였어! 그 때의 그 벅찬 감격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진주 할아버지, 할머니에게 예쁘게 보이기 위해 그 후로도 몇 번을 더 그렇게 연탄재를 발랐던 것 같다. 그 후 도시로 이사를 나오고 새 환경에 적응하게 되면서 연탄재는 어느 새 나도 모르는 새에 잊혀져 갔다.
딱 그 때의 내 나이만큼 먹은 내 딸 Angela는 매주 수요일마다 모이는 목장 모임(교회의 구역 모임 같은 모임)이 있는 날이면 물 묻혀서 머리를 새로 빗고 예쁜 드레스로 갖춰 입은 다음 빵모자를 머리에 살짝 얹고 장난감 통을 뒤져 찾아 낸 핸드백을 어깨에 매고 허리를 반듯하게 핀 자세로 현관 앞에 서 있다가 시간이 되어서 장로님들이나 집사님들이 들어서면 그런 모습으로 최대한 예쁘게 인사를 한다. 간혹 선글라스를 쓰고 있을 때도 있고 장식용으로 놓여 있는 조화를 한 송이 떼어다가 머리에 큼지막히 달고 서서 마치 북한의 유치원 어린이와 같은 모습으로 서 있기도 한다. 제 나름대로 예쁘게 보이려고 최선을 다 해 멋을 부리는 것이다. 아유 Angela가 예쁘게 하고 있구나. 하고 칭찬이라도 들으면 더욱 우쭐이다. 나는 그런 나의 딸의 모습을 보면서 잊혀졌던 연탄재의 추억을 떠올리게 되는 것이다.
아이는 아이라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예쁘고 사랑스럽다는 것을 아직 내 딸 Angela는 알지 못한다. 이 다음에 나의 딸 Angela가 지금의 내 나이가 되었을 때는 어떤 색깔, 어떤 모습으로 지금 이 순간을 회상할까. 그저 그런 생각만으로도 내 입엔 배시시 미소가 열린다.


또 다른 세상
막내 남동생이 태어나고 만 다섯 살이 되던 무렵에 나는 새로운 장난에 재미를 들이고 있었다. 그것은 아침에 잠에서 깨어나게 되면 제일 먼저 벽지의 연속으로 늘어져 있는 무늬를 살피는 것이었다. 밤새 조금이라도 변한 곳이 있는지 없는지. 모두가 잠이 들고 아무도 보지 않는 밤이 되면 벽지의 연속 무늬들이 살아 움직여서 살금살금 조금씩 눈에 뜨이지 않을 만큼씩 자리를 옮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다. 후에 몇 살 더 먹어 배우게 된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에서 술래가 알지 못하게 살짝살짝 아주 조금씩 옮기는 걸음처럼. 한 번도 무늬가 변해진 것을 발견한 적은 없었다. 내가 확인할 때마다 모두 정확하게 무늬들은 제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그 변해진 모양이 너무나 교묘히 위장되어 있어서 찾을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고 또 어쩌면 내가 눈을 뜨는 것과 동시에 재빨리 너무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아 돌아갔기 때문에 내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궁리를 해 낸 것은 거꾸로 내가 그 벽지의 연속 무늬들을 속여 보기로 한 것이었다. 아직 잠에서 깨어나지 않은 척 시침을 떼고 실눈을 뜨고 한번 살펴 보자는 것이었다. 아침이 되어서 잠에서 깨어나도 나는 아직 깨어나지 않은 듯 눈을 감고 있었다. 음냐음냐 자는 시늉까지 해 가면서. 그러나 나는 아무도 모르게 실눈을 뜨고 벽지를 살피고 있었다. 착시 현상이었을까, 단순하면서도 동시에 또 복잡하게 연속으로 열을 지어 있는 무늬 중 한 녀석이 내가 자신을 살피고 있는 줄도 모르고 조금씩조금씩 쪼르르르 걸음을 옮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이 때다! 싶어 눈을 크게 떠 보면 방금 전까지도 쪼르르 몸을 움직이던 그 녀석은 어느새 멈추어 꼼짝하지 않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멈추어 다른 무늬들과 나란히 서서 위장을 하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순식간에 본래의 자기 자리를 찾아 돌아가 있는 것인지 알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여전히 벽지 무늬가 달라져 있는 것은 찾아 내지를 못했다.
한낮이 되어 밖에 나가 놀다가도 문득 빈 방 안에서 제 세상이다 싶게 돌아다닐 벽지 무늬가 떠오르면 후다닥 집으로 달려와 벌컥 느닷없이 방문을 열어 그 녀석들을 놀라게 했다. 나의 급습에 놀라서 허둥지둥 몸을 숨겼을 그 녀석, 가쁜 숨을 할딱거리며 친구들 사이에 위장을 한 채 끼어 서 있을 그 녀석, 그 녀석을 생각하며 요 녀석일까, 아니면 조 녀석일까 벽지의 무늬들을 하나씩 손가락으로 짚어 보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나 때문에 당황을 했을 그 녀석 생각에 쾌재의 웃음을 웃기도 했었다.
나의 그런 장난은 내가 다 큰 다음에도 가끔씩 계속 되었다. 방안으로 들어가기 전 잠깐 문 밖에서 숨을 죽인 채 섰다가 느닷없이 문을 활딱 열어 젖히면 미처 제자리로 도망치지 못한 패잔병들처럼 제자리를 찾지 못한 장난감들이나 사물들을 발견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묘한 기대감 때문이었다. 중학교에 다니던 어느 날엔가는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집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그들의 허를 찔러 보기로 했다. 이번에는 방문이 아닌 창문 틈으로 방 안을 엿보다가 느닷없이 창문을 열어 젖히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방 안에서 움직이고 있던 사물들이 예상 밖의 창문 공격으로 인해 당황을 해서 우왕좌왕하다가 길을 잃을 수도 있다고 생각을 한 것이다. 그래서 창문 밖에서 숨을 죽이고 서 있다가 살그머니 문 틈으로 방 안의 동정을 살핀 다음 후다닥 창문을 열어 젖히며 동시에 창문으로 뛰어올라 창문을 뛰어넘어 방 안으로 들어가 본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움직이는 사물들을 발견하지 못했었다. 후에 내가 낳은 나의 아이들과 함께 Toy Story라는 애니메이션 영화를 보게 되었는데 사람들이 보지 않을 때 모두 살아 움직이면서 사람과 똑같이 감정을 가지고 있고 사람과 똑같이 생각이 있는 그 장난감들을 보면서 나는 깔깔 웃으며 그 때를 떠올렸다.


거듭되는 실패, 그러나 나는 여전히 도전한다
무엇이든지 될 듯 될 듯하면서 되질 않는 그것이 더 해 내고야 말겠다는 도전의식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도시로 이사 나오고 아직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이었으니까 6살쯤 되었던 것 같다. 그 때 우리 고모네 집은 이문동에 있었다. 나는 고모네 집이 고문동이 아니고 이문동이라는 게 참 이상하게 생각했었다. 고모네 집은 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대문보다 아래에 있는 마당으로 두어 계단 내려서게 되어 있었다. 어린 나에게는 그 계단이 한달음에 올라서기에는 조금 힘겨운 높이였다. 사촌 언니와 오빠가 모두 학교에 가고 나서 심심해진 나는 내 나름대로 내 도전의 목표를 정했는데 그것은 바로 그 층계에서 뛰어내리기였던 것이다. 처음에는 첫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것조차 쉽지 않았으나 어느 날부터인가는 첫 번째 계단에서 하낫, 둘, 셋! 하고 폴짝 뛰어내리면 거뜬하게 성공을 하게 되었다. 기쁨도 잠시 나는 금세 다음 목표를 정했는데 그것은 두 번째 계단에서도 거뜬하게 뛰어내려 보리라 하는 것이었다. 한 칸, 한 칸 비장한 마음으로 계단 꼭대기까지(꼭대기라고 해 봐야 두 칸 밖에 없는 계단이었지만) 올라서서 심호흡을 한 다음 헛! 하고 뛰어내렸는데 콩! 고꾸라져서 턱밑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버리고 말았다. 한동안은 턱밑의 아픔 때문에 멍이 가실 때까지 뛰어내리기 시도는 못했지만 오기가 난 나는 계단을 지나칠 때마다 꼭 뛰어내려 보이고 말 것이라고 되뇌었다.
나는 조용하고 내성적인 성격이었기 때문에 아무도 내가 그렇게 무모한 도전을 하리라고 생각을 하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고모는 동네 아주머니들하고 가끔 심심풀이 화투를 했었는데 늘 나를 보고 하는 말이 애가 어찌나 얌전하고 조용한지 화투를 몇 판이나 치고 있어도 앉혀 놓은 그 자리에 꼼짝도 않고 그냥 있다니까. 하는 것이었다. 고모 말대로 나는 앉혀 놓은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어른들은 내가 겉보기에는 조용하고 말이 없었지만 끝없이 무엇인가를 상상하고 끝없이 무엇엔가 도전을 해 보려는 마음이 꿈틀대고 있는 것은 보지 못했던 것이다. 고모가 화투를 몇 판이나 치고 동전을 몇 번이나 잃었다 땄다 하는 그 동안에 나는 그저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이 아니라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아름다운 공주님과 왕자님의 사랑 얘기를 완성하였고, 내일은 그 계단에서 꼭 성공적으로 뛰어내려 보리라 마음을 다지면서 어떻게 하면 성공할 수 있을까 작전을 구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도 저도 싫증이 날 때 즈음에는 방바닥에 떨어져 있는 실 꼬무라기를 주워서 손가락을 코바늘 삼아 뜨개질을 했었다. 그러니 고모가 화투를 몇 판이나 치고 있는 그 동안에도 나는 하나도 지루하지 않게 앉혀 놓은 그 자리에 그대로 그림같이 앉아 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멍이 가실 때 즈음에는 나는 다시 계단 뛰어내리기를 시도해 보았다. 그러나 할 때마다 여지없이 실패를 했고 그 덕분에 내 턱은 시퍼렇게 멍이 들고 말았다. 동네 어른들은 내가 대문에서 들어오다가 어린아이의 다리로 내려오기가 쉽지 않은 높이의 계단이라 내가 발을 헛딛기 때문이라고 짐작을 하셨다. 그러나 턱밑이 시퍼렇게 멍이 들은 내가 다음에 꼭 성공하고 말리라 두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을 그 누가 알았으랴. 몇 번 그렇게 턱밑에 멍이 들고 나면 엄마가 와서 나를 다시 우리 집으로 데리고 갔었다. 그러면 나는 다음 번 방문을 기약하며 이문동 고모네 집을 떠나 왔었다. 그 후에 두 번째 계단에서 뛰어내리는 것을 성공했었는지 아니면 결국 성공하지 못했었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러나 끊임없이 그것에 도전을 했었다는 것은 생생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그 시도에 대해서는 후회하지 않는다.
나의 두 번째 도전은 줄넘기였다. 그것은 내가 삼송리에서 초등학교 일 학년이 되고 나서의 일이다. 그 때에는 아직 총각이었던 우리 막내 외삼촌하고 함께 살고 있었는데 삼촌은 손재주가 기가 막히게 좋아서 뭐든지 뚝딱뚝딱 잘 만들어 냈었다. 한번은 내 여름방학 공작 숙제로 실제 우리가 살고 있는 진짜 우리집하고 똑같이 생긴 집 모양 저금통을 합판으로 만들어 주어서 나를 깜짝 놀라게 했던 적도 있었다. 엄마랑 동생들은 낮잠을 자고 있었고 나는 낮잠에서 일찍 깨어나 혼자 무슨 놀이인가를 하다가 진력이 나서 새로운 놀잇감이 없을까 집안을 살피던 중에 삼촌이 쓰고 남은 전깃줄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 전깃줄은 길이가 딱 내 양 팔을 벌려 놓은 그만큼이었다. 그 길이는 줄넘기 하기에는 좀 부족한 길이였다. 그러나 그렇게 때문에 나는 더 강렬하게 도전하고 싶은 생각이 났을지도 모른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하낫, 둘, 셋! 하고 휙 줄을 돌리며 뛰어넘었다. 그러나 내 발이 전깃줄에 걸려서 꽈당 하고 마당에 고꾸라져 버렸다. 역시 줄이 너무 짧았던 것이다. 몇 번을 시도해도 마찬가지로 고꾸라질 뿐으로 매번 코만 까졌던 것이다.
오늘은 실패야. 하지만 내일 또 해 볼 거야. 나는 그 전깃줄을 누가 버릴까 싶어 아무도 찾지 못할 구석에 잘 숨겨 둔 뒤에 어떻게 하면 성공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고 또 생각을 했다.
줄을 돌릴 때 내 몸을 공처럼 동글려야 해. 그리고 동시에 발은 할 수 있는 한 엉덩이에 바짝 붙여대야 하지. 전깃줄이 짧으니 반대로 팔은 최대한 길게 늘이고.
그 전략에 따라 시도하고 실패하고 또 시도하고 또 실패하고. 그렇게 시도하고 실패하기를 거듭하다가 드디어 성공을 해 냈을 때 나는 그 전깃줄을 과감하게 버렸다. 그리고 그 성공의 기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었다. 짧은 전깃줄로 줄넘기하기를 성공했다고 해서 내 인생이 크게 달라진 것도 없고, 누가 그 성공에 대해 인터뷰하자고 달려들은 일도 없다. 그저 내가 도전하고 싶어 도전했고 또 그것에 성공을 해서 그 기쁨을 누리는 작은 행복을 맛보는 것밖에는.


초등학교 6학년 때에 나에게 새로운 도전 상대가 나타났다. 그것은 학교 운동장에 있는 철봉을 정육면체 도형을 여러 개 쌓아 놓은 모양으로 생긴 정글짐이라는 놀이기구였는데 면은 없고 철봉으로 만들어진 모서리만 있어서 우리가 그 위로 사다리처럼 타고 올라갈 수도 있고 또 사이를 미로를 찾아 나가듯 사이사이 빠져 나갈 수도 있게 만들어진 놀이기구였다. 정글짐은 맨 밑에는 땅 위에 넓게 펼쳐져 있지만 위로 올라갈수록 그 넓이는 좁아져서 제일 꼭대기에는 정육면체 딱 한 개만 있다. 내가 도전하려고 했던 것은 정글짐에서 뛰어내리기였다. 처음에는 그리 높지 않은 높이에서 시작해서 한 칸, 한 칸 점점 그 높이를 더 해서 맨 나중에는 최고 정상에 우뚝 솟아 있는 꼭대기 칸에서 뛰어내려 보겠다는 것이었다. 학교에서 수업이 모두 끝나고 나면 나는 교문을 나서기 전에 꼭 한번 정글짐에서 목표한 높이에서 뛰어내렸다. 한 칸씩 그 높이를 더해 가면서 나는 어렵지 않게 그 일을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맨 꼭대기의 그 마지막 한 칸은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심호흡을 크게 하고 으랏챠 뛰어내리면 착지할 때 내가 균형을 잃고 마는지 나의 몸무게가 한쪽으로 쏠리는 것 같은 느낌이었는데 그것은 오른쪽이거나 왼쪽의 발뒤꿈치로 가는 것이었다. 분명히 발 뒤꿈치는 땅에 대지를 않은 것 같은데 항상 발뒤꿈치에 엄청난 통증을 느끼게 되고 한동안 뒤꿈치가 붓고 아파서 운동화를 제대로 신을 수가 없게 되는 것이었다.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면 위험한 장난을 한다고 꾸중을 들을 것이 분명하므로 나는 나의 그 도전을 비밀에 부칠 수밖에 없었다. 뒤꿈치가 아파도 아픈 티도 내지 못하고 다만 발뒤꿈치의 붓기가 가실 때까지는 운동화를 제대로 신을 수가 없으니 신발 뒤축을 꺾어 신고 다닐 수밖에. 신발을 똑바로 신지 않는다고 가끔 야단은 맞았지만 그래도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결국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나는 거듭되는 실패만 맛보았을 뿐 성공을 하지 못했었다. 후에 나이가 들어 내가 두 아이의 엄마가 되고 난 후 역시 아이 엄마가 되어 있는 내 여동생과 그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는데 내 동생 또한 그 무렵 나와 똑같이 그 무모한 비밀 도전을 거듭했었고 또 나와 똑같이 그렇게 뒤꿈치가 아파서 고생을 했었다는 얘기를 듣고 그만 깜짝 놀라고 기막혀서 한참을 함께 웃었다. 형제는 그렇게 닮는 것인가 보다.
요즈음 나의 도전 상대는 무엇인가? 안 통하는 영어지만 열심히 노력하면서 동료들과 당당히 어깨를 겨누려는 것인가! 무엇을 하든 나는 최선을 다 해 노력할 것이다. 그리고 후에 내가 더 나이가 들어 지금을 돌이켜볼 때 흐뭇한 미소로 돌아볼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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