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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뉴욕 겨울 산의 단상 [미국/방인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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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610회 작성일 10-04-26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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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방인숙] 뉴욕 겨울 산의 단상

산은 사람에게 기를 주지만, 바다는 기를 뺏어 간다는 말을 들었다. 반추해 보니 바다를 보고 왔던 날은, 자석처럼 딸려온 끈적끈적한 습기와 노곤함으로 절여진 배추였었다. 반면에 산행을 했던 날은, 다리는 땡길망정 머리는 명징해서 별이 초롱초롱 떠 있었다. 몸도 갓뽑은 초록빛 무청처럼 쌩쌩했다. 자연히 바다보다 산을 즐겨 찾게 됐다.뉴욕 겨울 산의 단상


뉴욕 근교에 있는 산들은 낮지는 않아도 험준한 산세가 아니다. 경사가 완만한 구릉들이 다정하게 어깨를 겯고 있는, 순하고 살가운 자태다. 바위들도 뾰족한 성상이 아니라서 오르는데 부담이 없다. 생초보 등산가인 내겐 안성맞춤이다. 무엇보다 마음이 사로잡힌 건, 자연의 눈과 마음으로 마련된 자연친화적인 등산로였다.
처음엔 등산객이 적어서 무심히 방치해 둔 산인 줄로 알았다. 길을 잃기 딱 좋네 하면서 주위를 살피니까, 10m 정도의 간격으로 나무나 바위에다, 빨강이나 노랑, 파랑, 흰색으로 네모지게 페인트칠을 해 놓은 게 있다. 꼭 축구경기 때 주심이 꺼내드는 반칙카드 같다. 흰색에 빨강 점이 찍힌 건 일장기가 떠올라 기분이 영 별로다. 그렇게 활쏘기 과녁 같은 것이, 바로 길 안내 표시였다. 등산객은 그 날 선택한 코스의 색깔만 따라가면 되는 거였다.
어떤 산에는 옆 산과 앞, 뒷산이 악수하고 있는 형상이라, 등산로를 여러 개씩 품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차로에 있는 나무나 바위는, 옐로 카드에다 레드 카드까지 받고는 울상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막막해서 두리번거릴 때, 어김없이 등댓불마냥 손짓하고 있는 직사각형 딱지가 친구처럼 반갑다. 너무 원색적이라 유치하고 튀어 보이지만, 사람에게 보물찾기를 시키는 숨겨진 재미를 감추고 있다. 같은 색의 카드를 두 개씩 그려 놓은 건 커브 길임을 암시해 준다.
그토록 세심하고 친절하게 안내 표적을 부착해 놓고도, 정작 산행로는 왜 정비를 안 했을까? 의아심이 들었다. 그런데 계속 그 표적만 추적하다 보니 이상하게도 수월히 걸어졌다. 그제서야 걷고 있는 그 길이, 바로 예비해 둔 등산로라는 걸 눈치챘다. 콘크리트와 시멘트 한 줌, 철근 한 가닥 없다. 태고의 산 그대로 존재하듯이, 자잘한 바위와 돌, 고목의 부러진 가지와 흙이 자연스럽고 사이좋게 어우러져 있다. 발이 디뎌지기 편해서 발걸음의 흔적이 쌓이게끔. 그러하니까 자연이 스스로 빚어 놓은 길인 양 있는 듯 없는 듯, 그야말로 길 없는 길이라, 산이 한결 손때가 덜 타 보였다.
어떤 산엔 누워 있는 아름드리 고사목 가운데에다, 벤치 대용으로 네모반듯하게 홈을 파 놓기도 했다. 정상 가까이 대피소 하나만 있다. 산 아래 주변과 파킹 장에도 화장실만 있지, 식당이나 기념품점도 없다. 그런데 한국에 있는 산들은 자연 생태계를 무시한 채, 인간을 우선시한 인공구조물로 몸살을 앓는다. 조악하게 설치된 철 계단, 쇠 난간과 콘크리트, 벤치, 케이블 카 등이 자연의 숨통을 조르는 듯해 눈에 거슬렸다.
중국의 5대 명산에 낀다는 황산과 4대 불교 성지 중의 하나라는 구화산에 가 봤더니, 그 빼어난 산들이 한국 산보다 훼손이 더 심했다. 산한테 외경심이 없는 오만한 간섭은 절대 금물인데, 차라리 없느니만도 못했다. 과유불급이었다. 정상에 못 가 보고 구석구석 안 봐도, 다리품이 더 들고 허기가 져도, 자연 그대로 둘 일이었다. 산의 넉넉한 품에 동화되는 첩경은, 거만한 이방인 같은 태도를 버리는 거다. 철저하게 땀 흘리는 수고를 해야 한다.
지난 일요일 겨울산을 방문했다. 겨울 바다같이 고즈넉한 적막강산인 줄 알았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산은 따스한 숨결들을 간직하고 있는, 살아 있는 생명체라고 말하고 있었다.
우선 각양각색의 인간들처럼 자태가 제가끔 다른 나목들이 있었다. 짐을 내려 놓으면 홀가분할 줄 알고 다 벗었겠지만, 너무 추워 보여 벌쓰는 것 같다. 내 마음까지 시려온다. 그래도 바람을 만난 까만 가지들이 수런수런 얘기를 쏟아 내자, 못 이기는 척 빙긋이 웃고는 있다.
아스라한 꼭대기쯤에는, 무성한 잎들 속에 꼭꼭 숨어만 있던 새집들이, 하늘을 열고 open house 한다며 집 자랑을 하고 있다. 앙증맞기 그지없다. 세상에서 가장 엉성하고 초라해 보이지만, 그 이상 아늑하고 따뜻한 집도 없을 것 같다. 허지만 지붕도 열어제친 이 겨울엔, 눈비를 어쩔꼬 싶어 연민이 솟는다. 그러하여도 두 마리가 머리를 맞대며 사랑으로 서로를 감싸 줄 테니, 충분히 견딜 만도 하겠다. 나도 모르게 잔잔한 미소가 피어난다. 산책을 나왔는지, 나이팅게일보다도 작은 새가 가지에 앉더니, 도라지꽃씨 같은 눈을 깜빡거리다가 포르르 선유했다.
햇살이 피해 간 잔설 위에다 사슴이 화석처럼 발자국 도장을 찍어 놨고, 솔개는 상형문자를 새겨 놓았다. 지금은 어디선가 숨어서들 나를 주시하고 있을 거였다.
그런데다가 며칠 전에 왔던 폭설과 그 동안 쏟아졌던 겨울 장대비로, 온산은 물, 물, 물이었다. 사막이 아름다운 건, 우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라고 어린 왕자는 말했는데, 산이 아름다운 것도 물이 숨어 있기 때문이었다. 가을에 왔을 땐, 겸손하고 얌전해서 물이 시냇물처럼 흐르던 산골짜기였었다. 지금은 한겨울인데도, 댐의 수문이라도 열린 듯한 엄청난 수량과 급류로 인해, 곳곳에 작은 폭포와 소가 만들어졌다. 계곡을 따라 걷는데 물의 합창 소리가 어찌나 산을 흔드는지, 아찔해서 오싹할 지경이었다. 고국에서 친숙했던, 다소곳하고 아기자기한 새색시 계곡이 아니라 이질감이 들었다. 마리린 몬로가 주연하고 불렀던 돌아오지 않는 강의 격류가 떠오르면서 주제가가 흥얼거려졌다.
잔설이 계속 녹고 있는 데다 어제는 온종일 비까지 왔었다. 거기다 빗물에 질린 낙엽들까지 물을 도로 뱉어 내는 바람에, 길 없는 길도 푹 젖었다. 산길을 에우르듯이 생겨난 작은 골, 들마다 물이 포화 상태라 징검돌 신세를 져야 했다. 어떤 징검돌은 거북이처럼 물 속으로 엎드린 바람에 발이 젖기도 했다.
죽어 있는 줄로만 여겼던 겨울산은, 그렇게 생생하고 풍성하게 살아 있었다.
지난번 가을 산행 때는, 너무나 화려해서 슬퍼 보이기까지 하던 단풍잎들이 낙엽비가 되어 날렸었다. 도토리들도 결실의 축제가 한창이었었다. 그런데 어느 새, 은빛 분칠을 하고 토토톡 떨어지던 연연둣빛의 도토리들이, 짙은 갈색의 무생물로 변신해 있다. 그 찬란하던 오색의 단풍잎들도, 모두가 똑같은 흙색으로 퇴색되어 참담하게 죽어 있다. 거의가 다 익사 상태라 측은지심이 더 든다. 그렇게 무표정한 퇴적물로 쌓여 있다가, 결국은 흙으로 돌아가리라.
인간의 인생길이랑 똑같다. 각자가 걸어왔던 삶의 빛깔과 양태는 달랐어도, 종착역에 이르면 저 낙엽들모양 모두 닮은꼴이 되어, 속절없이 흙으로 돌아가고 만다.
마음이 착잡해져서 무연하게 나무에 눈길이 갔다. 생의 미련 때문에 마음의 정리가 아직도 안 끝났는지, 가랑잎 몇 개가 새가 되어 아둥바둥 매달려 있다. 당장이라도 한 줄기 바람결에,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질 걸, 아는지 모르는지.
죽음의 선고를 받은 인간의 비통함이 연상되어, 마음이 저려온다. 생자 필멸하는 자연의 섭리와 인간의 허망한 삶이 겹쳐진다. 생과 사()가 저리도 찰나적인데 싶다.
최정자 시인의 시 가랑잎이 떠올라 가만히 낭송해 본다.
꽃을 위해 태어났다고 하면 / 안 되지요 / 열매를 위해 살았다고 하면 / 안 되지요 / 생명을 위해서나 / 죽음을 위해서나 / 치열하게 매달렸다가 / 냉혈하게 놓았을 뿐이지요.
산자락의 양달에다 자리를 잡고 앉았다. 뒤엔 인수봉같이 생긴 큰 바위가 바람막이가 돼 준다고 병풍처럼 옆으로 누워 있다. 오른편에 준수한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딱 영화 모정의 그 언덕의 그 정감 있는 모양새다. 나이테가 늘수록 의젓해지고 기품이 풍기듯이, 너도 헛나이만 먹지 말고 나이 값을 하라고 일깨워 준다.
어디선지 낯설고 특이한 냄새가, 솔바람에 실려와 자꾸만 코끝을 감돈다. 주위를 둘러보니 바로 뒤에, 반지르르 윤기가 나는 초콜릿 빛깔의 사슴 똥이 소담스럽게 쌓여 있다. 처음 보는 사람은 비타민인 줄 알겠다. 옆엔 까만 콩자반 같은 새끼 사슴 똥이 소복하다. 사슴 가족이 해바라기 하고 노니는 놀이터인가 보다. 영물인 사슴들은 기가 충만한 곳만 찾아 머문다고 한다. 제대로 명당에다 자리를 잡았다 싶어, 더럽다는 느낌은커녕 마냥 흐뭇하기만 하다.
사슴 똥을 코앞에다 모셔 놓은 채 명상을 했다. 떡국을 끓여 먹고 녹차도 마셨다. 기이하게도 하나도 역하지 않다. 오히려 이제껏 먹어 본 떡국 중에서 제일 맛있고 녹차는 더욱 향긋했다. 만약 인가 옆의 사슴 목장이나 동물원에 있는 사슴 똥이었다면, 충분히 비위가 상하고도 남을 냄새인데 하는 순간, 문득 깨달아졌다.
아! 그렇구나! 산 속에선 사슴 똥마저, 청정한 산의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구나. 나무, 흙, 바위, 바람과 조화를 이뤄 자연과 완전 동화됐구나. 냄새마저도 달콤한 자연의 향기에 녹아들었고. 그럼 이 순간에 내 탁한 냄새도 사슴 똥처럼 자연 속으로 융화될 수 있을까? 언감생심이다. 속진들이 쌓여 추하고 추한 내가, 어떻게 사슴처럼 맑고 순수한 영혼으로 돌아가기를 꿈꾸겠는가? 잠시나마 깨끗이 열린 눈과 마음으로, 자연의 오묘한 섭리와 신성함을 엿보고 깨우친 것만으로도 감사하고 만족할 일이다.
루소가 왜 자연으로 돌아가라고 했겠는가? 인간이 자연과 일치될 때만, 지고지순하고 맑아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가급적 자연의 품에 자주 안겨서 때묻은 몸과 맘을 자꾸자꾸 닦아 내다 보면, 좀 순화될까? 그렇게 해도 욕심 많은 속물인 나는, 안 될 것을 안다.
하산길은 다른 색깔의 카드를 잡았다. 우묵하게 패여 있는 산마루마다, 나무가 있는 섬까지 갖춘 미니 호수로 변했다. 낮은 산골들마다 웅덩이를 품고 있다. 작은 물 옹당이들은 떠 있거나 잠수해 있는 낙엽들로 꽉 차 있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단순하게, 눈에 투영되는 대로 그윽하게 물 속을 응시했다. 명상할 때 가로막는 잡념처럼 굳이 부정하려고도 하지 말고, 시선을 어지럽히는 낙엽들까지 물의 한부분으로 느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물 밑엔 딴 세상이 그림처럼 펼쳐졌다. 고적하고 순일한 자태로 서 있는 새까만 나목들, 청아하고 투명한 깊고도 깊은 청자빛 하늘, 순연하고 순백한 백자빛의 구름들까지 존재해 있다. 어찌나 미적이고 정적이고 적요한지, 넋 놓고 서서 한참을 들여다보았다.
그래! 눈을 현혹하는 저 낙엽들에 연연하지 않아야, 그 밑에 숨어 있는 맑은 세계가 보인다. 그렇듯 가식과 탐욕, 물욕을 제거한 다음에야,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심연의 자의식까지 정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것이다. 고백하지만 나는 이기와 타산으로만 뒤엉킨 속내를, 교묘하게 위장하고 감춰 왔다. 스스로에게마저도 합리적이었다며 변명하고, 안도하면서 살아왔다. 인생을 가장무도회하는 것같이.
아무리 자연 속에 쌓여서 좋은 기를 받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가 되어, 티없이 순전한 물 밑 세계를 구경했으면 뭐하나! 어차피 산을 내려가면, 다시금 분수처럼 분출되는 욕심 앞에서, 속수무책일 것이다. 속물로 돌아가서는 시침 뚝 떼고 살 것이 뻔하다.
이 검고 교만한 마음과 아만, 명리만 좇으려 하는 자세론, 다 소용없는 일이다. 소 귀에 경 읽기 아니겠는가.
부끄럽다. 무욕의 삶을 살지 못해서.
아! 어렵다. 정말! 참인간으로서 살아가기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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