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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수필 : 재즈 아리랑 : 윤종범(미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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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599회 작성일 10-04-26 23: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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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 아리랑

대상│윤종범(미국)


그때를 회상하면 언제나 그때처럼 두근거리는 가슴과 함께 님 생각이 난다. 위기에 처한 나를 구하기 위해 수만 리 태평양을 단숨에 건너온 님.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흙 내음을 맡은 곳, 나의 앙증맞은 두 발을 처음으로 내 디딘 곳. 나의 유년과 청년 시절을 몽땅 간직하고 있는 바로 나의 고국이다.


 


일 년 후면 내 나이가 오십이 되는 어느 여름날이었다. 저녁 식사를 끝내고 여느 때처럼 집을 나서는 아내와 나는 가벼운 운동복 차림이었다. 서쪽 하늘에 붉으스레 수를 놓고 있는 노을은 걷고 있는 내 몸이 빨려 들어갈 듯 아름다웠다. 살아 있음에 행복할 수 있음은 저처럼 아름다운 노을을 내 작은 눈에 담을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동네 한가운데 만들어진 여인의 부드러운 허리를 닮은 S자 형태의 호수를 산보하기 시작한 것이 한 두어 달 되고 있었다. 한 바퀴 돌면 대략 이십 분이 걸리는 호수를 두 바퀴로 늘린 것은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매주 토요일마다 아내의 몸이 올라서는 체중계가 보여주는 눈금에 잔뜩 재미를 붙이고 있던 아내가 호수를 따라 걷기 시작한 지 한 달이 지났을 즈음 “이제부터 두 바퀴 어때?” 했었다. 그런다고 체중계 눈금이 두 배 속도로 후진하는 것은 아닐 텐데 두 바퀴를 제안하는 아내의 목소리가 내게는 그런 소리로 들려와 아무 불평 없이 그때부터 나는 아내와 두 바퀴를 돌고 있었다. 잡고 있는 아내의 손에 땀이 나는 듯 촉촉해 지는 것은 늘 두 바퀴가 끝날 무렵이었다.


한 바퀴를 돌고 두 바퀴 째를 막 시작하려고 할 때였다. 기승을 부리던 여름 더위는 한풀 꺾여 제법 시원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산보 길에서 가끔씩 만나는, 이름이 ‘에드’인 앞집 남자가 하얀 털이 온 몸을 풍성히 덮은 푸들을 끌고 호숫길로 들어섰다. 나란히 걷고 있던 아내와 나를 보고 그는 반가운 표정으로 다가와 말을 걸어 왔다. 살랑대는 푸들의 꼬리가 내 다리를 간질여 아내 곁으로 조금 비켜서며 한참동안 오고 갔던 그와의 대화 속에서, 그가 세상을 떠난 자기 아버지 얘기를 꺼낸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기억에 없지만 내 뇌수에 박힌 것은 에드 아버지의 불행이었다.


“제 아버지의 불행은 은퇴하고서 부터 시작되었죠. 별달리 취미도 없으셨던 분이라 은퇴 후 소일할 거리가 마땅치 않았어요. 따분하게 집에서만 맴도는 일상생활에서 행복할 순 없었겠죠. 그게 단명의 원인이 됐을 겁니다. 오죽했으면 은퇴는 최대한 늦게 하라고 돌아가시기 전 저에게 유언처럼 말씀하였겠어요.”


은퇴로 이어지는 선이 그리 길게 남지 않았음을 느낀 것은 바로 그때였다. 산보를 끝내고 집으로 돌아온 나는 사뭇 심각해져 있었다. 에드 아버지의 불행이 나에게 충격을 준 것은 사실이었지만 나를 심각하게 만든 것은 은퇴가 그리 멀지 않은, 일 년 후면 벌써 오십이 되는 내 나이였다. 하루 빨리 무슨 대책을 세우지 않으면 머리가 허예진 나에게도 불행이 덮칠 것 같았다. 할 일 없이 집에서만 빈둥대는 처량한 할아버지 신세는 상상만으로도 끔찍스러웠다. 그래서 내 자신에게 던진, 늙어서 뭐 할 거니? 라는 물음에 아, 다행히도 쏜살같이 다가오는 대답이 하나 있었다. 바로 재즈 바이올리니스트였다.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만 앉아 있는 컴퓨터 프로그래머가 나의 직업이다. 조그만 대학교 연구소에서의 여덟 시간 일이 부족했는지 집에 돌아와서도 컴퓨터 앞에 앉아 있기가 일쑤인 나였다. 피곤해진 눈 생각을 해서라도 그만 들여다보라는 아내의 애정 어린 핀잔이 내 귀에 닿으면 그제야 모니터 앞을 슬그머니 떠났으니 거실의 피아노 위에 올려  놓은 바이올린은 먼지만 잔뜩 덮어 쓰고 있기가 십상이었다. 게다가 머리 굳고 손도 굳은 후에야 처음으로 바이올린을 목에 걸었다. 남 앞에 나서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다. 반짝 반짝 작은 별 수준은 벗어났지만 모차르트나 사라사테의 곡을 연습할라치면 내 손가락은 어느새 꼬이기 시작하고 멀쩡하던 손에서는 쥐가 나려는지 손가락이 뻣뻣해지기까지 한다. 이 정도면 재즈 바이올리니스트라는 대답은 쉽게 풀어지지 않는 미스터리에 속할 만하다. 원숭이에게 사람으로 변하는 재주를 피워 보라는 식으로 터무니없기도 하다. 그래도 굳이 대답의 이유를 밝혀 보자면 노후대책의 물음에서 내가 무게를 둔 것이, 보잘것없던 바이올린 수준이 아니라 은퇴하기 전 까지 창창히 남은 미래의 시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군말 없이 잘 다니고 있는 지금의 직장에 발길을 뚝 끊는 것은 앞으로 십 년 후의 일이나 될 것이고, 십 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강산도 변하는 그 십년 동안 내 바이올린 수준이 높은 산봉우리를 넘지 말란 법 또한 없는 것이다. 실로 내가 그 변화에 잔뜩 기대를 걸고 있었음이라. 게다가 클래식이 아닌 재즈가 아닌가. 바이올린이 재즈 세계에선 상당한 희소가치가 있을 거라는 것이, 복잡한 컴퓨터 코드로 이십 년간 다져진 내 머리에서 쉽게 계산이 되었던 것이다.


신나게 불어대는 트럼펫, 섹소폰 소리와 전자 기타, 피아노 소리에 익숙해져 있는 재즈 애호가들의 귀에, 흔치않은 재즈 바이올린 소리는 오랜 가뭄 뒤에 뿌려지는 비의 소리일 것이다. 단비 같을 바이올린 소리. 그것이 내가 계산한 희소가치였고, 그 희소가치까지 가미된 재즈 바이올리니스트는 마치 내가 오랫동안 가슴에 품어왔던 미래의 꿈처럼 나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모니터에 바짝 눈을 붙이고 들여다 본 음악대학의 웹 사이트에는 다행히 ‘재즈 입문’이 가을학기에 개설되어 있었다. 강의 시간 또한 절묘했다. 마치 나를 위해 짜여진 듯 점심시간에 식당 대신 강의실을 찾아 가면 될 것이었다. 그러나 나는 마냥 흐뭇해 할 수만은 없었다. 다음날 아침, 서둘러 음대에 전화를 걸었던 것은 음대 강의를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내가 과연 음대 과목을 수강할 자격이 있는지가 의문스러웠기 때문이었다. 수화기에서 흘러나오는 약간 쉰 듯한 그러나 상냥한 목소리는 오디션을 통과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고, 오디션 날짜와 더불어 지정곡까지 친절히 알려 줄 때는 나의 가슴이 그만 철렁 내려앉고 말았다. 불과 일 주일 밖에 남지 않은 오디션이었다. 내 기억엔 그 일주일은 하얀 밤들이다. 컴퓨터는 간데없고 바이올린만 붙잡고 지새운 하얀 밤들이었다.


음대 건물로 들어서고 있는 나의 심정은 긴장을 넘어 비장했다. 총 대신 바이올린을 든 전사였다고나 할까. 그러나 한편으로는 재즈라는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에 마음이 설레어 바이올린을 든 내 손에 가벼운 전율마저 일었다.


나에게 G장조 스케일과 지정곡을 연주해 보라고 주문하는 교수 앞에서 치러진 오디션에서 나는 흡족한 미소를 지을 수 있었다. 오디션의 좋은 결과는 어찌 보면 하얗게 지샌 밤들 덕분이 아니라 협박처럼 들렸을지도 모를 애원조의 내 목소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 강의를 수강하지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마치 생을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는 어조로 한숨까지 푹푹 내 쉬는 나를, 교수는 아마도 길거리에서 손 내미는 걸인처럼 측은하게 여겼으리라. 나보다 나이가 서넛 젊어 보이는 교수는 내가 어렸을 때 동전 한 닢으로 자주 드나들던 구멍가게  주인아저씨처럼 마음이 후덕해 보였다. 한번 열심히 해 보라는 격려까지 아끼지 않던 교수였다.


 


음대 강의실의 특이함은 어느 정도 예상했지만 강의실을 들어서면서 부터 한 눈에 들어오는 대형 오선지 같은 칠판은 뜻밖이었다. 그러나 금세 고개가 끄덕여 졌다. 음악의 언어인 음을 표시하는 데는 오선이 필수지 않는가. 강의를 하면서 칠판에 일일이 오선을 그어야 하는 시간은 사실 낭비인 것이다. 오선지 칠판으로 그 시간 낭비를 덜은 셈이다.


책상 또한 전혀 찾아 볼 수 없는 강의실이었다. 가운데가 텅 비워진 채 의자들만이 서로 마주보며 둥글게 원을 그리고 있었다. 칠판 바로 앞에는 드럼 한 대가 학처럼 긴 다리를 세우며 외롭게 서 있었고 칠판 앞 오른쪽 구석에 놓여 있는 그랜드 피아노는 칠판을 지키는 파수꾼처럼 늠름했다.


강의실로 들어서는 학생들의 눈부신 젊음은,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던 나의 흰 머리카락을 더욱 돋보이게 만들었다. 눈에 돋보인 것은 유독 내 흰 머리카락뿐이 아니었다. 트럼펫과 섹소폰 그리고 전자 기타는 여러 학생들 손에 잡혀 있었지만 나만이 홀로 바이올린이었다. 재즈에서 바이올린의 희소가치에 대한 나의 계산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이론과 연주가 함께 병행되는 강의에서 이론은 별로 어렵게 느껴지지 않았다. 선정된 연주곡 역시 음표들이 단순하게 그려져 있어 일단 안심이 되었다. 그러나 그 안심이, 쉽게 생각한 재즈에 대한 나의 결례였음을 알아차리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자, 이제 앉은 순서대로 돌아가며 연주를 해 봅시다.”


이론을 끝낸 교수가 드럼으로 박자를 치기 시작했다. 곧 이어지는 기타 반주에 따라 교수에게서 가장 왼쪽에 앉은 학생부터 연주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악보 따라 연주하는 것이 아닌 즉흥 연주였다. 재즈의 심장이 즉흥이니까 즉흥적으로 연주를 하는 것이 당연한 것이었지만 나는 그 당연한 것을 불행히도 그때껏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내 귀에 들려오는 소리는 모두가 초보와는 거리가 멀고도 먼 전문가들 소리였다. 사실 나는 입문이라고 해서 용기를 내었던 것인데 학생들의 재즈 연주 실력은 대부분이 프로에 가까 왔다. 나중에 알아 버린 사실이지만 재즈바에서 아르바이트로 연주를 하는 학생도 있었다. 자기 차례가 돌아 올 때마다 학생들은 애타게 기다린 연인이라도 돌아온 듯 섹소폰과 트럼펫을 미친 듯이 불어 대고 전자 기타를 떡 주무르듯 했다. 그 속에서 나의 바이올린은 수줍은 색시였다. 고개조차 제대로 들지 못하고 얼굴 붉히며 내 무릎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한껏 흥이 돋은 강의실 분위기는 즉흥 연주는 고사하고 언제 연주를 시작해야 하는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나를 수천 길 낭떠러지로 몰고 있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되는 즉흥연주 속에서 그들이 어디쯤 가고 있는지 나는 도통 알 길이 없었다. 내 옆 자리의 학생이 몸까지 흔들어 가며 섹소폰을 불기 시작했을 때 내 가슴은 바람에 심하게 떠는 창호지였다. 박자에 맞춰 발을 까닥거리고 머리를 흔들기 시작한 것은 떨려 오는 가슴을 어떻게든 진정시켜 보려는 나의 처절한 몸부림이었다. 남들이 보면 강의실에서 제일 흥겨워하는 사람이 바로 나인 줄로 착각했으리라. 박자 따라 흔들리는 내 머리가 가져다주는 것이 흥겨움이 아닌 두통이었음을 남들은 결코 알 리 없었다.


얼마가 지났을까. 강의실은 기타 반주와 교수의 드럼 치는 소리만 들릴 뿐이었다. 아무 생각 없던 내 머리는 여전히 아무 생각 없이 흔들리고 있었고 내 귓가는 트럼펫 소리의 여운이 남아 윙윙 거렸다.


내 머리를 멈추게 한 것은 느닷없이 나를 향한 교수의 드럼채였다. 나의 눈을 찔러 오는 교수의 드럼채는 나에게 보낸 출발 신호였다. 화들짝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며 흔들던 머리를 멈추고 턱 밑으로 바이올린을 서둘러 집어넣었다. 그리고 악보에 적힌 암호처럼 난해한 재즈 코드를 응시했을 때는 밀려오는 파도처럼 현기증이 몰려왔다.


제 때 시작을 놓친 터라 언제 시작하나 모든 학생들의 눈이 나를 향하고 있었다. 그 맑고 호기심 어린 눈들에게 악보를 그대로 베끼는 연주로 실망을 안겨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상황이 급박하다 해도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즉흥 연주가 갑자기 나에게서 툭 튀어 나올 수는 없는 법이다. 거의 울상이 되어 버린 나에게 하늘은 무심히도 내려앉고 있었다. 그러나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때 내가 찾아낸 구멍이 바로 ‘아리랑’이었다.


사천 만 한국인이 애창하고 있는 아리랑이 내 바이올린에서 조용히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강의실에서 연주하던 곡의 분위기가 아리랑과 비슷하다고 느꼈기 때문인데 지금 그때를 생각하면 연주곡 분위기가 아리랑과 흡사했던 것이 아니라, 오갈 데 없이 궁지로 몰린 애처로운 내 처지가, 떠난 임을 그리워하는 아리랑 곡의 애처로움과 닮아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강의실에는 다행히도 나만이 유일하게 콧등이 약간 가라앉고 눈이 가늘게 째진 한국인이었다.
아리랑이 그들에게 색다른 재즈풍으로 다가갔던 것일까. 단조롭게 시작했던 교수의 드럼채엔 제법 흥이 붙어 있었고 학생들의 몸도 이리 저리 흔들리며 박자를 타고 있었다. 아리랑에 도취한 듯 지그시 눈을 감은 학생도 눈에 들어왔다.


교수와 학생들의 예상치 않은 반응에 내가 힘을 얻었던 것일까, 아니면 죽기 살기로 내가 용기를 냈던 것일까. 나는 아리랑에 엇박자를 넣고 있었다. 소위 말하는 스윙으로 재즈 흉내를 어설프게 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설프긴 해도 위기에 몰린 나를 구하기에는 충분한 아리랑이었다. 나만의 재즈 아리랑이었다.


아, 그리고 그때, 엇박자를 넣고 있던 나는 알 수 있었다. 아리랑에 재즈의 기본만을 설 입힌 나의 재즈 아리랑은, 내 한 몸이 온전히 용해될 수 없는 미국 사회에서 살아가고 있는 바로 나 자신이었음을. 점심 식사 때는 빵에 버터를 발라 먹지만 진정 나의 배를 충족 시켜주는 것은 저녁 식사 때의 김치와 밥이었음을. 그랬다. 비록 어설프고 못난 재즈 아리랑이었지만 그것은 고국의 따뜻한 품속이 아닌 황량한 바람 이는 타국에서 살아가는, 내가 사랑할 수밖에 없는 바로 나 자신이었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임은. 어느새 아리랑은 클라이맥스로 치닫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가슴 졸이며 앉아 있던 가엾은 중년은 간데  없고 대신 가슴을 활짝 편 중년이 강의실에 앉아 있었다.


바이올린을 높이 치켜 올렸다. 치켜 올라간 바이올린에서 흘러나오는 힘찬 재즈 아리랑을 따라 한 마리 봉황이 하늘을 차고 올랐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위기에 처한 나를 향해 아리랑 손길을 뻗어준 나의 님에게, 비록 보잘 것 없지만 힘찬 재즈 아리랑으로 보답하는 나 자신이, 예전에도 그랬듯이 앞으로도 님을 버리지 않아 발병 나는 일은 절대로 없을 것임을 확신하는 나의 몸 떨림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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