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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바나나 연가 [미국/이경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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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5,639회 작성일 10-04-26 14: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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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경난] 바나나 연가

요즘 나에게 작은 가슴앓이가 하나 생겼다. 십 년 전, 엄마가 서울에 다녀오시면서 이모네 집의 뜰에 피어 있던 분꽃과 봉숭아꽃의 씨를 받아 갖고 오셨다. 고이고이 몇 겹의 종이에 싸서 가져오신 그 씨앗을 엄마는 우리집 화단에 정성껏 심으셨다. 봉숭아가 잘 자라 꽃을 피우면 그 꽃잎을 따서 미국인 외손주들의 손톱에 곱게 물을 들여 주고 싶으셨던 게다. 꿈에 부푼 엄마는 매일매일 화단에 물을 주시며 싹이 트기를 고대하셨다. 그러나 아쉽게도 봉숭아는 자라지 못하였다. 기후의 탓인지 토지의 탓인지는 몰라도 기다리던 봉숭아 꽃잎은 그 해도 그 다음 해도 영영 그 모습을 내어놓지 않았다. 바나나 연가



빠알간 봉숭아 물을 들여 주려고 벼르던 손주들의 고사리 같던 손가락은 이제 우악하고 뻣뻣한 틴에이저들의 것이 되어 버렸고 화단 속에 묻혀진 봉숭아 꽃씨는 세월 따라 차츰 우리 모두의 기억에서 지워져 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해 갑자기 우리집 화단에 분홍색을 띤 꽃들이 피기 시작했다. 봉숭아와 함께 심겨졌던 분꽃이었다. 땅 속에 묻힌 지 몇 년째인지 기억해 내기도 알쏭달쏭할 무렵 분꽃은 저 혼자 유유히 피어나더니 한여름 내내 탐스러운 꽃을 피워 내었다.


서울에서 태어나 대도시 로스앤젤레스에서 잔뼈가 굵은 나는 화초류와는 전혀 궁합이 맞지를 않았다. 화단에 심는 꽃이건 집안에 들여 놓는 화분이건 할 것 없이 우리 집에만 들여왔다 하면 족족이 죽어 나가곤 했다. 애 둘을 낳아 키우고 게다가 하루 종일 컹컹거리는 네 마리의 개까지도 집안에서 키우는 여자가 어째서 소리없이 가만히 한 군데 앉아 있는 화초를 죽이느냐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화초를 가꾸는 데에도 애정이 필요한 것이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아항! 바로 그것이야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하는데 정말 나는 화초류에 대한 관심도 부족하고 애정이란 더더욱 없는 사람이란 사실을 인정한다.


그렇게 안주인의 무관심 속에서 방치된 작은 화단 속에서 분꽃은 저 스스로 제 마음이 내키는 해마다 찾아와 피고 지고를 반복해 왔다. 사막의 더위를 연상케 하는 무지막지한 뙤약볕이 기승을 부리는 해에도 분꽃은 날 보라고 시위라도 하듯 도도하게 피어 제 수명을 채우고 지곤 했다. 무심한 안주인으로부터 비료 따위의 호사스러운 양식일랑은 바라지도 않는다는 듯이 분꽃의 줄기는 그렇게 저 혼자서 우리 집 화단에 마실 왔다가 쉬어 가곤 했다.


며칠 전, 최근에 한식구가 된 강아지를 데리고 집 밖에서 용변보기를 가르치고 있는데 잡초밭으로 변해 버린 화단이 눈에 거슬려 아들애에게 잡초 좀 뽑으라고 시켰더니 제 어미만큼이나 화초류에 문외한인 녀석은 꽃 줄기인지 잡초 줄기인지도 분별하지 않고 모조리 뽑아 놓고 말았다. 그런데 무성했던 잡초들이 뽑혀 나가고 울퉁불퉁 표면이 파헤쳐진 화단의 검은 속살을 보니 뜬금없이 뇌리에서 잊혀져 가고 있던 분꽃 생각이 문득 난 것이다.


이젠 다시 분꽃이 찾아와 주질 않으려나. 단 한 번도 기다려 본 적이 없는 분꽃의 방문임에도 마음 한 구석에 싸아 하니 밀려오는 허전함이 있었으니 그것은 과연 무엇이었을까.


머나먼 한국 땅에서부터 옮겨와져서는 낯선 이국 땅에 심겨져야 했던 작은 씨앗들. 이 곳의 흙과 물과 바람과 햇볕에 익숙해지기 위해 소리 없는 진통을 겪었을 씨앗들. 그리고 드디어 새로운 세계와 융화되어 싹을 트고 꽃을 피운 장한 씨앗들. 지난 몇 해를 무심하게 보아 왔던 분꽃의 송이송이는 어쩌면 나의 작은 화단에 찾아와 조용히 머무르며 나 같은 1.5세들의 연가를 불러 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미국이란 대륙의 낯선 땅덩어리에 모종된 작은 새싹들. 거친 자갈밭이나 메마른 모래밭에서 새 삶의 지혜와 요령을 터득했어야 했던 여린 잎새들. 그렇게 너와 내가 비바람을 이겨 냈고 한여름 강한 햇볕 아래에서도 이렇게 꿋꿋하게 꽃을 피우고 푸른 잎을 성장시키지 않았느냐며 분꽃은 나에게 그윽한 찬미가를 불러 주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재미교포 1.5세,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아직 미성년자일 때 미국으로 건너와 이 곳의 풍속과 문화에 접붙임당해 이 곳에서 잔뼈가 굵고 이 곳의 사고방식으로 나의 골수를 살찌운 일명 바나나 여성이다. 겉모습은 변함없는 황색 인종일지언정 속에 들은 사고방식은 백인들과 같다 하여 바나나라는 닉네임이 붙여진 동양계 미국인이다. 그러나 많은 바나나들이 그렇듯이 나에게도 지난 삼십 년의 미국 생활은 모국과 현재의 내 삶이 속해 있는 미국 문화사이의 줄타기 곡예와도 흡사했다. 타국이란 곳에서 철이 들어간다는 것은 일찍부터 자신의 정체성 찾기에 대한 방황과 고뇌를 거듭해야 하는 특이한 어려움이 따른다고 하지만 많은 이들이 상상하듯 우리의 성장기가 결코 불우하고 어둡지만은 않았다. 대부분의 1.5세들은 어느 면으로 보나 잃은 것보다도 얻은 것이 더 많은 축복받은 세대라고 자부심을 보이는 밝고 건강한 사고를 가진 코리언아메리칸이다.


미국인 남편과 가정을 이룬 나의 바나나의 양면성으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입는 사람들은 아마도 우리 가족들일 것이다. 우리나라 말로는 나와 같이 타인종과 결혼을 하는 사람들을 보고 흔히 국제결혼을 했다고 하는데 나는 내가 만약 한국인과 결혼을 했더라면 그것이 더 확실한 국제결혼이었을 거라고 정정을 해 주어야 할 때가 자주 있다. 그만큼 나는 더 이상 순수 토종 한국인이 아닌 새 문화가 키워낸 바나나이기 때문이다.


어쩌다 내가 미국인 남편의 아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한국 사람들이 제일 많이 물어오는 질문 중의 하나가, 도대체 무얼 먹고 사느냐이다. 남편이 김치를 먹는 사람인지, 한국 음식은 해 먹고 사는지 등등 미국식의 정서 기준으로 보아 극히 개인적이다 싶으리만한 질문 공세를 자주 받는 편이다.


약 오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딸아이가 초등학교 5학년이 된 해의 일이다.
딸아이에게 새 친구가 생겼다. 오하이오 주에서 이사 온 가족의 같은 학년의 여자 아이였다.
알리사라는 이름의 이 아이도 역시 한국계 엄마에 백인 아빠를 가진 예쁜 아이였다.
둘은 금세 친해져서 방과후에도 우리 집이나 그 아이 집에서 함께 공부하고 놀다가 저녁까지 먹고 가곤 하였다.
그 날도 방과후 알리사가 우리 집에서 놀다가 저녁을 먹고 가는 날이었다.
저녁준비를 무얼 할까 망설이다 딸아이를 불러 물었다.
얘, 어제 알리사네 집에서 저녁 뭘 먹었니?
그 집에서 다른 것을 먹었다고 하면 나는 피자를 전화로 배달 주문할 속셈이었다.
음 어제 알리사네 집에서 아! 생각났다. 부부기.
부부기?
예스, 부부기.
그렇게 대답한 딸아이는 오늘 저녁 메뉴가 무엇이냐고 묻고는 피자를 주문할 것이라는 답에 흡족해 하며 친구가 기다리고 있는 제 방으로 깡총거리며 되돌아갔다.
부부기가 어떤 음식일까 궁금하기도 했지만 우선은 저녁 메뉴 문제가 해결되었기에 별다른 생각없이 지나치고 서둘러 피자를 주문했다.


피자가 배달되어 모두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으면서도 한시도 쉬지 않고 조잘대는 두 소녀 아이들을 흐뭇한 기분으로 바라보다 문득 부부기라는 음식이 궁금해졌다.
얘, 아까 네가 알리사네 집에서 먹은 음식 이름이 뭐라고 했지?
딸아이는 냅킨으로 입 주위를 닦으면서 오물거리며 말했다.
부부기.
나는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그 요리가 어느 나라 음식일까 생각하며 또 한번 물었다.
맛있디, 그 부부기?
고개를 끄덕이는 딸아이. 그 때 알리사가 말했다.
울 엄마는 한국 음식 잘 만들어요.
!?
그럼 부부기가 한국 음식이란 말인가? 1.5세로서의 약점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때 나타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흔히 먹는 것이 아니면 아무리 한국 음식이라도 외국 음식이나 다름없이 생소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런 이름의 한국 음식은 없다고 자신 있게 부정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알리사의 엄마는 한국말조차 못하는 2세인데도 불구하고 나도 모르는 한국 음식을 할 줄 안다니 신기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이 자존심 상하는(?) 상황을 좀더 깊이 캐어 보고 싶어졌다.
분명히 요리 이름이 부부기라구? 난 그런 이름 들어 본 적 없는데.
그러자 딸아이는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문스런 표정을 지었다.
마미, 지난 주에도 우리 먹었잖아. 얇게 썬 쇠고기 양념해서.
나는 그제서야 이 아이들이 틀린 발음으로 불고기를 말하는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웃음이 나왔다.
아~ 불고기!
그제서야 아이들의 발음을 고쳐 주며 생각했다. 앞으로도 한국음식의 제 이름을 아이들에게 가르쳐 주자. 내가 잘 아는 주위의 일본계 미국인 3,4세들은 일본어도 물론 못하며 일본인들과 아무런 동일감도 느끼지 못하지만 일본 음식만은 제 나라 말로, 제 발음으로 부를 줄 안다. 알리사의 외할머니께서도 자식들에게 한국어는 가르치시지 않으셨지만 한국 음식의 요리법과 그 이름은 가르치신 것이다.


나는 어쩌다 아이들에게 한국 음식을 해 먹일 때에도 요리의 이름을 가르쳐 준 기억이 없었다. 물론 아이들이 아직 어려 저희들이 먹는 음식이 어느 나라 것인지도 관심없이 그저 주는 대로 먹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아이들이 커 가며 조금씩 관심을 보이기 시작하는 요즈음은 나도 좀더 신경을 써서 가르치기 시작했다.
이건, 장조림.
창죠딤!
떡국
터쿠!


한동안 알리사가 우리 집에 놀러오는 날이 뜸해졌던 어느 날 나는 소파에서 독서를 하고 있는 딸 곁에 다가앉아 말을 걸었다.
알리사보구 놀러 오라 구해. 부부기 해 줄게.
나는 짓궂게 일부러 틀린 발음을 하며 딸의 표정을 살폈다. 하지만 딸아인 그저 아무 생각 없이 건성 고개를 끄덕인다. 좀더 놀려 주고 싶은 생각에 딸의 옆에 바싹 다가앉아 물었다.
부부기, 너 아직두 좋아하지?
그제서야 딸은 놀림당하고 있음을 눈치채곤 웃으며 날 떠밀며 외쳤다.
푸코키, 푸코키, 푸코키!
언어에 유난히 소질이 있는 딸아이에게도 한국어는 발음하기가 역시 어려운 것이었다.


제 누나보다도 훨씬 동양적인 외모를 타고난 아들녀석은 아예 한국어로 말을 걸어오는 사람들도 자주 접한다. 유난히 마음이 여리고 심성이 고운 그 녀석을 데리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던 어느 해 여름, 녀석은 서울로 향하는 비행기 안에서 내내 미안합니다, 한국말을 못합니다.라는 문장을 서툰 발음으로 자꾸자꾸 연습하고 있었다.


그 해 7월 말, 한 차례 홍수의 난리가 지나간 서울은 무더운 날씨가 계속되는 나날이었다. 뙤악볕이 살인적인 대낮인데도 녀석은 나의 옛친구의 아들아이와 함께 생전 처음 들어보는 희귀한 소리를 내는 매미를 잡으러 매미채를 손에 들고 온 아파트 단지를 헤매고 다녔다.
자꾸만 저를 형이라고 부르며 쫓아다니는 새 친구에게 내 이름은 히영이 아니라 패트릭이야.라고 몇 번이고 친절하게 가르쳐 주는 등 미소를 짓게 하는 에피소드를 만들어 가며 말이 안 통하는 두 꼬마 친구는 땀을 뻘뻘 흘리며 붙어 다녔다.


소음과 공해 속에도 살아남는 악착 같은 매미가 눈이 멀지 않은 이상 그 어수룩한 두 아이의 손에 잡혀줄 리 만무였고 번번이 허탕을 치고 들어오는 아들녀석이 안쓰러우면서도 미국에서는 해 볼 수 없는 매미잡이가 남길 추억의 고운 빛깔을 생각하며 흐뭇한 마음이 되곤 했다.


하루는 기차를 타고 지방에 갔다가 그 곳에서 엄청 큰 메뚜기 한 마리를 잡아올 수 있었다. 처음에는 머뭇거리던 제 누이가 메뚜기 한 마리를 덥석 맨손으로 잡자 녀석도 용기가 났는지 잠자리며 메뚜기 할 것 없이 보는 대로 정신없이 쫓아다니더니 얻은 수확이었다. 결국 우리는 다른 곤충들은 다 날려보내 주고 가장 큰 메뚜기 한 마리만 노오란 플라스틱 벌레통에 넣어 우리가 머물고 있던 언니네 집으로 모셔오게 되었다.
그 날부터 녀석의 메뚜기 봉양은 시작되었다. 녀석은 매일 아침저녁으로 아파트 앞의 작은 산에 가서 연한 풀을 뜯어다 먹이고 벌레통 속에 넣어 준 작은 접시에 담은 물도 매일 갈아 주었다. 어찌나 먹성이 좋은 메뚜기였는지 통 안에 넣어 주는 풀은 족족이 다 먹어치우고는 열심히 똥도 싸서 매일 벌레통 밑에 깔아 준 신문지 마저 갈아주어야 했다. 그래도 녀석은 불평 한 마디 않고, 신기한 듯 정성을 다해 메뚜기를 돌봐 주었다.


우리가 서울을 뜨는 날이었다.


공항으로 떠나기 전 우리는 메뚜기를 아파트 앞에 있는 산에 놓아 주기로 했다. 녀석은 서운함이 가득한 표정으로, 제가 혼자 가서 놓아 주고 오겠다면서 조심스레 통을 들고 산으로 갔다. 한참이 되어도 돌아오질 않길래 쫓아가 보았더니 녀석은 산 근처의 자그마한 바위 위에 덩그마니 혼자 앉아 있었다. 손에는 빈 벌레통을 들고, 땡볕 밑에 앉아 있는 녀석의 웃옷은 금방 새것으로 갈아 입었음에도 땀에 푹 젖어 있었다. 이마에도 볼 옆에도 땀이 흐른 자국이 줄줄이 그어져 있었다. 내가 가까이 접근하자 녀석은 손등으로 얼른 눈시울을 닦았다. 워낙 마음이 여린 녀석이라 메뚜기와의 이별이 슬펐던 게다. 가슴이 뭉클해 왔다.


나는 녀석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일부러 시선을 주지 않고 씩씩하게 물었다.
메뚜기하고 굿바이 잘 했어?
.
녀석은 그냥 고개만 끄덕였다. 나는 녀석을 포옹해 주고 싶었지만 그랬다가는 녀석이 더 엉엉 울기라도 할까 겁이나 그냥 일어서며 풀밭을 향해 소리쳤다.
메뚜기야 잘있어. 우리 패트릭하고 친구 해 주어서 고맙다. 오래오래 잘 살아라!
녀석도 따라 일어났다.
아파트의 주차장으로 돌아오면서 녀석은 나의 손을 잡았다.
있지, 마미. 메뚜기가. 벌레통 문을 열어 주었더니 뛰어나와서는 얼른 산으로 가지 않고 내 손등에 올라왔다가 땅으로 내려갔어. 아마, 나에게 인사를 하고 가려던 거 같애.
그래? 어쩌면! 무슨 인사였을까?
녀석은 잠시 생각하더니 약간은 목이 메인 소리로 말했다.
놓아 줘서 고맙다고.
그래. 그런지도 모르겠다. 메뚜기는 맛있는 풀을 매일 먹여 준 너를 잊지 못할 거야.
녀석의 이별의 아픔에 위로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한 말이기도 했지만 실제로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묵묵히 있던 녀석의 눈망울이 또다시 흥건히 젖어들었다.
마미, 왜 하품을 하면 눈물이 날까? 아까부터 자꾸 하품이 나오는데, 그러니까 또 자꾸 눈물이 나.


제 어미를 닮아 눈물이 흔한 녀석은, 제 맘대로 주체되지 않고 흘러내리는 눈물이 창피해 뜬금없는 하품 타령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녀석의 능청을 받아 주기로 했다. 나 역시 아픈 가슴을 쓰다듬어 주는 일보다 녀석의 능청에 맞장구를 쳐 주는 쪽이 훨씬 더 수월하리라는 꾀가 나서였는지도 모르겠다.
글쎄, 하품을 하면 왜 눈물이 날까. 마미도 잘 모르겠는데.


자꾸만 가짜 하품을 해대며 눈물을 감추려 애쓰는 녀석의 팬터마임에 속아 주며 우리는 김포 공항으로 향하는 언니의 차에 올라탔다. 몇 시간 후, 점점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비행기의 창 너머로 자꾸만 멀어지고 있는 서울 땅을 내려다보고 있는 녀석은 비행기의 창가에 머리를 박고 두 눈을 껌벅거리며 말이 없었다. 삼십년 전, 차갑던 비행기 창에 코를 박고 점점 작아져 가는 내 고향 땅을 가슴에이게 내려다보고 있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내 눈가도 촉촉히 젖어들었다. 나 역시 가짜 하품을 해야 할 판이었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하던 소녀 시절 시작된 낯선 땅에서의 새 삶은 하나에서부터 열까지 색다른 생활의 하루하루에 적응하기 바빠 곤두박질을 하는 나날이었다. 한국에서 영어를 그렇게도 싫어했던 이유가 그 과목을 가르치는 지도방법이 나와 궁합이 맞지 않았다는 사실을 증명하듯 나는 날로날로 나보다도 더 일찍 미국 생활을 시작한 학생들을 앞질러 가며 영어를 내것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수동적인 배움에 능숙한 학생들이 우등생으로 인정을 받고 학생 본인의 실력보다도 학생의 가정형편이나 배경이 더욱 유세를 하던 사회에서 벗어났다는 자유스러움이 나로 하여금 날개돋친 새와 같은 기분이 들게 하곤 했다.


한국인의 친구가 거의 없다시피 보낸 대학 시절에는 백인 친구들의 무리에 끼여 거리를 걷다가는 무심코 유리창에 비친 나의 모습을 보고 흠칫 놀라곤 했던 적도 있었다. 저기 있는 저 까망머리의 아이는 누구지? 하는 일순간의 의문이 들 정도로 나는 철저히 미국화 된 바나나였다.


간혹 가다가 어쩌다가 미국인하고의 결혼을 하게 되었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그럴 때마다 적절하게 대꾸해 줄 답이 참으로 궁색하다. 같은 문화 속에서 자란 미국인 두 사람이 유난히 죽이 잘 맞아 함께 있으면 즐겁고 정서와 영혼의 궁합도 잘 맞아 편안하기에 결혼했다는 것이 너무도 당연하고 무리없는 이치인데도 그 와 내가 다른 살 색을 갖고 있다는 이유로 사람들은, 아니 유독 한국인들은 나에게 그런 질문을 해 오곤 한다. 그들에게 남편은 항상 궁금증의 대상이기도 하다.


신혼 시절, 다양한 한국의 생활용품들이 갓수입되어 오기 시작하던 때가 있었다. 없는 것이 없는 미국이라지만 옛날 한국에서 보았던 눈에 익은 상표가 찍힌 물건을 보면 나도 모르게 한 번쯤은 그 물건을 집어 보게 되는 법이다. 어느 날 가까운 한국 마켓을 찾았다가 백양표라는 간판을 내건 속옷 가게를 발견했는데 신혼초의 빠듯한 살림에도 불구하고 마치 대단한 보물이라도 발견한듯 남편의 속셔츠와 팬티를 바리바리 사들고 오고 말았다. 그 날의 그 사건으로 인해 남편과 한국산 속옷의 가를 수 없는 인연은 맺어졌다.


아내 잘 만난 덕에 품질 좋은 한국산 면 속옷의 진가를 알게 된 남편은 다른 것에는 굳이 까탈을 부리지 않아도 속옷만큼은 미제 보다는 한국 상품인 팩얭을 선호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아침, 속셔츠를 입으려던 남편이 동작을 멈추고 망설이더니 혹시 한인 타운에 나갈 일이 있거들랑 속셔츠와 팬티를 좀 새로 사와야겠다면서 벗은 옷을 나에게 내밀었다. 짠돌이로 둘째 가라면 서러울 남편이 드디어 새옷을 사오라고 백기를 들었을 정도로 그이의 속옷은 눈만 흘겨도 찢어질 듯 낡은 상태였는데도 차마 쓰레기통에 버릴 수가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그러나 그 날 따라 비도 부슬부슬 오는 꾸물꾸물한 날에 굳이 차 사고 많은 한인타운까지 가려니까 꾀가 나려고 했다. 마침 코스코에 갈 일이 있길래 거기서 파는 속셔츠를 사오면 어떨까고 슬쩍 물어보았더니 남편은 완강히 고개를 저어대며 꼭 오늘이 아니라도 좋으니 절대로 팩얭을 사다 달라는 것이었다.


십여 년 전, 저 멀리 이국 땅의 사람들이 입는다는 속셔츠를 입으라는 마누라의 성화에 못이겨 마지못해 백양표를 입기 시작한 남편은 어느 새 팩얭만 고집하는 골수 팬이 되고 말았다.
남편은 그 날 저녁, 새로 사온 속셔츠와 팬티를 빨아 개켜놓은 서랍장을 열어 새옷을 꺼내 입으며 음, 아이 러브 팩얭!이라며 감탄사를 던졌다. 나도 잘 안 사 입는 한국산 속옷을 고집하는 남자. 무늬만이라도 한국인인 아내 덕에 남달리 촉감 좋고 품질 좋은 속셔츠를 입고 출근하는 남자. 팩얭만 입는 남자. 바나나를 아내로 둔 남자이다.


80년 초반에 대학 동기로 만나 어찌어찌해서 85년 여름에 결혼을 했으니 그와 나는 비교적 오랫동안 알고 지내온 친구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법학을 공부하러 동부의 대학원에 진학한 그는 UN에서 인턴쉽을 하는 등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는 바쁜 몸짓에 분주하던 때였고, 나는 나대로 다니고 있던 대학을 옮기며 전공을 바꾸어 보려는 변화를 시도하려 여러 모로 역부족인 나 자신과의 힘겨운 씨름을 하던 격동의 시절이니만큼 우리는 어쩌다 가끔씩 보내는 편지에도 긴 장문들을 엮어 내려가곤 했었다.


그이도 나도 글쓰는 일이 수고스럽고 번거로웠다면 아마도 우리의 관계가 오래 지속되지는 못했을 것이 분명하다. 얼마 전 이 곳 한인사회의 한 신문사는 남편의 이야기를 대서특필한 적이 있는데 그 기사의 제목은 동화를 쓰는 변호사였다. 보통 사람들이 갖고 있는 변호사들에 대한 선입견이 두 권의 그림 동화책을 낸 아동작가하고는 너무나도 동떨어지기에 흥미있는 기사감이 되었으리라.


그 기사에 나는 한국인 부인 아무개 씨라는 꼬리표를 달은 곁다리로 남편과 함께 사진에 찍혔었다. 이제는 듣기에도 생소하기만한 내 이름 석 자에 한국인 부인이라는 거창한 타이틀이 붙어 있는 활자를 보자 왠지 그 감회가 참으로 새로웠다.
저 집은 대체 무슨 음식을 먹고 살까?
저 여자는 어떻게 미국 남자하고 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그 집 애들은 한국말을 할까?
기사를 읽는 교포들의 머릿속에는 또다시 그러그러한 의문들이 잠시 뇌리를 스쳐갔으리라.
 
하루 종일 영어로 지껄이고 영어로 생각하고 영어로 꿈을 꾸면서도 이렇게 한글로 끄적끄적 글을 쓰기도 하는 1.5세 바나나 아줌마는 이렇게 나의 내면에 공존하는 양면의 문화를 가족들과 나누며 예쁘고 자랑스러운 가정을 꾸며 가며 살고 있다고 속으로 대꾸하면서 가만히 미소를 지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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