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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꿈은 이루어진다 [미국/고동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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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5,993회 작성일 10-04-26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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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고동운] 꿈은 이루어진다

어린 시절 나는 무척이나 수줍음을 타고 내성적인 아이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선천적인 성격이었다기보다는 외부와의 접촉 없이 많은 시간을 혼자 외롭게 지내다 보니 생겨난 다분히 후천적 현상이었던 같다. 나는 세 살에 소아마비를 앓아 하반신 마비의 장애인이 되었다. 그전까지는 남들처럼 마구 뛰어 놀았다고 한다. 그러나 나의 기억 속에는 두 발로 걸어다녔다는 사실은 흔적조차 없다. 다만 한 장의 낡은 흑백사진 속에 초롱한 눈빛으로 서 있는 아이가 나라는 사실이 한때는 나도 걸어다녔다는 것을 확인해 줄 뿐이다. 꿈은 이루어진다

내가 처음으로 나의 운명이 남들과는 다르며 아마도 평생 힘겨운 삶을 살게 되리라는 것을 어렴풋이 느낀 것은 여덟 살이 되던 해, 초등학교 입학통지서를 받고 난 후의 일이다. 나의 부친은 결코 내가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는 것을 참을 수 없다며 나의 초등학교 입학을 허락하지 않았다.

나는 초등학교 입학을 몹시 기대하고 있었다. 내게는 세 살 위의 누이가 있다. 이모는 가끔 나를 등에 업고는 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를 찾아가곤 했다. 누이의 초등학교 담임 선생님은 땅꼬마라는 별명처럼 키가 작고 예쁘장한 여선생님이었는데 이모와는 고등학교 동창이었다. 이모의 등에 업혀 있는 나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내가 입학을 하면 꼭 자기 반에 넣어 주겠다고 약속을 했었다. 나는 땅꼬마 선생님의 학생이 되는 꿈을 꾸곤 했었다.
초등학교 입학을 앞둔 겨울에는 어머니를 졸라 가방과 학용품을 미리 사다 놓고 심심하면 가방을 들고 방에서 마루로, 마루에서 건넌방으로 넘어 다녔다. 아버지의 결정을 바꾸어 보려고 어머니도 무척 애를 쓰셨다.
나는 며칠이나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울며 졸라 나중에는 목이 쉬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아버지의 고집을 꺾지 못했다. 결국 나는 집에서 어머니로부터 초등교육을 받았다. 한글을 익히고 구구단을 배웠다. 하루는 아버지께서 요즘 공부를 제대로 하느냐며 배운 것을 설명해 보라고 하셨다. 나는 며칠 전에 국어 책에서 읽었던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를 해 드리고 크게 칭찬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누이가 소풍을 가는 날은 어머니가 내 몫의 김밥도 따로 싸 주었다. 그 날은 아버지가 서둘러 퇴근을 하여 집 근처 삼청공원에 올라 동생과 함께 김밥을 먹으며 소풍 기분을 내기도 했다. 봄, 가을에는 창경원이나 정릉으로 가족 나들이를 가기도 했다. 이런 나들이는 내가 자라고 몸이 커져 등에 업고 다니기에는 너무 무거워질 무렵부터 차츰 그 횟수가 줄어들었다.

또한 어머니에게는 나말고도 돌보아야 할 4남매가 있었다. 해병대 대령이었던 부친이 제대하신 후에는 함께 사업을 하여야 했기 때문에 나는 자연히 뒷전으로 밀리게 되었다. 어머니는 나를 친정으로 보냈고 나는 어린 시절의 대부분을 관훈동에 있던 외가에서 보냈다.

외가는 방 세 개, 11평의 작은 한옥이었다. 에어컨은 고사하고 선풍기도 없는 집이 많던 무렵이라 더운 여름날이면 대문 앞에 의자를 내다 놓고 앉아 더위를 식히곤 했다. 외가의 근처에는 학교와 학원들이 많아 오후가 되면 풀먹인 제복을 입은 학생들이 재잘대며 무리를 지어 지나가곤 했는데 나는 그 아이들이 한없이 부러웠다. 만약에 내게도 학교에 다닐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정말 아무 불평 없이 열심히 공부를 하겠다는 생각을 수도 없이 많이 했다. 그 때는 중학교부터 입학시험을 보아야 진학을 할 수 있었다. 다른 아이들은 밤늦도록 과외공부를 하느라 공부에 지쳐 있었지만 나는 그런 아이들이 무척이나 부러웠다.

난 그 무렵 별로 하는 일도 없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연속극에 심취해 있었고 낮에는 만화를 보며 소일했다. 하루는 수녀 두 명이 무슨 책인가를 팔러 왔는데 만화를 보고 있던 나에게 다 큰아이가 공부를 해야지 만화만 보고 있으면 어떻게 하느냐는 투의 걱정어린 이야기를 하고 갔다. 그 때 내 나이가 1213살 정도였다고 기억되는데 무척이나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 날부터 만화 대신 문학전집을 보기 시작했고 미뤄 두었던 공부도 시작했다.
집에는 책이 무척이나 많았다. 50권으로 된 소년소녀 문학전집을 다 읽고 성인용 한국문학전집, 세계문학전집도 읽었다.

2살 아래의 남동생과 함께 한 6개월 정도 과외수업도 받았다. 그 후로는 주로 독학을 했다. 방학을 하면 누이와 동생이 다음 학기 새 책을 받아 오는데 내가 먼저 방학 동안 다 읽어 헌책을 만들어 버리곤 했다. 전과나 참고서를 가지고 하루 종일 씨름을 했다. 모르는 내용이 나오면 표시를 해 두었다가 누이나 동생에게 물었다.
영어도 누이에게서 겨울 방학 동안 기초를 배운 후 혼자 공부했다. 쓰는 대로 읽는 한글과 달리 영어는 단어의 발음을 익히기가 어려웠다. 틈만 나면 모르는 단어의 발음을 누이에게 물어 한글로 적어 놓았다. 하루는 누이가 내게 사전을 찾는 방법과 발음 기호를 보고 영어 단어를 발음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그 후로는 영어 공부가 많이 쉬워졌다. 그 무렵 서울의 중고등학교 영어교재는 거의 모두 구해 보았다. 관훈동에 문장사라는 책방이 있었는데 전화로 책이 도착했는지 확인을 하면 외할머니가 달려가서 사 오곤 하셨다. 책을 하도 많이 사니까 나중에는 없는 책도 주문을 해서 구해 주었다. 할머니는 바람이 부나 비가 오는 날도 내 책 심부름을 해 주셨다.
영어 공부는 그 후 나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나는 주로 문형을 외우고 단어를 바꾸어 새로운 문장을 만들어 가며 영어를 익혔다. 카세트 테이프나 LP판을 이용해서 듣는 연습을 했고 AFKN TV와 라디오를 청취하기도 했다. 한참 열심히 영어를 공부할 때는 꿈도 영어로 꾸었다. 영어 이외의 다른 과목은 암기보다는 주로 책을 읽고 내용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라디오와 텔레비전에서 방송되는 학교 방송의 도움도 많이 받았다. 이를 통해 나는 시청각 교육의 혜택을 누릴 수 있었다.

세상의 어느 부모나 마찬가지겠지만 나의 부모님들도 아들의 소아마비를 고치기 위해 많이 애쓰셨다. 어려서부터 침도 많이 맞았고 한약도 엄청나게 많이 먹었다. 내 몸에는 3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수많은 흉터가 남아 있다. 초등학교 입학 연령을 전후하여 나는 을지로에 있던 메디칼 센터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일 주일에 23회 병원에 가서 물리치료를 받고 나머지 시간에는 집에서 운동을 해야 했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보조기를 입으면 목발을 집고 걸을 수 있을 것이라는 전문의의 의견에 따라 보조기를 맞추었다. 보조기가 제작되는 동안 물리치료와 운동으로 다리 근육을 키우고 팔 힘을 길러야 했다. 운동은 주로 아버지가 퇴근한 이후인 저녁 무렵에 했다. 세발자전거의 페달에 발을 묶고 누군가 뒤에서 밀어 주면 다리가 오르내리는 운동을 했고 아버지가 나를 철봉에 올려 주면 그 다음에는 철봉에 오래 매달려 있는 운동으로 팔 힘을 길렀다.
병원에 약을 타러 갈 때는 외할아버지와 자주 갔던 것 같다. 할아버지는 나를 약국 근처의 벤치에 앉혀놓고 약을 타러 가셨는데 모퉁이를 돌아가면 더 이상 할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어떤 날은 약국에 사람이 많은지 시간이 상당히 흐른 후에도 할아버지가 돌아오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나를 내버려 두고 할아버지 혼자 집으로 돌아가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울기 시작했다. 잠시 후 벤치 옆을 지나가던 하얀 옷의 간호사가 걸음을 멈추고 우는 이유를 물었다. 이유를 설명하자 그녀는 나를 안고 약국까지 가서 할아버지를 찾아 주었다. 그런 일이 여러 번 있었다.
보조기가 완성되던 날,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가 나 때문에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았다. 가슴까지 올라오는 철제 보조기를 입고 우뚝 서기는 하였으나 나는 단 한 걸음도 내 힘으로는 발을 내디딜 수 없었다. 병원에서는 수술을 하면 혹시 상태가 나아질 수도 있다고 했지만 완치 여부는 장담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 후 다시 메디칼 센터에 가지 않았다.

그 후에도 수년이나 더 나는 쓰디쓴 한약을 삼키고 침을 맞아야 했다. 하지만 나의 상태는 좋아지지 않았다. 도리어 물리치료와 운동을 그만둔 후에 허리가 심하게 휘게 되었다. 결국 나는 걸을 수 있다는 희망을 포기하고 휠체어를 쓰게 되었다.

나는 친구를 사귈 기회가 별로 없었다. 학교도 안 다니고 밖에도 마음대로 나다닐 수 없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어려서는 형제들이 나의 좋은 친구였다. 나는 공휴일과 방학 오기를 그들보다도 더 손꼽아 기다렸다.
외가에 있으며 이웃의 친구를 사귈 기회가 있었다. 그 아이는 나이도 동갑이고 소아마비를 앓아 동병상련의 인연을 나누었던 친구다. 그는 나보다 증상이 경미해서 목발을 집고 학교에도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오후에 공터에서 노는 아이들을 쫓아다니기에는 어림없이 힘이 부쳤다. 자연히 그와 나는 한쪽에서 딱지 놀이나 구슬치기를 하고 놀았다. 그는 오후가 되면 늘 혼자였다. 아버지 없이 엄마하고 살았는데 그 아이의 엄마는 오후가 되면 일을 나갔다.

얼마 후, 그가 나를 멀리하며 대신 뛰어 노는 아이들 뒤를 힘겹게 목발을 휘두르며 쫓아다니는 날이 많아졌다. 하루는 외할머니가 그 아이를 불러 찹쌀떡을 주며 왜 자주 안 오느냐고 물으셨다. 그의 대답인즉, 엄마가 나와는 놀지 말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너는 목발이라도 짚고 다닐 수 있는데 멀쩡한 아이들과 놀아야지 무엇 때문에 앉은뱅이와 노느냐며 심한 꾸중을 들었다는 것이다. 세월과 함께 그 시절의 많은 기억들이 사라졌지만 그 말을 하던 그의 얼굴만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도 눈에 선하다.

독학을 계속했지만 늘 나의 실력을 평가해 보고 인정받고 싶은 조바심이 있었다. 20살 남짓 되었을 무렵의 일이다. 하루는 무작정 서울에 있는 풀부라이트 장학재단에 전화를 걸어 담당자를 찾았다. 전화로 연결된 미국 여인에게 나의 사정을 이야기하고 미국에 가서 공부를 하고 싶은데 도와 달라는 부탁을 서툰 영어로 전달했다. 처음에는 상당히 난감해하더니 한번 자기를 찾아오라는 것이었다. 나는 그 다음 날로 그녀를 찾아갔다. 그녀의 소개로 미국 고등학교 졸업 자격 시험을 보게 되었다. 시험 준비는 그녀의 주선으로 용산에 있던 미8군 교육 센터에 드나들며 교재를 빌려 공부했다. 영내에서 근무하던 한인들은 내가 무슨 고관이나 재벌의 자녀로 착각을 했다고 한다. 그 무렵 정부고관이나 재벌의 자녀 중 영내의 미국 대학 분교에 다니는 이들이 더러 있었다. 시험 결과 좋은 점수를 얻어 대학 진학 자격을 얻었으나 비싼 학비를 내며 미국 대학에 다닐 처지는 아니었으므로 실력을 인정받은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후 교회를 다니며 전병기 형을 사귀게 되었다. 연세대학을 중퇴하고 선교사업을 하고 돌아온 그는 취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함께 토플 시험을 보기로 했다. 둘다 상당히 높은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나보다 조금 낮은 점수를 받았던 병기 형은 그 점수 덕에 대한항공에 무시험 취업이 되었는데 나는 그 성적으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신문에 더러 영어 번역사 모집 광고가 있었지만 이력서를 보내도 오라는 곳이 없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 아니었나 싶다. 내 이력서에는 달랑 미국 고등학교 검정고시 합격과 토플 점수만이 기재되어 있었으니 말이다. 낙심하고 있는데 선교사들의 주선으로 교회 번역부에서 시간제 번역 일을 하게 되었다.
81년 아쉬운 기억과 정다운 친구들을 남겨둔 채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미국 이민을 결정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한국에서 마치지 못한 공부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 무렵 한국에서는 나 같은 중증 장애인을 위한 학업이나 취업의 기회를 거의 찾아볼 수 없었다. 막상 미국에 도착해 보니 상황은 내가 한가하게 학교에나 다니며 지낼 형편이 아니었다.

먼저 오신 부모님이 하시던 식당에서 큰 손해를 보시고 한국의 구멍가게에 비교될 만한 작은 편의점을 운영하시게 되었다. 학교를 마쳐야 할 동생들이 셋이나 남아 있었고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자립을 해야 했다. 한인 타운이 형성되고 있었지만 장애인을 쓰겠다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전화번호부를 펼쳐 가며 50여 군데 미국 관공서와 대기업에 취직을 부탁하는 편지를 보냈다. 취직을 시켜 주겠다는 답장은 없었지만 자격을 갖추면 고려해 보겠다는 답장과 장애인을 도와 주는 기관을 소개해 주는 답장들이 날아왔다.

그렇게 해서 찾아간 곳이 주정부 장애인 재활국이었다. 그러나 막상 찾아가서 만난 백인 담당자에게서 큰 실망을 느끼게 되었다. 직업학교에 보내 줄 테니 조립공 훈련을 받고 전자회사에 취직을 하라는 것이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지만 이왕에 타국에 이민 와서 시작한 고생인데 좀더 버젓한 직장에 들어가고 싶었다. 사무직을 고집하자 그는 나에게 필기 시험을 치러 자격이 있다는 판정이 내려지면 사무직을 주선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다행히도 시험 성적이 좋아 사무직에 취업이 가능하다는 통보가 왔다. 그 다음 주부터 주2회 재활국에 나가 구직처를 알아보았다. 운 좋게도 2주만에 새로 문을 여는 부동산 회사의 사무원으로 취직이 되었다. 시간당 5달러를 받으며 주6일 일을 했다. 그 곳에서 2년간 일을 했는데, 미국의 여러 가지 제도와 사무요령 등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을 배웠다.

낮에는 8시간 일을 하고 밤이면 2년제 대학에 나가 꿈에 그리던 공부를 했다. 그 때까지 아내가 늘 그림자처럼 나를 데리고 다녀야 했다. 아침에 출근을 시켜 주고 퇴근 시간이면 요깃거리를 만들어 가지고 회사로 와서 나를 학교로 데리고 갔다. 81년 겨울이 되어서야 재활국의 주선으로 운전교육을 받고 내 차에 수동으로 운전하는 장치를 부착해서 마침내 혼자 나다닐 수 있게 되었다.
80년대 초 미국의 부동산 경기는 바닥에 떨어져 부동산 업자들이 앞을 다투어 전업을 하기 시작했다. 내가 일하던 직장도 예외는 아니라 봉급날이 되도 급료가 안 나오는 일이 자주 생겨났다. 영어도 서툴고 사무 일에도 미숙하던 나를 채용하여 길러 준 사장에게는 미안한 일이었지만 나도 전업을 결정하고 주정부 공무원 시험에 응시했다. 늘 시험에는 운이 따라 이번에도 상위권의 성적을 얻었다. 그러나 마침 불어닥친 불경기의 여파로 정부부처의 신규채용이 동결되어 6개월 가량 기다려서 겨우 지금의 산재보험국에 채용이 되었다.
81년에 입학한 2년제 대학에는 일 주일에 3일, 3시간씩 야간수업을 나갔다. 어떤 날은 피곤해서 교수의 강의를 들으며 졸기가 일쑤였다. 휴게 시간에 화장실에 들어가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오면 도움이 됐다. 남가주에는 별로 비가 오지 않아 큰 어려움은 없었지만 겨울에는 한 3개월간 비가 온다. 비가 오는 날 학교에 가는 일이 가장 힘들었다. 우산을 받고는 휠체어를 밀 수 없으니 비가 오는 날이면 그냥 비를 맞아야 했다. 비를 맞으며 강의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하면 우선 화장실부터 찾아 대충 종이 타월로 비를 닦아 내고 강의실에 들어갔다. 더러는 그 다음 날 감기에 걸리기도 했다.

85년 12월에 마침내 대학 졸업장을 받았다. 캘리포니아 주립대학에 편입하여 공부를 계속했다. 85년에는 주립대학에서 장애인 학생에게 수여하는 장학금도 받았다. 그 상을 받는 날 나는 장애인 학생을 격려하고 용기를 심어 주는 이 자리에 상을 받는 이가 아니고 주는 이의 자격으로 다시 돌아오리라는 다짐을 했다. 10년이 지난 95년 나는 다시 모교에 돌아가 내가 근무하는 직장의 대표로 다른 장애인에게 상을 주었다. 그 후로 매년 그 일을 계속하고 있다. 나는 직장의 장애인 직원 자문위원회의 회장으로 8년간 봉사했는데, 나의 추천으로 직장에서 매해 주립대학에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공무원 생활 중에도 어려움은 있었다. 직장에서는 매해 근무 성적을 평가하는데, 내 자랑 같지만 항상 우수한 평점을 받았다. 83년에 타자수로 채용이 된 후 기회가 있을 때마다 승진 시험을 보아 한 자리씩 차근차근 올라갔다. 더러는 내가 장애인이기 때문에 혜택을 본다는 투로 비아냥대는 동료들도 있었다.
캘리포니아 주에는 장애인을 위한 특채 시험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장애인임을 내세워 덕을 보려고 한 적은 없다. 당당하게 일반 직원과 똑같은 승진 시험을 보았다. 나보다 근무 성적이 떨어지는 백인 동료가 나를 제치고 승진했을 때, 동료 중에는 인종 차별이니 정식으로 불평을 하라고 조언하는 이들도 있었으나 참고 넘어갔다. 다음 기회에는 승진이 내게 돌아왔다. 그 후에도 나는 계속 승진을 했으나 지난번에 나보다 먼저 승진했던 백인 동료는 1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그 후 회사 차가 지급되는 외근직을 놓고 다시금 미역국을 먹었다. 휠체어를 사용하는 내가 외근직에 부적당할 것이라는 편견으로 다른 직원에게 그 자리가 돌아갔던 것이다. 그 후 다시 자리가 비었을 때, 이번에는 내 직속상관을 설득하여 함께 매니저를 찾아가 나도 충분히 그 일을 할 수 있음을 설명했다. 그 후 회사에서 차를 개조하여 지급해 주었고 나는 2년 동안 그 자리를 지켰다. 그 일을 하며 직장에서 우수직원 표창도 받았다.

전문직인 산재보험에 대한 공부도 계속했다. 주정부에서 실시하는 자격 시험에도 합격하였다. 91년부터는 보험 전문인을 양성하는 교육기관인 IEA(Insurance Educational Association)에 산재보험법 강의를 나가고 있다. 아직도 동양인의 악센트가 남아 있는 영어를 사용하지만 나는 인기 있는 강사 중의 한 사람이다. 직장에서는 보험조정관을 감독하는 슈퍼바이저로 근무하고 있다. 내가 하는 일은 산재를 당한 근로자에게 치료비와 보상금을 지급하는 일이다.

직급이 올라가며 다른 도시로 출장을 가야 하는 일이 가끔 생겨났다. 처음 혼자 출장 길에 나설 때는 두려움도 있었지만 장애인의 여행을 위한 편의 시설이 놀랍도록 잘 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되었다. 비행기에 타고 내리는 것은 항공사 직원들이 간이 휠체어를 이용해서 도와 주고 여행지에 도착하면 택시나 장애인 전용 밴 차를 탈 수 있었다. 호텔의 숙박시설 또한 장애인 혼자 묵는데 불편함이 없도록 장애인 전용 방에는 편의 시설들이 마련되어 있었다. 처음 혼자 비행기 여행을 하던 날, 창 밖에 깔려 있는 솜덩이 같은 하얀 구름을 바라보며 외할머니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린 시절 할머니는 가끔 용하다는 점쟁이 집에 다녀오신 날이면 나에게 동운아, 너 아무 걱정 마라. 네 나이 삼십만 되면 하늘을 훨훨 날아다니며 남 부러울 것이 없다더라.고 하셨다. 바로 내 나이 30살에 나는 하늘을 날아 출장을 다니고 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그 때 내게 들려 주신 말씀의 진실은 밝히기 어렵게 되었지만 그런 용한 점쟁이가 있다면 앞으로의 나의 생은 어떤 모습이 될는지 물어보고 싶다.
한때는 재일동포가 부러움의 대상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재일동포를 친척으로 둔 사람들이 이웃의 부러움을 샀다. 그 후 재일동포는 밀수와 사기의 대명사로 바뀌어 버리고 재미동포가 부상했다. 그것도 잠깐, 영화와 드라마에서는 재미동포를 사기꾼으로 조명하기 시작했고 얼마 시간이 지나고 나니 재미동포는 미국에 이민 가서 고생만 죽도록 하며 사는 것으로 그려졌다. 한국 사회는 이민 가서 힘들게 사는 재미동포를 보며 조금씩 우월감을 키워 갔다.

나는 이런 일련의 사태들을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 진입을 앞둔 사회가 자신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일시적인 현상이라고 보고 싶다. 또 여기에는 재미동포들의 잘못도 상당 부분 있다고 본다.
재미동포라는 지위를 이용, 고국에 돌아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사례가 얼마든지 있다. 미국 땅에 살면서도 늘 고국을 바라보며 기회를 엿보는 해바라기, 박쥐 같은 동포들도 많이 있다. 이는 모두 그다지 권장할 만한 일이 아니다.

진정 조국을 사랑한다면 외국에 나와 사는 동포들은 먼저 사는 곳에서 훌륭한 시민이 되어야 한다. 그 나라의 말을 배우고 문화에 적응해야 한다. 현지 언어와 문화에 익숙한 동포는 조국의 입장에서는 소중한 인적 자산인 셈이다. 글로벌 시대에 맞추어 발빠른 무역, 유연한 외교에 이들을 활용하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닌가 싶다.
내 개인적으로는 돌아보면 힘들었던 날들이지만 주위에 좋은 친구들과 사랑하는 가족들이 있어 외롭지 않았던 날들이다. 부디 앞으로의 날들은 미약하나마 남들을 위해 봉사하며 사는 날들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나는 스스로를 참 운이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절박할 때마다 기회의 문이 열려 주었다. 세상의 많은 어려운 사람들도 나처럼 운 좋은 삶을 살 수 있었으면 좋겠다.
금년으로 공무원 생활 20년이다. 55세가 되면 은퇴를 해서 퇴직금을 받을 수 있다. 앞으로 7년 가량 남았다. 그 때 기회가 주어진다면 고국에 돌아가 사회복지에 도움을 주고 싶다.
꿈은 이루어진다고 했다. 나는 이를 굳게 믿는다. 불가능해 보였던 나의 꿈들 중에 이미 많은 부분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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