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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소설: 우울한 섬, 블루를 가다 : [미국/이수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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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582회 작성일 10-04-30 2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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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수내] 우울한 섬, 블루를 가다


맨하탄이라는 섬, 그 싶은 곳에 블루가 있다. 그 곳에 가면, 외로운 섬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들이 있다. 블루에서는 사람들이 섬이 된다. 쓸쓸히 바다를 지키며 육지를 맴도는 섬, 하지만 그들은 알고 있다. 섬으로 태어난 이상, 절대 땅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맨하탄 32가에서 블루를 찾는 건 너무나 쉽다. 무채색의 밋밋한 거리에서 무심코 지나쳐 버리기엔 눈에 띄는 파란색 문 때문이다. 그 파란 철문의 매끈한 손잡이를 밀고 들어서면 두 눈은 막 결빙되기 시작하는 얼음처럼 서늘해진다. 에메랄드빛 돌가루가 박힌 바닥을 걸을 때면 얼음 알갱이가 내 입 속에서 잘근잘근 씹히듯 발바닥을 간지럽힌다. 푸른 물이 뚝뚝 떨어질 듯한 천정엔 투명한 물방울 모양의 크리스탈이 줄에 매달려 있다. 바람이라도 일렁이면 머리 위로 맑은 파도 소리다 모래처럼 쌓인다. 적당한 간격을 두고 엇갈린 탁자와 의자들은 반듯한 직사각형의 모양으로 되어 있다.


테이블 한가운데엔 알파벳으로 섬 이름이 새겨져 있다. 마우이, 오아후, 라나이, St. 토마스, St. 크로이크, 키웨스트……. 벽마다 그 섬이 그  섬 같은, 이름도 모양도 비슷비슷한 액자들이 빼곡히 걸려 있다. 바라보기만 해도 눈이 축축히 젖어 드는 푸른 쪽빛의 바다. 그 한가운데 용감히 서 있는 섬, 섬, 섬, 벽을 마주보고 서 있으면 나까지 섬이 된다. 그리고 블루를 찾는 모든 사람들까지 익명의 섬이 되어 서러가 서로를 바라본다. 손을 내밀어도 잡아줄 수가 없고, 눈물을 흘려도 닦아줄 수가 없는 막막한 섬으로 그렇게 서글픈 눈짓만 교환할 뿐이다.


1년 전, 나와 내 남편을 중매한 박지후 선배가 갑자기 서울로 돌아가면서 블루를 내게 맡겼다. 블루를 부지런히 드나들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난 박선배의 후임자로 발탁된 것이다. 다시 돌아온다는 약속으로 새끼손가락만 걸었을 뿐, 살아서는 절대 돌아오지 못할 전쟁터로 떠나는 군인처럼 비장했다. 단촐한 가방 하나 들고 온 팔년 전에 비해 짐이 몇 배는 늘었다며 공한에서 마지막 전화를 넣었다.


내가 잘 할 수 있을 것 같냐고 물었더니 허허롭게 웃기만 했다.


박선배가 거짓말처럼 눈앞에서 사라지자 오히려 담담해졌다. 매상을 정리하고 은행수표를 쓰는 일이 서툴러 처음엔 애를 먹었지만 차츰 익숙해졌다. 블루를 찾는 손님들과도 별 탈 없이 무난하게 잘 지냈다.


그리고 그가 떠난 지 한 달 후쯤 전화가 왔다. 신도시로 이사한 아파트 얘기와 다시 시작한 회사일과 아내의 늦둥이 임신 소식까지 다 털어내고 나서야 블루의 근황을 물었다.


잘 하고 있고 또 박선배의 탁월한 안목이 적중했다고 말하자 껄껄걸 웃었다. 다행이 블루는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사람들로 매일 파도를 일으켰다.


무인도, 손님이 한 사람도 없을 때, 우리는 블루를 무인도라고 부른다. 반대로 테이블마다 사람들로 넘쳐나서 발 디딜 틈도 없을 때, 땅이란고 한다. 섬들도 별처럼 모이면 땅으로 살라고, 더는 가슴시리지 않게, 더는 외롭지 않게…….


남편 윤상호를 만난 것도 블루에서였다. 제각각 블루를 드나들던 우리 두 사람을 박지후 선배가 한 테이블에 합석시키면서 우리의 인연은 엮어졌다. 나보다 조금 키가 크고, 조금 더 뚱뚱하고, 조금 더 나이가 많은 남자였다. 반달 모양의 라임 한 조각이 빠진 코로나를 마시면서 큰소리로 웃는 얼굴이 처음인데도 싫지 않았다. 그럴때면 그의 하얗고 고른 치열이 맥주 거품 속에서 반짝거렸다.


우리는 시절을 거슬러 거슬러 올라가며 전설처럼 아득한 이야기를 풀고 또 풀었다. 퇴적한 땅처럼 시간의 흔적만 밝을 수 있는 징검다리 같은 세월이 더 없이 유쾌했다.


중학교 1학년, 새로 맞춘 교복을 얼마 입어보지도 못하고 한국을 떠나야 했던 것이 가장 마음 아프고 억울했다며 라임향이 물씬 풍기는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그 빳빳한 교복이 너무 갖고 싶어 이민 가방에 몰래 쑤셔 넣었지만 엄마가 귀신같이 알고 끄집어내자 엉엉 소리 내며 울었다고 했다.


멋쩍은 듯 웃었지만 그의 눈자위는 벌써 빨갛게 얼룩졌다. 중학생 교복과 모자, 그리고 검은 운동화를 신은 열네 살 소년의 흑백사진 한 장이 내 가슴속에 활랑활랑 날아와 꽂혔다.


‘이 남자가 그깟 중학생 교복 때문에 울었다니, 그것도 소리내어 엉엉…….’


남편을 처음 만난 그 밤, 나도 모르는 처량맞은 안쓰러움에 밤새 잠을 뒤척거렸다.


석 달 후, 난 그의 아내로 평생을 살겠다고 했고, 지난주엔 다섯 번째 결혼기념일을 블루에서 보냈다. 섬마다 넘쳐나는 손님들과 함께 향 좋은 와인을 나눠 마시며 행복한 웃음으로 축하의 답례를 대신했다.


‘웃음도 어쩌면 바이러스의 한 종류가 아닐까.’


 그날 문득 생각했다. 블루에서는 매일 왁자한 웃음소리가 전염병처럼 이 섬 저 섬을 들쑤시고 다닌다. 하지만 그 반대로 침잠하는 우울함이 변종 바이러스로 둔갑해 블루를 돌아다닐 때도 잇다. 그런 날은 아주 드물지만, 아주.


 



 블루를 시작한 지 얼마 않아 낯선 한 여자가 종종 블루를 찾았다. 키가 크고 몸이 마른 스물다섯에서 서른 사이쯤 되는 여자, 그녀가 음악에 맞춰 몸을 흔들 때면 노릇노릇한 긴 머리카락이 가슴과 어깨 사이를 출렁거렸다. 혼자서 넓은 테이블을 차지하기가 미안했는지 그녀는 늘 바의 높은 의자에 앉았다. 캐시어 앞에 있는 나와는 어쩔 수 없이 마주 봐야 했고, 서로의 눈이 부딪칠 때마다 슬쩍슬쩍 웃으며 딴청을 피우곤 했다.


 그녀의 얼굴이 눈에 익을 때쯤, 그녀가 즐겨 마시던 쿠어스 맥주를 미리 꺼내 주었고, 그녀가 흥얼거리며 따라 불렀던 노래를 찾아 들려 주었고, 또 맥주와 번갈아 마시던 핫초콜릿을 나도 한 잔씩 놓고 마시다가 친구가 되었다. 언젠가 유끼 구라모토의 피아노 연주곡 시디를 내게 건네며 은수가 말했다.


 “피아노도 한 대 들여 놓지 그래요?”


 “피아노?”


 “피아노도 가끔 연주하면 좋잖아요. 언니는 그런 적 없어요? 난 피아노 소리를 듣고 있으면 파도가 잔잔한 바다 위에 부-웅 떠 있는 것 같아 나른한 잠이 마구 쏟아져요. 피아노 소리는 엄마 뱃속처럼 포근하고 아늑해서 늘 마음이 차분해지거든요.”


 “피아노칠 사람이 없어, 블루엔.”


 “내가 한 번 해보면 안 될까요?”


 “네가?”


 “블루에서 피아노를 치고 싶어요. 너무나.”


 그리고 은수는 쿠어스 세 병을 비우는 동안 자신의 이야기를 간략하게 들려줬다.


 그녀는 대학 3학년 때, 방송국에서 주최하는 대학가요제에 참가해서 장려상을 탔다. 그 바람에 유명한 가수도 못되고, 평범한 학생도 못되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다가 결국은 졸업을 하지 못했다. 졸업장이 없어 취직이 안 되자 집에서 동네 아이들을 모아 놓고 열정도 성의도 없는 피아노를 가르쳤다. 지루하고 따분한 몇 년을 버티다가 적금으로 붓던 통장을 깨어 여기저기 여행을 다녔고, 마지막 도착지인 뉴욕에서 아직껏 긴긴 여행 중이라고 했다. 돈이 필요해 처음 시작한 일이 한인교회에서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용돈을 벌다가 지금은 사설 유아원에서 아이들에게 한글과 노래를 가르치며 살고 있다고. 그래도 아이들 사이에선 인기가 상당히 높아 비록 머리를 노랗게 물들이고 다녀도 감히 자기를 자를 수 없다며 싱싱하게 웃었다. 살다보니 어떻게 어떻게 학교도 가게 되었고, 학비를 벌기위해 나쁜 짓 빼고는 안 해 본 일이 없다며 남은 맥주를 쭈욱 들이켰다.


 



 은수는 대학가요제에 나갔던 그 해 겨울, 자신의 운명은 이미 궤도를 이탈해 버렸다고 했다. 최우수상을 타서 텔레비전에 비치는 유명한 가수가 되든가 아니면 참가하는 데 그 의의를 두었던 당당한 탈락자로 차라리 남아야 했었다며 씁쓸히 웃었다. 어정쩡한 장려상 하나가 내 인생을 뉴욕에서 떠돌게 할 줄 꿈에도 몰랐다며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느닷없는 제안에 며칠을 고민한 후, 꽤 쓸만한 중고피아노 한 대를 주방 앞쪽에 들여 났다.


 정훈은 피아노가 있는 천장에 빛의 밝기를 조절할 수 있는 파란 조명등을 세 개나 더 달았다.


 은수는 매일 저녁 블루에서 피아노 건반을 두들겼다. 그리고 가끔 노래도 불렀다. 얘기를 나눌 때 듣던 목소리와는 사뭇 다른 독특한 음색으로 블루의 분위기를 사로잡았다. 너무도 충만한 푸른 조명을 받으며 은수는 밤마다 평온한 파도를 일으켰다. 이탈한 구도로 다시 진입한 평안한 얼굴, 그리고 따뜻한 목소리로 블루라는 새로운 행성을 발견한 은수는 나날이 물이 올라갔다.


 



 여름으로 접어들면서 블루는 조금씩 바빠졌다.


 팍팍한 하루를 견뎌 낸 사람들에게 블루는 잠시 숨을 고르며 쉬었다 가는 빈 의자 같은 곳이었다.


 라나이 테이블엔 일찌감치 두 남자가 자리잡고 앉아 무엇인가에 격렬히 분노하고 흥분했다. 옆 빌딩의 무역회사에 다니는 젊은 영업사원, 오늘도 안주 없이 맥주만 마셔대고 잇다. 몇 번인가 내가 가벼운 안주를 권했지만 그들은 번번이 필요 없다며 거절했다.


 블루는 다 좋은데 ‘김사장, 성부장’ 같은 훌륭한 안주가 없다며 짓궂은 농담을 건넸었다. 제일 맛있는 안주는 바로 자기네 회사 심사장과 그 처남인 성부장이라며 키득키득 웃던 얼굴이 떠올랐다.


 그들이 주말과 공휴일에도 블루에 얼굴을 자주 들이미는 걸 보면 맥주만 거뜬히 마시고도 남을 충분히 영양가있는 안주가 아닌가 싶기도 했다. 김사장과 성부장은.


 그들은 마치 음모를 꾸미는 공범처럼 비밀스럽게 귓속말로 속삭이기도 하고, 또 날 향해 빈 맥주병을 적지에 꽂는 깃발처럼 흔들기도 했다. 어둑한 밤. 그들의 휘적거리는 발걸음이 블루를 떠낫다.


 두 남자가 앉았던 라나이 섬엔 그들의 애환과 서럼움과 희망이 모래성처럼 높이 쌓였다.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머리의 혈관을 돌고 돌아 마침내 입으로 쏟아져 나온 무수한 말들은 건조하고 날카로운 모래알이 되어 블루를 휩쓸고 다녔다. 파도가 크게 밀어 덮치면 흔적도 없이 한 번에 쓸려 나갈 엉성한 모래성. 하지만 그렇게라도 마른 모래를 토해 놓지 않으면 사람들은 도시를 유령처럼 걸어다닐 것이다. 가끔 블루는 사람들이 끝도 없이 토해 놓는 모래성 때문에 황량한 사막이 되곤 했다.


 



 며칠째 끈적끈적한 바람이 계속되엇다. 눅눅한 공기가 핏속까지 침투해 온 몸을 무겁게 했다. 오후의 후덥지근한 잔열이 아스팔트바닥에 질편하게 깔렸다.


 차를 주차장에 넣고 문을 열고 나오자, 더운 김이 얼굴에 확 달려들었다. 난 블라우스의 단추 하나를 더 풀고 빠른 걸음으로 34가와 33가를 지나쳤다. 촉촉한 습기는 모조리 증발되고, 퍼석퍼석한 마른 공기만 남아 목을 칼칼하게 조였다. 손톱만큼 보이는 블루의 푸름 문이 아지랑이 때문에 흐물흐물 했다. 쇠도 단숨에 물엿처럼 녹일 만큼 대단한 더위였다. 오늘 아침 신문에서 본 알라바마주의 어느 노인 부부가 계속 되는 찜통 더위로 사망했다는 토픽 기사가 눈앞을 다시 스쳤다. 그리고 살인적인 더위라는 단어가 입 안에서 몇 번인가 굴러다녔다.


 블루에 들어섰다. 냉랭한 바람이 땀으로 범벅된 몸을 날름날름 훑고 다니자 금새 시원해졌다.


 정훈은 내게 라스베리향이 섞인 아이스티를 갖다 주었다. 블루의 섬들은 어느새 달착지근한 라스베리향으로 물들어 자주빛 과도를 일으켰다.


 해가 긴 오후, 파란 눈동자가 섞인 한 일행이 블루에  들어섰다. 그 틈에 있는 한 남자, 마흔을 갓 넘긴 이호영이라는 변호사가 내게 눈인사를 건네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34가의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에서 변호사 사무실을 운영하고 있는 1.5세의 교포였다.


 그에게선 뭐랄까, 어깨 끝까지 차오른 열정과 패기가 늘 당당해 보였다. 얼굴 어느 구석에서도 쓸쓸한 사람의 냄새는 조금도 묻어나지 않았다. 풍요로운 들판에서 수확의 기쁨만 음미하며 평생을 살아온 사람처럼 보였다. 바다의 고독함이나 광활함은 상상조차 성가셔 할 것만 같은 기름진 얼굴이었다. 세수나 샤워를 하지 않으면 평생 차가운 물에 손 한 번 담그지 않았을 정갈한 손가락이 문득 은수와 닮았다고 생각했다.


 피아노 건반 위를 유유히 뛰노는 그의 손가락이 마치 한 몸에서 뻗어 나온 듯 겹쳐졌다. 그가 오면서부터는 블루는 시가 특유의 몽화적인 냄새로 꿈틀거렸다. 그 남자의 이방인 일행들은 그에게 의례적인 악수를 건네고 먼저 블루를 떠났다.


 그는 다시 테이블로 돌아가 마시던 맥주를 들고 바로 걸어 왔다.


 “여기에 앉아도 될까요?”


 “네, 그러세요.”


 그는 계산서와 반이 남은 맥주병과 셀룰라폰을 나란히 테이블 위에 놓았다.


 그가 떠난 마우이섬 테이블이 말끔히 치워지자 문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네 명의 남자들이 그 섬을 서둘러 차지하고 앉았다. 계곡의 섬이라는 애칭에 딱 들어맞는 섬, 마우이. 그 테이블은 보고 있으면 원시적이고 원초적인 자연의 냄새가 코끝을 파고들었다.


 “여긴 참 분위기가 좋아요.”


 이호영의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섬 같죠. 블루는…….”


 난 레몬 한 조각이 풍덩 빠진 아이스티를 마시며 말했다.


 “섬?”


 “혹시 마우이섬에 가본 적 있으세요?”


 “아뇨, 아직…….”


 “태평양 한 가운데에 있는 마우이란 섬이 있어요. 사진에서나 보던 사탕수수밭이 끝없이 깔려 있고, 열대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희귀한 나무들이 천지에 널려 있죠. 공항에 내리면 먼저 지독한 꽃 냄새에 머리가 터질 것 같은 화려하고 짜릿한 섬이에요. 근데 해가 지면 암흑이에요 아무것도 없어요. 호텔 근처의 번화가만 빼면 불빛이라고 없죠. 정말 무서운 섬이에요. 어둡고 드넓은 바다 위에 그저 삐죽 솟아 있는 작은 섬. 바다 속으로 어느 날 갑자기 침몰할 수도 있고. 또 높은 해일이 한 입에 삼킬 수도 있는 보잘것없는 섬이죠. 그때 알았어요. 섬은 두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화려함과 우울함. 섬은 꼭 사람 같아요. 두 가지 얼굴을 가진 사람. 어쩜 그보다 더 많은 얼굴을 가진 사람 같기도 하고…….”


 말을 마침과 동시에 난 당혹스러웠다. 처음 마주 앉은 남자에게 쓸데없이 많은 말을 한 것이다.


 “갑자기 그 섬에 가고 싶어지는데요. 참 아직 정식으로 인사가 없었죠? 저는 이호영이라고 합니다.”


 “윤혜진이에요. 결혼을 해서 윤이 된 거고 원래는 서혜진이었죠. 전 벌써 이 변호사님 알고 있었어요. 유명하신 분이잖아요. 교포 사회에서는.”


 그는 무안한 듯, 씨익 웃음을 흘렸다.


 “마우이엔 언제 가셨어요?”


 “5년 전이에요.”


 그는 남아 있던 맥주로 천천히 목젖을 적셨다.


 “섬이란 말의 뜻을 혹시 아세요?”


 그는 병을 탁자 위에 놓으며 낮으막한 목소리로 내게 물었다. 따뜻한 눈빛이 조금은 슬프게도 보였다. 아마 블루의 푸름 조명 때문일 것이다.


 “섬? 글쎄요. 무슨 뜻인데요?”


 “책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네요. 홀로서다의 홀로섬, 일어서다의 일어섬. 그런 뜻의 섬이라고 했던 것 같아요. 어때요? 맞는 말 같죠?”


 “그렇네요. 정말.”


 “사람이 섬처럼만 살 수 있다면 참 멋있겠죠?”


 이호영은 처음 인사를 나눈 사이답지 않게 편한 말투였다.


 “혹시 키웨스트란 섬을 아세요?”


 “헤밍웨이가 살았고, 또 사랑했던 섬이죠. ‘노인과 바다’라는 소설이 태어난 섬, 맞죠?”


 “가 보셨어요?”


 “아뇨, 아직.”


 “한 번 가 보세요. 마이애미에서 차를 타고 한 세 시간쯤, 다리로이어진 수십 개의 섬을 건너면 키웨스트에 다다르죠. 미국 지도의 끝이면서 동시에 출발점인 곳이에요. 그 곳에서 헤밍웨이가 살았다는 집을 봤죠. 울창한 나무에 둘러싸인 커다란 집에서 허연 백발을 한 헤밍웨이 할아버지가 창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 것만 같았어요. 또 헤밍웨이가 자주 들렀다는 바를 찾아 그 섬을 헤매고 다녔지만, 떠나는 그 날까지 난 찾을 수가 없었어요. 이 세상에 없는, 헤밍웨이가 죽으면서 함께 이 땅 위에서 사라진 전설의 바가 아닐까,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생각했어요. 왜 헤밍웨이가 그 섬에서 자살을 했는지 아세요? ‘이 섬에서 한 번 죽어봐도 괜찮겠다’ 라는 충동을 끊임없이 부추기는 곳이니까요. 마음이 독하지 못한 사람들이 절대 가서는 안 되는 섬이 바로 키웨스트에요. 마우이란 섬하고는 분위기가 많이 틀리죠? 아마 마이애미와 가깝게 있어서 도시적인 냄새가 더 강한 건지도 몰라요.”


 눈이 마자치자 그는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한 병을 더 달라는 시늉으로 빈 병을 내 코앞에서 흔들었다.


 밀러 하나를 꺼내 그 앞에 놓았다. 그의 은색 셀룰라폰에서 벨이 울리자. 그는 시끄러운 블루를 피해 밖으로 나갔다. 그가 닫으려고 하는 문을 비집고 은수가 들어왔다.


 “우와, 벌써 풀하우스네!”


 그녀의 발랄한 웃음이 머릿속을 어지럽게 달리던 플로리다 주의 거미줄 같은 도로를 확 걷어냈다.


 “오늘 친구가 왔어요. 서울에서.”


 “어떤……?”


 “나랑 듀엣으로 가요제에 나갔던 친구에요.”


 “그 친구도 너처럼 궤도를 이탈했었니?”


 “아니, 남자.”


 “남자?”


 “난 이제 내 갈 길을 찾아서 정착하고 있는데, 그 친구는 이제 시작인가 봐요.”


 은수는 내 앞에 노인 아이스티를 몇 모금 들이키더니 피아노 쪽으로 걸어갔다.


 그녀를 알아보는 손님들이 “우우-” 휘파람을 불며 박수를 보냈다. 스피커에서 치직거리던 소음이 뚝 끊기며 잠잠해졌다.


 은수의 노랗고 긴 머리카락에서 푸른 불빛이 넘실거렸다. 마치 물속에서 지금 막 건져낸 다시마처럼 미끈미끈하고 윤택해 보였다.


 블루에 자갈처럼 깔리는 피아노 소리를 저벅저벅 밟으며 다시 이호영이 들어섰다. 그는 그의 자리에 앉으려다 말고 피아노를 향해 얼굴을 돌렸다.


 “피아노, 블루에서 처음 들으세요?”


 그는 가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참 듣기 좋은데요”


 그는 다시 몸을 돌려 의자에 앉아 뚜껑도 열지 않은 맥주를 만지작거렸다. 병에서 뿜어져 나온 물방울이 그의 지문을 적셨다. 그는 가끔 고개를 돌려 은수를 보았다. 피아노의 리듬은 점점 빨라지고 있었다. 곡이 숨가쁘게 전개 될수록 그녀의 어깨도 헝클어진 악보처럼 들썩거렸다.


 은수가 언젠가 내게 말했다. 블루에서 피아노를 칠 때 마치 커다란 무대 위에 우뚝 서 있는 것 같다고, 그래서 숨이 막히도록 기쁘고 가슴 벅차지만 피아노 뚜껑을 덮고 무대에서 내릴 때는 가슴이 싸아해진다고, 그래서 블루는 참 이율배반적인 공간이라고 했다.


 난 그녀의 이율배반적이라는 말에 아이처럼 즐겁게 웃었다.


 내 입과 머리에서 화석처럼 견고해 가는 한자성어는 또 다른 외국어처럼 신기하고 생소했기 때문이다. 모국어를 조금씩 갉아먹는 벌레 한 마리가 내 몸 어느 구석에 숨어 있지 않을까? 라는 징그러운 상상이 잠깐 머릿속으로 비집고 들어 왔지만 그런 상상마저 블루에서는 유쾌했다. 쫄깃쫄깃한 유질을 씹듯 몇 번인가 그 네 음절을 또박또박 발음 했다.


 이. 율. 배. 반.


 어쩔 수 없이 이율배반적으로 살아야만 하는 삶도 있지 않은가? 어쩔 수 없이.


 



 어두컴컴한 하늘에서 소나기가 퍼붓는 오후였다. 장마가 없는 도시 뉴욕의 소나기는 사막 같은 땅의 갈증을 너끈히 해갈시켰다.


 요란한 빗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문을 밀치고 들어섰다. 이호영이었다. 비에 흠뻑 젖은 모습으로 나를 쳐다봤다.


 난 그에게 깨끗한 타올을 찾아서 건네고, 에어컨의 차가운 바람을 껐다.


 그는 입구에 서서 빗물을 꼼꼼히 닦고 또 닦았다. 그가 털어내는 빗방울이 바닥에 나동그라지면서 사과향 샴푸 냄새도 같이 바닥을 뒹굴었다.


 “따뜻한 커피 한 잔 하세요.”


 척척한 바지를 타올로 꾹꾹 누르며 바에 앉았다.


 “의자가 젖을 텐데 괜찮을까요?”


 “닦으면 돼요. 편히 앉으세요. 걱정 마시고.”


 그는 바지 뒷주머니에서 축축한 지갑을 꺼내 테이블 위에 놓았다.


 난 그에게 금방 걸러낸 커피를 건네면서 살짝 벌어진 지갑을 보았다. 예쁜 여자이이가 풍선을 들고 웃는 사진이었다.


 “제 딸이에요.”


 내 시선을 쫓아간 이호영이 말했다.


 창을 두들기는 빗소리는 점점 더 시끄럽게 울렸다.


 “얘기 하나 해드릴까요?”


 “무슨……?”


 훈훈한 눈빛이었다.


 “비가 이렇게 사납게 내리던 날이었어요. 제가 그땐 기차를 타고 맨하탄 사무실을 다녔거든요. 차가 한 대 뿐이라서 아내는 매일 아침 나를 기차역에 데려다 주고 또 밤마다 나를 데리러 왔어요. 아내가 임신을 했을 때에도 또 아이를 낳은 후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참, 사진엔 딸이 하나였죠? 원래는 쌍둥이였어요. 두 아이의 얼굴이 너무 똑같아 난 자주 아이의 이름을 거꾸로 불렀어요. 하지만 아내는 새벽에 깨어나 젖을 물릴 때도 그 울음소리로 누가 누군지 금방 알아냈어요. 그땐 참 그게 신기하고 부러웠죠. 그런데 비가 억수 같이 퍼붓는 오늘 같은 날 두 아이를 차에 태우고 기차역으로 날 데리러 오다가 빗길에 미끄러지는 트럭과 충돌해서 딸 하나와 아내를 잃었어요. 사이좋게 하나씩 나누어 가진 거죠. 아이들을. 비가 오면 난 빗속에서 아내 목소리를 들어요.”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니 빗물 같은 눈물이 잠깐 고였다가 다시 눈동자 속으로 스며들었다.


 ‘이럴 땐 어떡해야 하나?’


 어설픈 동정이나 위로의 말은 감히 꺼낼 수없었다. 그냥 우두커니 서서 그의 흔들리는 눈동자만 쫓아야 하는 걸까?


 “혜진씨가 그때 이런 말을 했죠? 사람은 섬이라고……. 그 말이 너무 좋았어요. 블루에 오면 신혼여행을 갔던 키웨스트란 섬이 떠올라요. 그때 찍은 사진들은 벌써 오래 전 다 태워버렸는데, 그 섬을 사랑했던 어린 아내가 어느 날 내 마음속에 다시 나타났어요. 그녀가 내 가슴속에 섬 하나를 만들고 매일 그 속에서 뛰놀고 있는 것 같아요. 딸아이와 함께.”


 환하게 웃는 그의 모습이 사진 속에 있던 딸과 많이 닮았다. 비는 그치지 않고 눈앞을 송두리째 가로 막으며 창문을 연신 두들겼다. 어디선가 비릿한 냄새가 스멀스멀 기어 올라 발목을 잡앗지만, 블루는 여전히 평화로웠다.


 



 며칠째 보이지 않던 은수가 블루에 나타났다. 수척해지고 해쓱해진 얼굴이었다. 무슨 일이 있냐고 혹 아니면 어디라도 아픈 거냐고 물었다. 은수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내게 시원한 아이스티를 한 잔 달라고했다. 그녀의 차갑고 침착한 눈동자가 컵에 담긴 얼음 같았다.


 “친구가 갔어요. 어젯 밤에.”


 꺼칠꺼칠한 목소리였다.


 “함께 서울로 돌아가자고 했지만 난 그럴 수가 없었어요. 난 뉴욕이 좋아요. 향수병도 다 지나가고 이제 겨우 뉴욕에 익숙해졌는데 여기서 돌아갈 순 없잖아요. 어렵게 시작한 공부도 내 힘으로 끝까지 해내고 싶고, 그리고 블루에서 피아노치는 일도 내겐 너무 즐겁고 소중한 일이에요. 그래서 친구에게 먼저 돌아가라고 말했죠. 난 이 곳을 떠나지 않을 거라고. 살고 싶을 때까지 오래오래 살거라고 했어요. 그 친구, 너무나 보고 싶었던 얼굴이었는데 막상 보니까 바람빠진 풍선처럼 시시했어요. 참 사람이라는 게 우습죠? 겨우 조금 시간이 흘렀을 뿐인데 손님처럼 불편하고 어색하고 또 빨리 돌아갔으면 싶더라구요.”


 은수는 별일 아니라는 듯 얘기했지만 그 얼굴엔 아쉬움이 멍처럼 깊이 스며 있었다.


 아마도 그건 사랑이었나 보다. 그리고 지금 은수에게 남은 건 사랑에 대한 자연스런 냉소, 그뿐이었다.


 은수는 오늘 피아노를 치지 않았다. 밤늦게까지 내 옆에서 시디를 번갈아 꽂고 계산서에 찍힌 금액을 일일이 검산하며 웃고 떠드는 사람들을 먼발치서 바라만 보았다. 무료하고 지루한 여행을 이제 막 시작한 사막 위의 낙타처럼 은수의 얼굴은 고단함으로 많이 지쳐 보였다. 하지만 파르스름해진 입술을 깨물고 또 깨물었다. 가까스로 발붙인 블루의 궤도를 한 발짝도 비껴서지 않겠다는 듯이.


 



 눅눅한 습기가 도시를 짓누르는 날이었다. 바람은 불었지만 끈적끈적한 열기가 워낙 강해 잔뜩 열이 오른 선풍기 앞에 마주 앉은 것처럼 후덥지근한 오후였다.


 문이 거칠게 열리고 옆 빌딩 무역회사의 두 영업사원이 어깨동무를 하고 들어섰다. 늘 앉는 익숙한 섬 라나이 테이블로 거침없이 당당하게 걸어갔다.


 정훈에게 코로나 두 병을 먼저 달라고 했다. 소금에 절인 라임 조작이 풍덩 빠지며 그들의 손에 황금색 코로나가 높이 쳐들렸다.


 그때 문이 열리고 마흔은 훨씬 넘어 선 두 명의 남자가 들어 왔다.


 “여깁니다.”


 라나이 섬의 두 남자들은 성급히 병을 테이블 위에 놓으며 벌떡 일어섰다. 몸이 호리호리하고 가느다란 은테 안경을 코끝에 걸친 남자가 손을 들어 아는 체를 했다. 그 옆의 키가 작고 머리에 희끗희끗한 새치가 있는 남자는 블루의 내부를 재빨리 둘러보며 호리호리한 남자 곁에 바싹 붙어 걸었다. 그들이 비좁게 껴안은 라나이 섬엔 파헤쳐진 여래 같은 빈 맥주병들이 뒹굴었다. 그들은 가끔 푸짐한 안주를 주문하는라 걸핏하면 정훈을 주방에 불러내곤 했다. 네 명의 얼굴엔 핏발서린 진지함도 스쳤고, 또 허물없는 웃음을 나누기도 하며 끊임없이 건배를 외쳐댔다.


 잠시 후, 젊은 영업사원 하나가 내게로 와서 피아노치는 여자분은 언제 오느냐고 물었다. 갑자기 그녀의 심금을 울리는 피아노 연주가 듣고 싶다며 괜한 너스레를 떨었다.


 “그런데 저 두 분은 누구세요? 처음 보는 사람들인데…….”


 “누구겠어요. 걸어 다니는 우리들이 안주지, 척 보면 몰라요?”


 “그래요?근데 무슨 좋은 일이 있나봐요. 다들 기분이 좋아 보이는데.”


 “좋은 일은 무슨……. 이렇게 한 판 풀고 내일부터 또 잘 해보자는 거죠 뭐. 저희 사장님이 왕년에 피아노를 아주 잘 치셨대요. 그래서 제가 특별히 이리로 모셨죠. 매일 밤 블루에 가면, 훌륭한 피아니스트를 볼 수 잇다고 했더니 아주 좋아하시더라구요.”


 그는 내게 점수 좀 확실히 따게 빨리 은수를 불러 달라며 애원을 하고 라나이 섬으로 돌아갔다.


 난 은수를 부르지 않았다. 오늘 그녀는 블루에 오지 못 한다.


 나는 라나이 섬으로 가서 블루를 처음 찾은 손님들에게 인사를 했다.


 두 영업 사원들의 상사는 유순한 웃음으로 내게 답례를 했다.


 “피아노는 멋으로 갖다 놓은 겁니까? 왜 피아노치는 사람이 안보여요?”


 김사장이라는 사람은 오랜만에 닥친 설레임을 애써 누르며 곁눈질로 피아노를 흘끔거렸다. 그럴 때마다 코끝에 걸려 있는 그의 은테 안경이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오늘 그 분은 못 오세요. 쉬는 날이거든요.”


 순간 그의 얼굴은 아쉬움과 낭패감이 번갈아 교차했다.


 “그래요?”


 “혹시 피아노 치고 싶은 분이 계시면 저 곳으로 올라가 보세요. 악본는 의자 밑에 있고, 또 블루에서는 모두 저 무대의 주인고이 될 수 있으니까요.”


 처남이라는 성부장과 내게 다녀갔던 영업사원이 동시에 김사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라나이 섬에 승전보처럼 울리는 우렁찬 환호성이 김사장의 등을 떠밀었다. 머뭇머뭇거리며 손을 허공에 저으면 저을수록 그의 얼굴은 더욱 붉어져 갔다. 블루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아낌없는 격려의 박수를 보냈고, 누군가는 호루라기 소리 같은 휘파람을 불었다. 라나이섬에 남은 세 남자의 시끄러운 ‘브라보’가 마침내 김사장의 용기에 한 몫을 했는지, 김사장은 초등학교 학예회의 무대에 서는 소년처럼 부끄럽게 걸어 나갔다.


 그는 윤기가 반지르르한 피아노의 뚜껑을 올려 젖혔다. 블루의 푸른 조명이 그의 떨리는 눈동자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삶에 지치고 피곤한 주름 몇 올이 푸른 불빛 아래서 바다의 수면처럼 팽팽해졌다. 숨을 한 번 길게 고르고는 바들바들 떨리는 손가락을 건반위에 놓았다. 그는 눈을 지그시 감고 건반 위의 손을 스르르 움직였다.


 ‘엘리제를 위하여’


 너무나 오랜만에 듣는 곡이었다. 그는 몇 십여 년의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수줍은 사춘기 시절로 돌아간 듯했다. 여학교에 다니는 단발머리 여학생을 짝사랑했던 열정으로 건반 하나하나를 튕겼다. 블루에 까리는 피아노 소리는 하얀 자갈이 되어 이 곳에 모인 사람들의 마음을 휘저었다. 라나이섬 남자들의 평화로운 휴전, 내일 또 지긋지긋한 일상으로 돌아가 한바탕 전쟁을 치를지 모르지만 적어도 오늘은 가슴에 달린 계급의 뱃지를 떼어 내고 하나의 자연인으로 돌아갔다. 서로 할퀴고 물어 뜯은 상처들마저 세 살을 돋게 하는 곳, 블루의 밤은 너무나 고즈넉하게 저물어 갔다.


 “엘리제를 위하여, 블루를 위하여. 건배!”


며칠 후였다. 블루에 들어오니 내 이름이 적힌 카드와 꽃이 테이블위에 놓여 있었다. 장미 , 백합, 튜울립, 히야신스……가 어지럽게 한데 뒤섞여 묘한 향기를 풍기는 꽃바구니였다. 남편이 보냈을 거라며 카드를 열었는데 뜻밖에도 그 카드의 이름은 낯설었다. 그리고 짧은 메모가 반듯이 눌러쓴 글씨체로 또박또박 적혀 있었다.


 ‘블루에서 피어노를 친 그 밤, 다시 피아노가 좋아졌습니다. 바이엘을 처음 시작했던 설레임으로 살고 싶어졌습니다. 가끔 블루에서 피아노 연주를 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부탁드립니다.’


 알 수 없는 즐거움에 가슴이 팽창했다. 슬픔과 기쁨, 또 외로움이 때때로 그들의 가슴을 범람하면 누군가는 그 봇물처럼 터져 나오는 물줄기를 담아줘야 하므로 블루는 매일 문을 열고 그들을 기다렸다. 블루라는 섬은 그들의 축 늘어진 영혼을 끄집어내어 말끔히 빨고, 햇살 좋은 볕에 널어 맑은 공기를 실컷 쏘이게 했다. 팔랑팔랑 넘나드는 바람으로 새 옷을 갈아입은 사람들은 어느새 말쑥해져 블루를 떠났다.


 티끌 한 점 묻히지 않고 돌아가는 그들의 발뒤꿈치를 보노라면 가슴이 두근거렸다. 엄마 뱃속에서 막 나왔을 대의 보드라운 맨발이 자꾸 내 눈에 밟혔기 때문이다.


9월이 띄엄띄엄 가을바람을 끝자락에 묻히고 이 도시를 훑고 다녔다. 사그라드는 여름의 햇살은 따갑지도 쓰라리지도 숨이 막히지도 않았다. 이가 뭉턱 빠져버린 늙은이가 아무리 살갗을 질겅질겅 씹어대도 그저 조금 간지러운 것처럼 9월의 태양도 그저 조금 가려울 뿐이었다. 여전히 블루의 오후는 손님을 맞이하는 채비를 분주 했고, 정훈과 은수는 블루를 찾는 모든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섬의 이름을 그들의 가슴팍에 달아줬다.


난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이 조금씩 다르게 보였다. 사람이 섬이었다고, 그래서 우리는 절대 다가설 수 없다고 말했다. 섬을 바라만 보았던 나, 이젠 섬과 섬 사이에 다리를 놓고 싶다. 그리고 건너가고 싶다. 그 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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