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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국가 1급화가 락근흥 스토리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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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Angel 댓글 0건 조회 635회 작성일 17-02-05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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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12년전인 2002년 양력설로 거슬러올라간다. 당시 조선족녀류화가이며 《인민중국》잡지사 미술편집으로 근무하고있던 김선씨는 양력설휴가차 연변으로 나왔다가 북경으로 돌아가는 기차에서 우연하게 안도현 삼도향 북도촌에 거주하고있는 한 촌민을 만나게 되였다. 김선씨는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서 북도촌의 피눈물 나는 이주사, 개척사를 대체적으로나마 료해하고 북도촌에 관심을 갖게 되였다.

2002년 음력설, 김선(金善, 1959년 출생)씨는 남편이며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화가 락근흥(骆根兴, 한족, 1955년생)과 함께 안도현 삼도향 북도촌에 도착하였다. 그들의 계획은 시초부터 주도면밀했다. 목적은 단 하나, 3년간의 시간을 들여 유화인물, 풍경사생, 수채, 소묘, 촬영, 동영상, 문자, 록음 등 부동한 방법으로 북도촌의 풍경과 북도촌의 어제와 오늘을 립체적으로 생생하게 재현하여 세인들에게 널리 알리는것이였다.

연길에서 출생한 조선족녀류화가인 김선씨는 연변인민출판사에서 미술편집으로 근무하다가 1993년부터 2년간 중앙미술학원 연구생반에서 학업에 정진했고 졸업후에는 《인민중국》잡지사에 전근하였다. 그는 지금까지 북경에서만 2차의 개인전을 개최할만큼 미술계에서 알아주는 베테랑화가로 《중국문화보》, 중앙텔레비죤방송국, 《중국미술잡지》, 《중국당대예술》 등 국가급매체에서만 10여차나 그의 사적을 보도했고 2008년에 그의 미술작품들은 《중국당대예술명가정품․김선권》으로 출간되였다.

김선씨의 남편 락근흥은 중국미술가협회 리사이며 국가1급미술가로 중국인민해방군 총장비부 정치부 문예창작실 전직화가로 근무하고있다. 그는 중국미술계의 거장으로 “대적을 앞두고”, “서부년대”, “서부기억” 등 중국미술사상 기념비적인 정품들을 창작하여 국내외 학술계와 미술계로부터 광범위한 주목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는 지금까지 여러차례 전국과 전군 미술전람회에서 대상을 수상하였으며 다수 작품이 중국미술관, 중국군사박물관에 소장되여있다.

김선부부는 북도촌에 도착한후 촌장의 안내로 홀로 사는 성이 옥씨인 할머니의 집에 려장을 풀었다. 할머니는 “와따메! 누가 웬 귀인을 우리 집에 보냈당게.”라고 전라도 사투리로 김선부부를 반갑게 맞이하고는 금방 점심식사후라 남은 밥과 반찬이 있었지만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새로 밥을 짓고 반찬을 만들어 먼곳에서 온 손님을 각근히 대접하였다.

이튿날 이른 아침, 김선부부는 마을어귀에서 마을풍경사생에 나섰다. 한겨울 해뜨기 직전, 시골의 한기가 살을 에이는듯 파고들었다. 주인집할머니는 아궁이에서 벌겋게 달아오른 숯을 꺼내여 화로에 담아 말없이 김선부부의 옆에 슬그머니 가져다놓았다. 락근흥은 손님을 환대하는 조선족의 아름답고 소박한 풍속에 가슴이 뜨거워나고 목이 메였다.

저녁이면 김선부부는 이민 1세들의 가정을 방문하면서 사진, 록음, 동영상 등 방식으로 북도촌의 이주사, 개척사를 수집하였다.
1937년, 일제 만척주식회사에서는 전라남도, 전라북도에서 감언리설로 이주민을 모집하였다. “북간도는 땅이 끝간데 없이 넓고 기름지다. 북간도의 감자는 목침만큼 커서 베고 자도 되고 옥수수는 대들보를 삼아도 된다.” 당장 쌀독에 거미줄을 친 가정들에서는 이런 감언리설에 혹하지 않을수 없었다.

헌데 이주민 100세대가 오늘의 북도촌에 도착해보니 영 딴판이였다. 어둡고 침침한 산골인데다 삼림이 우거져 하늘을 가리웠고 몸을 뉘울 집 한채조차 없었다. 이민 1세대들은 먼저 매호마다 4칸짜리 초가집을 짓고 도로를 뺐다.

일제는 마을청년들을 강제로 자유대라는 조직에 참가시켰는데 농망기에는 농사를 짓게 하도 농한기에는 군수훈련을 시켰다. 또 마을 주변에 토성을 높게 쌓고 네곳에 망루를 세우고 항일유격대를 경계하였다. 당시 송강진은 안도현의 소재지로서 일군헌병, 만군경찰 등 일제의 통치기구들이 많았다. 따라서 송강진의 주변마을들은 일제의 동북침략을 돕기 위한 군소점(军消点)으로 전락되였다. 촌민들은 농사외에도 머루잎따기, 송근유채집 등 일제의 군수품장만에 동원되였는데 아침 일찍 집을 나서면 날이 어두워야 집으로 돌아올수 있었다.

당시 북도촌의 촌민들중에서는 따스한 남쪽지방에서 북방지구의 추운 곳에 와서 어렵게 생활하다보니 굶어 죽고 얼어 죽고 병들어 죽은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출생한 어린이중에서 생존한 어린이는 극소수였다고 한다.

1945년, 일제가 투항하자 북도촌에서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바람이 불어 북도촌에 남은 원주민은 3분의 1정도에 지나지 않았다. 1946년 8월에 중국공산당이 령도하는 부대가 송강진에 진출하면서 공작대가 마을에 내려오고 토지를 분배하면서 촌민들의 생활이 펴이기 시작했다.

김선부부는 2002년 음력설부터 2004년 음력설까지 3년간 도합 네차례 북도촌에 다녀왔다. 그들부부는 매번 10여일이상씩 북도촌에 머물렀는데 남방사람인 락근흥은 음식과 기후에 적응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그들부부는 합심하여 악조건을 극복하고 당초에 계획했던 소기의 목적을 모두 달성했다. 락근흥은 북도촌을 소재로 100여폭의 사생작품과 100여폭의 소묘작품을 창작하고 28폭의 초고를 완성하였으며 김선씨는 소중한 력사자료들을 수집하여 《북도촌사》를 펴냈다.

북도촌의 이민사와 개척사를 담은 김선부부의 귀중한 미술작품들과 영상, 음성, 문자 자료들은 중국조선족의 귀중한 문화자산으로 갈수록 그 빛을 더해갈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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