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짤깍 카메라- 문학시대 김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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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ngel 댓글 0건 조회 77회 작성일 24-05-13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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높은 돌층계를 오르고 있다. 미국에서 온 선교사가 세웠다는 채플이 층계 꼭대기에 보인다. 담쟁이에 가려서 모습이 확 드러나지는 않는다. 채플 창문 앞으로 백목련과 홍목련도 보인다. 저 두 나무는 따로 피었다. 흰색 꽃이 지고 나면, 붉은 꽃이 피었다.
"
저기 가는 저 여자가 이번에 새로 온 교수야"
친구가 말한다.
그녀의 생머리 단발과 미디스커트가 찬 공기에 들썩인다
"
우리 과 출신이야. 우리보다 학번이 몇 개 위야."
너무 젊다. 머리에서 철커덕하고 네거티브 필름이 돌아간다.
 "
남편도 S 대 교수래. 아이는 시댁에 보내서 키웠고, 둘 다 미국 유학파... "
허리가 잘록한 투피스를 입고 타자기를 두드리는 여성의 사진이 홍보되던 시절이다. 사각의 기계 속에 갇힌 제복의 타이피스트는 어딘가 별로였다. 여교수의 흐트러진 치마에서 컴퓨터, 교육공학, 선진 학문의 냄새가 풍겼다. 신촌 캠퍼스에서 공짜로 관람한 막간극은 이렇게 나의 머릿속 카메라에 담겼다.

1970
년대 한국은 잘살아 보고 싶은 나라였다. 비애와 희망을 넣은 된장찌개가 보글보글 끓고 있었다. 고속도로를 세워서 산업 발전과 일일생활권을 달성했다고 아버지는 대통령 표창장을 받아 오셨다. 미국의 팝문화가 쏟아놓는 이국적 설렘이 거리에서 넘실거렸다. 다방에서 틀은 팝송은 비트를 주체 못 해서 거리로 뛰쳐 나왔고,쏟아져 나온 서구의 신간은 명품 핸드백처럼 나의 가슴에 들려 있었다. 아는 것도 없으면서 친구들은 가슴이 탁 트이는 나라라고 했다. 보이는 대로 믿던 순수의 시대랄까, 무지의 시대였다. 막간극에서 본 여교수의 모습은 시대를 헤매고 있는 나에게 본드처럼 달라붙었다. '남편도 교수래' 그 말은 본드의 냄새처럼 떨치기 어려웠다.

호텔 커피숍이다. 장발일 듯 말듯 경계가 모호한, 홈스펀 재킷을 입은 남자의 뒷모습이 들어온다. 그를 향해 어머니는 똑바로 걸어간다. 나는 그가 책을 보고 있는 것을 놓치지 않는다. 자투리 시간에도 책을 보는 사람이라면, 그 여교수의 남편 같은 학구파일 것이다. 엊그제 캠퍼스에서 시작된 필름은 두 번째 장면을 촤르르 돌린다. '저녁을 먹고 치웠을 거야.' 전구 밑에서 공부하는 나와 남자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어른거린다. 신랑이 한진희를 닮았다는 어머니 친구들의 시샘 섞인 부러움을 받으며, 어머니는 나를 미국행 비행기에 밀어 넣었다. 어머니는 선망의 나라에 딸이 간다니까 선뜻 승낙했다. 시어스 로백(Sears Roebuck)의 카탈로그 모델처럼 차린 어머니의 흑백 사진을 본 적이 있다.

웨스트 버지니아 산골의 학교 마을에 왔다. 흑발 은발이 섞인 쏫카트에 굵은 안경은 쓴 엘레인 교수는 첫 수업 후 나를 불렀다. 강의 노트를 줄 테니 복사해서 수업을 들으라고 했다. 이렇게 친절할 수가. 미국 교수들은 다 이렇구나. 이런 배려가 있으니, 다들 공부하고 학위 따는구나. 다음 학기 수업은 유아 심리학이다. 은발의 올린 머리 여교수 파삐에는 매력적인 프랑스 분위기를 풍겼다. 그의 노트도 엘레인 교수처럼 기대했지만, 수업을 두세 번 지나도 말이 없었다. '제가 강의를 어떤 부분은 놓칠 것 같아 걱정입니다'를 직역했다. 연구한 결과물이 'I am afraid that I miss your lecture'였다. 준비한 말을 단숨에 읊조렸다. 파삐에 교수의 안색이 확 변했다. '수업을 빠지면 너는 낙제할 것'이라고 한다. 강의를 못 알아들어도 놓치는 거 아닌가? 나는 나를 잘못 대변하고 있었다. 치명적 실수를 깨달은 것도 한참 지나서였다.

햇살이 뜨거운 캠퍼스에 칸나 같은 팔 다리를 내 놓은 미국인 학생들이 걸어 다닌다. 도서관 코너에  길쭉한 열차 같은 식당 캔틴도 있다. 뮤직 박스에 동전을 넣으면 한국에서 설레며 들었던 존 덴버의 '웨스트버져나, 얼 머스트 헤븐' 노래가 나왔다. 나는 비밀을 간직한 싱글 유학생이었다. 결혼이 뭐 그리 신나게 자랑할 일도 아니니까. 그 날도 수업을 마치고 남녀 학생들과 섞여서 캔틴으로 향하고 있었다. 저 앞에서 차 한 대가 천천히 오고 있다. 남편 차 무스탕이다. 스카프를 휘날리는 엄앵란을 태우고 신성일이 몰던 차라고, 스모키 마운틴으로 가는 신혼여행 중에 남편이 말했지만, 그런 말은 들어오는 대로 튕겨 나갔다. 나는 남편의 차에 올라타지 않았다. 서먹하기는 남편이나 클리스메이트나 마찬가지였다.

산속의 분지 마을은 맹렬한 더위에 포위된 듯했다. 나는 짧은 반바지, 얇은 티셔츠 차림으로 원룸 아파트에 앉아 있었다. 문이 똑똑하길래 남편인 줄 알았다. 문을 여니 옆 방에 사는 남학생이 서 있다. 야유회에서 본 적이 있어서 낯선 사람은 아니다. 남편이 없다고 했는데도, 잠깐 들어가도 되냐고 하면서 밀고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든 생각은 밖으로 나가야 한다는 것, 파킹장에  있는 남편 차를 가르치며, 운전을 가르쳐 달라고 했다. 그날따라 남편은 수업을 마치고 부리나케 들어왔다. 두시간이면 소문이 퍼지는 한인 사회에 전리품을 보이듯 인사시켰던, 운전도 못 하는 여자가 재산 일호 무스탕과 함께 증발했다. 커다란 창문에서 눈을 부릅뜨고 살피던 남편은 옆방 남학생과 내가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나는 끼 많은 여자가 아닌데 그는 믿지 않았다. 같이 저금해 놓은 신뢰도 별로 없었다. 언어가 같은 남편에게도 나를 제대로 대변하지 못하는 나는 절망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트램을 타고 캠퍼스를 빙빙 돌다가, 텅 빈 스타디움에서 내렸다. 풋볼로 이름을 떨치는 학교다. 학생들이 주말 파티에 정신없을 시간이다. 큰길 건너 하디에서 불빛이 반짝인다. 어머니가 저만치 앉아 있다. 집에 가자고 손짓한다.
"
엄마야? 어떻게 여기 왔어?"
반갑고 놀라웠다. 내가 다가가자 엄마는 도망쳐서 없어졌다. 착각이었다. 나를 믿어주는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타운 어디에 있을 그레이하운드 역을 우선 찾아야 했고, 하이웨이를 두시간 달려서 피츠버그 공항, 뉴욕
공항, 그리고 한국행 비행기에 오를 자신이 없었다.

애팔래치아 산골 마을은 돌아 나가는 길이 없었다. 얇으막한 구릉 위의 마을 사람들은 별로 움직임이 없었다. 당시는 몰랐지만 아마도 가난과 술과 마약에 취해 있었을 것이다. 드문드문한 인가를 지나가면, 판자로 대어 놓은 구멍가게, 보험 회사, 타이어 가게들이 서로 의지하면서 버티고 서있다. 이 탄광 마을은 구름과 비에 가려서 분간되지 않았는데, 남편과 대치 중인 한랭전선 탓도 있었을 것이다. 한국에서 가져온 머릿속 카메라는 흐린 날이 계속되자 렌즈를 닫아 버렸다. 그러자 찰칵이 아닌 30분짜리 비데오 리와인드가 나타났다. 한국의 어느 날 오후였다.

아버지는 가끔 어머니를 대동하고 외출을 했다. 부모님의 차려입은 옷과 긴장감이 도는 표정에서 나는 중요한 사안임을 짐작하곤 했다. 그 주말 오후, 외출에서 돌아온 부모님의 기분이 모처럼 좋다. 밖에 나간 일이 잘 풀렸나 보다. 아버지는 아이들을 불러 모았고, 어머니는 파인애플을 먹자고 했다. 안방 벽장은 허락 없이 열면 안 되는 곳이다. 맏딸인 나는 그곳에 특사처럼 들어가 바닥에 있는 깡통 두통을 들고나왔다. 어두운 선반에 비닐에 말린 물건들이 어머니의 불만처럼 널려 있었다. 가끔 밖에서 무엇인가를 사들고 오는 어머니가 아버지의 눈을 피해 숨겨두는 곳임은 눈치채고 있었다. 아버지 월급으로 살기 힘든 어머니는 달걀 한 개도 아껴가면서, 외할아버지의 유산으로 경제적 기반을 만들었다. 어머니가 아버지의 월급 범위를 넘어가는 물건을 사면, 아버지는 허례허식이라고 몰아갔다. 빨강과 검정 글씨의 근검절약 포스터가 나돌던 시절, 공무원인 아버지의 목이 잘린다는 것이다. 한번은 어머니가 제너랄 일렉트릭 미제 냉장고를 구입했다. 커다란 두문 짜리 냉장고가 들어오니 나는 신이 났다. 일꾼들이 냉장고를 설치하느라 부산스러운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일찍 퇴근하셨다. 아버지에게 현장을 들켰으니 어머니는 자백해야 했다. 가격을 1/10쯤 낮추어 누가 쓰던 중고라는 대답에서 부모님의 싸움은 끝이 났다. 아버지가 그 말을 믿었는지는 알 수 없다

"
아무개야, 나오너라. 아무개는 어디 있니이. 파인애플 먹자아"
아버지의 목소리에 모처럼 장난기가 나오면, 어머니는 긴장이 풀어지면서 싫지 않은 웃음을 보인다. 각자 무엇엔가 몰입해있던 형제들은 마지못해서 하나 둘씩 나오기 시작한다. 한 애는 아예 방문을 닫아건다. 여섯 식구의 전선은 일치하지 않았다. 부재(나는 학교로 도서관으로)와 폐쇄(문을 잠가 거는 여동생)와 어긋남(반항하는 외아들)의 종합 선물 세트 같은 자식들 포함해서, 부모님은 생활과 서로에게 지치는 듯했다. 퇴근하는 아버지의 어깨는 돌이 들어앉은듯 했고, 현모양처로 자처하는 어머니는 자식들의 문제를 아버지에게 말하지 않았다.

큰딸 하나라도 치우고 싶은 미묘한 눈치가 보인 것은 이 시기였다. 머리가 컸다고 존재감이 탱천한 자식들, 홈을 홈으로 만들었던 네 자식의 구성원 자격이 만료되는 시점이 왔다. 때가 됐으니 길을 떠나라는 암시가 내게는 충격적이었다. 이제 부모님 집이 내 집이 아니란 건가? 한번 거절은 영원한 거절이다. 그렇게 떠난 집인데, 지금 내가 남편을 떠나 돌아간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결정을 어머니에게 밀어부쳤던 아버지는 얼음에 띄운 마티니 석 잔을 부딪쳐 가면서, 아파트 불빛을 내려다볼 것이다. 평화로운 불빛 아래 잠든 사람들처럼 딸이 남편에게 돌아갈 것을 바랄 것이 뻔했다. 그것이 비록 전구의 눈속임일지라도 말이다. 나는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학교 촌을 떠나는 날이다. 존 덴버가 부른 '얼 모스트 헤븐, 웨스트 버지니아'는 나에게는 틀린 가사였다. 남편은 침을 손바닥에 뱉어서 엘에이와 뉴욕 중 결정했다. 장발의 머리를 날리며 비즈니스의 메카 뉴욕으로 간다. 유홀 트럭 뒤에 매달은 파란색 왜건은 까딱거리며 충실하게 따라온다. 늘어난 식구를 옆에 태우고, 해 보고 싶었던 로우드 트립, 아메리칸의 흉내라도 내보고 싶은 것일까. 다른 학생들은 교수 자리를 찾아서 한국으로 돌아갔지만, 남편은 처음부터 관심이 없었다. 선볼 때 나를 교란시켰던, '학구적'인 책은, 시아버지의 부탁으로 산 이스라엘 여행안내서였음을 내가 알았을 리 없다

도시로 나온 파란색 왜건은 삐걱거렸다. 타이어에 구멍이 뚫리고, 길에서 멈춘 적도 있지만, 굴러가긴 했다. 우연, 착각, 실수, 오해는 타이어에 이미 잔뜩 묻었고, 그 위에 새로운 더께가 또 묻었다. 결혼의 제도 속에 들어간 나는 새로운 정체성을 만들어갔다. 한국에서 대학 졸업반 때, 층계를 오르면서 보았던 채플 벽, 그리고 우연히 날라와 자리 잡은 담쟁이가 생각났다. 영역 싸움은 어디에나 존재한다. 틈을 비집고 서서 덩굴을 척 올리고, 그렇지! 그렇게조금씩 매일 매일! 담쟁이와 담벼락은 십년의 시간이 지나니 공존의 모양새를 갖추어갔다.

그 옛날 단발머리 여교수의 필름은 재현되지 못했다. 한국으로 돌아오겠다고 한 남편은 생각이 바뀌었고, 나 역시 아이가 학교에 입학하니 생각이 달라졌다. 나는 미국 고등학교에서 제3국 출신의 학생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ESL 교사가 되었다. 한국인에게 강남 일 학군으로 알려진 이 학교에서, 한국인 부모들과 소통의 문제는 매일 벌어지는 일이었다. 수업 중에도 통역하라고 연락이 왔다. 영사관을 통해서 한국의 교육감 그룹이 학교를 방문하기도 했다. 나의 존재감이 발휘되는 날이다. 나는 베이지색 정장 투피스를 입고, 교장과 같이 그들을 맞이했다. 한국인 정체성이 이렇게 나의 밥줄이 될 줄은 몰랐다.

휴유, 퇴근하고 집에 왔다. 문을 잠그니 미국은 사라진다. 아침에는 저만치 떠 있는 섬나라 미국에 출근했다가, 저녁에는 65마일로 달려서 내 집 한국으로 돌아왔다. 고무줄 바지로 갈아입고, 김치를 먹고, 입을 덜 벌려도 되는 한국말로 이야기했다. 나는 이렇게 매일 저녁이면 한국에 돌아오는데, 한국은 앞걸음 쳐서 나를 지나쳐 가버렸다. 내가 살던 강남은 아시아 신흥 도시 어디쯤으로 보이고, 친정 식구들과 대화는 나무에 걸린 연처럼 파닥거리고, 낯선 개념이 등장하는 친구들과의 수다에 입을 다물곤 했다. 비행기 타고 가져온 나의 정체성은 유효 기간이 끝나고 있었다.

그렇다고 미국을 제대로 아는 것도 아니었다. 어느 날, 동료 교사에게 학군을 따져서 좋은 동네로 이사한다고 말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뜨면서 '교육을 잘 시키고 싶으면 사립 학교'를 보내야 한다고 말한다. 꿈의 집을 막 장만한 나에게는 무척 불편한 의견이다. 동양인이 별로 없는 이 동네에 와서야 알게 된 사실은 부모가 친구래야 내 아이가 생일에 초대받고, 부모가 경기를 지키고 있어야 내 아이가 운동장에서 뛴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쩌랴? 나의 뇌는 주인이 감당 못 할 정보는 알아서 없애 주었다. 군더더기 없는 공정한 나라라는 출처가 불분명한 미국 신화는 대체 어디에서? 엉터리 카메라를 탓 할 수 밖에.

2020
년에 팬더믹이 시작되었다. 귀향한 성인 자녀들은 부모가 차를 못 쓰게 한다고 불평하고, 부모는 새벽부터 집이 술렁거려서 힘들다는 글이 인스타그램에 올라온다. 근교의 집들은 웃돈을 언고라도 도시를 탈출하는 구매자에게 돌아간다. 아파트에서 살던 아들 역시 집을 찾아 오픈 하우스를 다닌다. 집주인들이 대부분 백인 할머니라고 한다. 이리저리 물어서 인종을 알아낸 할머니들은 일본에 놀러 간 적이 있고, 친척 오빠가 한국 전쟁에 참여했다고 수다를 늘어놓지만, 미국에서 태어난 아들은 그들의 코멘트가 불만스럽다. "So what? They are such a racist!"

몇 달 동안 집을 보던 아들에게 연락이 왔다. 체리타운에 집을 샀다고 한다. 주민끼리 연대감이 강한 듯했다. 주민들만 사용하는 SNS에 필요 없는 물건의 사진을 올리면 십 분 만에 와서 가져간다고 한다. 자기네 식탁 위의 샹들리에도 공짜로 얻었다고 자랑이 한가득이다. 그런 아들의 웃음조차 나는 힘들어 보이지만, 나와는 다른 정체성을 가진 이세가 아닌가. 새벽에 나가서 정원일을 하는 남편은 이웃들과 친하게 말을 나누었지만, 나는 하이를 해야 하나 망설였고, 누가 저만치서 걸어오면 방향을 바꾸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나에게 어디 사냐고, 미스터 킴 집에 사냐고 묻기도 했다.

바이러스에 쫓긴 사람들이 집으로 숨어들자, 거리가 텅텅 비었다. 내가 외면했던 문제들이 복면을 쓰고 거리로 뛰어나왔다. 동양인이라고 몰매를 맞을지도 모르고, 낯선 자를 경계하는 총부리가 있는 창문을 처음으로 의식했다. 새벽에 쓰레기를 치워가는 흑인이 처음으로 보인다. 저녁 6시 반 뉴스를 독차지하는 금발의 수탉 머리 남자의 영어가 조야하게 들렸다. 판디스틱, 뷰티풀, 나이스, 의미 없는 형용사를 남발한다. 국회에서 표결한다는 안건 속에, 경제인들의 애매한 뉘앙스에 내 생존이 걸려 있고, 내가 투표한 대통령이 오벌 오피스에 앉아있다. 미국에 대한 무관심이 와락 관심으로 변한 시점이다. 애매했던 정체성이 확실하게 비집고 들어온다.
"
왜 나는 이런 것들에 무심했을까? 대체 나는 어느 나라 사람이었을까?"
"
힘든 이야기는 두 사람 중에 한 사람만 알아도 돼. 이제라도 알면 됐어." 남편이 말한다.

내가 사는 167번지는 떨어진 섬인 줄 알았는데, 이번에 내 집도 휘청거린 것을 보면, 나는 미국 본토에 살고 있음이 분명하다. 남편은 나보다 앞서서 혼자서 고민하고 견뎌낸 시간이 분명 있었던 것 같다. 붙박이장 안에서 살 수는 없는 일, 정체성이란 자꾸만 변하는 것인가? 사십 년 전, 집을 떠나지 않으려는 나를 밀어서 길에 세워준 부모님, 그 손에 무슨 수호봉처럼 들려 있던 엉터리 카메라. 초점을 찾지 못해서 흐릿한 사진을 연출했던 구식 카메라였다. 시간이 지나자 엉터리였음이 판명되었지만, 그것이 없었으면 나는 떠나지 못했을 것이다.

동네 골목에 나무가 하나 서 있다. 나무에 흰 꽃과 분홍 꽃이 반반씩 핀다. 불퉁한 밑둥하며, 꼬부라진 가지하며, 따로 피었던 고고한 목련과 비교하면, 자태가 영 별로다. 두 꽃이 한 나무에 공존하는 것이 신기하여 자꾸 쳐다본다. , 저기 코너집 할머니 다이안이 걸어오네. 나는 손을 흔든다. 그녀는 내가 어디 사냐고 이제는 묻지 않는다. 나는 모퉁이를 돌아서 내 집으로 돌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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