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어머니의 기다림 [중국/홍이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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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210회 작성일 10-04-26 14: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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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홍이숙] 어머니의 기다림
올해의 청명은 일찍 찾아온 것 같다. 대지에 봄빛이 무르녹고 조심스레 눈을 뜨는 꽃봉오리가 유난히 아름다운 계절이다. 그런데 이처럼 아름다운 봄날에 어김없이 더해지는 춘곤증은 왜서일까?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춘곤증 때문에 밤마다 잠을 설치는 것이 이젠 생활이 지장을 받을 정도였고 그래서 약국을 집 드나들 듯 한다.어머니의 기다림
춘곤증에 시달리다 지쳐서 깜박 졸았는데 꿈결에 어머니를 만났다. 머나먼 시골의 오붓한 고향집 채마밭 앞에 간신히 서시어 주름살 가득한 이마 위에 손을 대고 깊숙히 꺼져 들어간 두 눈을 찡그리고 기차역 쪽을 바라보시며 누군가를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꿈 속에서 본 어머니의 주름살은 기다림의 역사로 안겨 왔다. 세월은 기다림으로 살아온 어머니의 얼굴에 인생의 고달픈 연륜을 그어 갔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대로 한 줌의 흙으로 사라진 어머니가 너무 그립다. 올해 초봄에 어머니는 먼저 가신 아버지를 따라 저 먼 하늘 나라로 가셨다.
청명날 밤, 나는 이 곳 중국의 한족 사람들 습관대로 십자거리에 앉아 누런 종이 돈을 태웠다. 어머니의 가슴에 근심만을 더해 온 이 딸의 죄를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서. 엄마!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소리내어 어머니를 불렀다.
만약에 나에게 돈이 많았더라면.
만약에 내가 선생 노릇을 안 했더라도.
핑계도 안 될 만약으로 어머니 생전에 해 드리지 못한 걸 미봉하려했던 내가 너무 초라하다.
이 딸을 남부럽지 않게 키우려고 무더운 여름에도 가마니를 짜시고 추운 겨울엔 짠지 장사를 하시면서 개학 때마다 이불짐을 손수 머리에 이시고 역전까지 바래다 주시던 어머니, 여섯 남매 중에서 유독 나에게만 용돈을 많이 주셨기에 나는 늘 형제들의 질투를 받았었다.
사범대학을 졸업하고 내가 길림시에서 수천 리 떨어진 하얼빈으로 전근되어 학교에서 무용 교원 노릇을 한 지도 어언간 20여 년이다. 예술제와 축하공연은 왜 꼭 여름 방학 기간에만 하는지? 애들과 쿵짜짜 하다 보면 한 달 휴가도 훌쩍 지나고, 나는 바쁘다는 핑계로 어머님께 전화도 몇 번 못한다. 그러나 어머니는 혹시나 하는 마음이신지 채마밭을 다루시다가도 허리를 펴시고 한참씩이나 사라져 가는 기차를 지켜보신다고 한다(친정집 마당에서 기차역이 보인다). 그것도 한 해가 아닌 십여 년을 그렇게 해 오셨다. 어쩌다가 고향 집에 들르면 어머니는 바쁜데 왜 왔냐? 곧 개학할 텐데.라고 하시지만 나는 어머니의 얼굴에서 무척 기다리셨다는 것을 읽을 수 있었다. 겨우 하루 이틀을 어머니와 함께 지낸 내가 떠날 채비를 하면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행장을 챙겨 주셨다. 나는 오는 방학에는 꼭 일찍 와서 여러 날 머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그 약속은 마냥 물거품으로 돌아갔다.
흔들리는 차창을 물끄러미 내다보며 나는 애써 눈물을 감추려 했다. 하지만 서운한 눈빛으로 홀로 플랫폼에 서 계시는 어머니의 모습에 자꾸만 눈물이 앞을 가리운다. 순박한 사랑과 말없는 그 행동에 실로 목이 메인다. 어머니만이 이 세상에서 가장 어질고 자애로우시며 모든 고귀한 품성을 한몸에 지니신 분이라고 외치고 싶다.
17세의 꽃나이에 고국을 떠나 60여 년을 부득이 타향에서 살아오시면서도 자신의 삶에 만족해 하신 어머니이시다. 그 곱고 하얗던 어머니의 이마에 장마철의 물줄기가 흘러간 골짜기처럼 깊숙히 패인 그 주름 속에는 자식에 대한 무한한 뜨거운 사랑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서릿발 같은 위엄도 있었다.
작년 8월에 있은 일이다. 여름 방학 기간에 전국 소년아동예술제가 하얼빈에서 있었다. 나는 이번 여름 휴가도 어차피 고향에 다녀오지 못할 바엔 어머니께서 오시기를 바랐다. 어머니는 바쁜 나에게 짐이 된다고 고집을 부리시더니 그래도 딸이 보고파서였던지 오빠의 부축임을 받으며 하얼빈에 오셨다. 하지만 나는 공연 준비로 바쁘다 보니 남들이 다 가는 태양도 공원에도 어머니를 모시지 못했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깨우시는 소리에 일어나 보니 창 밖에서 구질구질 비가 내리고 있었다. 심한 척주병에 견주염까지 있는 나는 날씨가 흐린 탓인지 컨디션이 아주 안 좋았다. 그 날도 나는 늦어서야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헌데 웬일인지 집안의 물건들이 방 여기저기에 어수선하게 널려 있었다. 남편은 벽에 벽지를 붙이려고 그랬다는 것이었다. 나는 그만 화가 치밀어 손에 든 가방을 내던지면서 버럭 소리를 질렀다.
하필이면 엄마가 와 계실 때 할 건 뭐예요?
일요일과 방학도 따로 없이 돌아치는 나 때문에 집안팎 일을 혼자 도맡다시피 해야 하는 남편도 이젠 지쳐 있었다. 당신 돕지 못할 거면 신경 쓰지 마. 남들이 다 쉬는 방학에 무슨 춤이요. 매일 아프다, 힘들다는 소리 이젠 지겨우니 싹싹 걷어 치워. 나와 남편은 오래도록 음성을 높이며 다투었지만 어머니는 아무 말씀도 안 하셨다.
그 날 밤, 나는 왠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언젠가 아들녀석이 엄마, 방학간에 춤 배워 주면 교장 선생님이 돈을 더 많이 줘요? 하고 철없이 묻던 일, 가끔 잠자리에 누웠다가도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면 후닥닥 일어나 거울 앞에서 손발을 놀려 보다가 메모지에 적어 두던 일, 그런 나를 보고 제 정신이 아니라며 그놈의 춤 이젠 좀 그만 추라고 화를 내던 남편의 얼굴 그리고 돌도리가 잘 안 되는 애들에게 수없는 시범을 보여 주다가 발목을 다쳐 통통 부은 다리에 파스를 붙이고 침을 맞던 일들이 자꾸만 눈앞을 스쳐 지났다.
삼라만상이 깊이 잠든 밤, 나는 베란다로 나와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나는 무엇 때문에 이토록 힘든 교원 직업이 나의 유일한 선택이었는가 하고 생각을 굴려 보았다. 훈장 똥은 개도 안 먹는다.는데 교원직 가운데서도 제일 힘들고 애탄 무용 선생 노릇을 달갑게 하는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문득 눈앞에 귀여운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동자들이 나타났다. 저 하늘의 깜박이는 별 하나하나가 사랑스러운 아이들의 눈동자가 되어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저 별은 금영이 그리고 저 별은 미란이. 저 애들도 지금은 나처럼 춤 귀신이 되어 곳곳에서 오색영롱한 빛을 뿌리고 있지 않은가! 중국, 십삼 억 인구가 사는 이 넓은 세상에서 오직 우리 민족의 혼과 정을 담은 춤 하나만으로도 말없이 민족을 자랑하는 홍보대사들을 키우는 내가 아닌가? 나는 왠지 가슴이 뿌듯해 났다. 내 삶이 만족스러웠고 아무런 원망도 후회도 없었다.
이튿날, 나는 저녁 늦게야 지친 몸을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어머니께서는 책상서랍을 정리하고 계셨다. 어머니는 서랍에 가득한 빨간 영예 증서들을 보시며 물으셨다.
얘, 이게 다 뭐냐?
나는 영예증서들을 보는 순간 신기하게도 하루의 피곤이 싹 가셔지는 듯했다. 나는 내가 춤을 잘 배워 줘서 받은 상장이라고 했다. 어머니는 하나둘 세어 보시더니 이렇게 좋은 걸 왜 벽에 붙여 놓지 않고 서랍에 넣어 두느냐고 물으셨다.
엄마, 그런 걸 뭐 벽에 붙여 놓겠어요. 나는 전국 및 성, 시 예술 축제에서 받은 수두룩한 증서들을 어머니께 자랑스레 보여드렸다.
네가 이렇게 바쁘게 보내느라고 방학이 따로 없었구나. 어머니는 나의 손을 잡아 주셨다. 그런데 그렇게 인자하시던 어머니의 얼굴에 전에 없던 엄한 표정이 어려 있었다.
학교일 잘 하려면 몸과 마음이 다 편해야 하느니라. 그리고 가정의 소중함도 알아야지. 너 힘들다고 짜증내면 식구들도 힘들어지고 학교일 하는 데도 지장이 있을 게 아니냐?
엄마!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내렸다. 지금까지 쌓이고 쌓였던 피곤과 스트레스를 다 쏟고 싶었다.
예술제가 열리던 날, 어머니는 애들이 춤을 얼마나 잘 추는지 마치도 어릴 때의 내 모습을 보는 것 같다고 하시며 눈굽을 적시었다. 무대 위에서 내가 무용 창작 특등의 영예증서를 받아 안을 때 어머니는 또 한번 눈물을 흘리시었다.
저녁에 나는 난생 처음 꽃 한 다발을 사들고 집으로 갔다. 나는 어리광을 부리며 꽃다발을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드렸다. 엄마, 엄마한테 항상 죄송한 마음으로 살았어요. 어머니는 빙그레 웃으시며 그 꽃다발을 다시 내 품에 안겨 주셨다. 순간 나는 가슴이 뭉클해났다. 나는 꽃다발 속에 머리를 파묻고 애써 눈물을 감추며 그윽한 꽃향기를, 아니 어머니의 향기를 한껏 맡았다.
어젯밤 꿈결에 또 어머니를 만났다. 고향집 앞마당에 서서 기차역 쪽을 바라보시며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인간은 다 뭔가를 기다리며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하지만 어머니의 기다림처럼 초조하고 신성하고 커다란 그런 기다림은 세상에 없을 것이다. 이역만리 타국 땅에서 어머니는 뭘 기다리시며 살아오셨을까? 일제시대 때, 외할머니는 어머니가 종군위안부로 끌려갈까 봐 아버지와 벼락 잔치를 시켜 중국 땅으로 보내셨다고 한다. 1년 후엔 꼭 다시 고향을 다녀오리라는 꿈과 희망의 기다림으로 장장 60여 년을 살아오신 어머니.
그렇게 기다리다 기다리다 그 옛날의 어여쁘던 어머니의 얼굴에 세월의 연륜이 아로새겨지고 애타게 기다리는 어머니의 쇠잔한 모습에는 한 가닥의 그리움만 남으셨다. 다만 어머니라는 이유만으로 아픔도, 슬픔도, 미움도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쾌락도, 행복도, 애정도. 드넓은 흉금에 오직 식을 줄 모르는 사랑만이 흐르셨던 어머니의 마음은 정녕 바다이고 하늘이었다. 우리 민족의 수많은 어머니들이 다 이러하였기에 고향도 마을도 더 정답고 더 그리운 것이 아닐까?
하지만 지금, 어머니는 한없이 그리워한 사람도 그리고 미워하던 사람도 모두 그대로 남겨 두고 저 어둡고 낯선 곳으로 쓸쓸히 사라져 가셨다. 춘하추동 모든 것을 기다림 속에서 맞이하고 기다림 속에서 지새우시더니 이젠 너무 지쳐서 그만 가셨나?
나도 이젠 대학생을 가진 어머니다. 방학 때면 딸애가 오기를 초조히 기다리는 어머니다. 그래서 내 어머니께서 그 힘든 기다림을 왜 계속하셨는지? 뭔가 기다릴 이유가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란걸 이제야 조금 알 것 같다.
어디선가 향기가 느껴진다. 어머니의 향기가 먼 고향에서 바람을 타고 내 코로, 내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언제나 환하게 웃어 주시며 밝은 미소와 진실한 마음으로 내 인생에 불꽃을 지펴 주신 어머니, 먼 하늘 나라에서도 늘 지켜 주고 계시기에 나는 외로워도 서럽지 않고 넘어져도 아프지 않다.
나는 오늘도 무용실에 들어선다. 몸과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도 예쁜 자태를 뽐내는 무용수들을 바라보노라니 다시 한번 벅찬 보람을 느낀다. 그렇다. 나는 다음 세상에도 엄마딸로 태어나 무용선생님이 될 것이다. 왜냐구요? 한번 해 본 일이니까 더 잘할 수 있을 것이고 짬짬이 여가를 타서 어머님 뵈러 고향에도 자주 다녀오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면 어머니도 기다림에 지치시지 않을 것이고 나는 20여 년이나 지지 누르던 이 춘곤증 같은 병도 뚝 떨어질 것이 아닌가?
올 여름 방학에도 공연 준비로 눈 코 뜰 사이 없다. 하지만 마음은 항상 어머니가 기다리고 계실 듯싶은 고향에 가 있다. 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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