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이별 연습 – 임영숙 > 아메리카 이민문학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아메리카 이민문학


 

수필 [수필]이별 연습 – 임영숙

페이지 정보

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728회 작성일 10-04-01 17:53

본문

몇 해 전부터 한 올씩 눈에 띄던 흰 머리카락이 올해 들어 왼쪽을 중심으로 정신없이 번져나갔다. 나이를 생각하면 당연히 있어야 할 흰 머리카락이지만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일은 쉽지 않다.

큰딸이 제 어미 머리카락 희어진 것이 보기 싫었던지 염색약을 들고 왔다. 집에서도 염색을 할 수 있을지 의문이었지만 큰딸은 저만 믿으라며 어미를 앉혀놓고 염색을 시작한다. 꼼꼼한 성격인 아이는 어미의 머리카락을 빗으로 빗겨가며 정성을 다 하는 모습이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고 욕실로 어미를 데려가 머리를 감겨주는 딸을 보며, 십수 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했다.

많은 자식을 놔두고 일찍 세상을 등진 아버지를 대신하여 평생 자식들 건사하느라 보내신 세월이 마음에 걸려 잠시 목울대가 뻐근하다. 일찍 홀로 서기를 대물림하고 싶지 않았었는데 어머니의 딸인지라 숙명을 거역할 수 없었다.

세상에서 76년을 사시며 남들은 평탄하게 사는 길을 수 없이 질곡을 겪으며 살아온 세월을 생각하니 가슴 한쪽이 아리다. 자식들 출세를 위해 외할머니가 살고 계시는 고향을 등지고 자식을 따라 서울로 상경한 어머니였다. 10여 년이 넘게 고향 한 번 다녀오지 못한 그 속내는 어떠했을까. 가을이 채 오기 전, 어스름 해가 지는 마당에다 돗자리를 깔고 다과상에 정화수 한 사발을 올린 후 낭자머리를 풀어 곡을 하며 고향 쪽을 향해 절을 올리던 당신이었다.

바람이 아름답던 어느 여름 날, 어머니는 여행 가방을 챙겨 고향에를 가셨다. 그동안의 불효를 씻고 싶으셨던지 꽤 여러 날을 머물다 복사꽃 같은 얼굴로 돌아오셨던 그날을 잊을 수가 없다. 짐을 챙겨 마지막 서울발 열차를 타고 고향에 도착할 때까지 이별 연습을 하셨을 것이다. 외할머니는 10여 년 만에 맏딸을 만나고 행복한 얼굴로 이후 세상을 떠나셨다.

어머니가 돌아가시기 몇 달 전, 몸이 허약해져 대중목욕탕을 찾아갈 수가 없던 처지라 집에서 목욕을 시켜드린 적이 있다.

"집에서 목욕을 하면 가스비가 많이 나올 텐데 목욕탕에 갈 걸 그랬나 보다."
"엄마는, 가스요금이 얼마나 나온다고 그런 걱정을 하세요. 대중탕에 가시면 힘들어서 안 돼요. 집에서 해야 제가 씻겨 드리죠."

몇 푼 가스요금 나오는 것을 걱정하던 내 어머니의 선하고 아름답던 모습이 십 수 년이 지났음에도 가슴에 들어앉아 떠날 줄 모른다.

초겨울 찔레꽃처럼 아름다운 모습으로 훨훨 날아가 버린 어머니는 하늘에서 지금도 슬프디 슬픈 향기를 풍기며 순백의 찔레꽃으로 고단함을 모두 내려놓고 계시겠지. 돌아가신 후 형제들은 영정사진을 하나씩 나누어 가졌지만 난 집으로 들고 오지 못하고 다섯째 오빠 집에다 맡겨두었다.

막내로 태어나 형제들 가운데 가장 짧은 날을 어머니의 딸로 살았던 인연이 늘 애달프고 서러워서일까, 난 아직도 어머니 사진을 보지 못하는 불효를 저지른다.

"우리 어릴 때 이렇게 머리를 감겨 주셨죠? 그런데 다 커서 이렇게 어머니 머리를 감겨 드리니까 기분이 참 이상하네요."

큰딸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덜컥하는 것은 무슨 이유였을까.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향해 이별 연습을 했었는지 '어미가 떠나더라도 새끼들 잘 키우고 오빠들이랑 우애 지키며 잘 살아야 한다.'라고 당부하시던 말씀이 지금에야 생각나는 것은 무슨 연유일까.

오래도록 딸들 곁에 남아 따뜻하고 든든한 언덕으로 그리고 울타리로 남고 싶다. 떠나더라도 딸들이 아프지 않도록, 어제 보냈어도 내일이면 어미의 사진을 바라보며 웃을 수 있는 딸들이었으면 한다.

어머니처럼 혼자 이별 연습을 하는 것이 아니라 내 딸들에게는 언제고 어미와 이별할 수 있도록 연습을 시켜야 할까 보다. 강하지 못해 가슴으로만 보던 어머니의 사진을 이제 꺼내 보고 싶다. 세월이 흐를수록 어머니의 모습인 내가 세상을 잘 살아 낼 수 있도록 말이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