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수필]항아리의 비밀 – 나향/이기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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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834회 작성일 10-04-01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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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딸아이와 중국인 약재상에 볼일이 있어 시드니 중심부의 차이나타운에 갔다. 지구에는 못 먹는 것이 없고 약 아닌 것이 없다는 중국인들의 말처럼 그곳엔 없는 것이 없었다. 자연 속에서 살아 숨 쉬는 것들이 바싹 말라 누군가에게 약으로 쓰이기를 기다렸다. 그 가운데는 내 어린 시절 아버지가 꿀 항아리로 유인하여 잡아 말린 지네와 똑같은 지네도 있었다. 그 지네를 보는 순간 문득 약재상 노인의 얼굴에서 아버지의 얼굴이 오버랩 되었다.
나는 딸아이에게 지네가 어떤 병에 어떻게 쓰이는지 물어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딸은 한의사답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다시 딸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에 외할아버지가 밤나무 밑에 꿀 항아리 놓고 지네를 잡았는데, 그 지네를 누구에게 먹였을까?”
“아마 엄마에게 먹였을지도, 엄마가 몸이 약했다면서요!”
“그랬을까?”
시골 농부였던 아버지는 11남매의 장남으로 환갑이 채 되기도 전 세상과 하직하셨다. 세상을 떠날 당시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보다 적은 나이였으니 너무 짧게 생을 마쳤다는 애석한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대가족의 전형적인 장남 모습이었으며 할머니에겐 둘도 없는 효자였다.
늘 근엄하신 데다 엄격하여 우리 자매들에겐 아버지와 아기자기한 추억이란 별반 없었다. 그렇다고 딸들을 무시하거나 아들에 대한 집착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아버지 당신이야 아들 가진 친구들이 어찌 부럽지 않았을까,
아들은 배태도 못하신 어머니는 딸만 줄줄이 아홉을 낳았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는 다른 딸보다 유난히 나를 예뻐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자랄 때도 얼굴 생김새나 성격마저 아버지를 제일 닮았다고들 한다. 아버지와 가슴 깊은 추억거리는 딱히 없어도 세월의 어느 뒤안길에서 마주한 봄이면 잊지 못할 추억 하나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개나리 꽃망울이 막 터지려 할 어느 봄날이었다. 그날따라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다. 좀처럼 낮에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아버지가 사랑채 헛간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연방 대밭과 앞마당을 드나드는 할머니를 보면서, ‘오늘 저녁도 누구 제삿날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보리밥마저 배불리 먹지 못한 채, 봄이면 쑥개떡 아니면 밀기울이나 보리개떡으로 배를 채우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집은 중농(中農) 정도의 형편이어서 매일 하얀 쌀밥은 아니더라도 개떡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일은 없었다.
특히 종갓집인 우리 집에선 매달 제사 아니면 누구의 생일 같은 크고 작은 행사가 잦아 그날도 무슨 날인 줄로 알았다. 나는 할머니가 건네주신 죽순 소쿠리를 받아 사랑방 건너편 평상에서 죽순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갈색 죽순 껍질이 한 겹씩 벗겨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아버지의 거동을 유심히 살폈다.
해거름 쯤 아버지는 작은 항아리와 소주병을 챙기셨다.
“아부지 어디 가세요?”
“양지뜸 산 아래 감나무밭에 간다.”
“나도 아부지 따라가야지….”
여느 때 같으면 딸아이들을 잘 데리고 다니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조용히 따라오라고 하셨다. 잔뜩 신이 난 나는 아버지 앞에서 씰룩쌜룩 어깨춤까지 추면서 따라 나섰다. 가을이면 양지뜸 우리 감나무 밭엔 먹을 거리가 풍성하지만 초봄엔 겨울이 쓸고 간 자리의 쓸쓸함뿐인데 순순히 따라 나서겠다는 내가 아버지에게는 대견해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아버지를 따라나선 것은, ‘왜 아버지가 소주병에다 꿀인지 조청인지를 담아 감나무밭으로 갈까? 저 항아리는 어디에다 쓸까? 소주병에 들어 있는 꿀인지 조청인지는 누가 먹을까?’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내 작은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에 어찌 눈을 뗄 수가 있겠는가.
어린 맘에도 이렇게 따라온 딸에게 꿀 한 모금 정도는 입에 넣어 주리라는 기대를 슬쩍 가져보았으나 허사였다. 밭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우리 집 머슴으로 있던 동철에게 “동철아 해지기 전에 일을 끝내라.”하셨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철은 소주병에 들어 있던 꿀인지 조청인지를 손으로 묻혀 항아리 속을 바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시더니 꿀을 바른 항아리를 들고 감나무밭 언덕의 제일 큰 밤나무 아래로 가셨다. 나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신기하고 궁금해서 졸졸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밤나무 양지쪽에, 그것도 바위가 적당히 놓인 장소에다 뚜껑을 덮지 않은 항아리를 약간 비스듬히 놓아두더니 이내 내려가자는 눈짓을 하셨다. 빈 꿀 병을 손에 든 나는 수없이 침을 삼키면서도 집에 올 때까지 왜 꿀을 바른 항아리를 밤나무 아래 놓았는지 묻지 않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며칠 후 아버지가 다시 감나무밭으로 가실 때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무척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처음 보는 신기한 일이라 학교 갈 생각보다는 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갈 궁리를 하며 아침마다 배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할머니는 허약 체질인 내가 아프다고만 하면 학교를 가지 말라 시는 터여서 나는 가끔 그런 꾀를 부리곤 했다. 학교 결석 허락을 받은 나는 누룽지만 조금 먹고 누워있으라는 할머니 호령을 거부하고 드디어 아버지를 따라 감나무밭으로 갔다.
그날도 우리는 해거름쯤 밭에 도착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감나무밭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여간 조바심이 난 것이 아니었으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눈은 멀리 아버지와 동철이의 손놀림에 박혀 있어도, 거리가 너무 멀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아버지는 뚜껑을 덮은 항아리를 들고 동철이는 지게에 무언가를 짊어지고 집으로 왔다. 그때도 나는 항아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묻지 않았다. 오로지 아버지가 항아리 속에서 무언가를 꺼낼 시간만 초조하게 기다렸다.
몇 시간 후 아버지는 동철이를 데리고 무언가를 하실 듯 보였다. 그동안의 궁금증을 풀지 않고선 다음날도 학교를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살금살금 그쪽으로 다가갔다. 동철이가 항아리 뚜껑을 여는 순간,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나는 현기증이 일면서 구토가 나올 듯해 얼른 나와 버렸다.
항아리 속엔 지네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얼키설키 겹쳐 누운 지네들은 수많은 발이 꿀에 엉켜 꼼짝을 못했다. 아버지와 동철이는 그런 지네를 손으로 잘 펴서 그늘 밑 멍석 위에 차례대로 눕혀 놓았고, 지네들은 누운 채 말려지기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꿀이나 조청을 담은 항아리를 초봄 즈음 밤나무 아래 놓아두면, 땅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온 지네들은 밤꽃이 핀 줄 알고 단맛에 홀려 항아리 안으로 기어들어 간다는 것이다. 항아리로 들어간 지네들은 끈끈한 꿀에 달라붙어 결국 발이 묶여버린 셈이다.
해마다 봄이 오면 고향집 밭 언덕에서 일렁이는 아지랑이와 양지바른 언덕 아래 소담스럽게 돋아난 쑥 냄새가 그립고, 어린 딸의 건강을 위해 꿀 항아리 들고 밭 언덕을 오르시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이었을까, 가을 하늘이 무척이나 높은 날이었다.
고구마밭 언덕에 앉아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당신이 하신 말씀은 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히 뇌리에 박혀있다. ‘삶이란 때로 내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가족을 위해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이것이 내가 아버지께 들은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 고구마밭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들어 계신다. 어느덧 내가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테를 두른 채 인생과 세월을 생각하며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어느 지식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이 살아가는 동안 삶의 초석이 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자연과 함께 공생하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삶, 세상의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삶이어야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면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넓은 혜안(慧眼)으로 성심(誠心)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짧은 생을 사셨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이름 아버지, 그 존재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지금은 호주라는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갈지라도 여전히 고국의 뿌리를 지키며 살아가고자 한다. 가끔 삶이 나를 아프게 할 때는, 인자(仁者)는 항상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하며 인간이 인간의 도리(道理)를 모른다면 어찌 사람다운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곤 한다.
또한‘영왕백리보(寧枉百里步) 곡목불가식(曲木不可息): 백 리 걸음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굽은 나뭇가지 아래 쉬어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는 오늘도 자신을 다듬질하며 삶의 도화지 위에 59줄의 나이테를 그려 넣는다. 선명하게….
나는 딸아이에게 지네가 어떤 병에 어떻게 쓰이는지 물어보았다. 영문도 모른 채 딸은 한의사답게 자세히 설명을 해주었다. 다시 딸에게 어린 시절 이야기를 꺼냈다.
“옛날에 외할아버지가 밤나무 밑에 꿀 항아리 놓고 지네를 잡았는데, 그 지네를 누구에게 먹였을까?”
“아마 엄마에게 먹였을지도, 엄마가 몸이 약했다면서요!”
“그랬을까?”
시골 농부였던 아버지는 11남매의 장남으로 환갑이 채 되기도 전 세상과 하직하셨다. 세상을 떠날 당시 아버지는 지금 내 나이보다 적은 나이였으니 너무 짧게 생을 마쳤다는 애석한 생각이 든다. 아버지는 대가족의 전형적인 장남 모습이었으며 할머니에겐 둘도 없는 효자였다.
늘 근엄하신 데다 엄격하여 우리 자매들에겐 아버지와 아기자기한 추억이란 별반 없었다. 그렇다고 딸들을 무시하거나 아들에 대한 집착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물론 아버지 당신이야 아들 가진 친구들이 어찌 부럽지 않았을까,
아들은 배태도 못하신 어머니는 딸만 줄줄이 아홉을 낳았다. 그런 가운데 아버지는 다른 딸보다 유난히 나를 예뻐하셨다. 나는 지금도 그렇지만 자랄 때도 얼굴 생김새나 성격마저 아버지를 제일 닮았다고들 한다. 아버지와 가슴 깊은 추억거리는 딱히 없어도 세월의 어느 뒤안길에서 마주한 봄이면 잊지 못할 추억 하나가 있다.
초등학교 3학년 때로 기억한다. 개나리 꽃망울이 막 터지려 할 어느 봄날이었다. 그날따라 학교에서 일찍 돌아왔다. 좀처럼 낮에는 얼굴을 볼 수 없는 아버지가 사랑채 헛간에서 무언가를 하고 계셨다.
그리고 연방 대밭과 앞마당을 드나드는 할머니를 보면서, ‘오늘 저녁도 누구 제삿날인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내 어린 시절만 해도 보리밥마저 배불리 먹지 못한 채, 봄이면 쑥개떡 아니면 밀기울이나 보리개떡으로 배를 채우는 친구가 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 우리 집은 중농(中農) 정도의 형편이어서 매일 하얀 쌀밥은 아니더라도 개떡으로 끼니를 대신하는 일은 없었다.
특히 종갓집인 우리 집에선 매달 제사 아니면 누구의 생일 같은 크고 작은 행사가 잦아 그날도 무슨 날인 줄로 알았다. 나는 할머니가 건네주신 죽순 소쿠리를 받아 사랑방 건너편 평상에서 죽순 껍질을 벗기고 있었다. 갈색 죽순 껍질이 한 겹씩 벗겨질 때마다 코끝을 스치는 향긋한 냄새를 맡으며 아버지의 거동을 유심히 살폈다.
해거름 쯤 아버지는 작은 항아리와 소주병을 챙기셨다.
“아부지 어디 가세요?”
“양지뜸 산 아래 감나무밭에 간다.”
“나도 아부지 따라가야지….”
여느 때 같으면 딸아이들을 잘 데리고 다니지 않았는데 그날따라 아버지는 조용히 따라오라고 하셨다. 잔뜩 신이 난 나는 아버지 앞에서 씰룩쌜룩 어깨춤까지 추면서 따라 나섰다. 가을이면 양지뜸 우리 감나무 밭엔 먹을 거리가 풍성하지만 초봄엔 겨울이 쓸고 간 자리의 쓸쓸함뿐인데 순순히 따라 나서겠다는 내가 아버지에게는 대견해 보였던 모양이다.
사실 아버지를 따라나선 것은, ‘왜 아버지가 소주병에다 꿀인지 조청인지를 담아 감나무밭으로 갈까? 저 항아리는 어디에다 쓸까? 소주병에 들어 있는 꿀인지 조청인지는 누가 먹을까?’하는 궁금증 때문이었다. 내 작은 머릿속엔 온통 그런 생각뿐이었다. 그러니 아버지의 행동 하나하나에 어찌 눈을 뗄 수가 있겠는가.
어린 맘에도 이렇게 따라온 딸에게 꿀 한 모금 정도는 입에 넣어 주리라는 기대를 슬쩍 가져보았으나 허사였다. 밭에 도착하자마자 아버지는 우리 집 머슴으로 있던 동철에게 “동철아 해지기 전에 일을 끝내라.”하셨다. 그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동철은 소주병에 들어 있던 꿀인지 조청인지를 손으로 묻혀 항아리 속을 바르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작은 소리로 무언가를 열심히 설명하시더니 꿀을 바른 항아리를 들고 감나무밭 언덕의 제일 큰 밤나무 아래로 가셨다. 나는 처음 보는 아버지의 그런 행동이 신기하고 궁금해서 졸졸 따라다니며 일거수일투족(一擧手一投足)을 놓치지 않았다.
아버지는 밤나무 양지쪽에, 그것도 바위가 적당히 놓인 장소에다 뚜껑을 덮지 않은 항아리를 약간 비스듬히 놓아두더니 이내 내려가자는 눈짓을 하셨다. 빈 꿀 병을 손에 든 나는 수없이 침을 삼키면서도 집에 올 때까지 왜 꿀을 바른 항아리를 밤나무 아래 놓았는지 묻지 않았다. 아무리 궁금해도 며칠 후 아버지가 다시 감나무밭으로 가실 때를 기다리기로 작정했다.
그날 이후 나는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 무척 궁금하기도 하거니와 처음 보는 신기한 일이라 학교 갈 생각보다는 아버지를 따라 밭으로 갈 궁리를 하며 아침마다 배가 아프다고 엄살을 부렸다. 할머니는 허약 체질인 내가 아프다고만 하면 학교를 가지 말라 시는 터여서 나는 가끔 그런 꾀를 부리곤 했다. 학교 결석 허락을 받은 나는 누룽지만 조금 먹고 누워있으라는 할머니 호령을 거부하고 드디어 아버지를 따라 감나무밭으로 갔다.
그날도 우리는 해거름쯤 밭에 도착하였다. 아버지는 나에게 감나무밭 입구에서 기다리라고 하셨다. 여간 조바심이 난 것이 아니었으나 아버지의 말씀을 거역할 수는 없었다. 눈은 멀리 아버지와 동철이의 손놀림에 박혀 있어도, 거리가 너무 멀어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얼마를 기다렸을까….
아버지는 뚜껑을 덮은 항아리를 들고 동철이는 지게에 무언가를 짊어지고 집으로 왔다. 그때도 나는 항아리 속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묻지 않았다. 오로지 아버지가 항아리 속에서 무언가를 꺼낼 시간만 초조하게 기다렸다.
몇 시간 후 아버지는 동철이를 데리고 무언가를 하실 듯 보였다. 그동안의 궁금증을 풀지 않고선 다음날도 학교를 갈 수가 없을 것 같아 살금살금 그쪽으로 다가갔다. 동철이가 항아리 뚜껑을 여는 순간, 그 속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를 직감적으로 알아차린 나는 현기증이 일면서 구토가 나올 듯해 얼른 나와 버렸다.
항아리 속엔 지네가 가득 들어 있었다. 얼키설키 겹쳐 누운 지네들은 수많은 발이 꿀에 엉켜 꼼짝을 못했다. 아버지와 동철이는 그런 지네를 손으로 잘 펴서 그늘 밑 멍석 위에 차례대로 눕혀 놓았고, 지네들은 누운 채 말려지기만 기다리는 신세였다.
꿀이나 조청을 담은 항아리를 초봄 즈음 밤나무 아래 놓아두면, 땅속에서 슬금슬금 기어 나온 지네들은 밤꽃이 핀 줄 알고 단맛에 홀려 항아리 안으로 기어들어 간다는 것이다. 항아리로 들어간 지네들은 끈끈한 꿀에 달라붙어 결국 발이 묶여버린 셈이다.
해마다 봄이 오면 고향집 밭 언덕에서 일렁이는 아지랑이와 양지바른 언덕 아래 소담스럽게 돋아난 쑥 냄새가 그립고, 어린 딸의 건강을 위해 꿀 항아리 들고 밭 언덕을 오르시던 아버지가 떠오른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한 달 전쯤이었을까, 가을 하늘이 무척이나 높은 날이었다.
고구마밭 언덕에 앉아 두둥실 흘러가는 구름을 바라보며 당신이 하신 말씀은 40년이 흐른 지금까지도 생생히 뇌리에 박혀있다. ‘삶이란 때로 내 의지대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니 가족을 위해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명심하여라.’ 이것이 내가 아버지께 들은 마지막 말씀이었다.
그 고구마밭에는 아버지와 어머니가 잠들어 계신다. 어느덧 내가 그때의 아버지보다 더 많은 나이테를 두른 채 인생과 세월을 생각하며 삶의 무게를 저울질하고 있다. 학교에서 배운 어느 지식보다, 어린 시절 부모님이 가르쳐주신 교훈이 살아가는 동안 삶의 초석이 되어 오늘의 나를 만들지 않았나 싶다.
자연과 함께 공생하며 조화를 이루어가는 삶, 세상의 부정과 타협하지 않는 삶이어야 하며 자신에게 주어진 일이면 아무리 작은 일일지라도 넓은 혜안(慧眼)으로 성심(誠心)을 다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비록 짧은 생을 사셨지만 영원히 잊지 못할 이름 아버지, 그 존재가치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지금은 호주라는 타국에서 이방인으로 살아갈지라도 여전히 고국의 뿌리를 지키며 살아가고자 한다. 가끔 삶이 나를 아프게 할 때는, 인자(仁者)는 항상 자신을 되돌아볼 줄 알아야 하며 인간이 인간의 도리(道理)를 모른다면 어찌 사람다운 사람이라 할 수 있느냐는 아버지의 말씀을 다시 한 번 되새기곤 한다.
또한‘영왕백리보(寧枉百里步) 곡목불가식(曲木不可息): 백 리 걸음이 아무리 힘들더라도 굽은 나뭇가지 아래 쉬어선 안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처럼, 나는 오늘도 자신을 다듬질하며 삶의 도화지 위에 59줄의 나이테를 그려 넣는다. 선명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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