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소설 : 엄마 미안해 : 김민정(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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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435회 작성일 10-04-30 2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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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와 딸
새벽 2시. 화장실에서 나와 냉장고로 향한다.
요 며칠 잠이 들면 새벽녘에 꼭 한 번씩 깨게 된다. 임산부를 위한 잡지에 따르면 ’엄마가 되는 준비’라 설명되어 있다. 아이가 태어나면 3시간에 한 번씩 모유를 수유해야 하고 그 준비로 엄마가 자꾸 밤에 깨게 된다는 거다.
엄마가 츠키시 수산시장까지 가서 사온 가자미조림 한 접시, 엊저녁 손님치레 때문에 엄마가 삶아둔 호박잎과 쌈장, 엄마가 싸준 콩나물, 시금치 가지 무침이 가득한 타파웨어 몇 개. 결혼하고 4년이
지나도 냉장고엔 엄마가 가득했다. 허기를 채우기엔 충분하지만 딱히 먹고픈 게 없다.
냉장고 두 번째 칸, 야채실을 당긴다. 먹다 남은 멜론, 엄마가 한국 수퍼마켓까지 가서 사온 참외 여섯 개, 엊저녁 손님이 가져온 포도 한 송이. 엄마대신 손님을 택한다. 얼른 포도 서너 알을 입으로 옮긴다.
“너 뱄을 때 엄만 포도만 먹었어. 아예 포도밭까지 가서 먹었다니까.”
“아들이래.”
“아들은 나아 뭘 하려구? 아들이 얼마나 번거로운지 알어? 걔네들은 엄마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한다니까. 그리고 여자 생기면 또 어떤 줄 아니? 엄마한텐 1원도 아까우면서 여자한테 명품 갖다 바치고, 여행까지 시켜주고.”
아들을 낳겠다구? 엄마는 우리 애가 딸이 아니란 사실을 서글퍼했다. 아들, 아들, 반복하면서 한숨을 쉬었던가.
처음 임신을 했다고 전했을 때도 엄마는 기뻐하지 않았다. 마지못해 축하한다고 덧붙여 준 거 같기도 하지만 엄마 얼굴엔 실망감이 가득했다.
아이가 있으면 사는 게 얼마나 힘든데. 평생 애 걱정해야 한다구. 엄마는 애 보는 사람이 집에 있어서 키웠지, 안 그랬으면…….
엄마는 늘 그랬다. 나 걸스카웃 할래. 걸스카웃? 그런데 가서 뭘 배우겠어. 겨우 캠핑이나 가는데 아니니? 엄마는 그날 당장, 당시는 국민학교라 불리던 초등학교로 찾아와 날 컴퓨터부에 입부시켰다. 엄마, 음악 선생님이 나보고 성악을 해보라는데. 성량이 좋고 목소리가 고와서 전문가한테 한 번 지도를 받아보는 게 좋겠대. 너 지금 무슨 소리하는 거야? 음대 나와서 뭐 먹고 살라구? 너 지금 고2야. 지금부터 무슨 성악을 하겠다는 거니? 음악 같은 소리 집어치우고, 책이나 읽어!
그러나 엄마는 공부를 하라는 남들 엄마완 달랐다. 공부하란 소린 초등학교 입학부터 대학 졸업까지 장장 16년간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치만, 난 안다. 엄마가 내 성적표에 늘 만족하고 있었단 사실을. 나처럼 복잡한 머리상태와 정신상태를 가진 아이에겐 공부하란 소리보다 그냥 두는 것이 가장 적절하단 사실을. 엄마가 공부하란 소리를 하지 않은 덕에 난 공부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엄마들처럼 공부하라고 한 마디만 해 줘, 엄마. 시험 잘 봤다고 칭찬해줘, 엄마.
엄마는 언제나 부엌에 서서, 창밖으로 봄엔 수국을 내려다보며 가을엔 감나무에 열린 떫은 감을 보며 묵묵히, 마치 내겐, 아니 내 성적엔 아무 관심이 없다는 듯, 책이나 읽어. 아니면, 늘 당당하게 살아라고 덧붙일 뿐이었다.
당당하게!
성적위주로 돌아가는 학교에서 당당하기 위해선 공부밖엔 별 도리가 없단 사실은 학교에 석 달만 가보면 익히게 되는 진실임을 엄마는 어찌 그리 잘 알고 있던 것일까.
참 한 가지 더 있었지. 아빠 없는 아이란 소리를 듣지 않기 위해서도 공부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닐지 몰라도 학교의 카스트는 성적순으로 매겨지니까.
그날 신주쿠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제야 같이 사는구나.”라며 엄마가 데려간 곳엔 일본어만 말하는 일본인 남자가 있었다. 3년 만에 우린 또다시 네 식구가 되었다. 난 고교생이 되어있었다. 남자는 수더분했고, 성격도 좋았다. 나와 동생은 조용했고, 우린 매주 외식을 하는 겉보기엔 아무 문제가 없는 가족이 되었다. 그치만, 그저 식구에 불과했다. 밥을 같이 축내는 식구. 밥 때문에 이어진 인연. 목숨을 연명하기 위한 타지 생활에서 엄마가 고른 건 나와 동생을 부담스럽지 않게 생각해줄 남자가 아니었을까. 가끔 저 남자가 없었으면, 그런 생각을 안 해 본 것도 아니었다. 남자는 가끔 지나치게 수다스러웠다. 남자는 아빠처럼 술을 좋아했지만, 아빠처럼 주정을 부리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아빠처럼 여자에게 손찌검을 하는 스타일도 아닌 것 같았다. 그치만 아빠처럼 과묵하고, 속이 깊어보이지도 않았다. 아빠처럼 고독하고, 달관된 눈빛을 갖고 있지도 않았다. 그치만 아빠처럼 키가 컸고, 아빠처럼 노래도 잘했다. 하지만, 그는 아빠가 아니었다, 물론.
신주쿠 역엔 서문, 동문, 남문이 있다. 서문을 나오면 도쿄도청이 있고, 스미토모 빌딩이며 힐튼 호텔, 게이오 프라자 호텔, 하야트 호텔 높다란 건물이 즐비하다. 폭 넓은 인도를 무작정 걸을 수 있는 서문은 신주쿠를 처음 밟은 그 날부터 마음에 쏙 들었다. 밤이 되면 일본 최고의 환락가가 된다는 동문도 나쁘지 않았다. 호객꾼들 중엔 “안녕하세요?”라 한국어로 손님을 끄는 흑인들도 있었다. 최고의 환락가란 단어에 걸맞지 않게 그곳은 쿨 했다. 고교 교복을 입고 걸어도 치근덕대지 않았고, 미니스커트를 입고 활보해도 그들은 거들떠보지 않았다. 최고의 환락가에서 길 거리를 걷는 여자는 손님이 될 수 없었다. 손님이 아닌 여자에게 가부기쵸는 아무 관심이 없는 듯 했고, 일본최고의 환락가는 평범한 여자에겐 치안면에서 가장 안전한 곳이라 의심할 여지도 주지 않았다.
1992년 그해는 곧잘 비가 내렸다. 신주쿠엔 서문, 동문, 남문 모두 외국인들로 넘쳐났고, 교복을 입고 돌아다니면 가끔 “차 한 잔 어떠냐”는 아저씨들도 있었지만 한국과 다를 것도 없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들은 일본은 어때? 한국이랑 어디가 틀려란 편지들을 보내왔지만, 과연 어디가 다른지 아무래 생각해봐도 찾아낼 수가 없었다. 그럴 땐 틀려가 아니라 달라란 단어를 쓰는 거야. 건물이 똥그래, 여자들이 하나같이 다 뚱뚱해, 굴러가려하고 있어, 게다가 코끼리 뿔처럼 커다란 덧니도 있어, 바닷물이 달아, 하늘색이 샛노래, 뻔한 거짓말을 쓰는 일도 없었다. 틀려가 아니라 달라란 단어를 써줬음 어디가 다른지 찾아내려 노력이라도 해볼 수 있었을 텐데 말야.
“포도 사갈까?”
“아니 괜찮아. 순대를 먹으러 갈 생각이야, 엄마는?”
“난 속이 안 좋아서 순대는 됐구. 그나저나 애 낳으면 일은 어쩔 건대? 집에서 놀 거니?”
“모르겠어.”
원 이렇게 대책이 없어서야. 엄마의 혀 차는 소리가 들린다. 츳. 츳츳.
“나 이제 일하러 들어갈래.”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대책 없는 내게 엄마는 그 소리가 하고 싶었던 것일까.
420엔짜리 우동 한 그릇에 젓가락도 채 대지 못한 채 레인보 브릿지를 바라본다. 인공적으로 만들었다는 이 섬은 남들에겐 오아시스일지 몰라도, 정작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무인도에 가깝다. 후지 티비 18층 사원 식당에서 내려다보면 이 인공섬이 얼마나 삭막한지 알게 된다. 바다 위로 걸쳐진 저 다리며, 그 사이사이를 달리는 차들, 그리고 전철까지. 텅 빈 망망대해 같은 건 여기 존재하지 않는다. 가슴이 후련한 바다가 그립다. 모든 걸 다 털어내도 받아줄 바다가 그립다. 오다이바 비치엔 파도조차 일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여름이면 수영복을 입고 찾아와 뭐 그리 신이 난다고 바다 앞에서 폼을 잡는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모래성을 쌓고, 공놀이도 하고, 여름햇볕에 한 손을 들어 눈을 가린다. 답답해.
처음부터 엄마가 축하를 해주리라곤 상상조차 하지 않았다. 그치만 섭섭했다. 오바이바의 밋밋한 바다가 섭섭한 것처럼.
당당하게 살아야 돼. 누구 앞에서라도 당당하라구!
엄마가 원하는 당당함엔 경제적인 요소들도 고스란히 포함되어 있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엄마는 내게 기자가 되길 권했다. 도쿄도내 신문사에 입시지원서를 내고 시험을 봤지만 번번이 필기에서 낙방이었다. 일본 역사가 부족했고 일반상식도 부족했다. 솔직히 준비조차 하지 않았다. 기자가 되라 기자가 되라. 엄마의 말은 늘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가끔 엄마는 꿈에 나타나 기자가 되라고 했다. 엄마의 아빠는 종군기자였다 한다. 엄마가 날 키우면서 가장 강조해 온 것은 여자도 자기 힘으로 먹고 살아야해, 그래야 이혼도 하지. 늘 당당해야해.
내 나이 스물이 되었을 때 엄마는 말했다.
“이제 혼자서도 충분히 살아할 나이야.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아. 그치만 네 인생의 책임은 니가 져”
엄마는 그 날로 내 용돈을 끊었다. 태풍이 북상해도 내 빨래만큼은 거둬들이지 않았다.
난 이모 친구한테 소개받은 야끼니꾸점(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시작했다. 일 년 내내 일해도 대학 학비는 모아지지 않았다.
일본 최고의 명문 사립대는 수업료만 해도 백만 엔은 더했다.
“엄마가 내니까 걱정하지마.”
용돈을 자르긴 했지만 엄마는 대학학비만큼은 어떻게든 자기가 대겠다며 작은 바를 하나 오픈했다. 그 무렵 엄마의 남자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어느 날 갑자기 소리 소문 없이 우리 식구가 되었던 남자는 소리 소문 없이 집을 나가버렸다. 엄마는 “나도 이 나이 되서 남자 밥해주고 빨래해주는 거 진이 빠진다” 며 아무 일 없다는 듯, 오히려 가벼워진 듯 헤벌쭉 입을 벌리고 웃었다. 엄마의 가게는 생각보다 손님이 많았고, 금세 단골이 생겼다. 엄마는 바가지를 씌우는 일이 없었고, 화학조미료도 사용하지 않았다. 한 손님의 조카가 일한다는 농장에서 농약을 쓰지 않은 야채들을 다량으로 사들이기도 했다. 고기는 꼭 일본산을 고집했다. 말이 술집이지 실은 엄마 반찬을 먹으러 오는 사람들이 더 많을 정도였다. 그러나 단골이 생겨도 수용인원이 열도 채 안 되는 가게에서 나오는 돈으로 대학학비를 마련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다 괜찮아. 지금까지도 먹고 살았는데 뭐.”
그때부터일까, 엄마에게 미안하단 마음이 생긴 게. 기자가 되지 못했을 때도 미안했던 거 같다.
아니, 미안한 마음은 처음부터 있었다. 늘 미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빠는 지방유지의 장남이었다. 소 백 오십 마리, 수만 평이 넘는 논, 옥수수 밭, 양계장, 그 동네 모든 땅이 아빠의, 아니 할아버지 것이라 해도 좋을 터였다. 매년 잘 알지도 못하는 지역에서 할아버지 또는 할머니, 또는 증조할아버지 이름의 땅이 나왔다. 아무도 얼마나 땅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조차 하지 못했다. 그 동네 사람들은 모두 아빠의, 아니 할아버지의 소작농이거나, 머슴이거나, 일꾼이었다. 동네 아줌마들은 식모였고, 보모이기도 했다. 라디오를 가장 먼저 산 것도 아빠네 집이었고, 티비를 보러 서른 명쯤 되는 동네사람들을 처음 모은 것도 아빠네 집이었다. 명절엔 손님이 끊이질 않았다. 안방, 건넌방, 사랑방, 마루에도 부엌에도 할머니가 잘 다듬은 정원에도 상이 차려졌다. 하루에도 수 십 번은 밥상을 차려내야 했다. 증조할머닌 거지를 위한 쌀과 반찬까지 준비해두었다. 그들은 밥을 먹고 갈 때도 있었고, 밥을 싸갈 때도 있었다. 가끔은 술에 취해 난동을 부리다가 소모는 쉐파트 견 케리에게 물려, 쌀을 더 달라 소리소리 지르기도 했다.
아빠는 집을 비우면, 석 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빠가 집을 나가서 뭘 했는지, 엄마는 결코 묻지 않았다. 아니 물었는지도 모른다.
“아빠 언제와?”
대신 내가 물은 것도 같다. 엄마는 조용히 날 바라봤다. 그게 처음이었을까. 괜히 엄마한테 미안했던 게.
아빠가 돌아오지 않는 밤의 숫자만큼 아빠가 돌아온 후 부부싸움은 심했다. “왜 결혼했어?” “당신이 그러고도 아빠야? 애들 크는 거 몰라?” 그러다가 엄마는 흐느꼈고, 비명소리가 들린 것 같기도 했다. 엄마, 내가 잘못했어. 아빠 내가 잘못했다니깐.
아빠는 비교적 온순했다. 늘 미소를 띄고 있었다. 술만 안 마시면 그는 부처님이고 예수님이었다. 남들에게 늘 친절했다. 돈 없다고 찾아오는 친구는 빚보증을 서주고, 술 마시러 찾아오는 후배에겐 상다리가 부러져라 대접했다. 나와 동생을 데리고 곧잘 여행을 떠났다. 자연농원, 서울대공원, 대천해수욕장, 해운대, 설악산, 부곡하와이……. 운전을 좋아하는 아빠는 차를 바꾸기 일쑤였고, 경찰을 따돌리며 아이들을 태운 차를 대한민국 전역으로 몰았다. 여권 만들기도 수월찮던 시절, 국내긴 했지만 우리 반 그 어느 아이보다도 여행을 제일 많이 한 아이가 되었다. 어느 성당에서 아빠는 “난 숨 쉬는 것도 죄요”라 신부님께 속삭였다. 아빠는 아무래도 천성이, 아니 천성은 착한 사람 같았다.
열 살 나던 여름날 아침, 커튼이 드리워진 방, 엄마 혼자 침대 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있던 걸 발견한 그 아침. 아빠는 어디 갔을까. 엄마 눈에 생긴 시커멓고 커다란 멍을 보면서 내내 미안했다. 엄마, 엄마를 지키지 못해서 미안해. 그날 우리는 짐을 쌌다.
아빠가 돌아가신지 얼마나 되었던가. 그런 걸 일일이 기억할 만큼 인생은 순탄하지 않다. 아빠 없는 아이를 둘씩이나 안고 엄마는 격정의 날들을 보내왔다. 그녀가 오밤중에 돌아와 눈물 흘리며 신세 한탄을 할 때도 우리 묵묵히 들어줄 도리 밖에 할 줄 아는 게 없었다. 아, 인생이여! 그 참혹함이여!
엄마를 보면서 삶은 오롯이 자신만의 몫이며 정신적이나 경제적인 보살핌을 아주 약간 얻을 수는 있지만 완전한 삶의 위로를 얻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란 걸 일찍이 고교시절에 깨닫지 않았던가.
엄마는 6남매의 3째 딸로 태어났다. 엄마네 집안은 유독 딸이 많았고 그 딸들은 모두 미인이었다. 엄마는 특히나 그랬다. 그 시절에 쌍꺼풀이 굵은 눈에 코까지 오똑했던 것이다. 게다가 듣기론 공부도 꽤나 했다고 한다. 그 시절, 성적순으로 분단을 메기던 때 엄마는 8분단 중 늘 1분단이나 2분단에는 앉아있었다니 말이다.
엄마의 단아한 고교시절 사진은 고스란히 엄마의 성격을 말해준다. 엄마는 대학에 가고 싶었겠지만, 6남매의 3째 딸을 챙겨줄 만큼 시대는 부유하지 않았다. 고교를 졸업한 엄마는 은행에서도 일하다가 음악다방 디제이로 직업을 바꾸고, 서울에서 유명한 미인으로 등극했다.
서울에서 대학생을 하던 아빠는 엄마에게 첫눈에 반했고, 그치만 엄마에게 반한 건 아빠뿐만이 아니라 그 음악다방 모든 청년들도 그러했으리라, 매주말 시골에서 달걀 한 판에 배추까지 싸들고 와 엄마가 일끝나고 나오길 온종일 기다렸다 한다. 이런 아빠에게 반한 건 엄마가 아니라 음악다방 안주인과 엄마의 엄마와 아빠였다.
그때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을까, 엄마에게, 그리고 아빠에게.
여하튼 엄마가 학벌 콤플렉스를 가진 건 아니지만, 엄마는 알고 있다. 남편 없이 홀로된 여자를 취업시켜 줄만큼 세상이 안이하지 않다는 것과 아이 둘 키우는 데 드는 희생은 자신의 인생의 절반 이상을 소비해야 한다는 사실도……. 엄마는 나와 동생을 정말이지 반듯하고도 남을 대학에 진학시켰다. 공부를 워낙에 어릴 적부터 좋아해서 그놈의 리포트들을 밤새 써냈고, 좋은 성적으로 대학을 졸업했다.
그래, 여기까지는 엄마의 시나리오대로였다. 딱 여기까지만!
일본 최고의 사립 명문대를 졸업하고도 난 취업을 하지 않았다. 세상에 어떤 직업이 있는지 알지도 못하면서 취업을 하다니, 그건 내 인생론과 정말이지 맞출래야 맞출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내 친구들처럼 토요타니 소니에 무작정 들어가기엔 왠지 꺼림칙했다. 인간을 파멸시키는 대기업이라는 편견을 그 시절 난 고스란히 가슴에 파묻고 있었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오라면 설설 기어서라도 가버릴지 모를 그런 정신의 소유자가 되었건만, 그 시절엔 그랬다.
졸업하고 놀 수만은 없어서 작은 출판사에서 기자 일을 시작했다. 3년쯤 일하다가 이런 저런 인연이 생겼고, 후지 티비 리서치팀에 발탁되어 방송 일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특별히 재미나지도 않았고 화려하지도 않았다. 방송국은 밖에선 의리쩡쩡 하지만 그 안은 별나지도 않다. 넘쳐나는 서류, 블라인드가 내려진 창문, 특종 때문에 잠 못 자는 사람들과 피눈물도 없는 경쟁, 카스트제도보다 더한 계급사회였다. 방송국 정직원은 잡일 없이 연출자가 되었고 제작사 직원은 밤샘을 천일 해봐도 AD에 만족해야 했으며, 프리랜서는 언제 목이 달아날지 몰라 주말 출근도 마다하지 않았다. 노이로제 때문인지 프리랜서 중엔 1년 365일 목을 가려주는 목티만 고집하는 중년 남성도 있었다. “목이 약해서 그래”란 그의 변명을 “목이 날아갈까 봐 그래”로 듣는 사람들은 물론 한 둘이 아니었다.
엄마가 원하고 원하던 신문기자는 아니었지만 기자 근처에서 얼쩡거린 건 분명하다. 그리 햇볕 쨍쨍 나는 일자린 아니었다. 엄마는 딸자식을 못미덥고 안쓰러워했다. 어떻게 키운 딸이 그 좋은 대학을 나와 겨우 리서치 팀에서 일하는 건지, 도대체 왜 엄마는 못간 대학을 나온 딸이 겨우 임신이나 해서 주부가 되려고 하는 건지 엄마는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엄마가 알기에 딸은 요즘 유행하는 엄친아였다. 성적은 초중고 단 한 번도 빠짐없이 전국 상위권이었고, 일본에 와서 현역으로 대학에, 그것도 명문 사립대에 입학했으며, 딸 주변엔 사람이 끊이질 않았다. 남녀노소 불구하고 명랑하고 친절한 딸애를 누구든 마음에 들어 했다. 연극 무대에서도 늘 주인공을 맡아왔다. 딸이 무대에 설 때면 어찌나 감동을 했는지. 대학에선 밴드의 보컬을 맡아 행사 때마다 박수갈채를 받아온 딸의 남다른 재주에 손님들 앉혀놓고 딸자랑에 바쁜 날도 있었다. 도대체 그런 딸이 왜? 뭐 때문에 결혼을 해서 아이를 낳고 주부가 되려는 걸까? 열 재주 있는 놈이 밥을 굶는다더니……. 가슴 한 켠이 서늘했다.
엄마한테 결국 말하지 못했다.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갖기엔 때가 너무 늦었어. 엄마, 차는 이미 떠난거라구. 미안해. 미안해.
딸과 아이
엄마는 결국 “임신을 축하한다.” 고 웃어주지 않았다. 도대체 어쩔 작정이냐고 묻고 또 물었다. “일은 어떻게 할 거야?” “애는 아무나 키우는 줄 아니? 도대체 니가 하는 게 뭐가 있어?” “애 낳으면 평생 걱정이야”
난 대답하지 않았다. 괜한 싸움을 하기엔 나도 나이를 너무 많이 먹어버렸다. 서른이 다된 딸에게 엄마란 존재는 서글픈 것이다. 미간에 푹 패인 주름을 볼 때마다, 점점 가늘어져 모델보다 더 날씬한 다리로 마켓에서 산 물건을 양 손에 들고 어쩔 줄 모르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가슴 한 켠이 서늘해졌고, 눈시울은 뜨거워졌다. 아빠가 죽고 얼마가 된 걸까. 아빤 여전히 삼십대인데, 엄만 이제 육십을 바라보고 있다. 아빠 없는 아이를 아빠 있는 아이처럼 키우기 위해 엄마가 얼마나 애써왔는지는 굳이 되돌아보지 않아도 가슴에 그리고 내 온몸의 피와 살이 되어 남아있다. 엄마의 투정을 들을 때마다 괜시리 아이를 갖은 게 아닌가 미안해졌다. 솔직히 미안할 건 없었다. 미혼모가 되는 것도 아니고, 아직은 이혼할 건덕지도 없으며, 잠시 일을 쉬게 되어도 프리랜서로 번역 일을 맡으면 가계에 조금쯤 도움이 될 만 했다. 엄마의 기대엔 미치지 못하겠지만…….
어느새 성큼 가을이 다가와 있었다. 그치만 더위는 두풀은 커녕 한풀도 죽지 않고 있었다. 도쿄는 여전히 30도를 웃도는 기온에 냉장고에 들어가지 못한 양배추처럼 축 늘어져있었다. 다행스럽게도 입덧은 천천히 가라앉기 시작했다.
야마나시에서 났다는 씨 없는 피오네 포도는 흑빛이 요염했고, 이탈리아에서 난 게 아닐까 싶은 로사리오 비앙코는 길쭉한 모양새가 서양 스러웠다. 오까야마의 히로타 모리마사가 품종을 개발했다는 네오 마스컷은 연초록빛이 싱그러웠다. 냉장고엔 빨강 파랑 노랑 검정 다양한 빛을 발하는 포도들로 가득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엄마의 포도들로 가득했다. 엄마는 올 때마다 오늘은 이세탄 백화점에서 오늘은 오다큐 백화점에서 오늘은 동네 시장에서 포도를 구입해왔다.
“아이를 낳으면 어떡할 건데? 애 키우는 게 장난인 줄 아니? 그거 보통일 아니야.” 란 잔소리를 해가면서도 포도가 떨어질 만하면 초인종을 눌렀다. 포도뿐이 아니었다. 오이지무침, 각종 나물과 김치, 간장 게장, 다랑어 회, 쑥떡이며, 떡볶이 떡, 신오쿠보의 한국 슈퍼마켓에서 사왔을 뻥튀기 과자들도 모두 엄마가 가져온 것들이다. 엄마는 어느새 우리 냉장고 안에 사는 사람이 되었다. 순산 기원 복대를 챙겨온 것도 엄마였다. 일본에 사니 일본식으로 하자며 내 허리에 복대를 채우고 사진을 한 장 찍었다. 냉장고를 열 때마다 엄마생각이 났다.
엄마가 사온 로사리오 비앙코 한 송이를 해치우고 전철에 올랐다. 그 무렵 난 후지 티비 14층 정보방송 제작국에 사요나라(마지막 인사)를 하고 집에서 뒹굴다 지쳐 자동차 교습소에 다니고 있었다.
5센티 짜리 속눈썹을 붙인 그녀의 네일 아트는 예쁘다기보다 커다란 큐빅이 너무 많아 혐오스러웠다. 독특하지도 않았고 과하다 싶었다. 게다가 그녀는 철지난 발이 다 들여다보이는 샌들을 신고 있지 않은가? 패션의 기본은 구두와 가방인데도 말이다. 가을이 무르익은 이 계절에 갈색 화장을 하고 샌들을 신은 그녀의 모습은 5센티짜리 속눈썹 마냥 어색하게만 보였다. 전철에서 우연히 내 옆에 서있던 그녀는 내 앞자리가 비자, 임산부인 나를 제치고 그 자리에 앉았다. 임신 6개월, 서 있는 게 힘들지는 않았지만 기분이 매우 불쾌해졌다.
천차만별. 운전교습소에서 8번 운전을 하면서 8명의 강사를 만났다. 그 8명은 다 제각기 가르치는 법도 다르고 운전하는 법도 다르고, 중요시 여기는 부분도 달랐다. 말 그대로 천차만별이다.
엄마가 된다. 천차만별의 엄마중 하나가 된다는 거다.
난 어떤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적어도 늦가을에 샌들 신는 그런 무감각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5센티 눈썹 붙이고 위화감을 못 느끼는 무분별한 엄마가 되고 싶진 않다. 외적인 부분이나 패션센스가 문제가 아니다. 임산부에게 자리 양보도 못하는 엄마만큼은, 절대 되고 싶지 않다. 아이는 부모를 보고 자란다. 강인하고 튼튼하면서 여린 감성을 가진 아이로 성장하도록 도와줄 수 있었음 좋겠다. 분별력과 사고력과 타인의 마음이나 타인의 경우를 상상하는 상상력도 있었음 좋겠다.
아이를 위해 나부터 많은 걸 돌아봐야겠다. 먼저 자세부터. 바르게 앉기, 바르게 걷기, 바르게 먹기……. 지금까지 살아온 것보다 더 열심히 나를 살아야하는 이유가 또 이렇게 찾아오는구나.
엄마, 차는 이미 떠났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 포기해.
엄마만 빼곤 모든 게 순조로웠다. 남편은 마냥 기뻐하고 있었다. 남편에게 바란 건 술 안 하는 사람이란 단순한 조건 딱 하나였다. 그는 술만 안 하는 게 아니라, 바람을 피우지도 않았고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고 난동을 부리지도 않았다. 그는 자상했다. 매주 일요일이면 화장실을 직접 청소했고, 집 주변을 둘러싼 잡초들을 뽑아냈다. 자전거를 깔끔히 닦는 일도 그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밥맛이 없다고 투정대지도 않았고, 반찬이 적다고 밥상을 엎는 일도 없었다. 먹고 싶은 게 있을 땐 휴대전화 메시지를 보내왔다. “나 그거 못하는데”라 문자를 보내면, 그는 수퍼마켓에 들려 재료를 사와 직접 만들어 내게 맛을 보였다. 그가 만들어주는 스키야끼와 오꼬노미야끼는 일품이었다. 10년을 혼자 살아온 그에게 가사일은 번거로운 일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였고 차곡차곡 해나갈수록 쾌적함을 가져다주는 노력한 만큼 결과를 내주는 드문 일 중 하나였다. 가사 일은 수학 문제 같았다. 끈기를 가지고 풀어내면 대부분 해답이 보였다.
그는 대학동창이었다. 연극 무대에 서겠다는 포부로 가득한 끼있는 학생들 사이에서 그는 늘 묵묵했다. 그에겐 서늘한 아우라가 넘치고 있었다. 그는 쓸데없는 말은 입에 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늘 정확하고 냉정하게 다른 학생들을 평가했다. 그 대사는 쓸데가 없어. 네 감정은 슬픔이 아니라 과장이야. 그 웃음소리도 마찬가지라구. 과장만이 연기가 아니야. 제발 좀 대본을 읽고 이해를 해와. 아닌 건 아닌 거야. 그는 연극 동아리를 박차고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동아리 학생들은 모두 그를 부담스러워했다. 아무도 그에게 다시 돌아오라 요구하지 않았다. 책상 한 귀퉁이에 박혀있던 쓸모없는 못 하나를 빼버린 기분이었다.
난 가끔 그를 떠올렸다. 내가 제대로 가는 건지 기분이 꿀꿀할 때, 연극무대가 끝난 후 관객 반응이 시원찮을 때, 취업활동 때 한국인이란 이유로 원서 접수를 거절당했을 때, 사랑하는 남자가 바람을 피웠을 때, 별 갖은 이유로 그가 그립곤 했다. 졸업 후 우연한 기회에 재회한 후, 그와 결혼을 했다. 망설임 따윈 없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가 정답이었다. 엄마의 대답은 시원스러웠다.
“어차피 일본에 살건데 일본남자랑 결혼하는 게 당연하지.”
엄마답게 쿨하고 합리적이었다.
어떤 이는 모국어가 다르단 이유로 내게 비수를 던졌다. 정작 결혼하는 건 나인데 나보다 주변 사람들이 더 걱정을 했다. 그러나 그가 한국말을 못한다고 해서 그게 내 가슴을 찢어놓을만한 결점이 될 수는 없다. 같은 언어를 말해도 가슴에 와 닿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잘 모르는 프랑스어를 말해도 왠지 필이 꽂히는 날도 있지 않은가. 말이 안 통해 결혼생활이 오래 못가면 어쩌지? 글쎄다. 중요한 건 가슴이지,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불행에 대해 걱정만 하는 머리가 아니다. 어차피 헤어질 인연이라면 그건 언어 문제가 아니라 성격차일 수도 있고, 운명일 수도 있는 법이다. 같은 나라 사람끼리 결혼해도 헤어지는 게 인생 아닌가. 남들은 국제결혼이라 하지만, 내게는 그냥 연인일 따름이다. 가장 따뜻한 연인, 내일 일은 나도 모르니까 말야.
포도를 백 송이쯤 먹어치웠을 무렵이던가. 가을 냄새가 폴폴 풍기고 있었다. 신주쿠 서구 쪽에 늘어선 상록수들의 빛깔은 점점 더 짙은 초록으로 변하고 있었지만, 사람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발걸음을 서둘렀다. 무작정 초콜릿이 먹고팠다. 메종 드 쇼콜라. 프랑스에서 일찌감치 들어온 그 초콜릿 전문점엔 코코아보다 농도가 짙은 초콜릿 100퍼센트 음료를 판매한다. 가격은 한 병에 2천 엔이 넘는다. 선물이나 하면 했지, 내 몫으로 사기엔 여간 아까운 게 아니다. 메종 드 쇼콜라의 그 초콜릿 드링크가 먹고 싶어진다. 임신을 하면 먹고자하는 욕심이 풍선처럼 부풀어 오른다. 오모테산도로 갈까. 거긴 너무 먼데……. 근데 임산부에게 초콜릿은 독이라던데? 카페인이 들어있다나 뭐라나……. 친구들 중 가장 먼저 아이를 가진 하나가 “아이를 낳으면 켄터키 프라이드 치킨도 먹을 거구, 맥도널드도 갈 거야. 참, 모스 버거의 모스 치즈 버거의 그 소스, 토마토가 듬뿍 든 잘게 썬 양파가 춤추는 그 햄버거를 서너 개는 먹고 싶다. 롯데리아의 새우 버거도 좋아. 피자도 실컷 좀 시켜먹고 싶어.” 하던 투정이 떠올랐다. 날이 갈수록 임산부에 대한 절제는 심해졌다. 먹어선 안 될 것들이 투성이인 세상천지에 매일 신선처럼 먹고 살라니……. 의사들은 임신중독증을 남발하며 먹는 것부터 자제시켰다. 포식의 사회가 얼마나 무서운 건지는 임신했을 때 뼈저리게 느끼게 된다.
“라 메종 드 쇼콜라의 초콜릿보다 더 맛있는 초콜릿이 나왔대. 장 폴 에반 가봤어?”
문득 회사 동료의 말이 떠올랐다.
이세탄 백화점의 장 폴 에반 앞은 대여섯의 손님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입구엔 ‘실내 온도 유지를 위해 손님 수를 제한하고 있습니다. 한 분씩 안내할 테니 기다리십시오.’ 란 안내 문구가 표시되어 있다.
뜬금없이 화장실에 가고 싶었다. 하지만 초콜릿을 먹어야해. 꼭 먹어야해.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초콜릿이라잖아. 매일 초콜릿만 먹고 사는 어떤 여자 탤런트도 추천한 곳이란 말야. 조금만 더 기다려 봐. 안돼,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다구, 화장실로 직행해. 아. 아. 하아. 내 손은 어느새 배를 감싸고 있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봐. 저기 직원이 나오고 있잖아. 하아. 아. 아. 후우. 그 손은 어느새 배 밑으로 내려가 있었다. 아. 아. 배가 뭉친 거 같아. 화장실로 가라구. 하아. 후우. 아. 후우.
“다이죠부?(괜찮아요?)”
아냐, 아이가 나오기엔 일러. 책에서만 보던 라마즈 호흡법이 입 밖으로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후우, 쓱, 후우, 쓱, 하아.
“순대가 먹고 싶어.”
수술실에서 나와 마취에서 채 깨지 못한 상태에서 난 순대를 찾았다. 아이를 잃고도 뱃속은 아직 그 사실을 터득치 못했는지, 아니면 6개월 새에 아이를 핑계로 탐욕스러워졌는지 잔인하게도 난 먹을 걸 찾았다.
“순대? 그게 뭐야? 그걸 어디서 사?”
그는 괜찮냐고 묻기 전에 순대가 뭐냐고 묻는다.
“내가 지금 순대가 먹고 싶다고 했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에게 물었다. 응, 그랬어.
6인용 병실은 조용했다. 프라이버시를 지켜주느라 그런지 일본 대학 병원의 병실엔 제각기 커튼이 쳐져 있었다. 360도 날 감싼 커튼 안은 가을인데도 더웠다. 옆엔 누가 있는 걸까. 내 옆에 누워있을 여자들의 존재는 커튼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엄마는 안쓰러운 듯 내 옆에서 나보다 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엄마 울지 말고 이제 가.”
“…….”
“자꾸 울거면 집에 가라구. 나도 안 우는 데 엄마가 도대체 왜 울어?”
“그래 미안해.”
“뭐가 미안한데? 자꾸 왜 이래? 집에 가라니까.”
“이 기집애야, 딸이 이렇게 누워있는데 엄마가 눈물이 안 나오겠어?”
“엄마 왜 아이를 가졌냐고 그랬잖아. 어떻게 키울 거냐고 그랬잖아.”
“그래 엄마가 미안해.”
“도대체 엄마가 뭐가 미안한데? 이제 엄마가 원하던 대로 된 거 아냐. 안 그래?”
엄마는 그 길로 병실을 나가버렸다. 엄마가 울면서 나갔던 거 같기도 하고, 눈을 흘겼던 거 같기도 하고, 얼굴이 새하얗게 질렸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그게 아니었어. 난 그냥 엄마의 축하한다는 그 말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거야. 맨 처음부터 말야. 다른 엄마들처럼 임신을 축하한다고 듣고 싶었어.
엄마에 대한 미안함과 동시에 원망이 내 기억 저편에서부터 올라왔다.
아빠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엄마는 그 많던 재산을 할아버지에게 그대로 돌려주어야했다. 하루 아침에 경제력을 잃은 엄마는 두 아이를 데리고 얼마나 마음이 무거웠을까. 서른 여섯 엄마에게 일자리를 주는 곳은 없었다. 엄마는 자기 언니가 있는 일본을 향했다. 엄마는 내가 엄마처럼 되는 것만은 피하고 싶어했다. 공부를 잘 했고, 글 쓰는 걸 좋아했으니 기자가 되어 세상 곳곳을 다니며 자유롭게 살아주기를 엄마는 원했다. 그치만 엄마가 원하는 길은 누구나 다 환영받는 길은 아니었다. 취업시험에서 떨어진 사람에게 기자가 되는 길은 프리랜서 밖에 없었다. 그치만, 엄마는 딸이, 아니 우리 딸이라면 뭐든 다 해내리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엄마는 내가 일본이란 타국에 있는 사실도 잊고 사는 거 같았다. 차별 받아보지는 않았다고 하지만 타국에서 성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더구나 ‘글’ 또는 ‘말’로 일본인들과 상대를 겨루는 건, 지난 내 이십 대를 뒤돌아보면 치열하고 또 치열하고, 때로는 더럽고 자존심 상하고 상처받을 수 밖에 없는 시절이었다. 아니, 무엇보다도 내 자신에 대한 불신과의 싸움에서 조금씩 조금씩 웅크려 들다보면 이내 자존심도 자신도 사라지고 남는 건 삶에 대한 회의뿐이었다. 얼마나 날 갉아먹어야 글은 태어나는지 얼마나 날 갉아먹어야 기획은 창조되는지……. 그런 값비싼 고민이 아니라 갉아먹을 흔적조차 남지 않는 자신을 뒤덮기 위해선 담요 한 장만으로 택도 없이 벅찼다. 내게 있는 건 남들보다 몇 번 더 상을 쥐어준 글 솜씨와 남들보다 조금 빼어난 관찰력과 남들보다 아주 조금만 우월한 인내였을 뿐. 인맥도 연줄도 아무것도 없었다. 물론 노력이 부족했다는 건 만인이 아는 사실이니 새삼 끄적이기도 불편하구나. 단지 무모함만큼은 넘치고도 남을 만큼 가지고 있었는데 삼십이 되면서 모든 게 더욱 불편해졌다. 신문기자가 되지 못한 게 한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원하는 직업을 못가져 준 게 너무나도 미안했다. 아이를 유산하고 병실에 누워있는 내 자신이 한심했다. 그냥 아팠다. 아이는 얼마나 아팠을까. 옆 커튼 안에 들리지 않게 숨을 죽이고 눈물을 닦았다.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았다.
그럴수록 엄마가 원망스러웠다. 엄마는 왜 나한테 공부하란 소리를 안 한거야? 왜 기자 말고 다른 회사 시험을 보라고 안 한 거야? 왜 엄마는……. 근데 말이지, 그 어릴 적 그렇게 춤을 좋아하고 노래를 좋아했던 나한테 엄마는 왜 발레를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일까? 그놈의 텔레비전 컬러바가 나오는 5시에서 5시 30분까지 클래식 컬러바에 따라 나오는 클래식 음악에 맞춰, 회전을 수백 번 해도 엄마는 그게 내 특기인지 아직도 모르고 있으니 말이다. 난 발레리나나 뮤지컬 배우가 되었음 했는데 말야. 엄마란 아이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그렇게 행동하면서 실은 아무것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날 밤 울다 잠든 사이 누군가 다녀갔다. 침대 곁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엄마였다. 난 눈을 뜨지 않았다. 숨을 죽이고 옆으로 고개를 틀었다. 엄마가 의자에 앉는 소리가 들렸다. 십분쯤 지났을까. 엄마는 날 깨우지 않고 머리를 쓰다듬은 후 자리를 떴다. 엄마 의자 위엔 바스락 거리는 비닐 봉투가 놓여있었다. 봉투를 뜯었다. 김이 모락모락 솟아올랐다. 순대!
서른이란 나이는 혼자임을 감출만한 여력을 충분히 가지고도 남는구나.
결단코 외롭지 않은 사람 마냥 방바닥을 뒹군다.
결단코 외롭지 않다고 누군가의 방명록에 끄적이고 내 자신의 게시판에 끄적인다.
외로움이나 그리움을 다 감추고 과연 글을 쓸 수나 있을까.
고독의 고고함 없이 탄생의 순간을 맞이할 수 있을까.
조용한 밤이구나.
아이의 유골이 놓인 텔레비전 옆 탁상 위에 우유를 따르고 짧은 기도를 바친다.
당분간은 아이의 유골과 함께다. 아마 그 영혼과는 평생 함께겠지. 아멘.
조용한 밤이구나. 타이핑 소리가 밤을, 방을 울린다.
아이를 잃고 가장 많이 생각하는 건 엄마인 거 같다.
엄마는 간혹 삼계탕을 해서 가져오기도 하고 도가니탕을 끓여놓고 가기도 했다. 삶이 잔혹하단 사실을 아빠는 죽음으로 엄마는 삶으로 내게 가르쳐줬다. 엄마가 뼈 빠지게 일해 봤자 서민이란 겨우 학교가고 밥 먹는 게 전부였다. 아빠가 살아있을 때 그리도 자주 가던 여행 같은 건, 아빠가 돌아가신 후 단 한 번도 떠나지 못했단 사실을 난 그쯤에서 기억해냈다. 그치만 삶이 아무리 잔혹해도 싸우고 또 싸우고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도 아빠와 엄마가 알려주었다. 엄마는 늘 웃음을 잃지 않았다. 화장기 없는 얼굴로 자기 바에 서서 새벽 4시까지 일을 하면서도 엄마는 자기 걱정보다 우리 걱정을 더 많이 했다. 나이가 들면서 엄마는 입버릇은 하나였다.
“나 죽을 때 장례비는 남겨놓고 죽어야지. 제발 깨끗하게 갔으면 좋겠다. 몸 아파서 너희들 고생시키지 말구”
엄마가 그런 말을 할수록 왠지 딸은 더더욱 미안했다.
엄마랑 난 아주 친한 친구처럼 지내고 있지만 우리 둘은 너무 많이 달라서 엄마가 내게 속내를 보여줘도 딸인 내가 엄마한테 내 맘을 보여주는 일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솔직히 뭐, 내가 속을 보여준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늘 혼자였다. 학창시절엔 아빠 뭐 하냔 소리도 듣고 싶지 않았고, 작은 집으로 친구들이 놀러오는 것도 꺼려했다. 뭐 하나 흠이라도 잡힐까봐 조심해야했다.
엄마, 여행 한 번 못 시켜드렸는데.
내 것만 좋은 걸로 챙기고 엄마 것은 챙기지도 못했는데.
막상 여행 시켜드리고 뭔가 챙기려하면 쑥스럽기도 하고, 별 것도 아니면서 생색부터 내려한다.
엄마가 아이를 축하하지 못했던 건, 엄마의 인생이 서글펐기 때문일 수도 있고, 딸에 대한 꿈이 너무 컸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치만 여전히 섭섭했고, 아이의 죽음이 엄마 탓인 냥 느껴지는 날도 있었다.
머릿속은 복잡했다. 엄마가 밉다가도 고맙고 고맙다가도 밉고 괜시리 눈물만 흘렀다.
그날 밤 병원에서 혼자 순대를 손으로 집어먹었다. 신주쿠 역에서 20분은 걸어야 있을 손으로 만든 순대집의 순대는 찰떡처럼 차지고 속까지 꽉 차 있었다. 엄마, 고마워. 결국 난 엄마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미안하단 말을 목젖 뒤에 숨기고 사는 것과 동일한 이치다.
조용한 밤이구나.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울어도 가고 웃어도 가고, 울면서도 보내고 웃으면서도 보내고 그래 시간은 잘도 가는구나.
잘 살아야하는데 자꾸 막연해진다.
아빠가 자신의 죽음으로 남겨준 게 있다면, 살아있는 것 자체에 만족하란 충고였다. 뭐가 되려고 노력하는 것이야 물론이지만, 그 어떤 고뇌 앞에서도 생을 포기해선 안 된다고 아빠의 죽음을 통해 익혔다. 목숨이 어찌나 끔찍한 건지, 그걸 지키는 게 인간에게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죽은 후에도 아빠는 늘 가슴속에 살아서 끊임없이 ‘삶을 감사하라’고 ‘삶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라’고 속삭였다. 근데 자꾸만 욕심이 앞선다. 창조해내고 생산해내고 길러내고 싶다. 창조와 생산이 없는 빈곤한 삶을 어찌 받아들이면 좋을지 모르겠다. 눈물은 짜고 짜도 또 나왔다.
12월 어느 날. 아이를 묻고 돌아온 바로 다음날, 생리가 왔다. 이제 몸이 본 상태로 돌아오고 있다는 시그널이다.
몸은 마음보다 가끔 더 단단하고 더 솔직하고 더 생리적이며 더 인간적이고 더 야만적이다.
몸은 늘 내게 살아라 살아라 그리 가르친다.
사는 건 늘 죽음과 연계되어 있다. 그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따름이다. 그건 슬퍼해야 하거나 아파해야 할 일이 아니라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진실인 것이다.
아이의 유골이 없는 집은 서늘했다. 이제 우유를 살 일도 아기 과자를 사올 일도 없구나.
아이가 내게 남겨준 건 무얼까. 그 죽음으로 내가 깨달아야 할 건 무얼까. 탄생 없이 떠나간 너에게 엄마로서 난 앞으로 어찌해야 하는 걸까. 너도 태어났음 나에게 미안하다고 말하고픈 아이가 되었을까. 우린 왜 만나지 못했을까. 우리 서로 미안해하는 사이였음 좋았을 것을…….
아이는 꿈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형체도 없이 사라진 아이를 어떻게 끌어안으면 좋을지 난 알지 못했다. 미안해. 미안해. 백 번을 사죄해도 천 번 무릎을 꿇어도 용서를 완벽하게 빌 수는 없을 게 분명했다.
하지만, 일상은 조용히 내 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아이의 흔적을 미니 홈피에서 지워나가는 대신 내 머릿속에 내 기억 속에 선명하게 새겨두기로 했다.
삶은 내게 자꾸만 미안한 사람들을 만들어주고 있다. 엄마, 미안해. 아이야, 미안해. 그리고 여보, 미안해. 미안할수록 삶을 풍요롭게 살아야겠다고, 살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마치 초등학생의 기도처럼 중얼거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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