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행문 [쿠바 한인의 후예를 찾아서 4 (민혜기)] 쿠바 한인의 후예를 찾아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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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786회 작성일 10-06-07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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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옆에 앉아 순수 한인 혈통을 이어오고있다고 자랑하는 박월선 할머니. (이들과 점심을 나누는 자리에서)

▲ 실버팀 여러분이 아리랑 가락에 마추어 아리랑 춤 시범을 보여주고 있다.

▲ 마탄자스 한인 후예들과 기념 촬영
마탄자스 지역에 사는 한인후예들
실버미숀 동역자 쿠바인 도피코 목사와의 연결 고리는 어떻게 맺어졌을까 궁금증은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이런 이야기 들을 사이 없이 쿠바에 다녀왔기 때문이다. 쿠바 실버 미숀 팀은 여행 후 10여일 만에 다시 만났다. 여기서 내 궁금증은 사전 답사 차 부군과 함께 다녀왔던 이경애님을 통해 들을 수 있었다.
여섯 부부 12명은 캐나다의 혹한을 피해 휴향지 바라데로 여행을 갔다. 벌서 두 번째 방문이었다. 그 분들 마음속엔 골프여행도 좋지만 소문으로 듣고 있는 쿠바인들의 궁핍한 생활고에 조금이라도 힘을 실어줄까 해서 구호품 챙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아무런 연고지 없이 구호품 전달도 쉽지 않음을 현지 도착해서야 알았다.
우선 바라데로 시내로 가기로 했다. 이중 이원홍 장로내외분을 비롯 여섯 분은 구호품을 싣고 역마차에 올라탔다. 성당이 보였다. 문을 두드렸으나 성당문은 꼭꼭 잠겨있었다. 교회만큼 이 뜻이 전달될 곳이 없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다시 역마차 차부를 설득 사람 많이 모이는 시장 비슷한 곳을 찾아갔다. 윤선생은 이들을 향해 영어구사 가능한 사람이 있는 가고 외쳤다. 근처에 교회가 있는지 아는가 묻고 싶어서였다. 그 때 한사람이 앞으로 나와 우리를 한 교회 문 앞에 안내했다. 문을 두드렸다. “찾아라 그리하면 찾아질 것이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열릴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은 이곳에서도 그들에게 영감처럼 떠올랐겠지. 중년의 남자가 교회 문을 열어주었다. 얼핏 보아도 이 교회 담임 목사 같았다. 다행이 영어가 좋다. 실상 바라데로는 관광지다. 따라서 부잣집 밥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만 얻어먹는다 해도 비교적 다른 도시 사람들보다는 생활 형편이 좋은 편이다.
윤선생의 방문 목적 설명을 듣고 있던 목사는 교회당 안으로 그들을 영접하고 함께 담소를 나눈 뒤 손에 손을 잡고 함께 기도했다. 가지고 온 물품들은 목사님께 전달했다. Joel Dopico 목사와의 연결고리는 이렇게 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우연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확실한 만남이었고 이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가 펼쳐지리라는 감격이 이곳을 방문한 모든 이의 가슴속에 심겨졌다. 실버미숀 사역지의 싹이
움트고 있었다. 이원홍장로와 이동렬 선교국장과 함께 윤선생은 움트는 새싹을 키우기 위한 세 번째 여행을 2008년 봄, 한인후예들의 실정을 조사하기 위해 다녀왔다. 다녀온 후 윤선생은 도피코 목사와 함께 실버미숀 파트너 쉽을 맺고 협력사역의 구체적인 방안을 논의 했다. 뜻을 함께 할 팀 구성에 온 힘을 기우렸다. 팀 멤버들은 모두 자비량으로 참여하고 윤 팀장은 선교기금으로 협조할 동지들을 규합했다.
도피코 목사는 우리와 함께 첫 날부터 마지막 그곳을 떠나는 순간 까지 실버미숀 팀의 뒷바라지와 안내뿐만 아니라 쿠바 크리스챤 리더들과 인맥을 어어 주면서 쿠바 한인후예들의 생활현장의 베일을 벗게 해주는데 절대적인 역할을 했다.
뿐만 아니라 앞으로 쿠바 선교를 위한 전략까지도 짤 수 있는 구체적인 계획을 세울 수 있다는 가능성 까지도 타진 할 수 있음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마탄자스 카디네스 하바나 이 세 지역에 흩어져 살고 있는 한인 후예들과의 만남의 기회가 이루어졌음은 결코 우연이라기보다는 사람을 도구로 사용하여 당신의 인간 사랑의 길을 펴 가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함께 해주셨다는 고백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신학교 방문 후 서둘러서 우리 일행은 한인후예들이 기다리고 있는 마탄자스 장로교회로 갔다. 예정보다 좀 늦게 도착하니 40여명의 한인 핏줄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실버 미숀팀의 활동은 교회 안에서만 활동이 제한되었고 그랬기에 우리를 맞이하는 이분들이 참 귀하게 여겨졌다. 쿠반 담임 목사는 우리를 반갑게 맞이했다. 신학교 재학 중인 김성기 목사가 이 교회 중년 넘은 은 쿠반 목사를 도와 봉사하고 있다. 교회에 이들을 초청 점심을 대접하는 우리와 한인후예들과의 첫 번 만남의 자리가 이루어졌다. 대부분 갈색의 피부에 서구적인 얼굴 모습으로 우리 본래의 모습과는 많이 달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멕시코로 이민했던 대부분의 일세들 자손들이 멕시코인 또는 쿠바사람을 배우자로 했으니 그럴 수밖에 없겠다는 이유가 명백해 졌다. 이들은 모두 쿠바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로부터 아이들까지 함께 한 자리었다. 반갑게 맞이하는 이분들은 우리들의 볼에 가볍게 키스해주며 환영의 마음을 전해준다. 이들 중 곱고 단아한 모습을 한 할머니 한분이 내게 다가왔다. 동양적인 모습에 품위까지 풍겨 퍽 호감이 가는 노인이었다. 내 곁에 앉아 식사하며 한마디씩 한국어로 나와 소통을 하려는 애씀이 영력했다. 이 애씀은 나도 마찬가지다. 자기이름은 ‘박월선’이라고 했다. 몇 번이고 되풀이한다. 딸이 마이아미에서살고 있고 한국인의 혈통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는 말을 자랑스럽게 해주었다. 그러나 그 딸을 3년에 한번밖에 보러 갈 수 없단다. 미국정부가 허용해주지 않기 때문이란다. 그 곁에 김씨 성을 가진 갈색피부의 할머니도 소통을 하고 싶어 애쓰나 한 마디의 스페인어를 알지 못하는 나로선 안타깝기만 했다. 이들의 국어는 스페인어다. 언어가 소통되었더라면 겹겹이 쌓인 사연들을 얼마나 많이 털어놓고 싶었을까.
아리랑 가락에 맞추어 춤사위도 보여주었고 날렵하고 유연한 몸매로 부채춤을 추는 김진균씨의 움직임을 넋 놓고 보고 있다. DVD에 담아간 한국전통 혼례장면과 음악을 보여주었다. 아메이징 그레이스(찬송가 나 같은 죄인 살리신..)를 하모니카로 독주 해주니 눈물짓는 분들이 눈에 들어왔다. 고맙다는 인사와 더불어 손도 잡고 허깅도하며 훈훈한 정감을 나누게 되었다. 이들은 앞에 나와 애국가로 답례했다. 그런데 이게 왼 일인가. 일제 점령 당시 새해 전야에 부르는 올드 랭 사인 곡에 마추어 불렀던 애국가를 부르고 있지 않은가. 동해물과 백두산이...가사도 뚜렷하다. 김구선생에게 독립자금을 보냈던 마트나 임씨의 아버지 시대에 목메어 불렀던 애국가! 이곡을 붙여 익히 부르고 있는 찬송가 ‘천부여 의지 없어서..’가 한 가닥의 정서로 몰려와 시큰해지는 코 잔등, 뭉클한 가슴, 반사작용을 막을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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