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꿈속의 아픔도 고통이었다. (최순봉) > 아메리카 이민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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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수필] 꿈속의 아픔도 고통이었다. (최순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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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3,746회 작성일 10-06-06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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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나이가 들어 살아온 세월을 뒤돌아보면, 돌아보는 그 순간이 행복에 젖어 있을 때는 행복했던 순간들이 먼저 생각나고, 그 순간이 불만에 빠져있으면 불행했던 것들만 기억의 창고에서 쏟아져 나와 불평을 보탠다. 그래서 삶은 마치 희비(喜悲)의 쌍곡선을 그어 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는데 현실이 어느 선을 긋고 있느냐가 과거의 삶, 희비의 어느 한쪽과 연결이 되어 있는 것 같다.
이렇게 산다는 것도 따지고 보면 흑백의 논리를 벗어나, 흑도 백도 아닌 흐리멍덩한 삶의 순간들이 허무 속으로 묻혀 간 것이나, 설사 불행했다고 생각하는 그 순간도, 행복했던 추억도 모두 다함께 오늘의 나를 창조하는 부분들인 성싶다. 이런 맥락에서 산다는 것을 진솔하게 고백한다면 물론 자부심을 느낄 때도 있겠지만 때로는 부끄러워지고 때로는 원인도 없이 한없이 울고만 싶어지는 것이 추구가 있는 보편적인 사람의 현실일 것이다. 추구란 말할 것도 없이 막연하기만 한 무병 장수 다복함일 것이고.....
이런 것이 이성의 산물이며, 본능적으로 주인의 소리를 흉내만 내는 앵무새와 다른 사람만이 누리는 축복이다. 앵무새에 비유한 이 말은 오해가 있을 것 같아 미리 밝혀 두지만 특정 종교를 모독하려는 말이 아니라, 종교에 대한 교리를 잘못 가르치고 잘못 따르는 신앙인 에게는 반드시 해당되는 말이다. 마치 교리를 배워서 목적을 추구하는 과정을 통하여 배운 것을 삶 속에서 실천하지 않고 교리를 입으로만 되뇌이는 믿음은, 다시 말해 앵무새의 흉내와 같은 믿음이다. 결국 이런 믿음은 추구를 얻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하느님이 그들처럼, 사람의 입맛에 따른 편견으로 선택된 부분만을 흉내내는 것을 원하셨다면 사람을 창조하지 않으시고 앵무새만 창조하시고 기뻐 하셨을 것이다.
최소한 내가 믿고 아는 것은, 종교의 교리를 믿는다고 하여 그들이 말하는, 성불이나 구원이란 추구가, 전능하신 분의 정의로운 능력으로 이루어 주시는 것이 아니라, 보시나 사랑하는 마음으로 베푸는 헌신으로만이, 그토록 고귀한 구원이나 성불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믿고 안다. 그런데 보시나 사랑이라고 하는 요놈이 그리도 실천하기가 어렵다는 사실이다. 사랑이란 당돌하게도 생명을 요구하는 경우가 너무도 많기 때문이다.
내가 이런 것을 조금은 깨달았다 해도 나 또한 속 된 사람이니, 사랑을 한다고 하면서도, 근시적이고 이기적이라 자기 것에만 집착하게 되고, 이런 환경은 언제나 실족한 것 같은 불안 속으로 스스로 빠져 들 때가 있었다.
하지만 그럴 때는 실족이 아니라 도약을 위한 몸짓이었다. 그러나 그 몸짓이 도약을 위한 수단이지만, 그 실족한 것 같은 몸짓을 하는 순간의 아픔은 참기 어려운 진한 고통이 따르는 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결국 내가 나와 연관 된 모든 삶의 주최이듯, 이기적인 나의 삶 속으로 다가서는 이런 아픔들은, 탈 없이 자라주는 사랑하는 두 아들을 통하여 위로를 받았다. 내가 겪던 아픔들이 반드시 겪어야할 과정이라면 아이들은 진통제 역할을 했고, 불의에 의한 상처일 때는 붕대처럼 그 상처를 싸매 주기도 하고 아물게도 하여 주며, 어렵고 고통스런 순간들을 모두 견디게 하여 주었다. 그렇다 해도, 간혹은 내가 아이들에게 짐이 되는 것 같은 느낌! 아들로부터 받는 치 사랑이, 아픔으로 다가올 때는 참을 수 없는 서러움까지 더한다. 아마, 그런 자책의 아픔을 사랑이 주는 고통이라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러한 사랑의 체험이 가족이란 울타리 속에 용해되고 있었지만, 처음 미국으로 이민을 올 때 이루겠다고 다짐한 꿈은, 가족이란 집합체가 오히려 무거운 짐이 되어 내 삶을 한가하게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런데 현실을 살펴보고 과거를 돌아보면 언제나 허무할 뿐이다. 그 이유는 "현실"이란 훌륭한 가치의 꿈의 열매들을 손에 잡고 있으면서도 현실을 만족하지 못하는 욕망 탓이라 생각된다.
이민이란 원래가 절박한 선택이고 그러한 선택 속의 꿈과 야망도 이민을 선택하는 절박함 만큼에다, 재기불능인 패자의 서러움을 더한 것 같은 아픔이 응고되어 있다. 아니 이 말은 최소한 나의 경우다. 이민을 선택할 당시 만약 내가 한국에서도 쉽게 생활 경쟁에서 살아 남아 꿈을 이룰 수 있다고 판단했다면 이민을 선택하지 않았을 것이란 말이다. 그렇다고 무작정 그 현실을 도망쳐 왔다면 꿈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꿈이 있었고 지금도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있다. 이렇게 아름다운 미래를 꿈꾸고 있지만 꿈속의 아픔도 고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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