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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행문 하와이 한인이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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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4,656회 작성일 10-05-13 1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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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남북 전쟁을 전후하여 하와이의 사탕수수산업은 그 중요성을 더 해가고, 이에 하와이의 사탕수수와 파인애플 농장주들은 이 산업을 확대하기 위해 처음에는 유럽에서 노동력을 수입하려 했으나 별로 여의치 않게 되자 아시아로 눈을 돌렸다. 그래서 제일 먼저 중국인 노동자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1880년대 부터는 일본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오기 시작했다. 그후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 정부와 계속적인 접촉을 갖고, 드디어 1902년 11월 고종이 노동 이민을 허락 하므로써 한인 노동자들의 이민이 시작되었다.

하와이 농장주들은 조선의 항구 도시 거리마다 하와이의 풍물, 작업내용, 미국 달러로 임금을 지급한다는 포스터를 붙이고 노동자를 모집했다. 1개월에 16달러를 지급한다는 광고는 당시 대기근으로 가난과 기근에 시달리던 조선 노동자에게는 일확천금을 만들 수 있는 기회로 여겨졌다. 그리하여 최초로 121명이 인천항을 떠나, 1903년 1월 13일 개릭(Gaelic)호를 타고 드디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하였다. 그후 1905년 까지 65차에 걸쳐 7천녕이 넘는 한국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이주 하였다.

그러나 1905년 고종은 멕시코 대마 공장에서 일하는 조선 노동자들이 심한 학대를 받는다는 이유로 이민을 중단 시키나, 사실은 하와이에서 일본인들 노동자들이 한인 노동자들로 부터 위협을 받는 것을 염려한 일본 정부의 압력에 의한 것이었다. 그후 한인의 해외 이민은 없었고, 아주 극소수의 개인적인 한인이 해외로 나올 뿐이었다.

이들 한인 노동자들은 대부분이 남자들로 결혼을 하여 가정을 이루기를 원했으나 한인 여성이 거의 없어 결혼을 할 수가 없었다. 결혼하러 한국을 다녀온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그래서 궁여지책으로 생겨난 것이 사진 결혼이다. 서로가 사진을 중매장이를 통해 주고받고, 이 사진을 들고 아가씨가 남자를 만나러 하와이로 건너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1910년 부터 1924년 까지 약 950명 정도의 사진 신부가 하와이로 건너왔다. 이렇게 해서 건너온 아가씨들에게는 연분홍빛 희망 보다는 척박하고 견디기 힘든 고생의 나날들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낮에는 사탕수수밭에서 노동을 했고, 밤에는 삵바느질을 하며, 오로지 자식과 자식들 교육에만 힘섰다.

한편, 하와이에서 군사력을 키우며 일제로 부터 무력 독립을 계획하던 박용만 선생은, 미국 유학후 L.A.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 박사를 하와이로 초청한다. 이후 이들은 동지회를 조직하여 한국의 독립 운동과 한국인의 교육, 문화 발전에 지대한 업적을 남겼다. 동지회는 미주 각 여러 지역에 지부를 설치 하였고, 이를 통해 상해 임시 정부를 재정적으로 도왔으며, 외교와 일제 식민의 부당함을 알리는데 노력 하였으며, 이승만 박사가 설립한 한인 기독학원을 지원하였다. 이러한 동지회의 활발한 활동은 우리의 선조 이민자들이 사탕수수밭에서 피땀을 흘려 모은 돈으로, 오로지 조국의 독립과 2세의 교육을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 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활발하고 왕성한 활동을 한 동지회는 1953년 한인 기독학원을 폐교하고, 그 건물을 매각하여 남은 돈 18만불을 하와이와 인연이 깊은 인천에 기증, 인천과 하와이의 첫자를 따서 만든 인하대학교 설립에 초석이 되었다. 동지회는 이외에도 대한민국 총영사관 건물 구입에도 많은 도움을 주었다.

이러한 동지회의 활동을 배경으로 이승만 박사는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1960년 4.19 이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1965년 7월 하와이에서 별세 하셨다.

동지회의 전폭적인 지원과 활동을 배경으로 이승만 박사는 대통령이 되지만, 정작 동지회의 설립자인 박용만 선생과는 끝내 의견 대립이 있었다고 한다.

힘들고 고단한, 모든 일이 순탄하지 않았을 사탕수수 노동 이민자들이지만, 우리의 이민 선조들은 조국을 위해 한푼두푼 쌈지돈을 모아 해방전 까지 3백만 달러가 넘는 거금을 보냈다는 사실에 우리는 숙연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최초의 한인 이민단은 통역관 2명을 포함하여 전부 121명이었다. 대부분이 인천 내리교회 신도들이었던 이들은 1902년 12월 22일 신천지를 향해 인천항을 떠난다. 당시는 한국에서 하와이로 직접 갈 수가 없어서 일본 고베항을 경유한다. 이곳에서 종합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20명이 탈락하고 101명만이 고베항을 출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다시 신체검사를 실시하여 15명이 탈락하고, 최종적으로 86명만이 상륙 허가를 받아 이들이 최초 미국 이민단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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