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 대전 이전의 프랑스(2) 9/1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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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6,335회 작성일 10-01-28 00: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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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국가의 근대 미술 1st hour : France before WW1 (2)
Post Impressionism: 폴고갱, 세잔 중심의 후기 인상파. representation 에서 expression 으로 가는 20세기 미술의 포문을 열었다.
Fauvism: 야수파. 마티스, 앙드레 드레인 중심의 강렬한 색을 탐구했다.
Cubism: 큐비즘. 면을 파편처럼 부수어 그리는 방식이다. 피카소의 지적 탐구 과정에서 칸와일로의 초상 에서 grid 가 나타난다. Grid 는 서양 미술 역사의 가장 중요한 tool 로 sketch 를 잘하기 위해 숨겨져 있던 도구였는데 피카소가 모눈틀을 거꾸로 뒤집어서 칸와일로는 오히려 안보이고 바둑판만 보인다.
Salon des Refuses: 탈락자의 미술전. 나폴레온 시대에 국가 살롱전에서 떨어진 많은 신진 작가들이 따로 미술전을 만들었다. 마네가 국가전에서 탈락되고 Salon des Refuses 에 The Luncheon on the Grass 를 출품한다.
Salon des Independants : 독립전. 19세기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왕립회원이 됨을 거부하고 Post Impressionist 들의 무대인 독립전을 만들었다.
Salon d’Automne: 가을전. 마티스는 작은 그룹전인 가을전에 Joy of Life 를 비롯한 그의 강렬한 그림들을 전시하고, 가을전은 fauvism 야수파의 모태가 된다.
Fauvism: 야수파. 마티스, 앙드레 드레인 중심의 강렬한 색을 탐구했다.
Cubism: 큐비즘. 면을 파편처럼 부수어 그리는 방식이다. 피카소의 지적 탐구 과정에서 칸와일로의 초상 에서 grid 가 나타난다. Grid 는 서양 미술 역사의 가장 중요한 tool 로 sketch 를 잘하기 위해 숨겨져 있던 도구였는데 피카소가 모눈틀을 거꾸로 뒤집어서 칸와일로는 오히려 안보이고 바둑판만 보인다.
Salon des Refuses: 탈락자의 미술전. 나폴레온 시대에 국가 살롱전에서 떨어진 많은 신진 작가들이 따로 미술전을 만들었다. 마네가 국가전에서 탈락되고 Salon des Refuses 에 The Luncheon on the Grass 를 출품한다.
Salon des Independants : 독립전. 19세기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왕립회원이 됨을 거부하고 Post Impressionist 들의 무대인 독립전을 만들었다.
Salon d’Automne: 가을전. 마티스는 작은 그룹전인 가을전에 Joy of Life 를 비롯한 그의 강렬한 그림들을 전시하고, 가을전은 fauvism 야수파의 모태가 된다.
1st hour: France before WW1 (2)
Salon des Refuses 는 단어 뜻 그대로 거부된자, 탈락자의 미술전 salon을 의미한다. 나폴레온 시대에 국가 살롱전에서 떨어진 많은 신진 작가들이-마네를 위시하여- 항의를 했고 자신들만의 미술전을 만들었다. 당시의 주류는 신고전주의의 자크 루이 다비드, 낭만파 드라큐루나 들이었고 큰 화폭에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역사적 인물과 사건을 장엄하게 그려서 국전에 출품했다.

Edourd Manet (1832-1883), The Luncheon on the Grass 1862-63
그런데 마네가 국전에 낸 작품이 풀밭의 점심 식사 로 브르조아 남성 둘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두 명의 여성 중 한명은 나체로 그려서 출품했다. 국전 심사위원들에게는 분노를 자아내는 주제였고 마네는 보기좋게 떨어진다. 이리하여 떨어진 작가전인 Salon des Refuses 가 형성되었고, 사람들은 이상한 그림이라고 욕하면서도 호기심에 너도 나도 보러갔다. 그래서 마네의 이름이 널리 알려졌고, Paul Gaugain, Vincent van Gogh, Cezanne 도 당시의 비주류 outsider 로서, 딴지를 거는 입장에 있었고, 사람들의 주목을 받았다.
Salon des Independants 당시에 국전 출품을 하기 위해서는 나라의 왕립 회원이 되어야만 했다. 19세기의 후기 인상파 화가들은 이것을 거부하고 Post Impressionist 들의 무대인 Salon des Independants 독립전을 만들었고 Georges Seurat, Paul Signac 등의 Neo Impressionism 신인상주의, Pointillism 점묘파 들이 주축이 되었다. 한때 젊었고 도전을 불사했던 outsider 들이 시간이 지나고 주류가 되자, 기득권이 생기고 자신들 또한 젊은 세대들의 그림을 못 받아들이는 현상이 벌어진다. 진짜 국전은 오히려 쇠퇴하고 자신들이 만든 독립전이 힘을 얻자 어린 화가 지망생들의 동경의 대상이 되고 독립전 전시가 그들의 꿈이 된다. 37살 무명의 Matisse 가 그를 유명하게 만든 작품 Joy of Life 를 독립전에 출품하나 세라 Seurat 가 받아들이지 않고, 비난과 함께 거절당한다.
Salon d’Automne In 1903, the first Salon d'Automne (Autumn Salon) was organized by Georges Rouault, André Derain, Henri Matisse and Albert Marquet as a reaction to the conservative policies of the official Paris Salon. The exhibition almost immediately became the showpiece of developments and innovations in 20th century painting and sculpture.
대신에 마티스는 작은 그룹전인 가을전에 Joy of Life 를 비롯한 그의 강렬한 그림들을 전시하고, 가을전은 fauvism 야수파의 모태가 된다. 비평가인 Louis Vauxcelles (루이 브셀) 이 그림의 색깔이 야수 les Fauves (wild beast) 와 같다 하여 fauvism 이라고 불렀다. 이상과 같이 19세기에서 20세기 넘어갈 때 위의 세 salon 전이 마네, 후기인상파. 야수파의 출현에 중요 역활을 하였다.

Vincent van Gogh (1853-1890), The Potato Eaters, 1885
The Potato Eaters 1789년의 프랑스 혁명 이후 19세기의 나라 상황을 보여 준다. 봉건주의는 무너져도 농부들의 생활은 똑 같다. 왕대신 브루조아 공장 사장님이 생겼다. 당시에는 land holder 들만 투표권리가 있었다. 18세기 중엽-19세기에 영국에서 산업 혁명이 시작되고 1832년에 모든 사람이 투표권을 가지고 민주주의와 평등이 시작되자 프랑스는 앞서가는 영국을 바라본다. 미국도 이미 민주주의와 지방 자치제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말만 republic 이지 나폴레온 3세가 집권하자 마자 다시 empire 로 넘어가려 했고 democracy 의 요소가 전혀 없었음에도 자신들은 민주국가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타유럽인들이 보기에는 겉으로는 평등, 경제 풍요를 누리는 듯했지만 안으로는 어두운 면이 계속 보였다.
고호의 The Potato Eaters 는 부르조아들이 응접실에 걸어놓고 편안히 밥먹을 수 있는 그런 그림이 아니었다. 그림 안 팔리고 가난한 생활을 한 고호. 19세기 말의 예술가로서 사회 위기 의식과 사회 고발 정신을 가졌던 그는 센느강의 소풍, 몽마르트 언덕의 댄스 같은 인상주의 그림을 편하게 그릴 수 없었다. 인상주의가 중요한 이유는 부르조아의 출현과 더불어 그들이 그림의 새로운 주제가 됨으로서 브르조아의 등장을 선포했다는데 있다. 그러나 세기말에 브르조아의 illusion 과 신화는 무너져 내린다.

Vincent van Gogh, Night Café 1888
거친 붓질이 보이며 합리적인 공간 분배를 무시했다. 빛의 소스가 여러 군데 나타나는 비사실주의적 그림이다. Leisure 여가 시간을 즐기려는 브르조와의 출현과 더불어 공원, café 문화, 물랑뮤즈 엉화 같은 밤의 향락 문화가 등장했다. 그러나 그림에서는 혼자 누가 싸매고 업드려 있고 남녀의 아름다운 연애라기 보다 뭔가 거래를 하는듯, 따스하거나 재미있다는 느낌이 없다. 당시 인상주의 중요 주제인 환하고 즐거운 cafe 를 가져다가 우울한 café 로 twist 시켰다.

Paul Cezanne (1839-1906), Still Life with Basket of Apples 1895
고호는 도시 하층민의 삶을 주로 다루었고 세잔의 관심은 정물화, 풍경화였는데, 누구나 그리는 정물화인데 세잔의 Still Life 는 좀 이상해 보였다. 비례가 안 맞고 사과의 음영도 틀린 미완성 그림같다. 새가 와서 쪼아 먹을 포도를 그렸던 르네상스 그림에 비해 세잔의 사과는 누가 봐도 탐스런 진짜 사과처럼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사람들의 비판을 받았다.

Paul Cezanne, Mount Sainte-Victoire Seen from Les Lauves 1902
절대로 잘 그린 산이라고 할 수 없어서 사람들이 이것을 보고 불편해 했다. ‘이게 산이니? 알아볼 수 없다.’ 후기 인상파가 중요한 이유는 representation 에서 expression 으로 가는 20세기의 포문을 열었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산의 representation 은 사진이 할 것이며 그림이 더 이상 하지 않는다. 대신에 우리 화가들은 표현 expression 을 한다. 실제의 산이 아닌 세잔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산을 그린다.
당시에는 그림이 열등한 위치였고 화가 계급 역시 열등했다. 그림의 역활은 왕, 귀족들의 초상을 그려주고, 그들이 멀리 섬에 가지 않아도 섬을 볼 수 있게 똑같이 그려주는 것에 지나지 않았다. 중세에는 글을 못 읽는 사람을 위해 성경을 그림으로 그렸다. 이런 이유로 교회가 화가들의 최고의 후원자 였다. 그림의 역활은 이야기 전달과 사물을 똑같이 그려주는 봉사의 차원에 지나지 않았다. 그림의 산이 실물보다 못함은 당연하고 그림은 재현 대상보다 항상 열등한 위치에 있었다. 그러나 19세기에 들어와 그림의 주제와 방식 how 와 what 에 동시에 혁명이 일어났다. 당시의 화가들은 사회적 위치가 열등했으므로 자신의 예술이 사회 혁명과 연결되기를 바라고 utopia 의 실현을 꿈꾸었다
이제껏 해왔던 재현을 발로 차고 이제부터는 그림에서만 경험할 수 있는 것을 express 하겠다고 선포했으며 그림의 양식 style 이 재현에서 표현으로 paradigm 으로 바뀌고, 그림의 주제 또한 더 이상 기득권층이 아니고 소외층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Henri Matisse 1933 (1869-1954) Portrait of Henri Matisse, By Andre Derain 1905
Henri Matisse 1933 (1869-1954) Portrait of Henri Matisse, By Andre Derain 1905



Henry Matisse, The Joy of Life, 1905-6
The Joy of Life 는 마티스가 신인상주의 작가 Paul Signac 과 결별하는 계기가 됐고, 독립전에 냈다가 툇짜 받고 가을 살롱전에 출품한 작품이다. 마티스는 법공부를 하다가 20세 후반에 그림의 세계에 들어왔다. How 와 What 을 동시에 고민하다가 The Joy of Life 에서 한 큐에 해결하였다. 서양 예술의 중요 개념인 Arcadia (이상향, 무릉도원)가 The Joy of Life 의 주제이다. 당시에는 Bacchus (박카스신, 주신) 을 위시한 신들이 festival 에서 벗고 춤추고 술마시는 장면은 아주 자연스러운 theme 이었다. 그런데 The Joy of Life 에서는 신이 아닌 멀쩡한 사람들이 숲속에서 외설스러운 장면을 연출하고 있다.
The Joy of Life 는 그림도 엉망이다. 나무의 기둥과 가지가 선으로 대강 그려져 있고 더욱 분노를 자아낸 것은 중앙에 있는 사람들의 윤곽선이다. 사람을 그릴 때는 밴 고호의 The Potato Eaters 같이 sketch 를 먼저하고 물감을 칠하면 contour line 은 사라진다. Contour line 은 오직 그림을 잘 그리기 위한 도구의 역활이었다. 그런데 마티스는 사람 몸의 테두리를 그것도 두가지 다른색으로 굵게 그렸고 그안에 색칠을 하였다. 그리는 process 는 완성작에는 사라져야 하는데 마티스는 그 과정을 거꾸로 갔다. 이런 이유로 마티스가 당시의 주류 미술에서 퇴출되었음은 당연하다.
마티스는 윤곽 line 과 color 를 평생동안 고민했다. 선의 보조적 역활을 뒤집고 선 없이 그릴 수는 없는지를 계속 실험했다. 또한 색을 어떻게 쓸 것 인가를 고민했다. 세잔은 Mount Sainte-Victoire 에서 원래 사실 그대로의 색을 썼다. 그러나 마티스는 원래의 색을 던져버리고 그의 생의 기쁨을 표현하기 위해서는 나무의 색은 분홍이어야 했다. 이것은 color 도 재현도 벗어버림을 의미한다. 당시에 다른 작가들이 재현과 표현 사이에서 왔다 갔다 고민하는 동안 마티스는 이미 그 단계를 넘어서 재현을 과감히 던져 버리고 단지 어떻게 표현 express 할 것인가를 고민 하였다.

Pablo Picasso (1881-1973), Self- Portrait in Blue Period, 1901
피카소는 마티스보다 12 살 어린 띠동갑이다. 스페인 출신으로 19살에 파리에 왔으며 평생을 가난을 모르며 단 한명의 제자, 후배도 없다. ‘나는 너희와 보낼 시간이 없다.’ 피카소는 미술의 정의를1-2년 단위로 새롭게 내놓아 미술 역사를 새로 썼다. 새 정의을 세상에 내놓고 다른 작가들이 그것을 소화하느라고 벅차할 때 본인은 또 새로운 것으로 옮겨간다. 피카소는 큐비즘, 초현실주의, 다다운동에 다 들어가 있다. Self- Portrait in Blue Period 는 20살 때의 Blue Period 의 작품이다. 그는 곧이어 Rose Period 를 거치고 cubism 으로 들어간다.

Pablo Picasso, Les demoiselles d’Avignon 1907

아비뇽의 여인들 습작 sketch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을 보고 충격에 빠진 사람은 마티스였다. 자신의 생의 기쁨 (1905-6) 이 나온지 1-2년만에 띠동갑 어린애가 이런 그림을 그렸다. 마티스의 그림과 비교하면 많이 달라졌다. 화면이 유리 조각처럼 파편이 나고 여자의 몸도 조각이 나있고 얼굴도 충격적인 가면을 쓰고 있다. 19세기 말적 증후군으로 새로운 종교 Theosophy 와 Primitivism 이 사회에 팽배해 있었는데, 피카소와 마티스는 루브르 박물관의 대규모 African Mask 전시를 보고 많은 영향을 받았다.
마네도 아비뇽의 여인들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마네는 1863년에 서양 예술의 중요 icon 인 옆으로 누워있는 reclining nude 뷔너스 여신 대신 prostitute 로 바꾸어서 올림피아를 세상에 내 놓았다. 그런데 피카소는 전무 후무한 standing nude를 내놓아 서양사의 role model, 학습 방법을 과감히 던져버렸다.
창녀의 거리 아비뇽에서 커튼 제치고 호객 행위를 하는 여인임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피카소는 아비뇽의 여인들을 Gertrude Stain 남매와 dealer 및 동료 예술가에게만 살짝 공개했고, 미술사적으로 cubism 의 시작으로 평가되는 이 그림은 1923년에 불란서의 한 dealer 가 살 때까지 피카소의 studio 에서 16년 동안 빛을 못보고 있었다.
아비뇽의 여자들 중 한명은 정면을 응시하는데 등이 보이고 신체의 비례가 안 맞다. 그림의 양식이 3차원의 표현이 아니며 원근법이 파괴되었는데 이것은 마티스가 The Joy of Life 에서 이미 파괴한 것이다. 그런데 피카소는 하나 더 나가서 3차원에서 2차원으로 갈 때의 경로, 면이 부셔져 있는 것을 드러냈다. 마티스와 피카소를 통해서 그림이 이제 3차원이 아닌 2차원이, 평면이 추상이 되어간다.
마티스가 충격을 받은 이유는 또 있었다. 야수파 마티스는 색깔이 화려하고 expressionistic theme 이 있었다. 그런데 피카소의 Les demoiselles d’Avignon 는 주제를 모르겠다. 생의 절망도 아니고, 아가씨가 예쁘지도 않고 왜 그렸는지 알 수 없다. 피카소는 혁명이나 도시의 타락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고 오직 지적인 탐구에만 열중했다. ‘기존의 그림 방식으로는 나의 예술을 누구도 이해 못 한다. 나는 그림의 역사를 다시 쓰겠다.’

Pablo Picasso, Portrait of Daniel Henry Kahnweiler 1910
피카소의 dealer 의 초상으로 피카소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주제는 없다. 단지 그림을 그리는 방식, 지적 탐구만을 보여준다. 칸와일로의 초상 에서 grid 가 나타난다. Grid 는 서양 미술 역사의 가장 중요한 tool 로 sketch 를 잘하기 위해 숨겨져 있던 도구였다. 15,16세기 르네상스 화가들은 구멍뚫린 도구를 사용해 과학적으로 밑그림을 그렸다. Grid 는 재현을 위한 모눈틀인데 피카소가 모눈틀을 보이게 하고 칸와일로는 오히려 안보이고 바둑판만 보인다. 칸와일로라는 사람의 재현도, 표현도 아닌 칸와일로와는 상관없는 그림이 되었다.
Cubism 은 color 에 관심이 없이 색깔을 절제했고, line 과 2차원 공간에만 관심이 있다. 음영법은 3차원을 잘 보이기 위한 도구로서 고호의 감자먹는 사람들에 잘 표현되어 있다. 그러나 피카소는 dealer 의 그림에서 음영법을 가지고 play 를 하고 있다. 빛의 파괴--빛이 어디에서 들어오는지 모른다. 화가들이 그림 잘 그리기 위해 숨겨 놓고 썼던 나만의 도구를 파괴한 것이다.
Pablo Picasso, Maquette for Guitar 1912 African Grebo Mask


피카소는 African mask 를 보고 기호체계가 절대적이 아님을 깨달았다. Mask 에 있는 눈, 코, 귀는 뜯어놓고 하나씩 보면 절대로 눈, 코, 귀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튀어나온 눈을 코와 입 옆에 두니까 누가 봐도 얼굴임을 의심 안 한다. 하나의 사인은 대비, 혹은 도와주는 다른 sign 때문에 전체가 어우러져 약속대로 읽힌다. 기호체계는 절대적이 아니고 그것이 걸쳐 있는 context 에 따라 상대적이 된다. 이것은 마치 세상을 인지하는 것이 절대적이 아님과도 같다. 여자 남자의 개념은 남자가 있어야 여자라는 단어가 가능해지며, 인간은 짐승으로 인해 인간 존재가 완성된다.
피카소는 Maquette for Guitar 에서 기타를 거꾸로 조합했음에도 사람들은 기타라고 생각한다. 하나의 사인이 약속대로 보이기 위해서는 그 옆에 비교 대상이 있어야 한다. 미인의 조건이 있기 위해서는 그 옆에 미인이 아닌자가 있어야 한다. 이렇듯 존재의 완성은 상대적이다. 피카소는 이 mask 하나를 보고 세상에 대한 인식은 상대적임을 깨닫는다.
Braque, Fruit Dish Glass 1912

Picasso, Guitar Sheet Music &Wine Glass 1912


Braque 는 피카소 보다 먼저 Fruit Dish Glass 에서 파삐에 꼴레papier collé (pasted paper, 종이 오려붙이기)를 시작한다. 피카소는 브라크의 것을 보고 더욱 발전시켜 Guitar Sheet Music & Wine Glass 를 내 놓는다. 이것을 synthetic cubism 통합적 큐비즘 이라 하며 sign system 의 작위성을 실험하고 보여 주는데 1912년에 피카소의 의도를 깨달은 사람은 별로 없었다. 피카소는 anarchist (무정부주의자) 였는데 1910년대의 유럽은 긴장이 감돌았다. 1912년은 발칸반도 전쟁,1914년은 WW1 이 발발했다. 1900년에 파리에 온 피카소는 파리의 이방인이었고 피카소의 눈에는 파리의 standard, manner 등의 삶의 방식이 이해가 안 되었고, 결코 절대적으로 보이지 않았다. ‘왜 전쟁을 해야 해?’ 피카소는 마치 그림 속의 사인이 작위적인 것 처럼 사람의 확신도 상대적일 수 있음을 그림을 통하여 말하려 했고, 사람들이 그의 의도를 알기를 바랬다.
피카소는 analytic cubism 분석적 큐비즘을 1-2년 하다가 던져버리고 Guitar Sheet Music & Wine Glass 에서 종이를 붙이는 papiers colles 파삐에 꼴레를 한다. 이를 synthetic cubism 이라 한다. 이 역시 sensation 을 일으켰다. 그림은 붓으로 그리는 것이지, 대중 매체인 벽지, 풀 등을 사용하는게 아니었다. 박물관에 가서 감상하는 예술 작품인 high art 와 low art 사이에 경계가 분명했었는데, 피카소가 1912년에 Guitar Sheet Music & Wine Glass 에서 오려붙이기를 함으로써 경계를 허문다.
20세기의 모든 현대 미술은 사실상 피카소가 다 한번씩 해본 것이다. 뒤샹이 한 ready made 도 이미 피카소가 ready made 된 벽지를 씀으로서 장르 파괴를 시도했고 sign system 도 이미 실험을 하였다. 1-2년 단위로 미술의 새로운 정의를 자꾸 내놓자 다른 작가들은 따라 하기에도 헉헉거렸다.
Guitar Sheet Music & Wine Glass 안에 있는 ‘Le jou’ 는 신문 the journal 에서 잘라진 것으로 회화 안에 글자가 처음으로 들어갔다. 서양 예술에서는 그림은 글을 도와주는 열등한 분야 였다. 그런데 세잔이 그림 만이 할 수 있는 것 보여주었고, 그 이후에 그림과 글은 점점 멀어진다. 바야흐로 회화의 지위가 문학과 동등해지는 것 같았다.
또한 ‘the battle is engaged’ 라는 신문의 headline 을 오려서 Guitar Sheet Music & Wine Glass 안에 붙였다. ‘jou’ 도 끝까지 안 붙이고 중간에서 잘랐다. 왜 그랬을까? Jou (jouer) 는 play 라는 뜻으로 피카소는 puzzle game 을 관객과 play 하자고 제안하고 있다. ‘내가 quiz 를 내니까 한번 생각해 보세요’ Anarchist 인 피카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왜 battle 을 일으켜야만 하나? 전쟁—그거 허상이며 상대적인 거예요. 민주주의, 정부, 이념 같은 것에 속지 마세요. 당신에게 결코 행복을 안 줍니다.’

Picasso, Still Life with Chair Caning 1912
가짜 Table cloth 를 오려서 붙였다. 꼴라쥬는 paste 라는 뜻과 혼외정사 라는 뜻이 있다. 말 그대로 피카소의 예술은 신문등의 대중 매체와 바람을 피운다. 같이 있으면 안되는 것들이 같이 있다. WW1 발발 직전의 프랑스에는 마티스와 피카소가 있었고, 포비즘과 큐비즘이 대세였고, 후기 인상파의 폴고갱, 세잔이 있었다.

Picasso, Still Life with Chair Caning 1912
가짜 Table cloth 를 오려서 붙였다. 꼴라쥬는 paste 라는 뜻과 혼외정사 라는 뜻이 있다. 말 그대로 피카소의 예술은 신문등의 대중 매체와 바람을 피운다. 같이 있으면 안되는 것들이 같이 있다. WW1 발발 직전의 프랑스에는 마티스와 피카소가 있었고, 포비즘과 큐비즘이 대세였고, 후기 인상파의 폴고갱, 세잔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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