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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의보감’과 에도(江戶)시대 한류 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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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087회 작성일 11-11-14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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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은 일찍 찾아온 무더위로 지내기 힘든 날씨가 지속되었다. 빽빽한 일정으로 꾸려진 한·중·일 연합의학사학회는 2003년도 한국측이 주도하여 서울에서 처음 개최된 이래 두 번째로 속개되었던 터인지라 각국 전문가와 학자들의 관심과 기대를 모았다. 때문에 만만치 않은 여정과 다소 불편한 대회장 여건, 그리고 주최 측의 미숙한 진행과정에도 불구하고 3국의 의사학회 회원들이 동참하여 뜨거운 열기 속에 전개되었다.
아시아 전통의학의 대표주자
필자는 대회 초반 ‘한국의학의 형성궤적과 동의보감’이라는 주제로 기조강연을 맡아 ‘동의보감’을 비롯한 우리나라의 역대의학문헌을 중심으로 한의학의 발전과정과 역사를 되짚어보는 내용을 발표하였다. 발표내용이나 주제뿐만 아니라 장내의 관심은 온통 한국이 아시아 전통의학문헌의 대표격인 『동의보감』을 유네스코라는 국제기구가 인정하는 기록문화유산(중국과 일본은 세계기억유산이라 부른다)에 등재시킨데 대하여 환호하는 분위기로 모아졌다. 덕분에 그 일을 진행하는데 일익을 담당했던 한국의 한의학연구원과 필자가 뉴스메이커로 부상했으며, 학술대회장에서는 다소 이례적으로 축하 무드가 조성되었다.
그들은 분명 ‘동의보감’이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것이 한국의 경사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시아 전통의학의 가치를 인정받고 그 위상을 높였다고 자축하는 의미였다. 특히 중국에서 온 학자들은 등재 과정에서 보여준 중국측의 신경전과 네티즌들이 보인 시샘어린 반응과는 상관없이 자신들의 고전의학문헌인 『상한론』이나 『황제내경』, 『본초강목』 같은 명저들도 이와 같은 대접을 받을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렸기에 매우 고무되어 있는 눈치였다.  

  
한류열풍의 원조였던 조선의약 
0.jpg사실 이와 같은 반응이 비단 오늘날 한의계가 처음 경험하는 무대가 아니었다. 역사를 돌이켜보면 적지 않은 사례에서 과거 우리민족의 의약전통에서 산생된 많은 약재와 의료기술들이 주변국가로부터 훌륭한 대접과 애호를 받아왔던 것이다. 그중의 한 사례를 이번 방문길에서 다시 한번 확인해 볼 수 있었다. 학회를 마친 후 우연히 들른 이바라키 시내 한 가운데에 위치한 서점의 교양서 코너에는 에도시대의 풍물을 소개하는 책자가 눈에 띠었다. 내용 가운데 한 부분은 약에 관한 주제로 이루어져있었는데 쇄국정책을 유지했던 에도막부 시대에 의약과 관련한 풍물과 약을 거래하는 상인들의 모습을 수록하고 있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시기에 조선약을 전문으로 취급하는 약재상이 존재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대나무로 만든 삿갓에 조선의 복식을 흉내 낸 차림새를 하고 어깨에는 약재와 과자 등속을 넣은 걸망을 메고 다니면서 파는 행상이었다는 설명이다. 길거리를 활보하면서 조선에서 건너온 귀한 약을 사라고 외치고 다녔을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흥미를 자아내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이 메고 다녔다는 행낭에는 아마도 고금의 명약으로 자타가 공인했던 조선인삼과 우황청심원 같은 약재가 들어있었으리라. 
그저 과장된 말로만 꾸며진 것이 아니다. 일본의 전통목판화인 우끼요에(浮世繪)의 명인이자 당대 최고의 화가로 지목되는 호쿠사이(葛飾北齋, 1760∼1849)가 남긴 화본 『북재만화(北齋漫畵)』집에 ‘코오케이시(弘慶子)’라는 이름의 제목 아래 그 모습이 잘 그려져 있다. 에도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풍물거리로 등장하는 조선약재상의 활약, 그것은 다름 아닌 2백여 년 후에 재연되었던 한류의 선구적 모델이자 열풍의 전주곡이었던 셈이다.   
 
세계로 향하는 한의학 
요사이 해외출장길에 오를 때에는 낯모르는 외국인들에게 애써 한국의 전통의학을 장황하게 설명하기 보다는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 얘기로 화두를 꺼내는 것이 손쉽게 느껴질 정도이다. 세계인의 스포츠대전인 월드컵의 열기가 후끈한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드라마 대장금이 무려 90%가 넘는 경이적인 시청률을 기록했다고 한다. 예전에는 미처 상상하기 어려웠던 좋은 여건이다. 학회에서 돌아오자마자 연구원에서는 국제수준진단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아마도 국내 한의계로서는 선례가 없었던지라 무엇이 세계화의 척도인지 감을 잡기 어려워 적잖이 혼란스러웠다.
평가위원으로 내원한 그들은 이구동성으로 외국에서 'Korean Medicine'을 접해보지 못했다고 말했다. 또 어디에서 볼 수 있는지도 물었다. 몇몇 개인이 시도적으로 진출한 로컬클리닉이나 한국적 색채가 분명치 않은 대학교 이외에는 자신 있게 한국의 전통의술을 펼치고 있는 기관이나 병원을 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다 우리는 한류를 즐겼을 뿐 세계로 진출할 준비를 갖추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그들은 한국인의 풍속과 멋을 흉내 내고 즐길 뿐이지 이식되지 않은 채이다.
조선옷을 걸쳐 입고 조선약을 팔았던 에도시대 못지않게 한국의 이미지와 한국인의 풍속은 선망의 대상이 되고 있다. 에도시대 일인 학자들은 『동의보감』을 학습하여 조선의술을 익히고 조선의 침술을 자기화하였다. 그리고 100년 후 그들은 화란을 통해서 들여온 서양의 우두접종술을 조선에 소개하고, 미개하고 낙후된 조선의 의사들과 조상대대로 전승해온 전통의학을 폐기하고자 강압하였다. 찬란했던 경험과 뼈아픈 역사의 교훈은 사서(史書)의 앞장과 뒷면에 이어져 있다. 지금 우리가 새 시대의 전통을 만들어내지 못한다면 찬란했던 과거의 역사도 빛이 바래고 말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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