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을 기르는 밥, 식약료병(食藥療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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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370회 작성일 11-11-1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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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철 무더위가 기승을 부리면서 열대야로 인해 밤잠을 설치고 차가운 음료수와 에어컨 바람 속에 여러 날을 지내면서 입맛이 깔깔해지면서 식욕을 잃어버린 분이 적지 않다. 때때로 생냉물에 버린 뱃속을 덥혀줄 따뜻한 음식을 먹어야 하는데, 여름철 보양식으로 삼계탕이나 보신탕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식재료로 이루어진 갖가지 요리들이 식탁에 올랐다. 먹는다는 행위가 단순히 주린 배를 채우고 허기를 면한다는 생리적인 욕구를 넘어서 식도락을 추구하게 되었지만 아직도 우리 사회에선 음식이 갖는 의미와 치료수단으로서의 식치(食治)의 개념에 충실하게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필자는 달포전 한·일 약선연구 세미나에서 『동의보감』 속에 담겨진 한국의 전통 식치에 관한 연구성과를 발표한 적이 있기에 당시 발표 내용 가운데 몇 가지 의미 있는 요소를 중심으로 식치, 즉 음식으로 치료하는 방법에 대해 돌이켜 보고자 한다.
음식, 생명을 기르는 근본
현대 영양학에서도 음식이 우리 몸에 자양분을 제공하고 성장과 발육, 건강유지에 절대적이라는 사실을 전제로 삼는다. 오늘날 급속도로 평균수명이 늘어나고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게 된 결정적인 계기도 단순히 의료기술의 발전에 기인하기 보다는 유아사망률의 감소와 무엇보다도 충분한 영양공급에 의한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의 분석이다. 나아가 잘 먹고, 많이 먹는 것보다도 무엇을 어떻게 먹을 것인가라는 화두가 건강생활을 보장하기 위한 고민거리로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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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동의보감』에서는 “음식이 생명을 기르는 근본이다(水穀爲養命之本)”라고 하여 앞서 말한 내용을 함축적으로 표현해 놓았다. 뿐만 아니라 음식의 조리 원칙이나 처방의 구성 원칙이 모두 같은 원리에 의하여 이루어짐을 전제[醫食同源]로 음식으로 질병이나 기혈순환의 부조화로 야기된 몸의 이상을 치료할 수 있다는 이론을 상정하였다.
고전을 살펴보면 일찍이 조선 전기의 학자인 심의(沈義, 1475∼?)는 그의 문집 『대관재난고大觀齋亂稿』(十宜箴 · 飮食宜節)에서 음식을 절제할 것을 강조하면서 의약보다는 먼저 식치가 우선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또 조선 중기 송시열과 함께 북벌론의 사상적 배경을 제공했던 대학자, 송준길(1606∼1672)도 역시 자신의 문집 『同春堂先生文集』에서 약과 함께 음식으로 병을 다스린다는 의미에서 ‘식치’라는 용어를 구사하곤 하였다.
한국의 유구한 식치 전통과 역사
한국의 유구한 식치 전통과 역사
우리나라의 식치 전통은 생각보다 길고 오래된 것이다. 삼국이전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고려에 사신으로 왔던 송나라 서긍(徐兢)이 남긴 기행문 『선화봉사고려도경(宣和奉使高麗圖經)』에 이미 ‘다약병용(茶藥倂用)’이란 말이 기록될 정도로 음식의 신체조절기능을 잘 인지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고려조에 상식국(尙食局)에 식의(예전에는 사의로 발음, 여기서는 식으로 표기)를 두어 음식치료를 전담하게 하였으며, 조선조에 들어서도 사선서(司膳署)에 역시 식의 2명을 배치하였다.
조선왕조가 만든 대표적인 약전인 『향약집성방』(1433) 논복약법에도 “병 치료에 있어서 음식과 섭생을 잘 하는 것이 약효의 절반 이상이다. 때문에 환자는 될수록 음식과 섭생을 잘 해야 장생할 수 있으니, 단지 병을 치료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여 음식과 치료의 상관성을 설파하였다.
또 세종때 명의 전순의는 자신이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1459)에서 조선의 고유한 식치와 약주제조법, 각종 조리법과 음식치료방 등 대표적인 식치 처방을 다수 소개하였다. 그는 또 자신의 대표작인 『식료찬요食療纂要』(1460)를 지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음식이 으뜸이고 약이는 그 다음이다.”라고 말하면서 45가지 질병에 대한 식이요법을 제시하였다. 세종임금 재위 당시에도 젊어서부터 소갈병을 앓았던 세종에게 쓸 약이 마땅치 않자 양고기를 이용한 식치 처방을 권하였고 과연 이것이 효험을 보았음인지 중년에 안질에 많은 차도가 있었다고 술회하는 내용이 『세종실록』에 실려져 있다.
아울러 전순의, 노중례 등의 의관뿐만 아니라 김예몽, 양성지, 민보화, 유성원 등 집현전 학자출신의 소장학자들과 안평대군이나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 등 왕자들까지 편찬 작업에 합세한 『의방유취醫方類聚』(1477) 안에는 식치가 금기, 도인편과 함께 방약의 필수적인 병용요법으로 처방과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의 편찬에 참여했던 세조임금은 훗날 국왕에 등극한 후인 1463년에 『의약론』을 집필하였는데, 여기서 여러 종류의 사이비의사를 비난하면서 “식의는 입을 달게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니, …… 음식에도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치료할 수가 있다.”고 하였고 나아가 “……약의(藥醫)는 다만 약방문에 따라 약을 쓸 줄만 알고, 비록 위급하고 곤란한 때에도 복약만을 권하는 자이다.”라고 비평하였다.
조선왕조가 만든 대표적인 약전인 『향약집성방』(1433) 논복약법에도 “병 치료에 있어서 음식과 섭생을 잘 하는 것이 약효의 절반 이상이다. 때문에 환자는 될수록 음식과 섭생을 잘 해야 장생할 수 있으니, 단지 병을 치료하는 것에 그치는 일이 아니다.”라고 하여 음식과 치료의 상관성을 설파하였다.
또 세종때 명의 전순의는 자신이 지은 『산가요록山家要錄』(1459)에서 조선의 고유한 식치와 약주제조법, 각종 조리법과 음식치료방 등 대표적인 식치 처방을 다수 소개하였다. 그는 또 자신의 대표작인 『식료찬요食療纂要』(1460)를 지어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음식이 으뜸이고 약이는 그 다음이다.”라고 말하면서 45가지 질병에 대한 식이요법을 제시하였다. 세종임금 재위 당시에도 젊어서부터 소갈병을 앓았던 세종에게 쓸 약이 마땅치 않자 양고기를 이용한 식치 처방을 권하였고 과연 이것이 효험을 보았음인지 중년에 안질에 많은 차도가 있었다고 술회하는 내용이 『세종실록』에 실려져 있다.
아울러 전순의, 노중례 등의 의관뿐만 아니라 김예몽, 양성지, 민보화, 유성원 등 집현전 학자출신의 소장학자들과 안평대군이나 훗날 세조가 된 수양대군 등 왕자들까지 편찬 작업에 합세한 『의방유취醫方類聚』(1477) 안에는 식치가 금기, 도인편과 함께 방약의 필수적인 병용요법으로 처방과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이 책의 편찬에 참여했던 세조임금은 훗날 국왕에 등극한 후인 1463년에 『의약론』을 집필하였는데, 여기서 여러 종류의 사이비의사를 비난하면서 “식의는 입을 달게 음식을 먹게 하는 것이니, …… 음식에도 차고 더운 것이 있어서 치료할 수가 있다.”고 하였고 나아가 “……약의(藥醫)는 다만 약방문에 따라 약을 쓸 줄만 알고, 비록 위급하고 곤란한 때에도 복약만을 권하는 자이다.”라고 비평하였다.
식치, 한의치료의 마당으로 자리매김해야
『동의보감』잡병편 내상의 첫머리에는 ‘식약료병(食藥療病)’이란 제목이 달려있다. 즉, 음식과 약으로 병을 치료하는 원칙에 대해 말한 것인데 “사람이 건강을 지키는 근본은 올바른 식사에 있으며, 병을 다스리는 방도는 오직 약에 달려있다. 먹기에 합당한 것을 알지 못하면 생명을 보전하기 어렵고 약성을 분명하게 모르고선 병을 고칠 수 없다.”라고 천명하였다. 『향약집성방』에 신선복이방이 수록된 이후, 『의림촬요』의 식기(食忌)와 식치편, 『동의보감』의 양성연년약이(養性延年藥餌), 그리고『제중신편』에서 양노편을 따로 두고 22종의 노인보양음식을 새로 제시한 사실은 우리 의학사에 있어서 식치의 전통이 면면히 이어져 왔음을 의미한다. 오늘날 음식의 문제를 식약청의 전담관리나 조리사의 직역으로만 미루어서는 안 된다. 대다수 질병이 내상과 음식에서 비롯되고 거꾸로 음식으로 많은 질병을 예방하고 치료할 수 있다. 한의계가 잊고 지냈던 자신의 직임을 다시 깨달아야 할 때가 되었다.
글= 전통의학연구본부장 안상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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