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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의사(三醫司) 제도의 변천과 개혁의 중심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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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461회 작성일 11-11-14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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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기술계에 새로운 연구개발 관리체계 도입을 위한 논의가 한창이다. 대개의 연구자들은 적지 않은 세월을 연구현장에서 일해 왔어도 그저 주어진 체제에 적응하고 최선을 다해 과업을 수행하느라 이런 논의에 적극 참여하거나 의견을 개진해 본 경험조차 많지 않을 것이라 생각된다. 그래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기관이나 연구조직에 갑작스런 변동이 일어난다면 적잖이 당황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예부터 국사를 다스리는 치정자도 전래가 없는 상황이나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옛일을 상고하고 역사와 고사를 살펴 정책결정에 참고하는 한편 재삼재사 숙고하여 아흔아홉가지의 이로움보다 한 가지의 폐단을 걱정하곤 하였다.
 
천여 년 전 동아시아 의학을 주도했던 선조들의 활약
우리나라는 삼국시대부터 의부(醫部)를 설치하여 의료시혜를 관장하고 의박사를 두어 의학교육을 담당케 하였다. 그들의 수준은 당대 최고수준에 달해 이웃나라 중국과 끊임없이 약재와 의약지식을 교류했으며, 그때의 흔적이 중국의 고대 의약서인 『외대비요(外臺秘要)』나『명의별록(名醫別錄)』,『신농본초경집주(神農本草經集註)』같은 책에 전해진다. 또 우수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섬나라 일본에 건너가 의약지식을 건네주는 역할을 하였는데, 일찍이 신라 실성왕 때의 의관 김무金武라는 사람은 414년 일본에 파견되어 그들의 임금을 치료하고 돌아왔을 정도였다. 또 백제에서 왜국에 파견한 고구려 의승(醫僧) 덕래(德來)의 후예는 훗날 일본에서 ‘난바약사(難波藥師)’라는 칭호로 불리는 의약의 시조가 되었다. 백제의 의박사 왕유능타(王有陵陀)와 채약사 시덕(施德), 반량풍(潘量豊) 같은 사람은 왜인들에게 약물학을 가르쳐 그들의 시초가 되었다. 또 고구려승 혜자(惠慈)는 쇼토쿠태자(聖德太子)의 사부가 되어 말을 치료하는 기술, 즉 오늘날 수의학을 가르쳤다. 그들이 전해준 당대 최고의 의료기술이 일본 최고의 고대 의학성전인 『의심방(醫心方)』에 지금도 남아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삼국시대에는 고구려에 시의(侍醫)라는 직책이 있었고 백제에는 약부(藥部)가 있어 의박사(醫博士)와 채약사(採藥師)가 있었을 뿐이었다.
원나라 간섭기 의료제도의 난맥상 
고려에서도 국초부터 의료제도를 두어 지방에 의사를 파견하였고 빈민을 구제하고 병자를 돌볼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을 두었다. 또 문종 때부터 중앙에는 의료업무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태의감(大醫監)과 어약을 관장하는 상약국(尙藥局)을 두었다. 이후 이들 조직의 기능은 왕조 내내 이어졌으며, 조선에 들어서 내의원(內醫院), 전의감(典醫監), 혜민서(惠民署)로 이루어진 삼의사(三醫司) 제도가 정착되는 단계에 이르기가지 변함없이 기본틀로 적용되었다. 즉 왕조시대 의료행정은 기본골격에 큰 변화 없이 지속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른바 원(元)의 간섭이 지배구조에 영향을 미친 고려 말기 충렬왕대에 이르러서는 원나라 제도를 모방하여 개혁을 단행하게 되는데 태의감을 전의시(典醫寺)로 바꾸고, 상약국(尙藥局)을 봉의서(奉醫署)로 이름하였다. 정치외교적인 주변여건의 변화에 따라 불가피한 개정이었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곧이어 충선왕대에는 사의서(司醫署)로 고치고 의료인력의 직함과 조직구성을 대폭 수정하였다. 이것이 공민왕대에 이르러 재위4년에 전의시를 다시 태의감이라 원상복귀하고 직제를 혁파하였다. 그러나 오래 가지 못하여 동왕 10년에 다시 태의감을 전의시라고 명칭도 이전으로 환원하였다. 그러다가 17년에는 또 다시 태의감, 20년에는 다시 전의시라 칭하면서 직제개정을 반복하였다. 이와 마찬가지로 어약을 관장하는 상약국 역시 봉의서(奉醫署), 장의서(掌醫署), 상의국(尙醫局) 등 여러 차례에 걸쳐 명칭과 직제를 교체하였다가 결국 공양왕2년에는 전의시에 병합되고 말았다.
제도개혁과 안정기반의 저울추
고려말 의료제도의 난맥상과 잦은 개혁의 후유증은 민생의 피폐와 의료시혜의 단절로 이어졌고 신유학에 기반을 둔 신진사대부들로부터 비판적 시각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그리하여 조선 초 그들은 향약(鄕藥)을 장려하고 의료제도를 정비하는데 주력했으며, 태종∼세종대를 거치면서 전래의 3의사 제도를 복구하여 정착하는 단계에 접어든다. 조선의 개국공신이자 건국의 이념적 틀을 제시했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은 스스로 『진맥도결(診脈圖訣)』이라는 진단법 전문서를 지었으며, 고려말 전의시승(典醫寺丞)으로 시무(時務)11조를 상주하였던 방사량(房士良)은 조선왕조가 들어선 이후 『향약제생집성방(鄕藥濟生集成方)』과 『신편집성우마의방(新編集成牛馬醫方)』을 지었다. 또 형조참의, 충청도관찰사를 지냈던 황자후(黃子厚)는 『향약구급방』을 펴내고 향약재와 중국산과의 차이를 일일이 분변하여 『향약집성방』을 완결하는데 비판적 논의로써 일조하였다. 집현전 학사였던 유효통(兪孝通)과 변계량(卞季良) 역시『향약채취월령(鄕藥採取月令)』을 지어 의약지식의 대중화에 기여했다.
이렇듯 왕조 초기 국가재건의 주역이었던 이들은 실사구시적인 입장에서 의료제도를 정비하여 안착시키고 건실한 기풍과 합리적인 자세로 의학을 연구하여 의학발전과 향약진흥에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들의 생각과 의지가 세종시대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의방유취(醫方類聚)』와 같은 대형 의방서를 편찬하고 노중례(盧重禮), 전순의(全循義) 같은 명의가 활약할 수 있도록 무대를 제공하는 견인차 역할을 하였다. 또『신주무원록(新註無寃錄)』,『침구택일편집(鍼灸擇日編集)』,『태산요록(胎産要錄)』 같은 법의학, 침구학, 산과학 전문서가 육속 간행되도록 결정적인 계기를 촉발하였다. 일률적인 제도개변만으로 개혁과 발전이 달성되리라 기대하기 어렵다. 요점은 전문가들의 건전하고 자발적인 개혁의지와 참신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가 발출되도록 안정적인 기반조성이 더욱 급선무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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