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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파편에 배어난 전통의학 세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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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027회 작성일 11-11-15 14: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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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고도 경주에는 신라왕국의 성이자 궁궐인 월성(月城)이 있고, 이 오래 된 옛 성터에 흔히 안압지(雁鴨池)라 불리우는 연못터가 자리하고 있다. 1975년 이 연못터를 조사하던 중 8세기 신라 경덕왕대로 추정되는 나무로 깍아 글을 써 넣은 목간(木簡)이-종이가 흔치 않던 시절에 종이 대신 사용되었다-다량 발굴되었는데, 당시 궁성에서 무역되었던 수많은 짐꾸러미에 일종의 수하물표나 보관용 꼬리표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중에 일부는 검은 먹 글씨가 남아 있어 이런 것을 묵서목간(墨書木簡)이라 부른다. 당시까지만 해도 이웃 중국이나 일본에 비해 죽간이나 목간 자료가 거의 드물어 고대사 연구 있어 매우 주목받는 발굴 성과로 여겨졌다.
고대 의학사의 바이블 코드
11.jpg이 묵서목간에 적힌 내용들은 여러 가지이나 물건의 종류나 수량, 보낸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 대한 사항 등 비교적 단순한 정보에 국한되어 있다. 그런데 안압지 출토 198번 목간에는 좀 색다른 내용이 기재되어 있었다. 바로 오늘날 한의학에서 쓰이는 투약처방 형태와 유사하게 한약재와 약재의 분량 등이 제법 상세하게 적혀있었던 것이었다.
물론 이 목간에 대해 관심을 갖은 것은 우리 뿐 만이 아니었다. 발굴 당시부터 다른 목간들에 비해서 형태나 기재 내용이 달라 많은 연구자들로부터 주목을 끌었다. 그런데 이 천년이상 흙속에 파묻혀 있었던 기록은 오랜 세월에 나뭇결이 삭고 먹빛이 바래어 육안으로는 판독하기 어려운 것이 태반이었고, 확대경이나 적외선 촬영을 거쳐도 암호와 같은 고대 문자 체계를 하루아침에 이해하기란 어려운 실정이었다. 특히 이 분야에 있어서는 한발 앞선 선진국이라 할 수 있는 일본에서도 자국의 출토유물과 관련하여 동양3국간의 대외관계나 무역거래를 살펴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자료인지라 초미의 관심사가 되었다. 

이렇듯 목간에 써진 문자와 기호를 판독하고 해독하는 일련의 과정을 석독(釋 牘)이라고 부르는데 기본적인 한자 지식은 물론 고문자학을 비롯하여 내용과 관련한 방대한 지식과 세심한 관찰력, 그리고 연상력이 필요하다. 그래서 그동안 198번 목간의 기재 내용이 특이함에도 불구하고 그 역사적 가치가 분명하게 정의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 목간이 최근 우리 연구원 학연협동과정에 재학 중인 신진연구생에 의해 정확하게 판독되어 그 역사적 가치가 새롭게 조명되었다.  
신라 의사의 처방전에 기록된 암호
그간 고대사 연구에 있어서는 장기간 여러 차례에 걸친 전쟁과 일제강점기 철저하게 자행된 역사왜곡, 그리고 한반도 남부에 편중된 국토분단의 아픔으로 인하여 문헌자료가 거의 남아 있지 않아 고대의학의 면모를 제시하기 어려웠다. 그런 와중에 근래 목간 자료가 잇따라 발굴되고 이와 함께 이번에 목간 처방전의 기재 내용이 규명된 것은 매우 뜻 깊은 연구 성과라 여겨진다. 특히 연구자는 오랜 세월 탓에 흐려진 문자와 기호를 정확하게 판독하기 위해 지금까지 아무도 시도하지 않았던 기법을 도입하여 많은 시간과 공력을 들여 도판자료를 이미지 보정하여 완결성을 높였으며, 이 과정을 거쳐 그 동안 풀리지 않았던 많은 약재의 이름을 읽어내고 단편적인 기록에 의미를 부여하는데 성공하였다.
예컨대 국내외 학자들이 명료하게 포착하지 못했던 대황(大黃), 청대(靑黛), 승마(升麻), 감초(甘草), 호동률(胡桐律), 박소(朴消), 청목향(靑木香) 등의 명칭을 명확히 밝혀내었고, 각각의 약재 이름 아래 적혀있던 약재의 무게와 가공법을 판독함으로써 이것이 실제 투약을 위한 처방기록이었음을 분명히 밝혀졌다. 또한 이 처방은 고대 동아시아의 의서인『천금방(千金方)』이나 『외대비요(外臺秘要)』, 『의심방(醫心方)』 등에 실려 있는 어떤 처방과도 유사한 점이 없어 신라 의사의 독자적인 처방인 것으로 판명되었다.
특히 세로쓰기로 되어 있는 약재명들의 첫머리에서부터 오른쪽 옆으로 내려 그은 기다란 꺽쇠 부호가 있는데 지금까지 무슨 의미인지 아무도 명료하게 해석해 내지 못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이것은 조선시대까지도 관용적으로 사용해온 방법으로 의원의 처방에 따라 약재를 배분할 때 차례대로 분배를 마친 약재명 위에 이미 조제를 마쳤다는 의미로 약제사가 표기하던 방식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아울러 이 기호는 약재명 위에 이미 조제과정을 마쳤다는 의미에서 ‘了’[마칠 료]라고 표시하던 습관에서 기인한 것으로 여겨진다. 
   
세계화의 선례를 보여준 목간처방전
지난 가을 목간학회 학술세미나에서 필자가 이런 견해를 얘기하자 일본의 고대사 연구 권위자인 와세다대학 이성시(李成市) 교수는 그간 의문으로 남았던 숙제를 풀게 되었다며 크게 기뻐하였다. 또한 이로써 고대 한일간에 무역거래를 통한 의약교류가 계속되었다는 사실도 입증되었는데, 일본의 목간 유물에서도 이와 유사한 표기들이 자주 보이기 때문이다. 특히 삼국시대 의약에 있어서는 신라, 백제, 고구려 공히 3국의 의사들이 일본에 파견되는 경우가 잦았으며, 그 중의 일부는 그곳에 정착하여 의약을 전하는 역할을 하였다. 고구려인 덕래(德來)가 바로 그런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인데 그의 증손은 오사카 남부의 난파(難波)지역에 자리 잡아 난파약사(難波藥師)란 칭호로 불리며, 일본의약의 창시자로 존숭 받았다. 이 작은 나무파편 한 조각에서 우리는 이미 신라시대 의약기술 수준이 최고조에 달해 있었고 무역을 통해 활발하게 국제교역에 앞장서고 있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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