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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깃에 스며든 조상의 지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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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953회 작성일 11-11-15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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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월 한 번씩 시행되는 답사길은 빠듯한 일상업무를 꾸려가야 하는 나에겐 매우 소중한 시간이다. 지난 달에는 갑자기 밀어닥친 한파로 감히 멀리 야외로 나가 유적을 둘러보는 것은 꿈도 꾸지 못하고 인근의 박물관 탐방으로 답사코스를 바꿔 잡았다. 다행히 대전의 선사박물관에서 출토유물 복식전이 열리고 있었다. 우리나라 전통복식은 오늘날에도 국가차원에서 ‘한브랜드’의 하나로 손꼽힐 만큼 멋과 아름다움을 간직한 뛰어난 디자인적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정작 내가 이 전시회를 찾은 것은 전통복식에 대한 대단한 관심이나 지견이 있어서가 아니라 단지 출토유물의 시대가 명종-선조연간으로 『동의보감』의 저술시기와 근사하기 때문이었다. 나아가 내가 맡고 있는 동의보감 기념사업을 기획하고 준비하는데 혹여라도 도움을 얻을 만한 것이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심리가 작동한 탓이기도 하였다.
변함없는 韓브랜드의 기능성
우리는 보통 한복이 아름답고 건강에 좋다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기능성에 있어서는 입기에 다소 불편하다는 인식을 갖고 있다. 이번 전시회에는 400년 전에 만들어진 사자의 복식을 출토 상태의 모습대로 진품이 전시되었을 뿐만 아니라 원형을 그대로 재현하여 비교 전시해 놓았기 때문에 평소에 놓치기 쉬운 관람 포인트를 유의하여 보기에 좋았다. 예를 들면 겨울철에 겹쳐 있는 남자들의 속바지는 아래트임이 있는 것인데 허벅지 아래로 재봉선이 터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마름선을 일직선으로 하지 않고 안쪽으로 삼각 깔대기 모양으로 이어 붙여 놓은 것을 보았다. 모양이 특이하여 누구라도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점이 있었다. 2층의 주 전시관에 오르니 넓은 옷깃을 붙인 중치막이라는 겨울철 외출복이 유리전시관안에 걸려 있었다.

전면에 솜을 넣어 촘촘히 누빈 공력도 돋보이거니와 한 점 흐트러짐 없이 땀땀이 손바늘질로 이어낸 옷 한 벌이 어디 값비싼 밍크코트나 유명브랜드 패션상품에 비하랴 싶었다. 목부터 무릎 아래로 내려오는 길이는 온몸을 감싸기에 넉넉해 보였으며 특히 허리 아래로는 겹주름을 넣어 걸을 때마다 보폭에 따라 넓게 펴질 수 있도록 신축성이 보장되는 디자인을 채택한 것이 눈에 띄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옷깃이었다. 보통 한복의 동정은 옷깃을 잘 여미고 깔끔해 보이도록 디자인된 미적요소가 강조되어 왔다. 하지만 실제 착용하기에는 다소 불편할 정도로 유난히 옷깃이 넓다고 생각되었다. 그렇다 실제로는 우리가 일상적으로 착용하는 서구식 양복의 옷깃에 비해서는 거의 곱절에 가까울 정도로 넓어 거의 20센티 안팎의 넓은 깃을 만들어 붙였다.
옷섶사이로 비치는 의학경험

column.jpg동행했던 전통의학사연구소 김홍균박사가 한동안 전시대 앞을 떠나지 못하고 물끄러미 쳐다만 보고 있더니 한참만에야 무릎을 치면서 나를 불러 세웠다. 왜 이렇게 높은 깃을 세워야 했을까? 그 이유는 한의학에서 찾을 수 있었다. 오늘날 우리가 착용하는 양복은 사철기후가 일정한 유럽전통에서 개발되어 앞뒤의 목이 그대로 노출된다. 따라서 소위 족태양방광경(足太陽膀胱經)의 풍문(風門)혈을 시작으로 등 쪽의 방광경으로 들어가는 외부사기[外邪]의 침입경로가 무방비로 드러나는 셈이다.

하지만 전시된 옷은 단번에 뒷목과 머리 아래 방광경의 풍문혈과 담경의 풍지혈을 감싸 한기에 저촉되지 않도록 넓고 길게 디자인된 것임을 뒤늦게 깨달을 수 있었다. 이런 깊은 뜻이 담겨져 있다니! 철저하게 질병을 예방하고 건강을 고려하여 재단된 맞춤복인 것이다.
한의학을 전공한 분들은 잘 알고 있다시피 외부에서 침입한 육음사기[六淫邪氣: 風, 寒, 暑, 濕, 燥, 火]는 태양, 소양, 양명, 태음, 소음, 궐음 6경을 차례로 돌아 전변하게 된다. 따라서 같은 상한병일지라도 이제 막 방광경락에 침입한 태양경병 표증인지 반표반리의 소양증인지 이증인 양명경병인지에 따라 치법과 처방이 전혀 다르다.

따라서 같은 감기라 하더래도 치료약은 질병의 전변 상태와 체질에 따라 확연하게 다를 수밖에 없다. 지난 신종플루가 유행할 때 처음 유행이 시작하던 때의 병증이 시시각각 달라져 진료진들을 당황하게 한 기억이 있다. 질병이 바뀌었다거나 바이러스가 변이되어서라기보다는 몸 안에 들어온 사기가 인체의 정기와 싸우면서 전변되는 변화규율을 몰라서 우왕좌왕하게 되었던 것이다.
상한과 신종플루
한의학의 상한론에서는 일찍부터 이러한 외감질환의 변화양상을 면밀하게 관찰해 오고 있었다. 외감병의 초기에는 머리와 목이 뻣뻣해지면서 아프고 으슬으슬 추위를 느끼거나 바람이 싫어지면서 심장의 맥박이 심하게 뛰게 된다. 코와 구강을 통해 들어온 바이러스는 맨 먼저 머리와 목 뒷덜미를 지나면서 통증을 유발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외감병의 발병을 예방하거나 초기 증세에 대처하기 위해서는 뒷목을 따뜻하게 감싸줄 필요가 있는 것이다.

우리 민족은 오랜 기간에 걸친 의약경험을 통해 이러한 예방지식을 선험적으로 깨달았던 것이며, 그러한 실증자료 가운데 하나가 세월을 훌쩍 뛰어넘어 오늘 출토복식전에 아름다운 한 벌의 옷으로 우리 앞에 선을 보인 것이다. 높아진 옷깃 한 뼘의 비밀, 그것은 미적 요소로서가 아니라 한복의 기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며, 우리 민족의학에서 출발한 지혜를 보여주는 역사 그 자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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