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사회에서의 새로운 가족: 일본 시설에서 만난 제2의 가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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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미 댓글 0건 조회 789회 작성일 15-06-21 03:10
본문
그들은 ‘고객’이 아닌 ‘가족’
“오카상(엄마라는 뜻의 일본어), 오늘 저녁에는 뭘 해 먹을까?”
“카레는 어떨까? 고기도 넣고 감자도 크게 썰어 넣고, 여름에 입맛 없을 때는 카레가 최고지. 맛있겠다.”
“오카상, 요즘 입맛이 당기나 봐. 체중이 불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깨끗한 앞치마를 두른 50대 중년여성과 그 옆에서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70대 할머니의 대화다. 서슴없는 반말 속에 담긴 친근함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들을 시어머니와 며느리, 또는 친정어머니와 딸 사이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성(姓)도 다르고 생김새도, 취향도 전혀 다른, ‘남남’일 뿐이다.
이들이 생활하는 곳은 일본의 니가타 현 야마토마치(현 미나미우오누마 시)에 있는 한 그룹홈. 가벼운 치매가 있는 노인들 6~9명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다. 어느 정도의 자립생활이 가능하지만 가사, 위급상황에서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홈헬퍼(장기요양보호사)가 함께 생활한다. 앞의 대화는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노인 입주자와 이들을 돌보는 홈헬퍼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혀 타인인 이들이지만 오랜 시간 숙식을 함께하다 보니 혈육 못지않은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입주노인들을 엄마, 아빠(어머님, 아버님)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 노인보호시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요코하마에 있는 한 그룹홈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한 노인이 불편한 손을 움직이면서 식탁에 수저를 놓기 시작한다. 휴식시간에 직원들 옆에 앉아 빨래를 개키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다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집에 있었더라면 저런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게 보였겠지’라고 생각을 고쳤다.
한밤중에 잠을 못 이루는 한 노인이 당직실 직원을 상대로 한참 옛날얘기를 하다가 소파에 누워 스르르 잠이 드는 것도 보았다. 혹시 감기에 걸릴까 봐 이불을 여며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중년 직원의 모습은 며느리나 딸의 모습으로 착각할 만큼 살갑다.
내가 일본의 노인시설들을 돌아보고 있을 즈음에, 일본 내에서는 노인요양시설에서 일하는 개호직원들의 저임금 문제, 노인인권침해 등으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그러한 각진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가족과 다름없는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서로에게 적응해 있을 뿐이었다. 노인들은 자신을 보호 또는 서비스의 대상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직원들 역시 노인들에 대해 ‘고객’이라는 거리감을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오카상(엄마라는 뜻의 일본어), 오늘 저녁에는 뭘 해 먹을까?”
“카레는 어떨까? 고기도 넣고 감자도 크게 썰어 넣고, 여름에 입맛 없을 때는 카레가 최고지. 맛있겠다.”
“오카상, 요즘 입맛이 당기나 봐. 체중이 불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깨끗한 앞치마를 두른 50대 중년여성과 그 옆에서 종이 접기를 하고 있는 70대 할머니의 대화다. 서슴없는 반말 속에 담긴 친근함 때문에 옆에서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들을 시어머니와 며느리, 또는 친정어머니와 딸 사이로 생각할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성(姓)도 다르고 생김새도, 취향도 전혀 다른, ‘남남’일 뿐이다.
이들이 생활하는 곳은 일본의 니가타 현 야마토마치(현 미나미우오누마 시)에 있는 한 그룹홈. 가벼운 치매가 있는 노인들 6~9명이 모여 공동생활을 하는 곳이다. 어느 정도의 자립생활이 가능하지만 가사, 위급상황에서의 도움이 필요한 이들을 돌보기 위해 홈헬퍼(장기요양보호사)가 함께 생활한다. 앞의 대화는 그룹홈에서 생활하는 노인 입주자와 이들을 돌보는 홈헬퍼 사이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전혀 타인인 이들이지만 오랜 시간 숙식을 함께하다 보니 혈육 못지않은 정이 들었던 모양이다.(입주노인들을 엄마, 아빠(어머님, 아버님)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나라 노인보호시설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요코하마에 있는 한 그룹홈을 방문했을 때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식사시간이 되면 한 노인이 불편한 손을 움직이면서 식탁에 수저를 놓기 시작한다. 휴식시간에 직원들 옆에 앉아 빨래를 개키는 모습을 보고 처음에는 ‘직원들이 해야 할 일을 대신하다니…’라고 생각했지만, 이내 ‘집에 있었더라면 저런 모습이 너무나 당연하게 보였겠지’라고 생각을 고쳤다.
한밤중에 잠을 못 이루는 한 노인이 당직실 직원을 상대로 한참 옛날얘기를 하다가 소파에 누워 스르르 잠이 드는 것도 보았다. 혹시 감기에 걸릴까 봐 이불을 여며주며 머리를 쓰다듬어주는 중년 직원의 모습은 며느리나 딸의 모습으로 착각할 만큼 살갑다.
내가 일본의 노인시설들을 돌아보고 있을 즈음에, 일본 내에서는 노인요양시설에서 일하는 개호직원들의 저임금 문제, 노인인권침해 등으로 시끄러웠다. 하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그러한 각진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가족과 다름없는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움으로 서로에게 적응해 있을 뿐이었다. 노인들은 자신을 보호 또는 서비스의 대상자라고 생각하지 않고, 직원들 역시 노인들에 대해 ‘고객’이라는 거리감을 두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마음 상할 일 없으니 외롭지 않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노인들은 ‘집’을 잃어버렸다. 대신 보증금 2,500만 엔, 월 10만 엔 등을 지불하는 노인요양시설, 또는 노인병원이 노인이 여생을 보내야 하는 새로운 집이 되었다. 계약에 의한 권리와 의무관계로 만들어진 집.
하지만 나름대로 안식과 위안이 있는 가정이다. ‘내 몸이 거처하는 곳이 가정이요, 웃음과 고단함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디에서나 가족을 찾을 수 있다. 노인들과 시설 직원, 같은 입주 노인들과의 사이에는 혈연 대신 ‘함께 생활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해’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동지의식’이 흐르고 있는 듯했다.
한 노인은 “이곳에 오기 전에는 딸 집에 있었는데 사위 눈치도 보이고 손주들도 가까이 오지 않아 참 쓸쓸했다. 이곳에서는 가족에 대한 기대도 없으니 마음 상할 일도 없다. 직원들이 잘 해주니 외롭지 않다”라고 얘기한다.
심한 폭력 성향과 배회 증세를 보였던 한 치매환자는 이 시설로 옮겨 온 뒤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담당의사는 “이 환자가 집에 있는 동안 가족과의 갈등과 몰이해가 증세를 악화시켰던 것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혈육으로 연결된 가족이 계약이나 편의에 의한 가족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가족을 둘러싼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늙어간다. 90대 부모와 60대 자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부모 자녀 사이인지, 친구 사이인지 헷갈린다. 자녀양육과 교육의 짧은 기간이 끝나면 자녀들은 동등한 성인으로서 부모와 교류한다.
미국사회학회 회장을 지냈던 마틸다 화이트 릴리 박사는 “고령사회에서 부모와 자녀는 서로 격려하고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고령화와 도시화가 맞물리면서 독거노인, 노인만의 가구가 늘어난다는 점도 큰 변화다. 현재 65세 이상 독거노인은 88만여 명, 2010년에는 1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홀로 사는 노인들이 주위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사망한 지 한참 뒤에야 발견되는 ‘고독사(孤獨死)’도 간혹 보도되고 있다. 가족의 부양을 받을 수 있었던 농경사회의 노인들에 비하면 요즘 노인들은 더욱 고독하고 무력한 존재가 된 셈이다.
가족이 해체되면서 노인들은 ‘집’을 잃어버렸다. 대신 보증금 2,500만 엔, 월 10만 엔 등을 지불하는 노인요양시설, 또는 노인병원이 노인이 여생을 보내야 하는 새로운 집이 되었다. 계약에 의한 권리와 의무관계로 만들어진 집.
하지만 나름대로 안식과 위안이 있는 가정이다. ‘내 몸이 거처하는 곳이 가정이요, 웃음과 고단함을 함께 나누는 사람들이 가족’이라고 생각한다면 어디에서나 가족을 찾을 수 있다. 노인들과 시설 직원, 같은 입주 노인들과의 사이에는 혈연 대신 ‘함께 생활하는 사람에 대한 배려와 이해’ ‘공간과 시간을 공유하는 데서 오는 동지의식’이 흐르고 있는 듯했다.
한 노인은 “이곳에 오기 전에는 딸 집에 있었는데 사위 눈치도 보이고 손주들도 가까이 오지 않아 참 쓸쓸했다. 이곳에서는 가족에 대한 기대도 없으니 마음 상할 일도 없다. 직원들이 잘 해주니 외롭지 않다”라고 얘기한다.
심한 폭력 성향과 배회 증세를 보였던 한 치매환자는 이 시설로 옮겨 온 뒤 안정된 모습을 보인다고 한다. 담당의사는 “이 환자가 집에 있는 동안 가족과의 갈등과 몰이해가 증세를 악화시켰던 것 같다”라고 이야기한다. 혈육으로 연결된 가족이 계약이나 편의에 의한 가족보다 더 낫다고 할 수 있을까?
고령사회에 접어들면서 가족을 둘러싼 많은 변화를 느낄 수 있다. 수명이 길어지면서 부모와 자녀가 함께 늙어간다. 90대 부모와 60대 자녀가 함께 있는 모습을 보면 이들이 부모 자녀 사이인지, 친구 사이인지 헷갈린다. 자녀양육과 교육의 짧은 기간이 끝나면 자녀들은 동등한 성인으로서 부모와 교류한다.
미국사회학회 회장을 지냈던 마틸다 화이트 릴리 박사는 “고령사회에서 부모와 자녀는 서로 격려하고 인간으로서 성장하는 관계를 이루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고령화와 도시화가 맞물리면서 독거노인, 노인만의 가구가 늘어난다는 점도 큰 변화다. 현재 65세 이상 독거노인은 88만여 명, 2010년에는 100만 명이 넘을 것으로 예상된다. 홀로 사는 노인들이 주위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사망한 지 한참 뒤에야 발견되는 ‘고독사(孤獨死)’도 간혹 보도되고 있다. 가족의 부양을 받을 수 있었던 농경사회의 노인들에 비하면 요즘 노인들은 더욱 고독하고 무력한 존재가 된 셈이다.

과연 손주대행업·가족대행 서비스 ‘돈으로 사는 수발’일까?
이러한 추세 속에서 대안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새로운 공동체가족이다. 앞에 소개했던 그룹홈을 위시해 일본에서는 노인들을 위한 다양한 주거 형태가 선을 보이고 있다.
은퇴자들이 모여서 공동체은퇴마을을 만드는 경우, 독신용아파트에 식사, 의료, 다양한 활동을 추가한 실버아파트, 생활협동조합을 중심으로 다양한 세대가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등이 있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혈연의 끈 대신 정서적인 유대감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의 의미는 계속 변화해왔다. 과거에 가족은 한 지붕을 공유하고 한솥밥을 먹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동아줄보다 질긴 핏줄로 서로 묶인 관계를 말했다. 그래서 함께 살아야 하고 서로를 보살피고 책임져야 하는 강제성이 때로는 가족 구성원들을 힘들게도 하고 외롭게도 했다.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들의 꿈을 희생해야 했고, 그들의 자녀들은 또 부모부양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가족 사랑’이란 포장지를 걷어내면 생계와 부양을 위한 노동, 개성을 허용하지 않는 동질성 강요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먹고 살기가 더 어려울 때 일수록 ‘가족 판타지’는 더욱 강조되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이라는 권위가 절대명제가 될 때 진정 사람들이 가족으로부터 원하는 사랑, 존중, 위로와 안식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가족으로부터 고독해질수록 가족의 존재 의미는 더 절실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가족을 이루는 것이 어렵거나 함께 사는 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 새로운 가족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된다.
양로시설의 노인들에게는 직원들이나 같은 입주 노인들이 새로운 가족이다. 중요한 것은 혈연이 아니라 서로 보살피고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는 가족의 기능이라는 점을 그들은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앞에서 열거한 새로운 노인시설, 생활공동체도 그러하며,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손주대행업, 가족대행 서비스 등도 가족의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도 노인의 주거 형태, 가족관계가 크게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올해 8월부터 시행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아마 이러한 변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노인들이 최저의 비용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한 제도로서, 전통적인 가족의 수발 기능을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한 것이다. 장기요양이 필요한 노인을 모시고 있는 가족에게는 경제적·육체적 부담을 덜어줄 것으로 기대되지만, 실제로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가족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수발 서비스를 받기 원할지는 알 수 없다. 부모의 몸을 닦아드리고 식사·배설 시중을 하는 것은 가족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인들은 아직까지 ‘돈으로 사는 수발’에 대해 탐탁해하지 않으며 자식과의 연대에 매달린다. 하지만 가족의 형태와 기능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나친 자식 의존, 전통적 가족에 대한 집착은 더 큰 실망과 고독, 고립을 가져올 뿐이다.
이러한 추세 속에서 대안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 새로운 공동체가족이다. 앞에 소개했던 그룹홈을 위시해 일본에서는 노인들을 위한 다양한 주거 형태가 선을 보이고 있다.
은퇴자들이 모여서 공동체은퇴마을을 만드는 경우, 독신용아파트에 식사, 의료, 다양한 활동을 추가한 실버아파트, 생활협동조합을 중심으로 다양한 세대가 함께 생활하는 공동체 등이 있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공통점이 있다면 혈연의 끈 대신 정서적인 유대감에 의지하고 있다는 점이다.
가족의 의미는 계속 변화해왔다. 과거에 가족은 한 지붕을 공유하고 한솥밥을 먹고,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동아줄보다 질긴 핏줄로 서로 묶인 관계를 말했다. 그래서 함께 살아야 하고 서로를 보살피고 책임져야 하는 강제성이 때로는 가족 구성원들을 힘들게도 하고 외롭게도 했다. 부모는 자식들을 위해 자신들의 꿈을 희생해야 했고, 그들의 자녀들은 또 부모부양의 무거운 짐을 지게 된다. ‘가족 사랑’이란 포장지를 걷어내면 생계와 부양을 위한 노동, 개성을 허용하지 않는 동질성 강요가 있었던 것은 아닌가? 그래서 먹고 살기가 더 어려울 때 일수록 ‘가족 판타지’는 더욱 강조되었던 것은 아닐까?
가족이라는 권위가 절대명제가 될 때 진정 사람들이 가족으로부터 원하는 사랑, 존중, 위로와 안식은 사라지는 것은 아닌지?
사람들이 가족으로부터 고독해질수록 가족의 존재 의미는 더 절실해지는 것 같다. 그래서 가족을 이루는 것이 어렵거나 함께 사는 것이 여의치 않은 경우, 새로운 가족을 향해 마음을 열게 된다.
양로시설의 노인들에게는 직원들이나 같은 입주 노인들이 새로운 가족이다. 중요한 것은 혈연이 아니라 서로 보살피고 따뜻하게 쓰다듬어 주는 가족의 기능이라는 점을 그들은 뼈저리게 느낄 것이다. 앞에서 열거한 새로운 노인시설, 생활공동체도 그러하며, 우리에게는 낯설지만 손주대행업, 가족대행 서비스 등도 가족의 부족한 자리를 채워주고 있다.
우리 주변에서도 노인의 주거 형태, 가족관계가 크게 변화하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올해 8월부터 시행되는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아마 이러한 변화에 박차를 가할 것이다.
노인장기요양보험제도는 신체적·정신적 장애를 가진 노인들이 최저의 비용으로 가족이 아닌 다른 사람으로부터 수발 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한 제도로서, 전통적인 가족의 수발 기능을 사회적 기능으로 전환한 것이다. 장기요양이 필요한 노인을 모시고 있는 가족에게는 경제적·육체적 부담을 덜어줄 것으로 기대되지만, 실제로 얼마나 많은 노인들이 가족이 아닌 타인으로부터 수발 서비스를 받기 원할지는 알 수 없다. 부모의 몸을 닦아드리고 식사·배설 시중을 하는 것은 가족의 역할이라고 믿고 있는 사람들이 여전히 많기 때문이다.
한국의 노인들은 아직까지 ‘돈으로 사는 수발’에 대해 탐탁해하지 않으며 자식과의 연대에 매달린다. 하지만 가족의 형태와 기능은 사회의 변화에 따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지나친 자식 의존, 전통적 가족에 대한 집착은 더 큰 실망과 고독, 고립을 가져올 뿐이다.

그렇다고 혈연가족의 존재감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야마토마치의 한 노인입주시설. 꼭두새벽부터 휠체어를 밀고 넓은 시설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직원들의 아침 업무를 지휘하는 야마다 씨. 독립적이고 괄괄한 그는 며느리와 마음이 맞지 않아 3년 전에 이곳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일요일 오후, 가족들이 찾아오면 주로 사용하는 응접실에서 우연히 만난 그녀는 응석받이처럼 보였다.
오랜만에 찾아온 아들이 떠먹여주는 생크림케이크를 얌전히 받아먹는 그이를 보면서 떨리는 손 때문에 밥알을 흘리면서도 직원들의 식사 시중을 거부하던 ‘야마다 씨가 맞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에 대한 의존, 사랑이 그녀의 표정에서 흘러넘치고 있었다.
몇 년 전에 만났던 교토대 환경공학부의 토야마 타다시 교수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더 이상 자식에게 기저귀를 갈아주고 식사를 떠먹여주는 수발자 역할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노후 생활에 자식이 중요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오히려 자식들은 부모들의 정서적인 필요를 가장 잘 이해하고 이해와 격려로 살아갈 희망을 주는 존재다. 자식은 타인이다. 하지만 나와 가장 닮은 타인, 그리고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생활했기 때문에 나의 기호와 철학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면 자녀들과 가장 좋은 관계를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소홀하게 하고 실망을 시켜도 여전히 좋은 자식과 손주들, 가까이에서 몸을 붙들어주고 기운을 차리게 해주는 시설의 가족들, ‘오래된 가족’과 ‘새로운 가족’이 모두 필요한 것이 현대 노인들의 처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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