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김 뉴욕필하모닉 부악장 > 예술가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예술가


 

미셸 김 뉴욕필하모닉 부악장

페이지 정보

작성자SMART 댓글 0건 조회 1,174회 작성일 14-09-28 03:14

본문

서울에서 태어나 11세 때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미셸 김은 고3 때 대통령 장학생으로 선발돼 케네디 센터와 백악관에서 연주했다. 콜번 공연예술학교와 USC 손톤 음대를 졸업한 뒤 2001년 뉴욕 필의 부악장으로 입단했다. 생일(10월 1일)이 같아 운명적으로 만난 사업가 최승혁씨와 사이에 1남1녀를 두었다.

“LA 밖에서 살 용기가 없어 LA에 뿌리 내리고 오래 잘 살기로 다짐했을 무렵이었지요. 다음해 1월 서울에서 결혼식도 예정됐고요. 그런데 두 통의 전화가 온 거예요.”

2000년 10월 미셸 김은 뉴욕 필의 수석 부악장 셰릴 스태플스와 로버트 립셋 콜번음대 교수의 전화를 받았다. 이듬해 초 김씨는 한 남자의 아내와 뉴욕 필의 부악장이라는 인생의 ‘새로운 역할’을 맡으며 뉴욕에 왔다. 서울에서 LA를 거쳐 뉴욕에서 인생의 제3막을 시작한 셈이다.


● 바로 부악장으로 입단했는데.

“스태플스와 립셋 교수가 ‘뉴욕 필에 부악장 자리가 났으니 오디션에 참가하라’고 권유했다. ‘뉴욕에서 살 자신이 없어서 못하겠다’고 했더니 둘이 ‘인연을 끊겠다’는 협박까지 했다. 그래서 난생 처음 오디션을 하게 됐다. 많은 기대는 안 하고 연습과의 전쟁을 시작했다. 그해 11월 닷새 동안 줄리어드 음대생의 기숙사 소파에서 자며 오디션을 했는데, 12월 마지막 주 뉴욕 필과의 3차 오디션까지 가서 합격했다.”

그는 11세 때 바이올린을 시작하면서 립셋 교수를 사사한 이후 스태플스와 중·고등학교, 대학을 함께 다녔다. 립셋 교수는 시카고심포니 악장, 보스턴심포니 수석 등을 키운 명교수였다.

● 부악장의 역할은.

“악장을 도와주고 악장이 전해주는 지휘자의 음악적인 해석을 단원 모두에게 전달하는 책임이 있다. 악장이 없을 때는 악장을 대신하기도 한다. 2001년 3월 오자마자 악장 역할부터 했다. 당시 악장(글렌 딕테로)은 휴가 중이었고, 수석 부악장(셰릴 스태플스)은 출산으로 자리를 비웠었다.”

● 무엇이 뉴욕필을 위대하게 만드나.

“세계 문화의 심장 같은 곳에서 뉴욕 필의 자존심을 연습과 연주로 보상받으려는 것같이 연주마다 가슴 벅찬 감동이 있다. 특히 화려한 음색과 잘 짜인 앙상블은 언제 들어도 황홀하게 표현된다. 금관악기들의 고급스럽지만 힘있는 소리, 목관악기들의 화려한 테크닉과 조화, 현악기들은 두말할 필요 없이 하나가 돼 마치 신들린 듯 흔들림 없는 연주를 한다.”

● 가장 기억에 남는 콘서트는.

“평양과 서울 공연이다. 마치 흑백과 컬러 텔레비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북한 콘서트 때는 하염없이 눈물이 흘렀고, 한국에서의 연주는 회한과 만감이 교차했다. 한국인으로, 뉴욕 필의 단원으로, 또 음악을 통해 국제교류를 돕는 음악대사의 입장에서 큰 일을 한 것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 평양 공연을 앞두고 지휘자 로린 마젤에게 한국어를 가르쳤다던데.

“지휘자님이 공연을 앞두고 쓴 글을 한국어로 번역해 오선지에 말과 악보로 다음 날까지 그려 달라고 하셨다. 5장의 악보를 갖고 나흘 동안 한국어 과외를 하며 내가 감히 짜증도 내고 살짝 구박도 했다. ‘를, 러, ㄴ, 의’를 제일 어려워하셨다. 공연 때 한국어를 하실 때는 내 눈치도 살짝 보시는 게 참 귀엽게 느껴졌다.”

(*지휘자 마젤은 평양 공연 당시 ‘신세계 교향곡’을 연주하기 전 한국어로 “좋은 시간 되세요”라고, ‘파리의 미국인’을 소개하면서는 “즐겁게 감상하세요”라고 말했다.)

● 좋아하는 지휘자는.

“쿠르트 마주어와 리카르도 무티다. 마주어는 나에게 뉴욕 필의 첫 지휘자이기도 하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마치 신들린 사람같이 지휘를 하며 음악을 만들어 내는 리더십에 항상 감동을 받는다. 무티 또한 재치 있고, 때로는 무섭기도 하지만 음악만을 위하는 지휘자다. 연주 때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많은 가르침을 주는 무한한 ‘음악의 원천’ 같은 지휘자라고나 할까.”

 (*쿠르트 마주어(83), 로린 마젤(80) 등 노장에서 지난해 젊은 지휘자 앨런 길버트(43)가 음악감독으로 영입됐다(길버트는 은퇴한 뉴욕 필의 바이올리니스트 마이클 길버트와 아직도 뉴욕 필 현역인 일본 출신 바이올리니스트 다케베 요코의 아들이다).

● 앨런 길버트는 어떤 지휘자인가.

“길버트는 젊지만 열정이 많고 카리스마가 넘친다. 겸손하고 공부도 많이 한다. 다른 지휘자들에 비해 신선한 해석으로 음악을 만들어 가기도 하지만, 풍부한 감정으로 많은 청중에게 쉽게 음악을 이해시키는 기술을 갖고 있다.”

● 음악적인 가족인가.

“서울대 작곡과를 나온 아버지(김정길 뉴저지 나눔 오케스트라 지휘자)는 성악도 잘한다. KBS TV와 라디오 오락 프로그램에서 일했고, 기독교 방송국 합창단도 지휘했다. 목사의 딸인 어머니(김경자)는 완벽주의자인데, 10여 년 전부터 첼로를 배워서 아버지가 이끄는 나눔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한다.

2000년 서울에서 큰 아버지 70세 생신 때 선물을 고르기가 너무 어려워서 대신 우리 가족이 갖고 있는 재능으로 음악회를 열어 드렸다. 아버지를 비롯해 삼촌들과 사촌을 모으니 테너, 바리톤, 피아노, 오르간, 플루트, 바이올린, 첼로, 메조소프라노까지 구성됐다. ‘그리운 마음’과 ‘고향’ 등 한국 가곡에서 베토벤, 리스트, 찬송가 등 다양한 레퍼토리로 연주회를 열었다. 돈으로 살 수 없는 선물을 했다고 생각한다. 지금 아들(윤제·6)은 피아노를 배우고, 딸(다연·4)은 바이올린에서 피아노로 바꾸었다.”

● 미국 생활엔 잘 적응했나.

“캘리포니아로 처음 왔을 때 비교적 어린 나이라서 쉽게 미국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다. 누구나 마찬가지지만 이민생활은 부모님들에겐 여러 가지 어려움으로 가득했다. 특히 음악을 하신 아버지는 직업을 구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그런 어려움을 보고 듣고 자라다 보니 내가 열심히 해서 성공해야겠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렵고 힘들어도 참고 또 참으면서 연습을 했다. 성공만이 부모님께 보답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 연주와 가사를 어떻게 조율하나.

“2003년 첫 아이를 낳자 LA에 살던 부모님과 남동생 부부도 뉴저지로 이사 왔다. 친정 부모님이 식구들을 돌봐 주어 해외 연주도 마음 편히 다녀올 수 있다. 지금은 여름방학이라 애들과 놀아주면서 무엇을 해먹을까가 제일 큰 고민이다. 연습은 밤에 해야 하나 새벽에 해야 하나가 매일 같은 숙제다. 무뚝뚝한 진주 출신 신랑과는 함께 와인 한잔에 쇼 프로그램을 보며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한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