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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나로 미국 동부 최대의 골프 숍을 일궈낸 이전구 뉴욕골프센터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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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nolja 댓글 0건 조회 1,448회 작성일 15-05-29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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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용하나로 미국 동부 최대의 골프 숍을 일궈낸 이전구(72) 뉴욕골프센터 회장은 이태리 계와 유대인이 장악한 뉴욕의 골프 소매업 시장을 천하통일 한 장본인이다.


그가 운영하는 뉴욕골프센터는 농구 슈퍼스타 마이클 조던과 미국 내 유명 방송인, 연예인들이 자주 찾는 명소로 자리 잡았다. 최경주 프로골퍼도 이 곳 매장에서 간이 골프교실을 열어 고객을 대상으로 시연회를 가지기도 했다. 점포만 해도 뉴욕 중심부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부근 1천 평에 달하는 이 회장 소유의 매장 건물을 비롯, 동부지역 14곳에 이른다.


2층 규모인 맨해튼 35번가 매장은 개별 골프 매장으로는 넓이나 매출 면에서 미국 내 ‘톱5’ 안에 든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뉴저지의 12곳은 사업 파트너 관계다. 이 회장 소유의 골프센터 매출은 연간 2천만 달러에 달한다.


뉴욕골프센터를 찾은 고객이 매장의 상품을 살펴보고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동업자끼리 미팅을 한다. 광고도 같이 하고 구매도 같이 한다. 그렇게 해야 힘이 세지니까. 세찬 경쟁을 이겨낸 비결이기도 하다.” 모래알이라는 뉴욕 한인사회에서 골프업계 만큼은 예외라는 얘기로 들렸다.

 이 회장은 “‘골프의 모든 것’이라는 상호를 내걸고 캘러웨이나 테일러메이드 등 유명 골프용품을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판매한 것이 뉴요커들의 호응을 받게 된 것 같다”고 밝혔다.

그가 뉴욕에 둥지를 튼 이유는 재미있게도 인생의 매너리즘을 극복하기 위해서였다. 이 회장은 서울대 농대를 졸업하고 6년간 사업을 하다가 1971년대 초 이미 미국에 건너와 미국 태권도의 대부 역할을 하고 있던 형(이준구 씨)의 권유로 미국 이민 길에 올랐다. 형과 함께 태권도 도장을 운영하며 주로 경영관리를 책임졌다.


“나의 정체성이 ‘이준구’라는 형의 이름에 가려서 사라지는 게 두려웠다. 이렇게 사는 게 싫증도 났다. 형에게 내 사업을 차리겠다고 말하고 형의 도장이 있는 워싱턴과는 많이 떨어진 뉴욕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당시 형은 많이 섭섭했겠지만 요즘은 ‘네가 독립하길 참 잘했다’고 말한다.”


그는 1984년 집을 담보로 잡힌 돈으로 뉴욕에 골프용품점을 열어 터줏대감이던 유대·이탈리아계 이민자들과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20년이 지난 지금 살아남은 골프용품점은 오직 이 회장의 뉴욕골프센터뿐이다.

1. 뉴욕골프센터 이전구 회장이 아내, 큰 아들과 자리를 함께 했다. 왼쪽 두 번째부터 이 회장, 아내 이희정씨, 큰 아들 찰리 이 사장.2. 이전구 회장이 뉴욕 서울대동문회 모임에서 하모니카 연주솜씨를 뽐내고 있다.

그렇지만 처음부터 장사가 잘 된 것은 아니었다. 맨해튼 구석의 한 빌딩 지하실에서 가게를 얻어 사업을 시작한 지난 1984년 1월부터 내리 5년 적자를 냈다.


“돈이 없는 상황에서 매상이 안 오르니까 계속 돈을 빌리게 돼 정말 힘들었다. 남들이 밥 먹을 때 죽 먹는다는 식으로 절약했다. 가족 전체가 매달려 청소부터 시작해 하루 16시간씩 일했다.” 그러나 기회는 벼락처럼 느닷없이 찾아온다고 했던가. 지난 1990년 거래 은행이던 뉴욕은행으로부터 현재 35번가 매장 건물을 사지 않겠느냐는 제의를 받았다.


“돈이 없다고 하니까 은행에서 돈을 빌려줬다. 내 호주머니에서 나가는 돈이 없이 샀다. 뉴욕은행에서 크게 도와준 셈이다.” 이 회장은 그때 미국 사회에서 살기 위해서는 신용이 정말 중요하다는 생각을 했다고 한다.


새 건물로 옮긴 뒤 매상이 곱으로 늘었고 이때부터 순풍에 돛단 듯 모든 것이 순조로웠다. 이 때문에 남들은 “운이 좋았다”는 말을 하지만, 이 회장은 “신용을 쌓았기 때문”이라며 손사래를 쳤다. 아무리 어려운 상황에서도 은행에서 빌린 돈은 반드시 제 날짜에 갚았고, 이자 내는 날짜도 하루를 어기지 않았다. 뉴욕은행이 이 회장을 믿었기에 좋은 제안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 회장이 사람 사이의 신용을 중시하게 된 것은 ‘인간관계’를 사업의 기초로 삼았기 때문이다. “부싯돌이 광야를 태울 수 있듯이 한번 만남에서 엄청난 아이디어가 나올 수 있지 않느냐”고 되묻는 그는 가족은 물론 시민, 근로자, 고객, 제조업자, 은행과 좋은 관계를 맺기 위해 애썼다.


이 회장은 “무수한 경쟁자들을 이기고 기반을 잡으니까 캘러웨이와 테일러메이드 같은 유명회사들이 무제한으로 외상을 주고 어떤 일이든 우리와 먼저 상의하고 있다”고 뿌듯함을 감추지 않았다.


이 회장은 하모니카와 시(詩)에도 남다른 재주를 가졌다. 지난 2000년 9월에는 뉴욕 링컨센터 매버리피셔홀에서 로열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기도 했으며, 1998년에는 ‘이삿갓 북한 유람기’라는 시조로 등단하기도 했다. ‘한상의 노래’를 작사하는 등 한상에 남다른 애정을 지니고 있다.


지금까지 매년 한상대회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는 그는 “한국은 땅 덩어리가 좁고 인구는 많기 때문에 더 많이 이민을 가야 한다”며 “청년 실업을 해결하기 위해 취업을 해외로 돌려야 한다. 결국은 한민족의 자산이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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