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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차 대전도 석유전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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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princeton 댓글 0건 조회 1,604회 작성일 10-08-07 1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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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의 역사는 전쟁의 역사다. 고대에서 근대에 이르기까지 전쟁은 영토 확장과 노동력 확보가 가장 큰 이유였다. 19세기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새로운 전쟁 인자로 등장한 것이 석유다. 미국의 이번 이라크 전쟁도 '이라크 자유 작전'이라는 이름과 달리 결국 '석유전쟁'이라는 시각이 많다. 1939년부터 45년까지 벌어졌던 2차 세계대전 역시 일종의 '석유전쟁'이었다.
1933년 '수권법'을 통해 독재체제를 구축한 독일 히틀러의 최종적 목표는 '라벤스라움', 즉 아리아 민족만의 삶의 공간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을 제압해야 가능한 일이었다.
히틀러에게 필요한 것은 소련의 전부가 아니었다. 히틀러가 원한 것은 무한한 곡물과 유전이 있는 우크라이나-코카서스 지역이었다. 히틀러는 이 지역에 꿈꾸어 온 라벤스라움을 세우려고 했다.
1940년 6월 25일 프랑스가 항복하자 히틀러는 41년 6월 22일 3백만 명의 병력을 동원, 3개 방면에서 소련을 침공했다. 히틀러의 최종 목적지는 소련 남부였고, 얻고자 한 것은 석유였다. 방어가 허술한 이집트(당시 영국군 1개 사단이 방어하고 있었음)의 수에즈운하를 돌파해 시리아-이란을 1차 경유지로 삼는다는 것이 초기 계획이었다.
히틀러는 전쟁 과정에서 그 목표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장군들의 끈질긴 우회 공격 건의를 자신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했다. 히틀러는 정면승부만 고집하다 수백만 명의 사상자를 낸 채 패배한다. 훗날 군사전략가들은 히틀러가 북아프리카를 우회해 소련의 석유 지대에 접근했더라면 2차 세계대전의 양상은 180도 달라졌을 것이라고 말한다.
일본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를 지배한 일본은 1937년 7월 7일 중국을 공격함으로써 중-일전쟁을 일으킨다. 중국과 전쟁에서 원활한 전쟁물자 공급선을 확보하기 위해 일본은 인도차이나반도와 동인도제도(현재 인도네시아 등)를 점령하려 했다. 1940년 프랑스와 네덜란드가 연이어 독일에 항복하고 인도차이나반도에 힘의 공백이 생긴 틈을 이용, 일본은 프랑스의 지배하에 있던 인도차이나반도를 점령하고 네덜란드의 식민지인 인도네시아를 공격, 석유를 확보하려 했다.
당시까지 미국은 철저히 중립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군이 인도차이나-인도네시아-싱가포르가 연이어 함락하자 미국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일본이 엄청난 석유자원을 확보하면 미국의 지배하에 있던 필리핀이 위협받게 되고 이는 곧 태평양에 대한 미국의 우월적 지위가 상처받는 것을 뜻하기 때문이다.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은 1941년 7월 25일 마침내 미국 내 일본의 자산을 동결하고 일본과의 모든 교역을 끊어버린다. 또한 필리핀에 주둔하고 있던 맥아더 태평양 사령관은 일본으로 향하는 보급 루트와 석유 공급 루트를 차단한다. 이로 인해 중국과의 전쟁 수행에 막대한 타격을 입게 된 일본은 미국과 외교협상을 벌여 물자와 석유의 보급 루트를 풀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
미국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자 결국 일본은 승산도 없는 미국과의 전쟁을 결심하고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한다. 석유 및 자원이 부족했던 일본이 이를 얻기 위해 '석유전쟁'을 감행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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