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의 세계와 그 동인 > 철학 영혼의 돋보기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철학 영혼의 돋보기


 

플라톤의 세계와 그 동인

페이지 정보

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2,200회 작성일 10-08-03 15:30

본문

플라톤의 주요 관심사는 도덕 철학과 정치 철학이었지만, 그는 또한 상당한 열의를 지니고 과학과 현상에도 주의를 기울였었다. 그의 자연에 대한 이론은 주로 「티마에오스」에서 발견된다. 이 대화편은 그가 약 70세가 되었을 때 저술하였다고 알려져 있다. 플라톤이 이 주제를 일부러 연기했던 것은 아닌 것 같다. 그는 다만 과학의 진보를 촉진하는 것보다 도덕의 문제를 철학의 중심 과제로 생각하고 있었으므로 도덕 철학과 정치 철학을 선행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가 활동하던 시기에 과학은 매우 힘겨운 상황에 빠져있었다. 이 분야에 일고 있던 풍향기는 어떤 과학적이며 논리적인 방향이나 탐구도 아무런 결실을 맺을 수 없으리라는 좌표를 향해 돌고 있었고, 대부분의 학자들 사이에 인식되고 있었다. 소크라테스는 "자연의 탐구라고 불리는 철학의 분과(分科)를 인식하는 데, 즉 사물의 원인들을 인식하는 데...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고 언표하곤 했었다. 그러나 아낙시만더, 아낙시메네스, 데모크리토스 등 일련의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이론들과 설명 방식의 상호 모순에 대중을 비롯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짜증스런 환멸을 느끼고 있었다.

  플라톤 역시 똑같은 실망과 회의를 지니고 있었다. 더욱이 플라톤 자신의 철학을 형성해가며, 그는 실재에 대해 제기된 이론들이 모두 엄격한 과학적 지식의 가능성을 충분히 의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그에 의하면, 물리학은 "단순한 이야기거리" 이상일 수 없었다. 특히 그의 이데아론은 엄격한 지식의 한 형식으로서의 과학을 불가능하게 하였다. 그에 의하면 가시계(可視界)는 변화와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는 반면에, 실재 세계는 이데아들로 구성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과학이 이론을 정립하고자 하는 곳은 바로 변화와 불완전이 가득 찬 가시계였다. 어떻게 우리가, 불완전 그 자체이며 변화로 가득 찬 주제에 대해 엄정하며 항구적인 지식을 가질 수 있을까? 오히려 그것 자체가 모순이거나 불온한 시도가 아닐까?

  플라톤도 역시 적어도 한 때 그러한 난제에 당면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동시에 그는 우주론의 필요와 요청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의 이데아론 및 도덕과 악과 진리에 대한 사유 방식이 좀더 일관된 형식을 지니려면, 세계를 바라보는 시선과 관점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고 그를 형성해야 하는 필요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즉 그는 물질 세계란 "단지 이야기거리'이거나 기껏해야 개연적(蓋然的)인 지식일 뿐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주제를 가능한 한 정확하게 표현해야 할 필요와 세계와 우주는 필연적이며 지속적으로 인간의 주요 관심 사항이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식하고 있었다.

  플라톤의 세계에 대한 시선과 관점은 이러하다. 즉 세계는 변화와 불완전으로 가득 차 있으면서도 목적과 질서를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데모크리토스(Democritos B.C 460 - 360)는 만물의 생성을 원자들의 우연적인 결합으로 설명했었다. 플라톤은 이러한 류의 설명을 단호히 거부했다. 예를 들면 플라톤은 행성의 괘도를 관찰하면서, 그것들은 일련의 엄밀한 기하학적 간격과 법칙에 따라 배열되며 그 간격과 법칙을 잘 관찰하고 계산하면 조화로운 비율이 나타난다고 믿었다. 플라톤은 세계를 묘사함에 있어 피타고라스 학파의 관점을 많은 부분에 채택하였다. 그러나 그는 만물이 수(數)라고 말하는 대신에 사물은 수를 분유하며, 따라서 사물들에 대한 수학적 설명이 가능하다고 주장하였다. 사물들의 이러한 수학적 성격이 플라톤에게 의미하는 바는, 사물의 배후에 우연하고 계기적인 메커니즘이 존재할 뿐만 아니라 그에 따르는 사유와 목적이 존재함에 틀림없다는 것이었다. 만물에 질서를 부여하는 것은 정신적 능력이기 때문에, 우주에는 어떤 지적(知的) 작용이 존재함에 틀림없으며, 인간과 세계는 그러므로 긴밀한 상호 유사성을 갖는다. 왜냐하면 양자는 우선 지적이고 영원한 요소를 함유하며, 그 다음으로 감각적이고 일시적인 요소를 함유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원성(二元性)은 영혼과 육체의 결합으로서의 인간 속에 표현된다. 이와 유사하게 세계는 영혼이며, 그 영혼을 통해 사물은 적정하게 배열되는 것이다. 이것이 플라톤의 해석이었다.

  플라톤은 정신이 만물을 배열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창조론을 체계 안으로 끌어들이지는 않았다. 창조론이란 사물이 무로부터(ex nihilo) 어떤 의도에 따라 창조된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플라톤의 가시계의 기원에 대한 설명은 이러한 창조론을 무시한다. 물론 플라톤은 "생성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어떤 동인(動因)을 통해 생성된다"고 말하고 있으나, 그가 말하는 동인이란 조물주(Demiurge)에 닿아있으면서 동시에 그 조물주는 새로운 사물들을 창조하지 않는, 다만 혼돈의 형식 속에 선재(先在)하는 어떤 것을 질서 있게 배열할 뿐인 조물주인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한 조물주의 상(像)과 그가 작용하는 질료를 동시에 발견할 수 있다. 가시계에서의 사물의 발생을 설명할 때, 플라톤은 사물의 모든 성분들의 존재, 즉 사물들을 구성하는 성분들의 존재를 가정하며 동시에 조물주와 이데아와 사물들이 그것을 모방해서 만들어지는 형식을 가정하였다.

  그렇지만 플라톤에게는 유물론자들과 확실히 구분되는 점이 있었다. 유물론자들은 만물이 어떤 근본 물질- 흙, 공기, 불, 물이든 간에 -에 근거한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플라톤은 물질이 근본 실재라는 생각에 동의할 생각이 없었다. 그에 의하면 물질 자체는 좀더 정연한 개념으로 설명되어야 하는 무엇이었다. 즉 더 높은 차원의 몇 가지 물질들의 결합으로서가 아니라 물질 이상의 어떤 것의 구성으로서 설명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흙이든 물이든 우리가 물질이라고 부르는 모든 것은 이데아의 반영이며, 이들 이데아들은 하나의 매개체를 통해 표현될 뿐이었다. 플라톤에 따르면, 사물들은 "용기(容器)"로부터 발생한다. 그는 이 용기를 "모든 생성의 보모(保姆)"라고 생각했다. 그 용기는 "주형(鑄型 : matrix)" 혹은 하나의 매개체로서 어떤 구조도 갖지 않는다. 그것은 단지 조물주에 의한 구조의 부과를 받아들일 수 있을 뿐이다. 플라톤이 "용기(容器)"의 대칭어로 사용한 것은 "공간(空間 : space)"이다. 그에 의하면, 이 공간은 "영속적이며 파괴를 용납하지 않고, 생성하는 만물에게 장소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자체는 의사(擬似) 추론에 의하지 않고는 파악될 수 없으며 믿음의 대상도 아니다." 그 용기의 기원은 어디에도 설명되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것은 플라톤 사상에서 추론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용기란 단지 사물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장소일 뿐이 것이다.

생각이 깊지 못한 사람에게는 흙이나 물이라는 한 분류가 영속적인 형태의 질료(質料)로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플라톤에 의하면 그것들은 끊임없이 변화하며 따라서 그것들은 "이것" 혹은 "저것"으로 표현할 수 없으며 어떤 문장으로도 "그것들이 영속적일 존재임을 증명할 도리가 없다." 물과 흙처럼 감관을 통해 "질료"나 "실체"로 생각된 요소들은 단지 그 사물이 지닌 성질들일 뿐이며, 그 성질들은 용기라는 매개체를 통해 나타나는 것이다. 용기(容器) 속에서 "만물은 생성하며, 그것들의 현상을 형성했다가 용기로부터 사라져 간다." 물질 세계는 비물질적 복합물들로 구성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물체들은 그것들의 표현 형식에 따라 기하학적인 견지에서 묘사되고 정의될 수 있다. 이러한 주장은 피타고라스 학파의 관점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즉 어떠한 평면도 삼각형들에 의해 분할될 수 있으며, 삼각형은 더 작은 삼각형에 의해 분할된다. 이러한 삼각형적 표면 형식은 물질이라고 알려진 복합물의 구성 요소들임에 틀림없다. 사실상 우주는 그것의 기하학적 도해(圖解)의 견지에서 생각될 수 있다고 플라톤을 비롯한 피타고라스 학파의 사람들은 믿었다. 또한 단순히 공간상에 발생하고 있는 것들로서, 혹은 다양한 형상들을 반영하는 공간으로서 정의될 수도 있었다. 플라톤이 특히 정립하고 했던 것은 물질이란 단지 보다 근본적인 어떤 것을 반영하는 현상이라는 생각이었다.

  만일 다양한 종류의 삼각형들이 만물의 근본 성분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사물들의 안정과 변형을 설명할 수 있을까? 간단히 말해 우리가 알고 있는 세계나 우주를 존재 가능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여기서 플라톤은 다시 만물은 정신에 의해 질서를 이루며 우주는 용기(容器) 안에 있는 세계 영혼의 활동이라는 주장을 반복하고 있다. 사물의 세계는 현상(phonomena : 희랍어로 외향)의 세계이다. 우리가 지각하는 것은 다양한 현상들이지만 그것들을 분석해보면 기하학적 평면들로 구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평면들은 근본적이며 환원 불가능하고, 또한 용기(容器) 안에 있는 "원질(原質)"이다. 한편 평면들은 자신들을 삼각형들로, 더 나아가 현상들로 배열재 주는 어떤 동인(動因)을 필요로 한다. 이러한 모든 활동은 세계 영혼에 의해 수행된다.

  비록 플라톤이 어떤 때는 세계 영혼을 조물주의 피조물이라고 표현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그것은 영원하다. 세계 영혼은 영원하지만 현상계는 변화로 가득 차 있다. 이는 마치 인간의 영혼은 영원한 요소를 반영하지만 육체가 변화의 요소를 내포하는 것과도 같다. 물질과 육신의 세계는 변화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복합적이며, 따라서 항상 자신의 근본 성분으로 되돌아가려 하기 때문이다. 즉 공간으로 "들어가고" 공간에서 "사라진다." 그러나 세계 영혼이 영원한 한에 있어서는 우리의 경험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변화에도 불구하고 안정과 영속의 요소, 즉 하나의 구조나 식별 가능한 하나의 우주가 존재한다.


  플라톤에 의하면, 세계 내에 악이 존재하는 것은 조물주의 활동에 방해하는 요소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비록 조물주가 가능한 한 자신의 형상을 닮은 세계를 만들려 했지만, 세계는 완전히 선하지는 못하다. 조물주는 이성이며 우주의 질서를 형성해 준 동인(動因)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우주의 발생은 필연과 이성의 결합의 결과였다. 여기에서의 필연이란 변화에 대한 어쩔 수 없는 인정을 의미한다. 또한 용기(容器)의 원질(原質)에 적용될 때 그것은 정신의 질서에 둔감한 일종의 고집을 의미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필연은 세계 안에 있는 악의 존재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므로 정신의 활동을 방해하는 모든 것은 질서의 파괴에 기여하며 따라서 악의 의미를 갖는다. 이는 인간의 활동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며, 정신이 통제력을 상실할 때 언제나 반항적인 욕구와 육체적 낮은 반응이 악을 낳는다는 사실을 암시해준다. 필연은 관성(慣性)이나 불가역성(不可易性)같은 다양한 양태로 표현된다. 따라서 어떤 목적에 따라 세계를 질서화해 가면서, 이성 심지어 신의 이성조차도 이러한 장해와 맞서 싸워야 하는 것이라고 플라톤은 주장했다.

  시간에 관한 문제가 있다. 플라톤에 따르면, 시간은 현상이 만들어진 후에야 나타난다. 불완전하고 변화하는 사물들이 존재하기 전에는 시간도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논리적으로 그때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영원하다. 시간의 의미는 바로 변화이며 따라서 다양한 모사들은 끊임없이 용기 속으로 들어가고 밖으로 나간다. 이 출입이 변화의 과정이며 시간의 원인이다. 그러므로 시간은 시간의 우주와 영원의 우주에 이중적으로 현현(顯現)된다. 즉 우주는 정신에 의해 정돈되기 때문에 영원의 요소를 내포하며, 동시에 우주는 표면 형식들의 일시적인 결합이기 때문에 변화의 요소와 시간을 내포한다. 또한 변화는 불규칙적인 아니라 규칙적이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 자체는 영원한 정신의 현현을 보여준다. 변화의 규칙성, 예를 들면 별이나 행성의 규칙적인 운동은 변화의 측정을 가능하게 하며, 따라서 "시간을 말하는 것"이 가능하다.

  이 밖에도 플라톤은 우주에 대한 "이야기거리"로, 어떻게 조물주는 형상(形象)들을 사용함으로써 용기로부터 사물들을 주조해 냈는가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 조물주에 의해 나타난 세계 영혼은 용기 내에서 활기를 주는 활동이며, 마치 우리에게 실체처럼 보이는 것들을 산출하는데, 과거 자연철학자들에 의해 실체로 인식되었던 물질은 실제로 단순히 기하학적 도형들의 배열에 의해 이루어진 성질들에 불과한 것이다. 이러한 설명에서 악과 시간은 불완전과 변화의 산물이다. 이러한 동인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대로의 물질 세계에서는 발견될 수 없다. 이 동인(動因)은 정신이며 주로 수학적 측면에서 설명될 수 있을 뿐이다.




  여기까지 플라톤 철학의 대부분을 간략하나마 살펴보았다. 우리는 이쯤에서 플라톤의 거대한 철학 체계에 대한 일련의 비판적 평가를 해야할 필요성을 느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떤 의미에서 철학사 자체가 플라톤의 대화편과 유사한 대규모적이며 깊고 심화된 대화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이 대화를 통해 사상가들은 바로 그가 가르쳤던 것들에 대해 동의하기도 하고 때로 의문을 제시하기도 하며, 가끔은 앞서 세웠던 축대와 성(城)을 무너뜨리려 노력하기도 하였다. 다만 플라톤이 기초한 철학적 기틀이 너무 완벽했고 거대했기 때문에, 여러 세기가 지나도록 그의 견해는 지식 사회를 지배했고, 강력한 권위를 지녔다. 화이트헤드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유럽의 철학적 전통을 가장 안전하게 일반화해서 평가한다면, 그것은 플라톤에 대한 일련의 주석들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화이트헤드의 유럽 철학이 원천으로 플라톤의 위치를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에 대해 많은 빚을 지고 있을 뿐 아니라 그 한 사람으로 인해 얼마나 많은 가능성이 봉쇄되어 왔는가를 또한 사려할 이유를 그에게서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제 플라톤을 마무리하고 플라톤의 위대한 계승자이며 플라톤의 결함에 놀라울 정도로 완벽한 덧칠을 했던 인물, 그리고 모든 자연과학의 입안자인 아리스토텔레스를 철학사의 평면에 조망하게 되었다. [철학과 삶]을 통해 이루어지는 여러 논의를 통해 우리가 어디를 향해 걸어가고 있는가를 의식할 수 있었으면 싶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