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크라테스의 도덕사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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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734회 작성일 10-08-03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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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에게 있어 지(知)와 덕(德)은 같은 것이었다. 만일 덕이 "가능한 한 영혼을 선(善)하게 만드는" 데 관련되는 것이라면,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선과 지(知)는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단순히 선과 지가 관련되어 있다는 것 이상을 말하려고 하였다. 그는 이 양자를 동일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이다. 그에 의하면 선을 아는 것이 곧 선을 행하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지는 덕이며, 덕은 바로 지의 목적인 것이었다. 지와 덕을 동일한 것으로 취급했던 소크라테스는 더 나아가 악덕이나 죄를 지의 부재(不在)라고 주장했다. 지가 덕인 것처럼 무지는 악덕이었다. 이러한 추론의 결과로 소크라테스는 어느 누구도 알면서 악덕에 빠지거나 죄를 범하지 않는다고 확신했다. 그에 의하면 그릇된 행동은 항상 무의식적이며, 따라서 무지의 산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덕과 지를, 악덕과 무지를 일치시킨 것은 어찌 보면 대부분의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경험한 것들과 모순되는 듯 싶다. 우리의 상식에서 볼 때, 우리는 종종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경우가 있고, 따라서 우리의 악행은 의도적인 행동일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이 소위 죄라고 불리는 행동을 저지른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항상 그 행위가 어느 정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있거나 그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충분히 취하고 있기 때문에 행동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덕과 지를 일치시킬 때 그는 이미 덕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덕이란 인간의 기능의 완전한 실현이었다. 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기능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있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동시에 모든 인간은 불가피하게 영혼의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갖으며, 그 갈망은 내면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즉 "가능한 한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행위"는 적합한 행동양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행복에 대해 필연적으로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선택함에 있어 그 행동이 그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전제한다. 어떤 행동들, 무슨 행위들이 행복을 낳을 것인가? 몇몇 행동들은 마치 행복을 낳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때문에 인간은 종종 의문의 여지가 있는 행동을 선택하기도 하나, 이러한 경우에도 인간은 그 행동이 자신을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도둑질이 그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는 희망에 따라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들은 행복의 상징들인 권력, 쾌락, 부(富), 의미,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과 참된 행복의 기반을 혼동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악덕과 무지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無知)는,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의 행복을 낳는 능력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무지였고, "영혼을 가능한 선하게 만드는 행위"와 관련된 무지였다. 그러므로 악행은 행동 양식에 대한 그릇된 판단이나 신념의 결과로 발생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어떤 종류의 사물이나 쾌락이 행복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다. 악행은, 그것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이 행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이루어진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는 어떠한 행위가 행복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써 나타난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참된 지식을 통해 그것이 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우리는 사물들과 행동 양식들에 대한 참된 지식을 통해 그것들이 과연 행복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행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적으로 행복을 주는 것을 구분할 때에도 지식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덕은 무지이며, 무의식적이라는 주장은 결국,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손상시키고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악행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고통을 선택할 때도, 이 고통이 자신을 덕으로, 인간 본성의 완전한 실현으로,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를 지니고 선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혹은 되도록 바르게 행동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제작된, 증인의 부정확한 증언에 의해 수감되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에서, 주인공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교도소에 수감된 대부분의 범법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완전한 무죄라고, 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거나, 편파적인 수사에 의해 구속된 경우에 속한다고, 혹은 사회적 부조리와 그와 유사한 이유에서 그러한 행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거의 언제나 스스로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으며, 진실로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고, 다만 그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무지한 행동이 그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끌거나 죄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실제로 옳은가는 그 행동이 참된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그 문제는 참된 지식의 문제, 즉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문제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서구 문명의 전역사를 통해 도덕 철학이 지향해 온 방향은 소크라테스 한 사람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 본성의 궁극적 구조가 영원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어떤 행동 양식들과 도덕적 가치들도 또한 영원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주장은,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그의 위대한 승리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예수 및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었지만, 그 본류의 지배적인 지적(知的), 도덕적(道德的) 헤게모니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제시되었던 것이며, 그 강물에 주변의 많은 줄기가 더해지거나 수정되어 발전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덕과 지를, 악덕과 무지를 일치시킨 것은 어찌 보면 대부분의 인간이 가장 기본적으로 경험한 것들과 모순되는 듯 싶다. 우리의 상식에서 볼 때, 우리는 종종 잘못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행동하는 경우가 있고, 따라서 우리의 악행은 의도적인 행동일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도 인간이 소위 죄라고 불리는 행동을 저지른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그러나 그는 누군가가 자신의 행동이 죄라는 것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죄를 저지른다는 사실을 부정했다. 소크라테스에 의하면, 죄를 저지르는 사람은 항상 그 행위가 어느 정도 선하다고 생각하고 있기 있거나 그를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를 충분히 취하고 있기 때문에 행동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덕과 지를 일치시킬 때 그는 이미 덕에 대한 구체적인 개념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있어서 덕이란 인간의 기능의 완전한 실현이었다. 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기능은 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에 있는 것이라고 그는 믿었다. 동시에 모든 인간은 불가피하게 영혼의 행복에 대한 갈망을 갖으며, 그 갈망은 내면의 행복을 실현하기 위해, 즉 "가능한 한 영혼을 선하게 만드는 행위"는 적합한 행동양식에 의해서만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인간은 행복에 대해 필연적으로 갈망하기 때문에 자신의 행위를 선택함에 있어 그 행동이 그를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는 희망을 전제한다. 어떤 행동들, 무슨 행위들이 행복을 낳을 것인가? 몇몇 행동들은 마치 행복을 낳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한 경우가 있다. 때문에 인간은 종종 의문의 여지가 있는 행동을 선택하기도 하나, 이러한 경우에도 인간은 그 행동이 자신을 행복으로 인도할 것이라고 믿고 있다는 것이다. 도둑은 도둑질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그는, 도둑질이 그에게 행복을 줄 것이라는 희망에 따라 도둑질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와 유사하게 사람들은 행복의 상징들인 권력, 쾌락, 부(富), 의미, 가치를 추구한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한 것들과 참된 행복의 기반을 혼동하고 있음을 스스로 알지 못하고 있을 뿐 아니라 진정한 의미에서의 행복이 무엇인가에 대해 무지하다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생각인 것이다.
그러므로 소크라테스에게 악덕과 무지를 동일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이 상식에 위배되는 것이 아닌 것이다. 왜냐하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무지(無知)는, 행동 자체가 아니라 그 행동의 행복을 낳는 능력에 관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과 관련된 무지였고, "영혼을 가능한 선하게 만드는 행위"와 관련된 무지였다. 그러므로 악행은 행동 양식에 대한 그릇된 판단이나 신념의 결과로 발생한다. 그들이 추구하는 어떤 종류의 사물이나 쾌락이 행복을 낳을 것이라는 기대는 잘못된 것이다. 악행은, 그것이 행할 수 없는 것을 그것이 행할 수 있다는 희망에서 이루어진 무지의 산물이다. 무지는 어떠한 행위가 행복을 낳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지 못함으로써 나타난다. 우리는 인간의 본성에 대한 참된 지식을 통해 그것이 요구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 또한 우리는 사물들과 행동 양식들에 대한 참된 지식을 통해 그것들이 과연 행복에 대한 인간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가를 알 수 있다. 또한 행복을 주는 것처럼 보이는 것과 실제적으로 행복을 주는 것을 구분할 때에도 지식은 요구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악덕은 무지이며, 무의식적이라는 주장은 결국, 인간은 자신의 본성을 손상시키고 파괴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고의적으로 악행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 주장이다. 인간은 고통을 선택할 때도, 이 고통이 자신을 덕으로, 인간 본성의 완전한 실현으로, 행복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를 지니고 선택한다는 것이다. 인간은 항상 자신이 올바르게 행동하고 있다고, 혹은 되도록 바르게 행동하려 한다고 생각한다. 미국에서 제작된, 증인의 부정확한 증언에 의해 수감되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는 과정을 담은 영화에서, 주인공은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동안 교도소에 수감된 대부분의 범법자들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으며, 자신이 완전한 무죄라고, 또는 억울한 누명을 쓰고 있거나, 편파적인 수사에 의해 구속된 경우에 속한다고, 혹은 사회적 부조리와 그와 유사한 이유에서 그러한 행위에 참여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자신의 행위에 대해 거의 언제나 스스로의 본성을 파괴하지 않으며, 진실로 행복을 갈구하고 있다고, 다만 그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알지 못한 상태에서의 무지한 행동이 그들의 삶을 불행으로 이끌거나 죄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것이라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을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동이 실제로 옳은가는 그 행동이 참된 인간의 본성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에 달려 있으며, 따라서 그 문제는 참된 지식의 문제, 즉 참된 행복이 무엇인가를 아는 문제라는 것이 소크라테스의 도덕 사상의 핵심인 것이다.
서구 문명의 전역사를 통해 도덕 철학이 지향해 온 방향은 소크라테스 한 사람에 의해 이미 결정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플라톤은 인간 본성의 궁극적 구조가 영원하다고 믿었고 따라서 어떤 행동 양식들과 도덕적 가치들도 또한 영원하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주장은, 소피스트들의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그의 위대한 승리의 기초를 이루고 있었다. 물론 소크라테스의 사상은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와 예수 및 많은 신학자들에 의해 수정되고 보완되었지만, 그 본류의 지배적인 지적(知的), 도덕적(道德的) 헤게모니는 소크라테스에 의해 제시되었던 것이며, 그 강물에 주변의 많은 줄기가 더해지거나 수정되어 발전해온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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