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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스토텔레스 3편 그의 형이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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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933회 작성일 10-08-03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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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이상학(Metaphysics)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른바 "제 1철학"을 전개하고 있다. 그는 "모든 인간은 본래적으로 앎을 갈망한다"는 명제로부터 시작한다. 그에 따르면 이 본유적 갈망은 단순히 어떤 일을 행하기 위해 혹은 어떤 것을 만들기 위해 알려고 하는 갈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실용적 동기들 이외에도 인간에게는 단순히 앎 그 자체를 위하여 어떤 종류의 사물이나 현상을 이해하려는 갈망이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이러한 사실이 의미하는 바는 우리의 감관(感官)들이 그 자체로 누리는 기쁨이 있다는 사실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시각이 우리에게 사물들간의 많은 차이들을 구별해 주는 한에 있어서 사물들의 유용성과는 별도로 그 사물들이 그 자체로 진리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지식에는 여러 수준들이 존재한다. 어떤 사람들은 단지 그들의 감관을 통해 경험한 것만을 인식한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우리가 감관을 통해 익숙한 것을 지혜라고 간주하지 않는다. 확실히 특정한 사물들에 대한 우리의 지식은 감관을 통해 획득된다. 그러나 이러한 종류의 지식은 단순히 우리에게 "왜"가 아닌 "이것" 혹은 "저것"만을 말해 줄뿐이다. 예를 들면, 그것은 우리에게 타고 있는 불덩이는 뜨겁다는 사실만을 말해 줄 뿐 "왜" 뜨거운가를 말해 주지 못한다. 약(藥)의 경우에 있어서도 어떤 사람들은 단순히 어떤 약품들이 어떤 병을 치료한다는 사실만을 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특정한 경험에 근거하는 이러한 지식은 약학자의 지식보다는 낮은 수준이라고 한다. 왜냐하면 후자는 특정한 약품이 어떤 병을 치료한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왜" 그러한가의 이유를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숙련 기술자들은 "보다 참된 의미에서 알고 있으며 단순 노동자들보다 더 현명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만들어진 사물의 원인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는 감각적 대상들 및 그것들의 성질로부터 획득된 지식 이상의 것이다. 또한 그것은 동일한 사물들의 반복된 경험에서 획득된 지식보다 우위에 있다. 지혜란 과학자가 점유하는 지식과 유사한 것으로서 과학자는 어떤 것에 대한 발견으로부터 시작하여 이 감각적인 경험들을 반복하며 결국 그가 경험한 대상들의 원인들에 관해 사유(思惟)함으로써 감각적 경험을 뛰어 넘게 된다. 과학은 정의 가능한 탐구 분야들의 숫자만큼 많이 존재하며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들 중 많은 분야를 다루었을 뿐 아니라 물리학, 윤리학, 정치학, 미학 등과 같이 광범위한 논제에 그 자신의 정열을 쏟아내었다. 이들 과학은 그 과학의 논제에 대한 활동의 근저에 놓여 있는 원인, 이유, 그리고 원리들을 발견하는 데 관심을 갖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물리학에 있어서는 무엇이 물체를 움직이게 하는가를, 윤리학에 있어서는 무엇이 행복한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가를, 정치학에 있어서는 무엇이 훌륭한 국가를 가능하게 하는가를, 미학에 있어서는 무엇이 좋은 시를 만들어내는가를 묻는 것이다. 여러 학문은 그것들의 논제에 있어서 서로 다를 뿐만 아니라 서로 서로에 대한 관계에 있어서도 다르다. 어떤 과학은 다른 과학헤 의존하고 있는데, 물리학이 수학에 의존해야 한다는 사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여러 과학의 위계 질서 속에서 "각각의 사물들이 행해져야 하는 목적을 아는 과학이 모든 과학 가운데 가장 권위 있는 과학이며 어떠한 보조 학문들보다도 큰 권위를 갖는다." 그러므로 개별 과학들 이외에 다른 하나의 과학이 존재하는바, 이것이 "제 1철학" 혹은 이른바 "형이상학"인 것이다. 형이상학은 다른 과학들의 논제를 넘어서서 "제 1원리들과 제 1원인들"에 관심을 갖는다. 이들 제 1원리들과 제 1원인들은 "지?quot;의 참된 기초임에 틀림없다고 아리스토텔레스는 믿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지식은 어떤 특정한 대상이나 행위에 관한 것이 아니라 참된 실재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형이상학은 가장 추상적인 수준의 지식을 취급한다. 이 지식은 특정한 것 대신에 보편적인 것에 관한 사항이기 때문에 추상적이다. 모든 과학은 논제에 관한 제 1원리들과 제 1원리들을 취급하는 한에 있어서 그 나름대로의 추상적인 수준을 갖는다. 예를 들면 물리학자는 일반적인 운동의 원리들에 관해 말하며 이는 '이' 위성의 운동 혹은 '저' 추의 운동을 묘사하는 것과는 구별된다. 그러므로 지혜는 추상적인 수준의 지식과 관계될 뿐 시각적인 사물들의 수준과는 관계하지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감각적 지각은 누구에게나 있고, 따라서 용이하며 결코 지혜를 보여주지 못한다." 참된 지혜로서 제 1철학인 형이상학은 가장 추상적이며 또한 모든 과학들 가운데 가장 정확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다양한 과학들의 제 1원리들마저도 근거하고 있는 참된 제 1원리들을 발견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참된 지식은 가장 인식 가능한 것 속에서 발견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제 1원리들과 원인들이야말로 인식 가능한 것이다... 또한 이것들로부터 모든 다른 사물들이 인식되어진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지금 [철학과 삶]의 지우(知友)와 함께 좀더 구체적으로 그의 형이상학을 살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 여겨진다.




         1) 정의된 형이상학의 과제

  여러 과학들은 물체들, 인간, 육체, 국가, 시(詩) 등등의 특정한 것들에 대한 제 1원리들과 원인들을 발견하려 한다. "이러저러한 사물은 무엇이며 또 왜 그러한가"를 묻는 과학과는 달리, 형이상학은 좀더 일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결국 이 문제는 과학들이 궁극적으로 설명해야 할 것인데 "과연 어떤 것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좀더 간단히 말하면 "존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바로 이 문제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형이상학」에서 존재하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고, 결국 그에게 있어 형이상학은 "모든 존재하는 것에 관한 과학"이 되었다. 그러므로 그가 생각했던 형이상학의 과제는 존재와 그것의 "원리들" 및 "원인들"에 과한 연구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은 그의 현실적 관심 사항들의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그가 궁중의사의 가계(家系)에서 성장했다는 사실과 그의 생물학에 대한 관심과 지적 논리적 지평에서 조명할 때, 그에게 있어 "존재한다는 것"은 정확하게 정의될 수 있는, 따라서 논의의 주제가 될 수 있는 어떤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에게 "존재한다는 것"을 동태적(動態的) 과정과 관련된 어떤 것으로 생각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한다는 것"이 항상 "어떤 것"임을 의미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는 실재적이며 개별적이고 일종의 한정적인 성격을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가 그의 논리학적 저서들에서 다루었던 모든 범주들, 예를 들면 성질, 관계, 양태, 장소 등과 같은 범주들, 혹은 술어들은 그 술어에 상응하는 어떤 주어를 전제한다. 모든 범주들에 상응하는 주어를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ousia)라고 칭했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것은 특정한 종류의 실체이다. 한편, "존재한다는 것"은 동태적 과정의 산물로서의 실체를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며, 이러한 식으로 형이상학은 존재 - 실체들 및 그것의 원인들 - 즉 실체를 출현시키는 과정들과 관계한다.




         2) 사물들의 제 1 본질로서의 실체

  아리스토텔레스는 실체가 의미하는 바를 이해하기 위한 단서는 주로 우리가 한 사물을 인식하는 방식 속에서 발견된다고 하였다. 범주들(혹은 술어들)을 염두에 두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렇게 주장한다. 즉 우리가 한 사물을 더 잘 인식하는 시기는 우리가 그것의 색이나 크기나 양태를 알 때가 아니라, 우리가 "그것이 무엇인가"를 인식할 때라는 것이다. 정신은 사물을 그것의 모든 성질들과 분리시켜 그 사물이 실제로 무엇인가 하는 문제, 즉 그것의 본질에 집중한다. 우리는 사람들간의 크기, 피부, 나이 등의 차이와 무관하게 모든 사람을 "사람"이라 인식한다. 이 경우에도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들 특정한 차이들(범주들, 술어들) 역시 존재하며, 따라서 존재성을 갖는다는 사실에 동의한다. 그러나 이러한 차이에 의한 존재는 형이상학적 탐구의 대상이 아니라는 것이다. 형이상학의 주요 관심사는 실체의 연구, 즉 사물의 본성에 관한 탐구인 것이며 이러한 견지에서 실체는 "하나의 주어에 의해 단언될 수 없으며, 모든 사물을 단언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실체는 어떤 사물의 기초이므로, 우리는 그 기초를 알고 난 후에, "그 어떤 사물"에 대한 다른 사실들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대부분 어떤 사항을 정의할 때 그것에 관해 말하기 전에 그것의 본질을 이해하고 있다. 우리가 하나의 커다란 테이블이나 한 명의 건강한 사람에 관해 이야기하는 경우 테이블과 사람은 큰 것 혹은 건강함으로 이해되기 전에 그것들의 "본질" 속에서, 그것들을 하나의 테이블이나 한 사람으로 만드는 것 속에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확실히 우리는 단지 특정하며 한정적인 사물들만을, 즉 현실적인 개개의 테이블들과 사람들만을 인식할 수 있다. 동시에 한 테이블이나 한 인간의 본질 혹은 실체는 그것의 범주들이나 그것의 성질들과 분리된 채 존재한다. 그렇다고 하나의 실체가 그것의 성질들로부터 동떨어져서 존재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지만 "테이블의 본질"의 경우처럼 만일 우리가 둥글다든다, 작다든가, 갈색이라든가 하는 이들 특정한 성질들로부터 "분리될 수 있는" 한 사물의 본질을 알 수 있다면, 우리가 테이블을 볼 때마다 발견할 수 있는 어떤 보편적 본질이 존재함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이 본질이나 실체는 특정한 성질과 독립되어 있음에 틀림없다. 왜냐하면 각각의 현실적 테이블들이 서로 다른 성질을 갖는 데도 불구하고 본질은 항상 동일하기 때문이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하려고 한 것은 한 사물은 그것의 개별적인 성질들의 총체 이상의 것이라는 점이다. 모든 사물의 "근저(substance)"에는 어떤 것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모든 사물은 그 개별적 성질들과 실체의 결합체이다. 이러한 주장을 전제로 하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전에 플라톤이 시도했던 것처럼, 본질과 개체의 관계를 규명하려 하였다. 무엇이 실체를 실체로 만드는가? 토대로서의 질료(質料)인가 아니면 형상(形象)인가?





       3) 질료(質料)와 형상(形象)

  비록 아리스토텔레스가 질료(hyle)와 형상(morphe)을 구분하였지만, 형상이 없는 질료나 질료가 없는 형상을 내세운 적은 없다. 존재하는 만물은 구체적인 개별 사물들이며, 질료와 형상의 조화이다. 그러므로 실체는 형상과 질료의 복합체인 것이다. 플라톤은 이데아나 형상이 사물과 동떨어져 존재한다고 추정하였으며, 공간을 물질적 토대 혹은 개체들이 만들어지는 재료라고 생각하였었다. 그러므로 플라톤에 있어 공간의 제 1 재료는 영원히 존재하는 이데아들에 의해 개체들로 주조되어야 했다. 플라톤은 이러한 식으로 어떻게 개별적으로 존재하면서도, 보편적인 본질을 내포하는 다양한 개체들이 존재할 수 있는가를 설명하였다. 플라톤에 의하면 이 보편자는 이데아이고, 형상은 영원히 또한 개체들과 동떨어져 존재하는 어떤 것이었다. 또한 개체들은 이데아를 분유(分有)하기 때문에 그 개체들 속에서 이데아가 발견될 수 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독자적 사상을 입안한 후부터 플라톤의 이데아론을 비난할 수밖에 없었다. 특히 그는 이데아들이 실재하는 개체들로부터 떨어져 존재한다는 생각을 인정할 수 없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도 보편자들이 존재하며 그것들이 단순한 주관적 관념 이상의 것이라는 사실에 동의하였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는 보편 개념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학적 지식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하나의 유(類) 안에 있는 모든 구성 분자들을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는 방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면 그것은 존재하지 않는 것과 다름없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과학적 지식을 효과적으로 만드는 것은 그것이 대상들의 종류(예를 들면 어떤 형태의 질병)를 발견할 수 있으며 따라서 한 개체가 이 종류에 속할 때 그와 관련된 다른 개체들도 가정될 수 있다는 점에 있다. 그러므로 이 보편자들은 단순한 정신적 허구나 상상이 아니라 객관적인 실재를 갖는 어떤 것이어야 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그것들의 실재는 개체들 그 자체 내에서만 발견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묻기를 "보편적 형상들이 완전히 분리된 채 존재한다는 가정에 의해 무슨 목적이 달성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일 그렇게 존재한다면 이는 사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들뿐이다. 왜냐하면 만물(개체들과 그것들의 관계를 포함하는)은 "현상의 세계에도 존재함으로써" 두 배(현실계와 이데아계)로 늘어나게 되기 때문이다. 더욱이 아리스토텔레스는,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사물들을 더 잘 인식하는 데에는 도움을 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데아들은 다른 사물들에 대한 지식에도 결코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비판은 "이데아는 운동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현상으로 나타난 사물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을 줄 수 없다." 왜냐하면, 사물은 운동으로 충만해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이데아는 비물질적이기 때문에 우리가 감각적으로 지각하는 대상을 설명할 수 없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는 사물이 이데아를 "분유(分有)한다"는 설명도 만족스러운 것이 될 수 없었다. 결국 그는 "그것들이 이데아이며 다른 사물들이 그것들을 분유한다는 주장은 시적(詩的)인 비유이며 말장난일 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우리가 어떤 특정한 사물을 묘사하기 위해 질료와 형상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우리는 어떤 사물의 재료와 그것으로 만들어진 것을 구분해서 생각할 수 있다. 즉 어떤 사물의 재료로서의 질료는 그것이 한 사물로 만들어질 때까지 형상을 갖지 않은 채로 존재하지 않을까 하는 의문을 가질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리는 어느 곳에서도 "제 1 질료" 즉 형상이 없는 질료로서의 사물을 발견할 수 없다. 대리석으로 비너스의 상을 조각하려는 조각가는 언제나 울퉁불퉁한 대리석이나 매끈한 대리석, 즉 이 대리석이나 저 대리석을 선택하여 작업을 한다. 즉 그는 형태가 없는 대리석을 선택할 수 없다. 그가 작업하는 덩어리는 이미 형상과 질료가 결합되어 있는 덩어리이다. 그러나 그 조각가가 대리석을 다른 형상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사실은 또 다른 문제를 야기시킨다. 어떻게 한 사물은 다른 사물로 될 수 있는가? 즉 변화의 본질은 무엇인가?




          4) 변화의 과정

우리를 둘러싼 세계에서 우리는 사물들이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음을 발견한다. 변화는 인간 경험의 기초 사실들 가운데 하나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서 변화라는 단어는, 운동, 생성, 소멸, 발생, 변조 등을 포함하는 많은 사실들을 의미한다. 이 변화들 중 일부는 자연적이며 나머지는 인간의 기술의 산물이다. 사물들은 항상 새로운 형상을 취한다. 거의 언제나 새 생명이 태어나고 새로운 도시가 건립되거나 소멸한다. 변화는 항상 새로운 발생을 내포하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에 관해 몇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우리는 어떤 사물에 관해서도 4 가지 질문을 할 수 있다고 한다. 즉 1) 그것은 무엇인가? 2) 그것은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3) 그것은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는가? 4) 그것은 어떤 목적을 위해 만들어지는가? 이 질문에 대한 4 가지 대답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원인들이다. 현대적 의미에서의 원인(cause)이라는 단어는 결과에 선행하는 어떤 사건을 지칭하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이 단어를 설명이라는 의미로 사용하였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의 네 가지 원인들은 만물의 전체적 설명을 위한 폭넓은 형식이요, 뼈대였다. 예를 들면, 이 네 가지 원인들은 1) 입상(立像) 2) 대리석으로 3) 조각에 의해 4) 장식을 위해, 같은 것들이다. 인간의 기술에 의해 이루어진 대상들 이외에도 자연에 의해 산출되는 사물들도 존재한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에 있어 자연은 이성적인 의미에서는 목적들을 갖는다. 이러한 이유에서 씨앗은 싹이 트고, 뿌리는 땅 속으로 내려가며, 식물들은 성장한다. 이러한 변화의 과정 속에서 이 모든 것들은 "목적들 - 분명한 기능이나 존재의 방식 -"을 지향한다. 그러므로 자연에 있어서의 변화도 동일하게 4가지 요소를 갖는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네 가지 원인들"은 1) 어떤 사물이 "무엇"인가를 결정해 주는 "형상인(形像因)" 2) 사물을 구성해 주는 "질료인(質料因)" 3) 사물을 만들어 주는 "작용인(作用因)" 4) 사물이 만들어진 "목적인(目的因)"과 대응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생물학자의 눈으로 자연을 관찰하였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활동"이었다. 만물은 운동 속에 생성과 소멸의 과정과 함께 있었다. 그에게 재생의 과정은, 변화를 시작한 만물에 내재하는 힘을 증명해 주는 훌륭한 예였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다음과 같이 원인들을 요약하였다. "생성하는 모든 사물은 어떤 작용인(作用因)에 의해 또는 어떤 사물로부터 생성하며 어떤 사물로 된다." 이러한 생물학적 관점으로부터, 그는 형상과 질료가 결코 분리된 채 존재하지 않는다는 자연의 생각을 세련시킬 수 있었다. 즉 변화란 형상 없는 질료나 질료 없는 형상으로부터 결코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반대로 변화는 이미 형상과 질료의 결합인 어떤 것 안에서 발생하며 새로운 다른 어떤 것으로 되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5) 가능태(可能態)와 현실태(現實態)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만물은 변화의 과정 속에 포함된다. 각각의 사물은 힘을 잠재하며 그 힘은 그 사물의 형상이 그것의 목적으로 설정했던 것을 실현한다. 만물 속에서 "목적"을 향해 나아가려는 역동적인 힘이 존재한다. 이러한 노력 중에는 외적인 대상을 지향하는 것도 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집을 짓는 경우이다. 그러나 내적 본성에 함유된 목적들을 이루어 가려는 노력들 역시 존재한다. 인간이 사유를 통해 인간으로서의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는 경우가 그 좋은 예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어떤 사물 자체가 함유된 목적을 그 사물의 엔텔레키(entelechie, 가장 완전한 현실성)라고 칭했다. 만물은 자신이 엔텔레키를 갖는다.

  사물이 목적을 갖는다는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가능태(可能態 : potentiality)와 현실태(現實態 : actuality)를 구분할 수 있게 해주었다. 이러한 구분은 변화와 발전의 과정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만일 도토리의 목적이 나무가 되는 것이라면, 어떤 의미에서 도토리는 잠재적인 한 그루의 나무이다. 그러므로 변화의 궁극적인 양태는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변화이다. 그렇지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사실은, 아리스토텔레스가 현실태를 가능태에 선재하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점이다. 즉 비록 현실적인 어떤 사물은 가능태로부터 나오지만, 우선 현실적인 어떤 사물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가능태로부터 현실태로의 변화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소년은 잠재적인 어른이다. 그러나 그러한 가능태를 가진 소년이 존재할 수 있으려면 우선 현실적인 어른이 선재해야 한다.

   자연의 모든 사물은 소년과 어른, 도토리와 도토리나무의 관계와 유사하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존재의 다양한 수준들을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만일 만물이 변화와 생성 소멸의 과정 중에 있다면 만물은 가능태들을 함유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가능태가 존재하기 전에 현실태가 존재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는 순수한 현실태로서의 최고 존재 개념을 필연적으로 수용하게 되었다. 변화는 일종의 운동이기 때문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가시적 세계를 운동 중의 사물들로 구성된 어떤 것으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변화의 한 양태로서의 운동은 가능태를 내포한다. 그러므로 잠재적으로 운동 중에 있는 사물들은 현실적으로 운동 중에 있는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지지 않으면 안된다. 결국 아리스토텔레스는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부동의 동자(the unmoved mover)를 내세우지 않을 수 없었다.




          6) 부동(不動)의 동자(動者)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있어 운동은 운동이 시작했던 "시간"에 까지 추적될 수 있지만 부동의 동자가 "제 1 동인(動因)"은 아니었다. 또한 그는 부동의 동자를 신학적 의미에서의 "창조자"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운동이나 변화의 발생을 설명해 주는 유일한 방법은 현실적인 어떤 것이 모든 가능적인 것에 "논리적으로" 선행해야 한다는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변화는 현실적인 어떤 것을, 다시 말해, 가능태가 섞이지 않은 "순수한" 현실태를 전제해야 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따르면 부동의 동자는 힘을 발휘한다는 의미에서의 작용인(作用因)도 아니며 "의지"를 표현하는 것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위들은 가능태를 전제하기 때문이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부동의 동자는 세계에 대해 사유하거나 세계에 목적을 부여하는 신적(神的) 존재라고 생각하지 않았으며, 어떤 의미에서 그것은 아무 것도 알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것은 운동을 설명해 주는 하나의 방식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어떤 종류의 존재도 아니기 때문이다.

  자연은 개개의 엔텔레키를 실현하려는 노력으로 가득 차 있다. 만물은 각기 자신의 가능성의 실현을 지향한다. 그 "목적"은 완전한 나무가 되는 것일 수도 있고, 완전히 선한 인간이 되는 것일 수도 있다. 이러한 노력의 총체는 대규모의 세계 질서의 과정이며, 따라서 모든 실재는 변화의 과정, 다시 말해 가능태들로부터 그 가능태들의 궁극적 완전화로 진행하는 과정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 포괄적이며 일반적인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동자를 운동의 "이유"나 "원리"로 채택하였다. 이러한 이유에서 그는, 그것을 현실태이며 어떤 가능태도 내포하지 않으며, 운동의 "영원한" 원리라고 이해하였다. 또한 부동의 동자를 통한 운동의 설명은 영원한 활동을 내포하기 때문에 사물의 세계가 진행 중에 있지 않았을 때에는 결코 "시간"도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아리스토텔레스는, 시간 내에 "창조"가 존재한다는 주장을 부정하였다. 비록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문장들 속에는 명백히 종교적이며 신학적인 측면도 존재하지만, 부동의 동자에 관한 그의 사상은 종교적이라기보다 과학적이며 논리적이다.

  그렇지만 아리스토텔레스는 그것을 비유적인 표현으로 설명할 수밖에 없었다. 어떻게 부동의 동자가 운동의 "원인"일 수 있는가를 설명하면서, 그는 그것을 한 명의 사랑 받는 사람과 비교하였다. 사랑 받는 사람은, 사랑의 대상이 됨으로써만 사랑하는 사람을 "움직인다." 즉 강제에 의해서가 아니라 매력에 의해서 움직이는 것이다. 좀더 기술적인 방식으로,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동자를 "형상"으로써, 세계를 실체로서 간주하였다. 그는 자신의 4 원인론(原因論)에서 부동의 동자를 "목적인"이라고 생각하였다. 왜냐하면 어른의 "형상"은 소년 속에 존재하며, 소년의 변화 과정은 하나의 "최종적"이며 자연적인 "목적"을 지향하기 때문이다. 간단히 말해 부동의 동자는 목적인(目的因)이다. 한편, 목적인으로서의 부동의 동자는, 세계와의 관련 속에서는 "작용인(作用因)"이 된다. 매력에 의해, 갈망되고 사랑받음에 의해 자연적인 목적들을 향한 노력을 고무함에 의해, 그것의 작용은 영원히 지속된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에는 세계의 운동 및 내재적 형식에 관한 무의식적인 원리가 존재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부동의 동자였다. 그것은 특히 13세기에 아퀴나스에 의해 기독교의 신(神)을 철학적으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도구가 되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동자는 순수 오성, 순수 이성(nous)이다. 한편 그것은 최상을 사유해야 하기 때문에 "그 자체를 사유하며... 그것의 사유는... 모든 영원성을 총괄하는... 사유에 대한 사유이다." 그렇지만 그러한 "신(神)"은, 인간의 모든 일까지도 포함하게 되는 종교적인 신이 아니라 단지 세계 내에 편재하며 세계에 하나의 지적 질서를 이룩하는 존재에 지나지 않는 것이어야 했다. 최소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렇게 신념하였다.



오랜만에 손을 놓고 있던 [철학과 삶]의 서양철학사를 정리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석서를 뒤적이며, 내가 사상하는 바의 많은 점이 아리스토텔레스의 생각과 닮아 있음을 발견하고 놀랐다. 비록 구체적이고 다양한 측면에서 그는 나와 다르지만 총체적인 줄기에서는 흡사한 면이 많고 또 그런 경향을 전개하였다는 사실이 2500년의 거리를 넘어 그와 나의 계보에 뿌려졌다. 서구 문화는 기본적으로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해 이미 설계되어진 바였다. 그들의 지적 지평 위에 서구의 역사는 참여하였고 의식과 실천으로서의 삶을 선도하여 왔다. 철학적 사유는 인간의 지평 위에 빛나는 불기둥과 같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모든 이의, 모든 역사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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