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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인을 자처했던 soph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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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315회 작성일 10-08-03 15: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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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무의 씨앗을 뿌린 이들

기원전 5세기부터 4세기까지 아테네를 중심으로 출현했던 소피스트들은 자신들을 지식인이라 자처했으며 그 중 가장 유명했던 인물은 프로타고라스와 고르기아스, 그리고 트라시마쿠스라는 이방인들이었다. 이들에 대해 각각 다른 장으로 구성하려 했으나 그들의 철학적 내용이라는 것을 서양철학사의 각 단편으로 취급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판단에 따라 그들을 하나의 단편으로 묶어 함께 기술하게 되었다.

   프로타고라스는 트라키아로부터, 고르기아스는 시실리로부터, 트라시마쿠스는 켈세돈으로부터 온 이방인이었기 때문에 아테네의 사고 방식과 관습에 대해 참신한 질문을 제기할 수 있었다. 소피스트들은 서로 다른 습속을 지닌 다른 여러 나라에 살았을 뿐 아니라 다양한 문화적 현상에 근거한 많은 지식을 수집하고 있었다. 그들은 그리스의 문화적 토양에 대해, 그리고 인간 본성에 대해 좀더 신중한 태도, 즉 인간이 지식을 획득하는 방식이나 인간이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방식에 대해 좀더 신중하게 고려해야 한다는 판단을 제공하였다.

   소피스트들은 실용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었다. 페리클레스 치하의 아테네 민주주의라는 상황은, 그들의 실용적인 기술이 적절하게 사용될 수 있었으며, 그것은 그들이 지닌 화술(話術) 및 산문과 문법에 대한 서로간의 경쟁심이 작용한 결과이기도 하였다. 페리클레스 치하에서 과거의 귀족 정치는 민주 정치로 대치되었고, 이는 자유 시민들로 하여금 정치적 토론을 유발함과 아울러 사회적 활동을 강화하는 경향을 갖게 하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아테네 지식인은 귀족주의적 교육을 받아온 탓에 민주주의에 적응하는 일에 서툴렀으며, 적절하게 대응하지 못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의 교육이 가계적 전통 위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종교, 문법, 시(詩), 예술과 법률, 수사(修辭) 등과 같은 보다 세련된 이론적 교육이 전혀 없었다. 소피스트들은 이러한 문화적 공백 상태에 침투하여 새로운 사회적 교육에 대한 수요를 창출함과 동시에 그들의 절박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었다. 그들은 시민의 대변자 또는 교사가 되었으며 새로운 교육의 주요 기반이 되었다. 특히 그들은 수사(修辭)의 기술과 설득의 기술을 가르치는 데 전념했고, 그러한 기술은 민주 사회 아테네에서 지위 상승을 욕망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필수 조건이 되어갔다.

  소피스트들의 명성은 처음에는 대단히 우호적이었음에 틀림없었다. 그들은 시민들이 분명하고 정확한 어법을 통하여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도록 교육하였으며, 명료한 표현과 논리적인 설득을 통하여 민주사회에서의 참여를 강화하는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었다. 자신과 의견을 달리하거나 어떤 이해관계의 반대자의 주장에 대해 그 오류를 정확히 지적하고 그로 하여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는 행위는 민주사회에서 필연적으로 부각될 수밖에 없었으며, 그러한 기술에 둔감했던 그리스인은 너나없이 소피스트에게 달려가 그러한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수사학(修辭學)은 선용될 수도 있고, 악용될 수도 있는 기술이라는 것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명백해졌다. 설득력을 소유한 자는, 그 힘을 난제를 해결하거나, 자신의 특별한 관심을 가진 부분에 대해, 또는 법정에서 불리한 증거를 타파하는 일에, 혹은 의문의 여지가 많은 철학적 명제를 주장하는 데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스인들은 어떠한 진상의 다른 측면을 변호할 수 있도록 소피스트들이 변호인을 교육시키는 데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피소자도 기소자가 그에 대해 사용하는 기술과 마찬가지의 기술을 자신의 변호를 위해 마땅히 사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소피스트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많은 지식의 배후에 그것들에 대한 회의주의를 지니고 있었으며, 그것은 이 문화에서 존중되는 사항도 다른 문화에서는 전혀 존중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그들에게 당연한 것이기도 하였다. 그들에게 진리는 일종의 상대적인 진리였으며, 가치는 그 가치가 입증될 수 있는 환경에서 비로소 가치가 될 수 있을 뿐 그렇지 못한 상태에서는 가치로 여겨지지 않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러므로 소피스트들은 어떻게 악한 것을 선하게 보이도록 만들 수 있는가, 혹은 정의롭지 못한 명분을 어떻게 정의로운 것으로 판단될 수 있도록 하는가와 같은 기술을 젊은이들에게 가르친 책임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그들에게는 상류계급의 젊은이에게 전통적인 관습과 종교 및 윤리적 견해에 대해 비판적이며 파괴적인 분석 태도를 교육했다는 비난을 면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그들에게 결정적인 오명을 지운 것은 그들이 그들의 가르침에 대한 대가를 요구하면서부터였다. 초기의 소피스트들은 자신의 능력이나 지적 견문을 보급하는 일에 따르는 명예를 소중하게 여겼으며, 그를 위해 그리스 시민을 교육하기를 원하였으나 점차 그 교육에 대한 금전적 요구를 필요로 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마침내 자신의 강의에 대한 적정한 대가를 지불할 수 있는 부자들을 찾기에 혈안이 되어갔다. 오늘날의 미국법정에서 유명세를 지닌 변호인들이 천문학적 금액을 주머니에 넣고 의뢰인을 위해 지략적으로 연기하는 모습을 보면 왜 소피스트들이 부정직한 지식인으로 전락하지 않을 수 없었는가를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도 젊은 시절 소피스트 밑에서 공부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그러나 그는 가난 때문에 단기 과정을 이수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소크라테스는 소피스트에 대해 좋지 않은 시각을 지니고 있었을 것이며, 특히 플라톤은 소피스트의 금전 수수행위에 대해 "영혼의 상품을 파는 상점의 주인들"이라고 격렬하게 비난하기도 하였다.

 

 


프로타고라스 (Protagoras B.C 500 - 430년경)


   아테네에서 활동하던 소피스트 중에 프로타고라스는 최고령자였고 여러 면에서 영향력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인간은 만물의 척도이다. 존재하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는 것의,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의 척도이다."라는 명제로 잘 알려져 있다.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그의 명제는, 인간이 어떤 사물에 대해 획득할 수 있는 모든 지식은 그의 능력들에 의해 제한된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신(神)들에 대해, 나는 그들이 존재하는지 존재하지 않는지 알 수 없을 뿐이다. 그들의 모습이 어떠한지도 알 수 없다. 왜냐하면 우리에게는 지식을 방해하는 여러 요소들, 예를 들면 주제의 불명료성이나 인생의 유한성과 같은 요소들이 있기 때문이다."

  프로타고라스에 의하면, 지식은 우리의 다양한 지각들에 의해 제한되며, 이 지각은 사람마다 다르다. 두 사람이 동일한 대상을 관찰할 경우에도 그 양자의 감각들은 서로 다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그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입장을 갖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동일한 바람도 한 사람에게는 차갑게 느껴질 수 있고, 다른 사람에게는 따뜻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 바람이 차가운가 차갑지 않은가는 간단하게 대답될 수 없다. 그러므로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명제는, 우리의 지식은 우리가 지적한 것에 의해 척도가 된다는 말이며, 따라서 모든 개인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사물들을 지각하게 하는 어떤 것이 각 개인마다 존재한다면, 누구의 지각이 옳고 누구의 지각이 그른가를 검증할 규준이 없다는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의 견해로는, 인간이 그들의 감관을 통해 지각하는 대상들이란, 여러 사람들이 그 대상에 속하는 것으로 지각하는 속성들을 모두 소유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에서 어떠한 사물의 '참된' 본성을 발견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한 사물은 그것을 지각하는 사람들만큼이나 많은 성격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현상'과 '실재'를 구분할 방도도 없다. 바람이 차갑다고 말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실제로 차가운 것이나 다른 사람에게는 그것이 따뜻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것이므로 항상 차갑게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인식론에 입각할 때 과학적 지식을 수립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다. 각각의 관찰자들이 지니고 있는 차이점들은 그 개인들이 사물을 서로 다른 눈으로 보게 하기 때문에 자연의 실재에 대한 파악은 불가능하다고 생각된 것이다. 그러므로 프로타고라스는 지식이란 개인에게 상대적인 것이라고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윤리의 문제에 접했을 때에도 프로타고라스는 도덕적 판단이 상대적이라고 주장했다. 물론 그는 법률에는 사람들 사이의 도덕적 질서에 대한 각 문화의 일반 의지가 담겨져 있음을 인정했다. 그러나 그는 모든 문화권의 사물들이 행동에 적용될 수 있는 자연법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그는 자연과 관습을 구분했으며, 법률과 도덕률은 자연이 아니라 관습에 근거한다고 주장하였다. 각각의 사회는 그 자신의 법률과 도덕을 갖는다. 또한 참과 거짓을 판단하는 기준은 그 법률과 도덕의 건전성에 관한 상식적 관찰 이외에 다른 어떤 것도 될 수 없다. 그러나 프로타고라스는 이러한 도덕적 상대주의를 극단적인 입장에까지 몰고 가지는 않았다. 즉 그는 도덕적 판단은 상대적이기 때문에 무엇이 도덕적인가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은 모든 개인들이라고까지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에 그는 보수적인 입장을 취함으로써, 국가는 법률을 제정했고, 이 법률은 만인에 의해 수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 제정하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었다. 각각의 사회들은 서로 다른 법률을 가질 수 있고, 한 국가 내에서의 개인들도 서로 다른 법률을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보다 훌륭한 법률은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들은 서로 다를 뿐이다. 그러므로 평화롭고 질서 있는 사회의 구현을 위해, 모든 사람은 그들의 전통이 신중하게 키워온 관습, 법률, 도덕률들을 준수해야 한다. 종교 문제에 있어서도 프로타고라스는 비슷한 견해를 취했다. 즉, 그는 신들의 존재와 본성을 확실히 알 수 없다고 해서 신들에 대한 숭배를 금지해야 한다고는 주장하지 않았던 것이다.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는 기이하게도 보수적인 결론으로 끝났다. 젊은이들은 그들의 사회의 전통을 수용하고 유지하기 위해 교육되어야 한다. 왜냐하면 그 전통이 진리이기 때문이 아니라, 사회의 안정을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프로타고라스의 상대주의는 참된 지식을 발견할 수 있다는 아테네적 자신감을 크게 파괴했음이 틀림없으며, 그 때문에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은 그의 이러한 회의주의를 크게 비판했던 것이다.

 

 


고르기아스 (Gorgias B.C 483 - 376)

  고르기아스는 그의 고향인 시실리의 레온티니 시(市)로부터 외교관의 자격으로 기원전 427년에 아테네로 왔다. 그는 진리에 대해 매우 급진적인 견해를 취했고, 따라서 철학을 포기하고 수사학의 실천과 교육으로 전향했다. 이러한 급진적 견해는 프로타고라스의 경우와 일치하지 않았다. 만물은 참되며 따라서 진리란 개인과 환경에 따라 다르다고 한 프로타고라스의 주장과는 달리, 어떠한 진리도 존재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머리카락을 세로로 정교하게 자르듯이 그는 자신의 생각을 다음과 같은 논리로 표현했다. 1)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 2) 만일 어떤 것이 존재한다 해도 그것을 파악할 수 없다. 3) 그것을 파악한다 해도 그것을 전할 수 없다. 이러한 세 번째 명제를 통하여 그가 주장하려 했던 것은, "우리는 단어를 전달하지만, 단어란 단지 상징이나 기호이며, 상징과 그것이 상징하는 사물 자체와는 동일하지 않기 때문에 우리가 무엇을 전달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처럼 면밀한 추론 방식으로 고르기아스는, 그가 자신의 세 명제 모두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최소한 자신의 추리가 그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사용한 어떠한 추리에 못지 않을 만큼 논리적이라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그가 확신하게 된 것은, 믿을 만한 지식, 또는 확실한 진리란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철학을 포기한 고르기아스는 수사학으로 전향하여 그것을 완벽한 설득의 기술로 완성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는 심리학적 지식과 최면술에 의한 일종의 기만술을 발전시켰다고도 전해진다. 그는 일찍이 진리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을 내림으로써, 실용적인 목적을 위해 자신이 선택한 모든 것을 사용할 수 있다고 믿었으며, 그와 같은 행위를 정당한 것으로 취급하였다.

 

 


트라시마쿠스 (Thrasymachus)

  플라톤의 [국가론]에서 트라시마쿠스는 소피스트로 묘사되고 있다. 그는 대담하게 불의(不義)가 정의로운 생활에 도움이 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불의를 성격의 결함으로 간주하지 않았고, 오히려 불의한 사람을 성격과 지성에 있어 매우 우월한 사람으로 간주하였다. 그는 실제로 "불의도 쓸모가 있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소매치기처럼 하급의 수준에서는 밥벌이를 한다는 점에서 그러하지만, 특히 쓸모가 있는 것은, 불의를 완전무결한 상태로 고양시키려는 사람이나 국가의 지배자가 되려는 사람의 경우가 더욱 그러했다. 그에 의하면 정의는 얼간이에 의해 추구되며, 인간을 약하게 한다고 한다. 트라시마쿠스는 인간은 적극적으로 무한한 자기 주장의 형식으로 자기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정의를 강자의 이익이라고 생각했고 "힘은 정의롭다"고 믿었다. 그에 의하면 법률은 지배적인 편의 이익을 위해 만들어지는 것으로 이 법률은 정의로운 것이 무엇인가를 규정하는 것이다. 거의 모든 국가에서 "정의"는 비슷한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정의"는 권력을 가진 편의 이익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트라시마쿠스는 이렇게 말할 수 있었다. "정의로운 것은 어디서나 비슷한 것, 즉 더 강한 편의 이익이라는 결론은 매우 건전한 것이다."


  도덕성을 권력에 귀속시키려는 현상은 소피스트들의 진보적 급진주의의 불가피한 논리적 결과였다. 그 급진성은 소피스트들을 진리와 윤리에 대한 허무주의적 태도로 이끌었으며, 소크라테스의 노력은 바로 그러한 소피스트들의 논리적 모순을 폭로하고, 진리의 개념을 재정립하여 도덕적 판단을 확고하게 하려는 점에 있었다.

 

 


간략한 논평 -

  소피스트들은 민주적 사회에서의 지식을 보급하는 데 대단한 반향과 영향을 미쳤음에 틀림없으나, 그들이 지닌 회의주의와 상대주의, 그리고 일종의 허무주의적 성향으로 하여금 세속화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에게는 사실상 진리라는 것은 거짓이었으며, 눈속임이거나 하나의 기능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들은 단지 가치라는 문제에 있어 그것이 이해관계에 의해 파생하는 결과물이거나 그 현상일 뿐이라는 것을 신념하고 있었으며, 그러한 시각을 통해 바라본 아테네는 지식과 정의를 옹호하는 산실이기보다 자신의 그것들을 통해 외부세계를 지배하려는 하나의 헤게모니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추구하였던 것은 무한이나 실재하는 존재에 관한 논제가 아닌 현상태에서의 적실한 기능이었으며, 전통적이고 근원적 문제에 관한 부정적인 경향이었다. 그들의 이러한 역할과 성능은 결국 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혁신되지 않으면 안 되는 사회적 문제로 발전하여 소크라테스를 위시한 이 후의 철학자들로 하여금 확실하고 믿을 만한 지식과 진리, 그리고 정의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을 철학적 사명으로 여기게끔 하였는데, 그것은 어쩌면 소피스트 자신들이 뿌린 씨앗의 발화였으며, 그들이 그토록 부정했던 신뢰할 가치가 있는 진리와 정의를 재촉함으로써 회의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한 그들의 믿음을 파괴하는 결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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