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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내에게 미리 쓰는 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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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191회 작성일 11-04-28 18: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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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내가 죽었다. 조금 더 일찍 죽어주지 못해 미안하다. 화장실 가서 많이 웃었니? 농담이야. 너는 원래 현명하고 씩씩한 사람이라서 다른 여자들처럼 울고 불고 하면서 몸과 마음을 상하게 하진 않을 거라 믿는다.

 고백할 게 있다. 몰래 마이너스통장 하나 만들었다. 다른 데 쓴 건 없다. 내가 도박이나 마약 하는 것도 아니고 주식에 손댄 것도 아니다. 따로 과소비를 한 것도 없다. 그저 한 달 한 달 살다 보니 그리 되었다. 어쩌다 오뎅집 같은 곳에서 술 마신 거랑 매달 대여섯 권 책 사 본 게 전부다. 그런데도 늘 마이너스였다. 내 인생이 온통 마이너스였다.

 또 있다. 언젠가 아는 이로부터 책 선물을 하나 받았다. ‘한국의 춘화’, 말하려고 했는데 어쩌다 보니 타이밍을 놓쳤다. 아주 야하거나 이상한 것은 아니다. 보면서 얼굴이 조금 화끈거리기는 했다. ‘녹색평론있는 책장 속에 숨겨두었다. 잠 안 오는 밤에 보도록 해라.

 하나 더 있다. 말하지 않고 블로그를 했다. 2003 8 1일부터 했으니 만 4년이 넘었다. 거기서 내 아이디가진흙거울이다. 내가 죽었다고 알리고 블로그를 닫아주기 바란다. 나도 없는데 블로거들이 찾아와서요즘 뭐하세요?” “포스트를 통 안 올리시네요하면서 안부 코멘트 남길 것을 생각하면 가슴이 아프다.

 우리는 참 일찍 만났고 일찍 결혼했다. 고생 시킨 거 안다. 미안하다. 솔직히 나는 결혼생활을 할 수 있는 정도의 책임감과 인격을 갖춘 인간이 못 된다. 어린 나이에 결혼이 뭔지도 모르고 무턱대고 결혼했다가 네 인생 작살낸 거 정말 미안하게 생각한다. 밖으로만 돌고 술 많이 마시고 사람 만나는 거 좋아하고 집에 늦게 들어가는 일로 자주 네 마음을 아프게 했다.

 나는 돈 버는 일에 통 소질이 없었다. 돈과 인연이 멀어 궁색했다. 나는 평생 돈과 불화했다. 나중에 호강 시켜준다고 했던 말 다 거짓말이었다. 내가 무슨 깜냥으로 돈을 번단 말인가.

 그 동안 내가 몇 권의 책을 썼는지 또 그 책들이 어느 정도 팔리는지 모르겠지만 책의 인세는 모두 네게 바치겠다. 어찌 보면 그것은 당연한 일이다. 언제나 나는 너를 팔아 글을 썼고 책을 냈으니까. 글감이 궁하거나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항상 네 얼굴을 떠올렸으니까. 얼마 되지 않겠지만 그래도 내게 재산이란 게 있다면 그것도 몽땅 네게 바치겠다.

 나 죽고 나면 너 혼자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 그러나 재혼하는 것도 좋겠다. 만일 재혼할 생각이 있다면 이왕이면 내가 다니던 또오에 가입해라. 특별 할인은 해주지 않겠지만 아무래도 더 신경 써 줄 것이다. 어련히 알아서 잘 하겠지만 겉만 번지르르한 사람보다 실속 있는 남자를 만나라. 사진, 생각보다 중요하다. 돈이 좀 들더라도 헤어샵 가서 머리도 하고 화장도 하고 스튜디오에서 제대로 찍으라. 괜찮은 남자 만날 확률이 배로 높아진다.

 믿지 않겠지만 나는 네 흰 머리를 좋아했다. 네가 항상 염색해서 네 백발의 전모를 보지 못하고 가는 게 좀 아쉽다. 나는 웃는 네 모습을 좋아했다. 그러니 울지 말고 많이 웃어라. 어디서 읽었는데 사람이 70세까지 산다면 일생동안 오십사만번 웃고 삼천번 운다더라. 울어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먼저 180번은 웃은 다음에 울도록 해라.

 화장이 좋을 것 같은데 그것도 화석연료가 많이 들어 환경문제를 일으킨다고 하니 어찌해야 옳을지 모르겠다. 아무튼 무덤 같은 건 일체 필요 없다. 무슨 기일 같은 걸 남겨 기념하지 마라. 세상에 기념할 게 없어 사람 죽은 날을 기념한단 말인가.

 장례도 간단하게 했으면 좋겠다. 사람이 나고 드는 데 무슨 그리 복잡한 절차와 돈이 든단 말인가. 내 친교가 워낙 좁아서 알려 봐야 문상 올 사람도 많지 않을 것이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만 알리면 좋겠다. 큰 소리로 곡을 하는 것도 금한다. 너무 슬퍼하는 사람도 쫓아내라.

 네겐 불행이었겠지만 나는 너를 만나 다행이었다. 네게 감사한다. 진심으로 사랑했다. 만약 다음 생이라는 게 있어서 우리가 다시 태어난다면 그때도 나는 너를 만나 너와 결혼해서 같이 살고 싶다. 그 다음 생에도, 또 그 다음 생에도. 이렇게 말하면 너무 내 생각만 하는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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