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재세시, 부처님의 하루일과는 어떠했을까? 어느 날의 오전 풍경을 들여다보자. 부처님은 사위국 기수급고독원에 제자 1250인과 함께 계셨다. 마침 공양하실 때가 되어 가사를 입으시고 발우를 드시고 사위성에 들어가 걸식하셨다. 차례대로 걸식하고 본래의 처소로 돌아와 공양을 드셨다. 가사와 발우를 거두고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셨다. 이 풍경은 금강경의 '법회가 열리게 된 동기'에 묘사된 그대로다. 금강경의 첫 부분은 이처럼 부처님의 지극히 일상적인 하루 풍경으로 시작되고 있다. 걸식으로 밥을 드시고 발우를 거두시고 발을 씻으시는 모습을 눈에 그려보라. 그저 평범한 일상을 제자들과 더불어 고요히 행하고 있는 부처님의 모습을. 만인의 스승으로 존경받았던 부처님이 걸식을 하셨다는 것은 금강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무상(無相), 공(空)사상의 진수를 일상에서 그대로 담아낸 행위라 할 것이다. '나'라는 상을 여읜 자리에서 걸식은 그대로 진리의 표현이고 진수다. 그곳엔 만인의 존경을 받는 부처라는 상도, 걸식을 한다는 상도 없기에. 이야기는 다시 이어진다. 발을 씻으신 뒤 자리를 펴고 앉으신 그 때, 장로 수보리가 대중들 가운데서 일어나 법을 청하며 "깨달음을 이루려는 마음을 낸 사람은 어떻게 안주하며 어떻게 그 마음을 항복받아야 합니까"라고 묻는다. 이는 수시로 들락날락, 오르락내리락 하는 마음을 어떻게 안주시킬 것이며, 복닥복닥 끓어오르는 마음을 어떻게 항복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한마디로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이며 세상을 바르게 보는 것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대답에 귀가 솔깃해질 수밖에 없다. 금강경이 시대를 불문하고 널리 읽히며 사랑받는 까닭이다. 금강경 읽는 소리를 듣고 출가했던 중국 선종의 6조 혜능대사가 '누구든지 금강경을 독경하고 심오한 뜻을 바르게 깨친다면 성불할 수 있다'고 일찍이 강조했다. 금강경이 선승들을 위시한 수많은 구도자들의 수행지침서로, 또 조계종단의 소의경전으로 불교의 나침반이 되어온 이유도 다르지 않다.
부처님과 수보리의 대화로 이어지는 금강경은 '내가 있다'거나 '상대가 있다'거나 '세상이 있다'거나 '부처가 있다'거나 하는 일체의 어리석은 견해를 단박에 내려치는 벼락같은 깨우침을 담고 있다. 다이아몬드처럼 단단한 반야 지혜의 칼날이 상(相)을 가진 일체 존재의 허상을 예리하게 도려내고 깨뜨린다. '무아'라는 것이다. 나, 나의 것, 너, 자아, 영혼, 세상 등은 일시적 인연화합 즉 연기(緣起)로 실재하는 듯 보이지만 진실로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이다. 무상과 무아의 세계관으로 공의 세계를 들여다보도록 잘못된 견해를 끊임없이 바로잡아 주기 위해 반복적으로 설하고 있다. 반복하고 있다는 것은 견해를 바꾸는 일이 그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팔만대장경도 '내가 있고 상대가 있으며 세상이 있다'는 그릇된 상을 깨뜨리기 위한 무수한 반복과 간곡한 당부에서 나온 것이니 말해 무엇 하겠는가? 그 수많은 반복을 통해 말하고자 했던 대승불교의 핵을 담고 있는 금강경은 부처님 가르침의 요약본쯤이 될 것이다.
금강경이 담고 있는 세상의 실상을 보게 하는 안목은 시대와 분야를 아우르는 절대가치다. 그래서 금강경은 불자뿐 아니라 학자, 소설가, 시인, 경제인 등 다방면의 사람들이 공부하고 해설서를 내기도 한다. 경전 중에서도 유독 관심의 한가운데 있는 경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금강경이 담고 있는 가르침은 금강경이 최고의 경이며 절대가치라는 상마저 거부하니, 금강경을 읽고 있으면 한순간 길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 길을 잃었을 때, 문득 길이 보인다. 상을 여의었을 때, 문득 실상이 보이는 것과 같이. 정해학당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