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 본래 만물은 스스로 동일하니 인위적으로 가지런히 할 필요가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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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1,797회 작성일 11-11-08 14: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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心無其心 何有於觀
심무기심 하유어관
釋氏曰觀心者 重增其障
석씨왈관심자 중증기장
物本一物 何待於齊
물본일물 하대어제
莊生曰齊物者 自剖其同
장생왈제물자 자부기동
심무기심 하유어관
釋氏曰觀心者 重增其障
석씨왈관심자 중증기장
物本一物 何待於齊
물본일물 하대어제
莊生曰齊物者 自剖其同
장생왈제물자 자부기동
마음에 마음이랄 것이 없으면 무슨 관(觀)이 필요하겠는가? 불교에서 ‘마음을 관하는 것은 그 장애를 겹쳐서 더하는 것’이라고 했듯, 사물은 본래 일물(一物)이니 어찌 다시 가지런히 하는 것을 기다리겠는가. 장자가 제물(齊物, 만물을 가지런히 함)을 말한 것은 스스로 동일한(同) 것을 짐짓 갈라놓은 것이다.
“본래 만물은 스스로 동일하니 인위적으로 가지런히 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말은 장자가 말하는 제물론(齊物論)을 일견 비판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러나 장자의 제물론은 무위자연을 바탕으로 하고 있기에 역시 만물이 스스로 동일하다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장자는 「제물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옛사람의 지혜는 이미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지극한 경지였던가? 그들은 원래 우주의 시초에는 아직 사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이는 지극하고 지극해서 무엇 하나 덧붙일 수 없는 완벽한 경지였다.
그 다음엔 사물이 존재하긴 했어도 아직은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 다음엔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긴 했어도 옳고 그름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옳고 그름’의 논쟁이 있게 되자, 곧 도에 훼손이 있게 되었으며, 도가 훼손되자 그에 따른 사사로운 애착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완성이나 훼손이 과연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완성과 훼손이 있는 것은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연주했을 때고, 완성과 훼손이 없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을 때다. 이처럼 소문과 같은 명인(名人)도 거문고를 연주하면 거기에는 구별이 생기게 마련이다. 소문이 거문고를 잘 연주하는 것, 사광(師曠)이 북채를 세우고 가락에 귀를 기울이는 것, 혜시(惠施)가 책상에 기대어 말솜씨를 늘어놓는 것 등 이 세 사람의 재능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서 그 이름이 후세에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은 그것들을 너무나 좋아해서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뚜렷이 드러내 보이려고 한 점이다.
뚜렷이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기 때문에 혜시는 견백론(堅白論) 같은 어리석은 궤변으로 끝났고, 소문은 그 아들이 아버지의 기술을 이어받는 데 그쳤을 뿐 평생 완성한 적이 없었다.
이런 것을 완성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완성이 있는 셈이지만, 완성이라고 할 수 없다면 어떤 사물에도 완성은 없는 셈이다. 그래서 성인은 참된 도를 흐리게 하는 빛을 제거하려고 한다. 자기의 판단을 가하지 않고 평상시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 이것을 참된 밝음(明)에 의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옛사람의 지혜는 이미 지극한 경지에 이르렀으니, 얼마나 지극한 경지였던가? 그들은 원래 우주의 시초에는 아직 사물이 존재하지 않았다고 여겼는데. 이는 지극하고 지극해서 무엇 하나 덧붙일 수 없는 완벽한 경지였다.
그 다음엔 사물이 존재하긴 했어도 아직은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지 않았다. 그 다음엔 이것과 저것을 구별하긴 했어도 옳고 그름은 알지 못했다.
그러나 이 ‘옳고 그름’의 논쟁이 있게 되자, 곧 도에 훼손이 있게 되었으며, 도가 훼손되자 그에 따른 사사로운 애착도 생겨난 것이다. 그러나 완성이나 훼손이 과연 있는 것일까, 아니면 없는 것일까?
완성과 훼손이 있는 것은 소문(昭文)이 거문고를 연주했을 때고, 완성과 훼손이 없는 것은 소문이 거문고를 연주하지 않았을 때다. 이처럼 소문과 같은 명인(名人)도 거문고를 연주하면 거기에는 구별이 생기게 마련이다. 소문이 거문고를 잘 연주하는 것, 사광(師曠)이 북채를 세우고 가락에 귀를 기울이는 것, 혜시(惠施)가 책상에 기대어 말솜씨를 늘어놓는 것 등 이 세 사람의 재능은 최고의 경지에 이르러서 그 이름이 후세에까지 내려올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그들은 그것들을 너무나 좋아해서 평범한 사람들과는 달리 사람들에게 뚜렷이 드러내 보이려고 한 점이다.
뚜렷이 드러낼 수 없는 것을 드러내려고 하였기 때문에 혜시는 견백론(堅白論) 같은 어리석은 궤변으로 끝났고, 소문은 그 아들이 아버지의 기술을 이어받는 데 그쳤을 뿐 평생 완성한 적이 없었다.
이런 것을 완성이라고 한다면 우리에게도 완성이 있는 셈이지만, 완성이라고 할 수 없다면 어떤 사물에도 완성은 없는 셈이다. 그래서 성인은 참된 도를 흐리게 하는 빛을 제거하려고 한다. 자기의 판단을 가하지 않고 평상시의 자연스러움에 맡기는 것, 이것을 참된 밝음(明)에 의거하는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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