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근담 시적 영감은 언어로써 전달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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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2,019회 작성일 11-11-08 14: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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詩思在?陵橋上 微吟就
시사재파릉교상 미음취
林岫便己浩然 野興在鏡湖曲邊
임수편기호연 야흥재경호곡변
獨待時 山川自相映發
독대시 산천자상영발시의 사념(詩思)은 파릉(?陵)의 다리 위에 있으니, 나직하게 읊조리매 숲과 골짜기가 문득 스스로 호연(浩然)하고, 야성의 흥겨움(野興)은 경호(鏡湖)의 기슭에 있으니, 홀로 기다릴 때 산과 시내가 서로 비춘다.
시사재파릉교상 미음취
林岫便己浩然 野興在鏡湖曲邊
임수편기호연 야흥재경호곡변
獨待時 山川自相映發
독대시 산천자상영발시의 사념(詩思)은 파릉(?陵)의 다리 위에 있으니, 나직하게 읊조리매 숲과 골짜기가 문득 스스로 호연(浩然)하고, 야성의 흥겨움(野興)은 경호(鏡湖)의 기슭에 있으니, 홀로 기다릴 때 산과 시내가 서로 비춘다.
당나라 정계(鄭啓)는 시를 잘 지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물었다.
“재상은 요즘 새로운 작품이 있습니까?”
정계가 대답했다.
“시적 감흥이 파교(?橋)의 눈보라 속에 있는데, 당나귀 등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대자연의 훈도(薰陶)를 이탈하면 시적 취향이 솟아나기 어렵다. 장자는 「지북유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된 도를 아는 사람은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사람은 도를 모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성인은 말로 표현하지 않고 가르침으로 행하는 것이다. 도는 언어로 전달하여 얻을 수 없고, 덕은 인위적인 것으로 도달할 수 없다.
인(仁)은 인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의(義)는 분별을 일삼는 것이며, 예(禮)는 서로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생기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생기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생기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생기니, 예는 도의 허망한 꽃으로서 모든 혼란의 시작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닦는 자는 나날이 헛된 것을 줄이고, 그것을 줄이고 줄여서 무위에 이를 것이니, 무위이면 도리어 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기구(器具, 사물)가 되었으니, 만물의 근원으로 돌아가려 한들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재상은 요즘 새로운 작품이 있습니까?”
정계가 대답했다.
“시적 감흥이 파교(?橋)의 눈보라 속에 있는데, 당나귀 등에서 어떻게 얻을 수 있겠습니까?”
이처럼 대자연의 훈도(薰陶)를 이탈하면 시적 취향이 솟아나기 어렵다. 장자는 「지북유편」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참된 도를 아는 사람은 말하지 못하고, 말하는 사람은 도를 모르는 것이니, 이 때문에 성인은 말로 표현하지 않고 가르침으로 행하는 것이다. 도는 언어로 전달하여 얻을 수 없고, 덕은 인위적인 것으로 도달할 수 없다.
인(仁)은 인위적으로 사랑하는 것이고, 의(義)는 분별을 일삼는 것이며, 예(禮)는 서로 속이는 것에 지나지 않으니, 이 때문에 ‘도를 잃은 뒤에 덕이 생기고, 덕을 잃은 뒤에 인이 생기며, 인을 잃은 뒤에 의가 생기고, 의를 잃은 뒤에 예가 생기니, 예는 도의 허망한 꽃으로서 모든 혼란의 시작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도를 닦는 자는 나날이 헛된 것을 줄이고, 그것을 줄이고 줄여서 무위에 이를 것이니, 무위이면 도리어 하지 않음이 없게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요즘 사람들은 모두 하나의 기구(器具, 사물)가 되었으니, 만물의 근원으로 돌아가려 한들 어찌 쉬운 일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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