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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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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뽕킴 댓글 0건 조회 1,809회 작성일 10-08-17 2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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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에 태어난 아버지의 삶은 험난한 세파와의 전쟁이었다. 일제시대에 태어나 그 시절 누구나 그랬듯이 헐벗고 굶주린 유년시절을 보냈다. 20대에 발발한 6.25 전쟁 때에는 국군으로 입대해 수없이 많은 죽을 고비를 넘겼다. 아버지가 배속되었던 보병 7사단은 생존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전사자가 많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비 오듯 쏟아지는 총알도 피해가고, 옆에 떨어진 포탄이 불발탄이 될 정도로 억세게 ‘운 좋은’ 사나이였다.


 휴전협정을 반대하는 데모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고 한다. 눈만 뜨면 전우가 죽어나가는 판국에 휴전이던 종전이던 따질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고향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부모와 아내 자식이 초근목피로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아버지는 제대 후에는 풍비박산이 난 집안을 일으켜 세우느라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 했다. 할아버지, 할머니, 삼촌, 자식을 합쳐 10명이 넘는 가족의 생계가 그의 어깨에 달려 있었다. 쫓기듯 살아온 아버지의 삶이다 보니 여유를 부리며 인생을 즐길 틈이 없었다. 가시밭길 그 자체였다.

 한없이 존경스러운 아버지의 인생이지만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 삶의 무게에 지쳐서 그런지 너무 일찍 은퇴를 결심한 것이다. 오십대에 들어서면서 어느 정도 생활에 여유가 생겼는데도 아버지는 느긋한 삶 대신 스스로를 옭아매기 시작했다. 오로지 “늙으면 어찌될 것인가?”라는 생각에만 빠진듯했다. “늙고 병들어 자식에게 부담을 주면 안되는데...”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부모님은 인생의 후반기에 대해 옛날식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온 분들이었다. 일단 장수혁명으로 인한 ‘수명 보너스(life bonus)’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설사 오래 살 것을 알았다고 해도 착잡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몇 년 더 산들 무엇을 얻을 수 있겠는가. 그저 노년이 길게 늘어나는 것뿐인데.

 어느 날 아버지는 대전에서 25년 넘게 해오던 가업을 홀연히 접었다. 몇 년 후 아버지는 공교롭게도 말기 위암 선고를 받았다. 당시로서는 사형 선고였다. 낙심한 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을 맏아들과 살기로 하고 홀연히 대전에 있던 집과 땅을 처분해 짐을 쌌다. 아버지가 큰 아들이고, 큰 아들이 곧 아버지이니 재산을 내 것, 네 것으로 나눈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서울에 살던 큰 아들은 재산이 늘어서 좋았고, 아버지는 자신의 노후를 지켜줄 아들 곁으로 가니 더없이 든든했을 것이다. 그 당시 아버지가 서울로 떠나면서 남긴 말은 “죽더라도 맏아들 집에서 죽는다.”였다.


 그러나 따로 살던 부자(父子)와 고부(姑婦)간이 합쳐지면서 옛날에 없던 문제가 싹트기 시작했다. 모르긴 해도 불편한 점이 한 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 사이 아버지는 암과의 전쟁에서 승리해 완치선고를 받았다. 위암에 이어 심장 등 생사를 건 몇 차례에 걸친 대수술도 무사히 극복해냈다. 어머니 역시 큰 수술을 몇 번 받고, 병원 중환자실에서 6개월 투병 후 걸어서 나왔다.


 어느 날 큰 아들 부부는 자식 뒷바라지를 이유로 돌연 미국행을 선택했다. 맏아들이 떠나고 아버지는 가슴에 큰 상처를 입은 채 대전으로 돌아갔다. 자신의 분신과도 같았던 큰 아들과 살림을 합칠 때는 분위기가 좋았지만 다시 재산을 나눌 때는 고통이 따랐다. 대전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80대 중반의 부모님은 지금의 삶이 평생 가장 행복하고 여유롭다고 한다. 주식투자에도 적극적이다. 손실은 좀 입지만 치매예방에 주식투자만큼 좋은 약이 없다는 것이다. 아버지는 가끔 농담반 진담반으로 말씀한다. “이렇게 오래 살 줄 누가 알았겠어.....”
 아버지는 너무 빨리 자신의 수명을 예측하고, 인생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늙는다는 것은 곧 가족이나 남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농경시대의 잣대로는 당연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이 바뀌었다.


 본격적인 장수(長壽)시대가 열리고 있다. 말기에 접어든 악성 암이나 사고가 아니면 치료가 가능해졌다. 한국인의 평균수명은 이제 80세에 육박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평균수명은 1970년 61.9세에서 2007년에는 79.6세로 38년 만에 17.6세나 늘었다. 하루 자고나면 11.5시간이 늘어나는 추세다. 길어진 수명은 신(神)의 축복이지만 그만큼 인생을 설계하기가 힘들어졌다는 반론도 가능해진다.


 불과 10여년 전만해도 인생의 전성기를 남녀 공히 20대 초반에서 40대 후반이라고 믿었다. 50세 이후는 지나온 인생을 정리하고 수습하는 기점으로 인식되었다. 나이가 50이나 되었다는 것은 노화라는 긴 겨울에 대비할 때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이제 40대 50대의 나이는 새출발을 모색해야 하는 전환점에 불과하다.


 윌리엄 새들러는 『서드 에이지, 마흔 이후 30년』이란 책에서 미래를 생각하며 마흔 이후 자기 인생의 한복판에 위치한, 거의 미지에 가까운 광활한 지역을 내다보라고 강조한다. 그곳이 바로 엄청난 성장잠재력을 지닌 새로운 개척지, 즉 ‘서드 에이지(third age)’라는 곳이다. 인생 전반기에 청춘의 성장이 있다면, 인생 후반기에는 중년의 성장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인생의 성공여부는 마흔 이후 30년, 즉 ‘서드 에이지’를 어떻게 설계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유럽에서는 생의 주기를 다음의 4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 단계인 ‘퍼스트 에이지(first age)'는 제1연령기로 배움을 위한 시기이다. 이 때는 학습을 통한 기본적인 1차 성장이 이루어진다. 주로 10대에서 20대 초반까지가 이에 해당한다.

 두 번째 단계인 ‘세컨드 에이지(second age)'는 제2연령기로 일과 가정을 위한 시기이다. 제2연령기는 제1연령기 때 획득한 1차 성장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직업을 갖게 되고 경제활동을 하게 된다. 또 사회적으로는 결혼을 해 가정을 이루고, 조직생활을 하는 시기로 규정된다. 20대 중반에서 30대까지가 이 연령대에 해당한다.


 세 번째 단계인 ‘서드 에이지’는 제3연령기로 생활을 위한 단계이다. 청년기인 제1연령기 때 학습을 통해 이루어지는 1차 성장과는 다른 2차 성장을 통한 일종의 자기실현을 추구해나가는 시기이다. 장수혁명으로 새롭게 생겨난 이 시기는 40대에서 70대 중후반까지로 4단계 중 가장 긴 기간을 차지한다. 신(神)으로부터 새로 선물 받은 30여 년은 인생의 축복이자 도전의 시기이다.


 마지막 단계인 ‘포스 에이지(forth age)는 제4연령기로 노쇠의 징후가 늘기 시작하는 노화의 시기이다. 이 시기의 목표는 나이가 들수록 젊게 사는 것, 최대한 오래 건강하게 살다가 젊게 죽는 것이다.


 이전 세대에는 ‘서드 에이지’라는 것이 없었다. 시대는 변했지만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서드 에이지’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시기에 인생의 제2차 성장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인생의 2차 성장은 1차 성장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고 역설적인 요소를 내포하고 있으며 예측불허인 경우가 다반사다. 따라서 2차 성장은 역설과 모순 사이에서 균형을 잡을 것을 요구한다.


 윌리엄 새들러는 이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한 6가지 원칙을 제시한다. ‘중년의 정체성 확립, 일과 여가활동의 조화, 자신에 대한 배려와 타인에 대한 배려의 조화, 용감한 현실주의와 낙관주의의 조화, 진지한 성찰과 과감한 실행의 조화, 개인의 자유와 타인과의 긴밀한 관계의 조화’가 그것이다. 언뜻 보면 서로 반대되는 의미로 들릴 수 있는 2가지 요소간의 조화와 균형을 거듭 강조하고 있다.


 나이를 너무 부정해도 곤란하지만 지나치게 나이 역할놀이에 빠져 있어도 곤란하다. 우리를 위축시키는 것은 세월이 아니라 세월을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다. 한국인은 너무 일찍 늙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얼굴을 젊게 고쳐주는 성형수술 열풍이 불고 있지만 정작 마음의 나이는 너무 일찍 손을 놓아버린다. 신은 우리의 앞 세대 보다 무려 30년이 넘는 수명 보너스를 인간에게 선물했다. 인생 이모작을 준비하면서 달란트(재능)을 발휘하라는 하늘의 뜻이다. 주사위는 이미 던져진 것이 아니라, 지금 던져야 하는 것이다.


 섣불리 자신의 수명을 예측하고 은퇴를 결정할 일이 아니다. 죽는 날 ‘최후의 행진’을 하겠다는 각오로 오늘 하루를 성실히 살아가야 한다.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은 비극이 아니다. 오히려 꿈을 소중히 여기지 않는 것이 더 슬픈 일이다. 우리에게는 ‘창창한 미래’와 ‘과거의 경험’이라는 2개의 카드가 있다. “내 인생에서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평생 화두로 삼아야 할 테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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