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태자의 루비(Black Prince's Rub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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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wha 댓글 0건 조회 1,159회 작성일 11-01-29 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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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흑태자(1330∼76)는 영국왕 에드워드 III세의 장자로서 그의 갑옷 빛깔이 검은데서 "흑태자"라는 별칭이 붙었다.
에드워드 III세는 왕권과 국력의 신장에 주력하여 스코틀랜드 군을 무찌르고 다시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단절을 계기로 왕의 계승권을 주장하여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흑태자는 백년전쟁 당시 크레시전투(1346), 칼레전투(1349)에서 무용을 떨쳤으며 프와티에전투(1356)에서 대승하여 프랑스왕 장 II세를 사로잡았다.
1362년 남프랑스의 아키텐과 가스코뉴 지방을 부왕으로부터 하사 받아 8년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통치에 힘썼다.
당시 스페인의 카스틸라(Castilla)에는 "잔학왕(殘虐王)왕이란 별명을 지닌 돈페드로가 왕위에 올라 있었고, 그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신사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혼 이틀만에 아내를 버리고, 또한 3일 후에 다른 아내를 버리고 수많은 사제와 귀족을 죽였음은 물론 자기의 친형제까지도 무참히 죽였다.
그후 카스틸라에서 신하들의 반란이 일어나 그는 폐왕(廢王)이 되었고 국외로 추방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달아나 당시 그곳을 통치하고 있던 가공할 영국의 전사 에드워드"흑태자"를 찾아갔다.
페드로는 금전과 토지 등 많은 재보를 에드워드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왕좌를 되찾는 싸움에 그의 협력을 얻기로 했다. 1367년 나헤이라전투에서 에드워드는 스페인군을 철저히 쳐부수고 이 잔학한 왕을 왕좌에 복귀시켰다. 페드로는 감사의 뜻으로 에드워드에게 커다란(50mmX40mm) 적색보석을 주었다.
에드워드는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키텐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 그 비용을 염출하였으므로 그곳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중병으로 와병 중에 있으면서도 이 반란을 진압시켰으나 그 뒤 병세가 악화되어 영국으로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국 기사도의 정화로서 "기사의 귀감"으로 꼽히고 있고 그의 유일한 아들이 바로 리차드 II세이다. 1415년 북프랑스의 아산클 전투에서 영국왕 헨리 V세는 프랑스군을 쳐부술 때 이 적색의 돌로 헬멧을 장식하고 싸웠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영국 왕실의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Imperial State Crown)의 정면에 장식되어 "흑태자의 루비"라는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적색의 돌은 수세기가 지난 후 루비가 아닌 스피넬이란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흑태자 루비밑에 세팅된 다이아몬드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로 무려 317캐럿의 "컬리넌 2"라는 별명을 가진 다이아몬드이다.
에드워드 III세는 왕권과 국력의 신장에 주력하여 스코틀랜드 군을 무찌르고 다시 프랑스의 카페 왕조의 단절을 계기로 왕의 계승권을 주장하여 백년전쟁을 일으켰다.
흑태자는 백년전쟁 당시 크레시전투(1346), 칼레전투(1349)에서 무용을 떨쳤으며 프와티에전투(1356)에서 대승하여 프랑스왕 장 II세를 사로잡았다.
1362년 남프랑스의 아키텐과 가스코뉴 지방을 부왕으로부터 하사 받아 8년동안 그곳에 머물면서 통치에 힘썼다.
당시 스페인의 카스틸라(Castilla)에는 "잔학왕(殘虐王)왕이란 별명을 지닌 돈페드로가 왕위에 올라 있었고, 그는 아무리 좋게 생각해봐도 신사라고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결혼 이틀만에 아내를 버리고, 또한 3일 후에 다른 아내를 버리고 수많은 사제와 귀족을 죽였음은 물론 자기의 친형제까지도 무참히 죽였다.
그후 카스틸라에서 신하들의 반란이 일어나 그는 폐왕(廢王)이 되었고 국외로 추방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는 프랑스로 달아나 당시 그곳을 통치하고 있던 가공할 영국의 전사 에드워드"흑태자"를 찾아갔다.
페드로는 금전과 토지 등 많은 재보를 에드워드에게 제공하기로 약속하고 왕좌를 되찾는 싸움에 그의 협력을 얻기로 했다. 1367년 나헤이라전투에서 에드워드는 스페인군을 철저히 쳐부수고 이 잔학한 왕을 왕좌에 복귀시켰다. 페드로는 감사의 뜻으로 에드워드에게 커다란(50mmX40mm) 적색보석을 주었다.
에드워드는 이 전쟁을 수행하기 위하여 아키텐에 많은 세금을 부과하여 그 비용을 염출하였으므로 그곳 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그는 중병으로 와병 중에 있으면서도 이 반란을 진압시켰으나 그 뒤 병세가 악화되어 영국으로 돌아온 후 세상을 떠났다.
그는 영국 기사도의 정화로서 "기사의 귀감"으로 꼽히고 있고 그의 유일한 아들이 바로 리차드 II세이다. 1415년 북프랑스의 아산클 전투에서 영국왕 헨리 V세는 프랑스군을 쳐부술 때 이 적색의 돌로 헬멧을 장식하고 싸웠다.
빅토리아 여왕 이후 영국 왕실의 임페리얼 스테이트 크라운(Imperial State Crown)의 정면에 장식되어 "흑태자의 루비"라는 이름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 적색의 돌은 수세기가 지난 후 루비가 아닌 스피넬이란 사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 흑태자 루비밑에 세팅된 다이아몬드도 역사적으로 유명한 다이아몬드로 무려 317캐럿의 "컬리넌 2"라는 별명을 가진 다이아몬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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