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처럼 멈춘 자리, 그곳은 발칸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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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2,012회 작성일 12-06-04 23: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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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완전 증발`. 아마도 직업병 때문일 게다. 범죄자들이 `완전 범죄`를 꿈꾸듯, 직업이 여행 전문인 기자는 늘, 완전 증발을 꿈꾼다. 그러니깐, 이런 상상.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오른 날, 무단 결근을 한다. 휴대폰 오프(off). 세상과도 완전 오프다. 그 다음은 지구본 돌리기. `휙` 팽이처럼 돌아가는 지구본에 손가락을 콱 찍어버리는 거다. 운명처럼 멈춘 자리, 그곳은 발칸반도.
다음부터는 일사천리 여행 준비다. 꼬꼬면 컵라면 10개, 스팸 5통, 햇반 15개. 스니커즈와 함께 빛 바랜 캐논 G10 카메라와 예상치 못한 추억을 만들어주는 로모, 폴라로이드 카메라까지. 손바닥 만한 로디아(Rhodia) 넘버13 수첩에 어울리는 굵은 필기감의 1.0 볼펜도 함께. 한 달을 버틸 MP3 473곡엔 필히 이 곡을 담는다. 크로아티아: 오래된 음악(Croatia:Music of Long Ago), 프리포비드 오 달마티아(Propovid O Dalmaciji), 즈트라보 마리요(Zdavo Marijo). 그 다음, 나의 카톡과 페북 담벼락에 `세상이여, 굿바이` 인사말을 남기고 출발.
하필이면 왜 발칸이냐고? 전세계 30여 곳을 돌며 운명처럼 스친 생각. 바람처럼 사라지기엔 발칸 만한 곳은 없다는 거다.
첫 코스는 당연히 발칸의 보석 크로아티아. 중유럽 풍경이 고스란히 남아 있는 수도 자그레브나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으로 지정된 플리트비체 호수공원은 증발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필히 찍어야 할 포인트는 이젠 폐허가 된 로마 유적이 곳곳에 퍼져 있는 달마티아의 북부 자다르(Zadar). 거기서 기필코 세계에서 단 하나뿐인 `바다 오르간(Moske Orgulje)`을 봐야 한다. 코발트빛 바다로 향하는 돌계단 구석 구석에 구멍을 뚫어 만든 자연의 악기. 파이프와 호루라기의 원리를 응용해 최고의 건축가 니콜라 바시치가 디자인한 세계 최대 파이프 오르간이다.
이건 숫제 방파제 전체가 오르간이다. 구멍이 난 방파제 보도 아래 75m 길이의 파이프. 세어 보니 무려 35개나 된다. 연주자는? 저, 거대한 신(神), 자연이다. 상상해 보시라. 거대한 바다 오르간 앞에 앉은 신이, 심호흡 한번 한 신이 눈을 감은 채 손을 펼쳐든다. 눈을 감고, 허공에 건반을 치듯 손을 움직인다. 자다르의 파도가 기다렸다는 듯 출렁인다. 이 파도는 방파제 밑의 공기를 바깥으로 밀어내고, 이때 `쟁쟁쟁` 오르간 소리가 폴폴 뿜어져 나온다. 지구의 심박, 그 맥을 따라 시시각각 달라지는 파도의 크기와 속도. 바다 오르간은 신의 영감이나 다름없는 자연의 흐름과 리듬을 따라 자연의 음을 만들어 낸다.
전자음과 기계음에 얼마나 지쳤던가. 지구의 전혀 다른 곳에서 완전 증발을 함께 꿈꿔 온 한 노파가 기자 옆에 대자로 누운 채 이렇게 속삭인다. "10분만 귀 기울여도, 평생 배울 걸, 다 깨우칠 수 있을 거다"라고.

황금알을 낳던 `스토리텔링`이 현실 문제와 부딪혀 수차례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드라큘라 성. 맞다. 트랜실베니아에 있는 브란(Bran) 성은 `드라큘라 성`이란 애칭으로 더 유명하다. 인근 민박집 곳곳에는 뱀파이어를 쫓는다는 의미의 마늘들이 지금도 주렁주렁 매달려 있겠지.
사실, 완전 증발 여행의 방문지로 `도센 남작의 성` 배경인 일본 오카야마 성은 너무 살벌하고 `신데렐라의 성`인 독일 노이슈반스타인 성은 너무 낭만적이다. 당연히 루마니아 드라큘라의 성은 사라진 뒤 꼭 봐야 할 방문지 버킷리스트에 1순위로 올라 있었던 곳.
물론 세계에서 `두 번째로 비싼 집` 리스트에 올랐다는 묘한 기대감도 작용을 했을 게다. 이 성의 시가는 알려진 게 1억4000만달러.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는 이곳을 전세계 관광객들은 미친 듯이 찾고 있다. 이유는 단 하나. 흡혈귀 소설 `드라큘라`의 가상 모델인 블라드 3세가 잠깐 머물렀다고 알려진 뒤 그 흔적을 찾기 위한 것이다.
정작 이 성의 실 소유주이면서 후손인 건축가 도미닉 합스부르크 로트링겐 씨는 "흡혈귀 성이 아니다. 그건 픽션이다. 브란 성은 단지 나와 내 할머니의 집일 뿐"이라고 지금도 못을 박는다.
어쨌거나 이글스의 데스페라도를 들으며 이 성을 거니는 맛은, 특별하고 기괴하다. 이 길 끝 모퉁이에서 불쑥, 뭔가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이 맛에 반하는 거겠지.
마지막 코스는 필히 `동유럽의 스위스`라 불리는 슬로베니아여야 한다. 사막 한복판에서도 볼 수 있다는 스타벅스와 맥도널드가 없는 자연 그대로의 곡선이 있는 곳. 그중에서도 포인트는 포스토이나 야마 동굴이다. 세계에서 두 번째로 긴 카르스트 동굴, 굳이 설명이 필요할까.
길이만 무려 24㎞. 상상초월 동굴이지만 관광객들에게는 5㎞ 정도만 개방한다. 위험할 수 있으니 당연히 가이드 투어만 가능한 상태. 동굴의 2㎞ 정도는 열차로 둘러보고 1㎞는 직접 걸어서 관람을 하게 된다. 수십억 년의 역사를 품은 기기묘묘한 종유석과 석순. 영국의 저명한 조각가 헨리 무어조차 `세계에서 가장 경이적인 자연미술관`이라며 격찬했을 정도란다.
"삐리리." 그런데 이건 뭘까. 맞다. 낭만 발칸 반도의 유희를 산산조각 내는 휴대폰 소리다. 예상했던 대로 "어서, 여행면 마감하라"는 데스크의 엄명. 이럴 때 휴대폰 팍 꺼버리고 완전 증발을 해야 하는 건데, 삶은 여전히 팍팍한 현실이니. 3D 업종의 대표주자 기자직에 종사하며 무슨 `완전 증발`이겠는가. 그래도 두고 보시라. 기어이 이 꿈, 실현하고 말 테니. 어쨌거나, 브라보 마이 라이프, 브라보 마이 발칸 트래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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