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탈리아 `친퀘테레(Cinque Terre) - 숨은 보석, 영원히 숨어버릴 뻔했던 그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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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타라곤 댓글 0건 조회 1,844회 작성일 12-06-04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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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백석, 김수영, 장 콕토, 도스토옙스키. 유독 연필을 좋아했던 인물들이다. 한때 나의 우상이었던 록밴드 도어즈의 리더 짐 모리슨도 말할 것 없다. 의문을 낳았던 너바나의 리더 커트 코베인의 유서도 연필로 쓰여 있었다고 한다. 잊을 뻔했다. 최근 세계를 떠들썩하게 했던 칠레 33인 광부의 기적 생환 사건. 그들 역시 생사의 기로에서 연필과 종이를 넣어달라고 요청했단다. 세상에, 아이패드나 갤탭도 아니고 하필이면, 연필이었다니.
첨단 디지털이 죽었다 깨나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연필이다. 아니, 연필의 흔적 혹은 질감이다. 연필이란 게 그렇다. 심의 굵기에 따라 세계의 질감이 달라진다. 쥐는 힘의 경중에 따라 묘사하는 생의 명암이 달라지는가 하면, 미세한 힘의 변화로 감정의 굴곡에 리듬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여행과 닮은 것도 연필인 것 같다.
첨단 디지털이 죽었다 깨나도, 엄두조차 낼 수 없는 게 몇 가지 있다. 그중 하나가 연필이다. 아니, 연필의 흔적 혹은 질감이다. 연필이란 게 그렇다. 심의 굵기에 따라 세계의 질감이 달라진다. 쥐는 힘의 경중에 따라 묘사하는 생의 명암이 달라지는가 하면, 미세한 힘의 변화로 감정의 굴곡에 리듬을 가할 수도 있다. 그러고 보니 참으로 여행과 닮은 것도 연필인 것 같다.
여행을 하다 보면 그런 곳이 있다. 연필 같은 곳, 아니, 연필로만 세밀한 묘사가 가능할 것 같은 곳. 나에겐 그게 이탈리아 `친퀘테레(Cinque Terre)`다. 이탈리아 중부 레반토 지역 바닷가에 있는 다섯 마을 친퀘테레. 이탈리아어로는 `다섯 개의 땅`이란 뜻이다. 거친 바위 해안을 따라서 몬테로소, 베르나차, 코르니글리아, 마나롤라, 리오마조레 5개의 마을이 나란히 서 있다. 총거리는 18㎞ 정도. 이 마을은 원래 연필처럼 `잿빛`이었다. AD 79년 화산 폭발로 베수비오 산 아래에서 화산재에 묻혀 있다 1748년에서야 발굴 작업이 시작돼 빛을 보게 된 것이다. 이탈리아의 숨은 보석, 영원히 숨어버릴 뻔했던 그 마을을 따라 `잿빛` 연필 여행을 떠난다.
2H : 리오마조레
첫 번째 마을은 리오마조레. 1998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친퀘테레 5형제 마을 중에서 가장 현대적인 느낌이다. 라스페치아에서 기차를 타고 역에 내리면 바로 옆에 마을 중앙으로 걸어서 갈 수 있는 터널이 눈에 띈다. 터널 아래로 흐르는 강이 리오마조르 강이다. 이곳과 어울리는 연필은 2H다. 제도용이나 세밀한 정밀화에 쓰이는 급이다. 이 연필과 맞는 종이는 결이 곱고 튼튼한 켄트지가 딱이다. 여행객이 지나도 개의치 않는 마을 주민. 그 정갈함과 당당함이 딱 2H 분위기다.
HB : 마나롤라
학창 시절 가장 많이 손에 잡았던 HB연필. 단단하지도, 무르지도 않아서 막 쓰기 좋다. 시인 김경주는 `레인보우 동경`이란 책에서 `무조건 떠나야 할 때 사용하라`고 권한다. 어느 지역에서나 낙서를 할 수 있고 끼적일 수 있는 게 좋지만 밀도가 약한 게 흠이라는 평이다. 리오마조레에서 다음 마을인 마나롤라까지 이어지는 길은 일명 `사랑의 길`로 불린다. 낭만적인 분위기 때문이다. 완만한 경사라 힘들이지 않고 HB연필처럼 막 가기 좋다. 성인 걸음으론 30분 정도 거리인데, 남산 꼭대기에서나 볼 수 있는 연인들의 자물쇠 더미도 눈에 띈다. 이 마을이 조성된 건 12세기경. 아슬아슬 절벽 위로 촘촘히 선 모습이 아찔하지만 눈에 익으면 그런대로 낭만적인 느낌이다. 아직 친테퀘레의 진정한 맛을 느끼기에는 밀도가 약한 게 흠이다.
심이 굵고 무르다. HB로 담을 수 없는 굵은 세상의 선을 표현할 수 있는 게 매력이다. 코르니글리아는 천혜의 요새인 높은 산 위에 우뚝 선 마을이다. 5개 마을 중에서 유일하게 배가 서지 않을 정도로 험준하다. 마을 이름은 초기 정착자였던 로마인 코르넬리우스의 어머니 코르넬리아에서 유래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곳 명물은 포도주다. 1년에 200만명의 관광객이 찾는 첫 번째 매력도 이곳의 낭떠러지에 계단식으로 조성된 포도밭이다. 기계가 들어가지 못하는 좁은 절벽의 척박한 땅을 일일이 손으로 축벽을 쌓아서 포도밭으로 일궜냈다니.
`친퀘 테레`가 있으니까…괜찮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도시 전체가 화산재에 파묻힌 유명한 폼페이의 유적지에서 이 모녀의 이름이 적힌 포도주 병이 발견된 것을 보면 코니글리아의 포도주는 과거에도 꽤나 알려졌던 모양이다. 다섯 개 마을을 돌며 팍팍해진 다리를 풀기에도 안성맞춤인 이곳 포도주. 식도를 좌악 긁으며 타고 내려가는 그 포도주의 굵기가 딱 2B 사이즈다.
4B : 베르나차
연필에도 4B가 있다는 걸 처음 알게 된 건 미술시간이었다. HB로는 도저히 담을 수 없었던 그 굵직굵직한 생의 두께라니. 심장이 뛰었고, 난 필기까지 4B로 한 적이 있었다. 베르나차는 좀 생경한 분위기다. 다른 마을과 달리 상대적으로 낮은 곳에 마을이 형성돼 있다. 4B연필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 같다고나 할까. 시인 김경주가 묘사한 4B연필의 용도는 `기술보다 마음 편한 작업이 필요한 연필`이라는 것. 이곳이야말로 그렇다. 지중해의 뜨거운 햇살 아래 한없이 펼쳐진 바다를 보며 편지 한 통 쓰기 딱 알맞은 곳. 그때 연필은 필히 4B여야 한다.
지우개 : 몬테로소개 : 몬테로소
마지막 마을인 몬테로소. 베르나차에서 몬테로소까지는 난코스다. 경사가 가파른 길도 있고, 꼬불꼬불 이어지며 두 시간 이상이나 걸린다. 괜히 왔다는 마음이 들 때쯤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는 몬테로소. 그 풍광은 그간의 고통을 단박에 날려보낸다. 마치 지우개처럼. 연필의 매력은 지울 수 있다는 거다. 지우개만 있으면 그것도 말끔하게. 간혹 연필로 종이 가득 낙서를 한 뒤, 그 위에 지우개를 선을 긋듯 그어버리면 마치 흰색 톤으로 그림을 그리는 놀라운 분위기가 만들어진다. 김경주의 표현대로라면 `마음의 음영처리` 같은 것.
몬테로소는 그런 면에서 마음에 음영처리를 원하는 대로 할 수 있을 것 같은 곳이다. 친퀘테레에서 가장 번화한 마을. 딱딱한 길에만 질렸다면, 아니 갑갑한 일상에 넌덜머리가 난다면, 일광욕이나 해수욕으로 음영처리를 제대로 해주면 된다. 마음속 `흑심`은 말끔히 지워야 하는 법이니깐. 아마레(amareㆍ사랑하다) 친테퀘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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