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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 양란 배양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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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챠이브 댓글 0건 조회 3,347회 작성일 11-09-15 0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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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란에 대한 기록 중 가장 오래된 것은 기원 전 300년경 데오프라스투스(Theophrastus)가 지중해지역의 어떤 난꽃의 모습이 남자의 생식기인 한 쌍의 고환 (그리이스어 orkhis)을 닮았다고 기록한 자료이다.  이 Orchis란 단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럽종 난에 적용되어 쓰여지고 있는데 이것이 오늘날 蘭科植物群을 일컫는 orchids의 유래가 되었다.

양란의 재배는 유럽대륙에서 시작되었다. 16세기까지 유럽에서는 유럽에서 서식하고 있는 蘭科植物 만을 재배하고 있었는데 외래종이 처음으로 소개된 것은 16세기에 이르러서이다. 이것은 탐험과 무역 그리고 선교의 부산물이었다. 비록 그들에게 전달된 난들은 빈사 상태의 보잘 것 없는 몰골의 것들이었지만 식물학자와 원예가들은 즉각적인 관심을 보이기 시작 하였다. 이를 시작으로 식민지의 개척과 더불어 1700년도 후반에서 1800년도 초에 많은 탐험대가 열대지방의 탐험에 나섰다. 남미와 동남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 지역이 주 활동무대였다.  이들이 보내 온 새로운 식물들은 유럽의 식물학자와 원예가 그리고 다른 탐험대들을 자극시켰고 유럽인들은 그들의 나라에 자생하고 있는 난들이 열대지방에서 보내어지는 다양하고 엄청난 양의 난에 비해 보잘 것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형태와 종류의 난을 찾는데 열중하기 시작했다.
많은 자금이 탐험대에 주어졌고 산채인들은 육체적인 역경을 감수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목숨을 걸기까지 하였다. 이들의 경쟁은 날로 치열해져서 접근하기 어려운 깊은 계곡이나 절벽, 정글 그리고 고산지역과 늪지대까지 뒤지기 시작하였고 서로가 채취한 난에 자극을 받고 질투심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래서 발견한 장소를 비밀에 붙이거나 거짓으로 이야기하기도 했다.  
당시 영국에서는 1700년도 중반에 설립된 왕립식물원이 있었는데 초기에 발견되어 영국으로 보내어진 난들은 이 식물원에서 재배되거나 귀족을 중심으로 유리 온실을 갖고 있는 부유한 층에서만 재배를 할 수 있었다.

1818년 영국의 William Cattley가 'stove(난로)'라고 부르고 있는 자신의 유리 온실에서 대단히 아름다운 꽃이 개화한 것을 발견하고 그 아름다움에 반해서 당시의 유명한 식물학자인 John Lindley에게 보여주었다. 이 꽃은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 근처의 Organ산에서 채취된 식물들의 포장재로 쓰여져 그에게 배달된 것으로 온실의 한귀퉁이에 팽개쳐져 있었던 것이었다. John Lindley는 그 난의 이름을 Cattley의 이름을 따서 Cattleya(캬틀레야)라고 명명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양란의 여왕이라고 부르는 캬틀레야의 유래이다. 곧 이 꽃은 대량재배가 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에 자극받아 더 많은 수집가들이 산지로 향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난들을 소위 '난로'라고 부르는 뜨거운 유리온실에서 배양하려고 시도한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그들은 이 낯선 식물이 흙이 담긴 일반 분에서 키울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또, 이 난들이 열대지방에서 보내온 것이었기에 뜨겁고 비가 많은 습한 환경이 필요할 것이라고 가정했는데 실제 대부분은 해발 수백미터의 어두운 숲의 그늘에서 채취된 것이었기 때문에 환경이 맞질 않았다.  또 어떤 것들은 폭포나 냇가 옆에서 항상 스프레이와 안개에 쌓인 환경에서 채취된 것도 있었고 나뭇가지에 착생된 상태, 흙이나 초원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것 등등 개체별로 그 환경이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 결과로 수천 수만개의 귀한 난들이 죽어갔고 당시 왕립식물원장인 Joseph Dalton Hooker는 "영국은 열대  난들의 무덤이 되어가고 있다."고 까지 한탄했다.  

8.jpg한편 John Lindley는 산채인들로부터 채취한 난의 서식지의 환경을 계속 조사했다. 그리고 그의 충고로 배양가들은 온실 문을 열어 보다 시원한 공기와 많은 통풍이 되도록 하였고 어두운 숲속의 그늘의 조건에 가깝게 새로운 환경을 조성했다. 이 때부터 난의 대량재배의 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 때부터 유리 온실을 갖고 있는 부유한 층은 자신들의 힘만으로는 배양의 한계가 있음을 느끼고 숙련된 배양가를 고용해서 난을 돌보기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여 수많은 시행착오 속에서 특정개체의 배양법을 터득한 사람들은 이 배양법을 비밀에 붙이고 공개하지 않았다.   이렇게 하여 19세기 말에 이르게 되어서는 난의 대량재배는 위험성이 적은 사업으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재배가 용이하여지자 야생에서 채취한 새로운 난을 구입하는 것은 빅토리아시 대의 부유층의 취미가 되어갔다.  

상업적인 난 재배는 1900년~1920년 사이에 본격적으로 성장하였다. 따라서 이를 배양하려는 아마추어 애란인이 급증하였으며 이러한 소장가의 증가로 새로운 야생란의 수요가 또 증가하게 되었다. 그 때까지만 해도 포기를 나누어 분주를 받지 못하면 수입되는 난을 구입하는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미 이 때는 열대지방에서 활약하던 전문적인 산채인들이 하나 둘씩 줄어들기 시작한 때였다. 서식지의 환경도 많이 황폐해져 난을 찾기가 어려워졌으며 열병이나 말라리아에 의한 질병으로 죽거나 원주민에게 살해당하거나 이미 늙어버렸거나 한 시기였다. 따라서 새로운 난을 구하는 것은 너무나 비용이 많이 들고 어려워졌다. 그래서 한 때 난은 일반화훼 식물에 그 유행의 자리를 내어 줄 것처럼 보였다.  

난 배양의 혁명은 1922년 미국 Cornell 대학의 Lewis Knudson교수의 한 발견에서 시작되었다. 그는 난을 포함한 여러 식물의 종자의 발아에 대한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몇가지 무기질 영양소와 설탕이 함유된 agar jelly를 담아놓은 유리 플라스크 안에서 난의 종자가 발아되는 것을 발견한 것이다. 이 것은 난을 기르고 싶어하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계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한 개의 씨방에서 수천 수만 개의 난을 배양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이다. 이로써 배양묘가 빠르고 싸게 생산되어 보급되기 시작되었다.   이후로 사람들은 종이 다른 난끼리의 인공수분을 통해 보다 관상가치가 높은 새로운 종의 개발에 열중하기 시작했다. 양란은 이러한 교잡에 의하여 오늘날까지 끊임 없이 새로운 종이 탄생되고 있는 것이다.   2차 대전 이후에는 영국과 프랑스, 하와이 그리고 미국에 난을 공급하는 기업이 설립되어 세계 난시장을 주도하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1960년에 이르러 난의 생장점을 이용한 조직배양의 성공으로 난관련 산업은 그 전성기를 맞이하게 되며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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