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예 동양란의 역사
페이지 정보
작성자 챠이브 댓글 0건 조회 2,930회 작성일 11-09-15 00:11
본문
|

중국남송시대(南宋時代 ; 1127 ∼ 1278년)의 주희(朱熹 ; 1130 ∼ 1200년)가 저술한 초사변증(楚辭辯證 ; 1199년간행)에는 식물의 종으로 확실히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난이 난으로 불려진 것은 북송시대(北宋時代 ; 960 ∼ 1126년)의 중기 이 후로 남송시대에 그 원예적인 재배가 크게 성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 불려지 던 난이란 현재 향등골나물 골등골나물 등골나물로 불리는 등골나물속으로 추정 되어지며 송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늘날의 난에게 그명칭을 물려준다. 근 2,000년 간이나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난이란 단어가 자연스레 옮겨진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빼어난 향기로 군자에 비유되며 난으로 불려지던 중 당말( 唐末)에 이르러 오늘날의 난이 발견된다. 처음에는 같은 격으로 대접받으며 두 종 류 모두 난으로 불려지다 점차 오늘날의 난이 진란(眞蘭)으로 굳어지게 된다. 굳 이 같은 종이니 아니니 따질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기에 공자시대부터의 난이란 모 두 하나로 대접받았다. 이미지에 합당한 상태를 난이라 일컬었고 이미 가리키던 것에서 더욱 어울리는 쪽으로 옮겨진 것 뿐이기 때문이다.
난이란 뜻에 있어서의 변화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난이 완상(玩賞)의 대상으로 가꾸어진 것은 11세기 중엽인 북송시대의 중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남송 시대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13세기에는 금장난보(金障蘭譜 ; 趙時庚) 왕씨난보(王氏蘭譜 ; 王貴學)가 저술되는등 난에 관한 여러책들이 저술되기에 이 르렀다 또한 문인들 사이에 묵란화가 유행하게 되어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수묵사군자(水墨四君子)로 굳게 되었으며 확실하게 난의 자리를 차지 하게 되었다 .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