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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예 동양란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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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챠이브 댓글 0건 조회 2,930회 작성일 11-09-15 0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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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7.jpg 난(蘭)이란 단어는 기원전 6세기경에 중국의 공자(孔子 ; BC 552 - 479년)에 의해 서 엮어진 시경(詩經)에서부터 나타난다.  시경은 기원전 12세기 ∼ 기원전 6세기 까지 불려지던 시 모음집으로 두편의 시에 처음 등장한다.  아직까지 군자의 이미 지는 보이지 않고 구애(求愛)의 물표이거나 처녀의 아름다운 모습에 비유되는 표 현 수단으로 쓰였다. 공자가어(孔子家語 ; 공자의 언행 및 문인과의 문답 논의를 적은책)에는 난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세 번나오는데 이 때에야 비로소 난은 군자 의 격에 비유된다. 이러한 난의 이미지는 중국 전국시대의 굴원(屈原 ; BC 343 ∼ 277년)을 거치며 여러 문인과 묵객(墨客)들에게서 자연스레 군자와 함께 오르내리 게 된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난과 그 시대에 얘기되어진 난과는 과연 식물학상 같은 종일까? 라는 의문을 제시하는 사람들이 많다. 

중국남송시대(南宋時代 ; 1127 ∼ 1278년)의 주희(朱熹 ; 1130 ∼ 1200년)가 저술한 초사변증(楚辭辯證 ; 1199년간행)에는 식물의 종으로 확실히 다르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난이 난으로 불려진 것은 북송시대(北宋時代 ; 960 ∼ 1126년)의 중기 이 후로 남송시대에 그 원예적인 재배가 크게 성행했다고 볼 수 있다. 이전에 불려지 던 난이란  현재 향등골나물 골등골나물 등골나물로 불리는 등골나물속으로 추정 되어지며 송대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오늘날의 난에게 그명칭을 물려준다.   근 2,000년 간이나 군자의 상징으로 여겨지던 난이란 단어가 자연스레 옮겨진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빼어난 향기로 군자에 비유되며 난으로 불려지던 중 당말( 唐末)에 이르러 오늘날의 난이 발견된다. 처음에는 같은 격으로 대접받으며 두 종 류 모두 난으로 불려지다 점차 오늘날의 난이 진란(眞蘭)으로 굳어지게 된다.  굳 이 같은 종이니 아니니 따질만한 성격의 것은 아니기에 공자시대부터의 난이란 모 두 하나로 대접받았다.  이미지에 합당한 상태를 난이라 일컬었고 이미 가리키던 것에서 더욱 어울리는 쪽으로 옮겨진 것 뿐이기 때문이다.


난이란 뜻에 있어서의 변화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난이 완상(玩賞)의 대상으로 가꾸어진 것은 11세기 중엽인 북송시대의 중기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으며  남송 시대에 이르러 활짝 꽃을 피우게 된다. 13세기에는 금장난보(金障蘭譜 ; 趙時庚)  왕씨난보(王氏蘭譜 ; 王貴學)가 저술되는등 난에 관한 여러책들이 저술되기에 이 르렀다   또한 문인들 사이에 묵란화가 유행하게 되어 명대(明代)에 이르러서는 수묵사군자(水墨四君子)로 굳게 되었으며 확실하게 난의 자리를 차지 하게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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