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청자 가장 한국적인그릇 > 아트공예

본문 바로가기
사이트 내 전체검색

아트공예


 

분청자 가장 한국적인그릇

페이지 정보

작성자 파슬리 댓글 0건 조회 2,244회 작성일 11-10-17 08:59

본문

분청자 하면 조금은 생소하게 느끼는 사람이 꽤 있을 겁니다. 분청자가 청자백자에 비해 상대적으로 덜 알려진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많은 미술사가들은 가장 한국적인 미가 무엇이냐고 할 때 ‘분청자에 해답이 있다’고 말해 왔습니다. 분청자가 그릇 중에서만 한국적인 미를 대표하는 것이 아니라 한국미술품 전체에서 그렇다는 것입니다. 청자나 백자는 중국에도 있는 것이지만 분청자는 다른 나라에서는 발견되지 않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가장 한국적인 맛이 나온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어떤 면이 그렇다는 것일까요? 여러 가지로 표현할 수 있겠지만 정리해보면, ‘자유분방하고’, ‘수더분하고’, ‘구수하고’, ‘천진난만하고’, ‘익살스럽고’, ‘대범하게 생략적이고’ 등등으로 말할 수 있겠습니다. 이 정도면 한국적인 멋은 다 나온 느낌입니다.
 
대범한 선과 문양이 돋보이는 분청자는 한국에서만 발견되는 독특한 자기 양식이다.
 
 
당시 유행하던 청자 그릇에 백토를 칠해 분청자 만들어
분청자는 말 그대로 기본적으로는 청자입니다. 청자 그릇에 하얀 분칠을 했기 때문에 분청자라고 한 것입니다. 이 말은 한국에서만 쓰이는 단어로 1940년대에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사학자였던 고유섭 선생이 처음으로 만들었죠. 이 그릇은 15세기에 나타나 약 150년 간 지속되다 백자가 유행하면서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 그런데 왜 이런 그릇이 나온 것일까요? 조선은 고려로부터 청자를 이어받았습니다. 그런데 이때의 청자는 고려가 망할 때 만들었기 때문에 질이 많이 떨어졌습니다. 예술이란 당시의 사조를 따라가는 것이라, 시대정신이 살아 있으면 수준 높은 예술품이 나오지만 그렇지 못하면 하치의 예술품들이 나옵니다. 이 시점에서 중국 명나라에서 새로운 개념의 그릇인 백자가 조선 왕실로 전해지게 됩니다.

중국에서 백자가 유행하게 된 것은 이민족인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멸망하고 한족의 명나라가 건국된 것과 맥을 같이 합니다. 불교가 국교인 원과는 달리 자신들의 정통신앙인 유교, 그 중에서도 성리학을 전면에 내세운 중국의 지배층은 이 유교에 맞추어 모든 질서를 개편하게 됩니다. 그릇 가운데 백자는 이런 유교적인 세계관과 잘 어울렸습니다. 성리학에서는 바깥으로 화려하게 나타내기보다는 검박하고 절제하는 것을 높이 치는데 이런 정신이 백자로 나타난 것입니다. 앞서 말한 대로 이 백자는 조선의 왕실에 전해졌고 조선의 상류층으로부터 큰 호응을 얻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조선에서 이 백자를 만들 수 있는 곳이 극히 한정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백자는 사옹원(왕실의 음식관련 업무를 담당하는 곳)에 소속된 몇 안 되는 관요에서만 만들어졌기 때문에 일반 사대부들은 구하는 것 자체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들도 백자를 갖고 싶었던지라 당시 유행하던 청자 그릇에 백토를 칠해 분청자를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한국도자사의 권위인 윤용이 교수는 ‘분청자란 15~16세기 전후해서 백자의 흰 맛을 내려고 몸부림을 치면서 만들어진 그릇’이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유분방한 선과 문양이 특징
 
 
분청자에도 많은 기법이 사용됩니다. 박물관에서 볼 수 있는 분청자는 선으로 문양을 그린 선각이나 철로 그린 철화, 문양 도장을 만들어 찍은 인화, 붓으로 그린 귀얄, 표면을 부분적으로 걷어낸 박지 등의 기법을 사용해 만든 분청자들입니다. 그런데 이 문양들의 모습이 한결같이 아주 자유분방합니다. 문양만 그런 것이 아니라 생김새도 그렇습니다. 청자나 백자에 비해 볼 때 더 그렇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된 데에는 역사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조선 초에 정치적 불안이나 왜적의 침입으로 인해 관요에 있던 도공들이 전국으로 흩어지게 됩니다. 이때 도공들은 국가의 규제가 없어지니 각지에서 그릇을 자유롭게 제작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다른 그릇에 비해 훨씬 더 활달하고 천진난만하며 자유분방한 멋을 풍기는 분청자를 만들게 된 것입니다.
 
그런 모습을 알기 위해 예를 들어보지요. 옆에 있는 분청자는 우선 모습부터가 자유분방합니다. 양쪽을 눌러 만들었기 때문에 편병이라고 부릅니다. 사진이라 잘 확인은 안 되지만 밑의 굽이나 병목을 그리 신경 써서 만든 것 같지는 않습니다. 모두 투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이 그릇을 마음대로 볼 수 없습니다. 일본에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런 그릇의 진가를 알지 못하고 있을 때 일본인들이 사 들고 간 것입니다. 이런 예술품들이 일본에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래서 한국예술사를 제대로 쓰려면 일본에 숨어 있는 우리 예술품들을 찾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양쪽을 눌러 만든 편병. 대범한 선과 자유분방한 스타일이 인상적이다.
 
 
 
 
이 그릇의 진가는 지금 말한 전체 모양보다 그릇 위에 그려진 문양에서 찾아야 합니다. 선으로만 그린 문양인데 어떻게 보면 치졸하지만 또 어떻게 보면 투박하면서 대범한 미의식이 엿보입니다. 이 그림은 아마도 도공이 그냥 쓱싹 그렸을 겁니다. 그런데 그 도형의 분할이라든가 선의 향방들이 자유로우면서도 나름대로의 높은 질서를 따르고 있습니다. 마치 현대의 추상화를 연상하게 합니다. 그래서 분청자는 현대성을 많이 갖고 있다고도 말합니다. 저 문양만 떼어 내어서 시내 화랑에서 전시하면 사람들은 현대화가의 그림으로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장군병. 웃고 있는 물고기 무늬를 통해 선조들의 해학과 멋을 알 수 있다.

 
물고기 문양의 분청자도 자유분방함이나 해학성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 그릇은 장군병이라 불리지요. 이 그릇 역시 전체적인 모습이 아주 자유롭고 투박합니다. 대칭으로 되어 있지도 않고 굽이나 주둥아리도 거칠게 마감되어 있습니다. 표면도 그리 신경 써서 만든 것 같지 않습니다. 이 그릇도 압권은 물고기 문양입니다. 보시다시피 물고기를 그렸는데 뒤집혀 있으니 이것은 죽은 물고기 아닐까요? 만일 이 추측이 맞는다면 어떻게 산 사람들이 사용하는 그릇에 죽은 물고기를 그려놓을 생각을 했을까요? 그것부터가 기괴한 발상인데 우리를 더 놀라게 하는 것은 이 물고기가 웃고 있다는 것입니다. 입을 벌리고 있으니 그렇다는 것이죠. 여기에 우리 조상들의 억누를 길 없는 해학이 있습니다. 이런 병은 일본이나 중국에서 발견하기 힘들 겁니다. 그래서 일본 사람들이 구입한 것이겠죠. 이 그릇을 사간 일본인들은 자기네들의 도공들은 이런 파격적으로 웃기는 그릇을 만들지 못할 것이라는 것을 알았을 겁니다.
 
 
 
 
 
이와 같이 우리 분청자의 미를 가장 먼저 발견한 사람은 항상 그렇듯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 이전에는 조선의 분청을 인정한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20세기 중엽이 되면서 드디어 유럽의 학자들도 분청의 세계를 알게 됩니다. 이것은 영국의 ‘빅토리아 앨버트’라는 박물관에서 한국 예술 담당 큐레이터를 하고 있는 홀릭(Horlyck)이라는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이전에 그들은 분청자를 청자가 퇴락한 그릇으로만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을 받은 버나드 리치(B. Leach, 1887~1979) 같은 학자들이 우리 분청자를 새롭게 보면서 유럽의 도자학계가 조금씩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군요. 세계는 다 이렇게 가는데 항상 자국의 시각만 주장하면서 ‘한국 문화는 중국 문화의 아류다’라고 하는 중국인들의 시각은 언제 달라질지 모르겠습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