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수장 한상수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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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챠이브 댓글 0건 조회 1,610회 작성일 11-09-15 23: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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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바늘 움직여요”
한땀한땀 정성 쏟다보면
어느덧 무념무상의 세계
수틀엔 삼라만상 드러나
평생을 오로지 우리나라 전통자수(刺繡)의 맥 잇기에 바쳐온 한상수씨(68·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匠)의 삶은 마치 깨달음의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참구하는 수행자의 그 길과 맞닿아 있다.
그는 자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한시도 전통자수 복원에 대한 발원을 놓아 본 적이 없다. 생계조차 어려웠던 시절에도, 아이를 낳아 등에 업고 다니면서도 그녀는 실잣는 법 하나, 염색하는 법 하나 놓치지 않으려 시골 할머니의 수틀까지도 살펴 보았다. 우리나라 전통 자수의 복원 그것은 평생의 화두였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천이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아직도 수틀앞에 앉는 것을 거르는 날이 없다. 바늘에 실을 끼워 한땀 한땀 수백 수천번을 움직여 삼라만상의 대역사를 수틀에 빚어낸다. 작은 보자기에서부터, 노리개, 주머니, 병풍, 수불(繡佛)에 이르기까지 바늘과 실, 그리고 지극한 정성과 심미안으로 자수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단조로우면서도 복잡한 작업이고 긴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에게 있어 수놓는 일은 마치 밥먹고 잠자는 일상사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는 바늘 한땀을 시작할 때 우선 호흡을 고른다. 자세를 곧추하고 입정에 들어 마음에 어떠한 잡념도 없도록 한다. 오로지 바늘 한땀 한땀에 정성에 정성을 다하다 보면 어느덧 무념무상에서 오로지 바늘만이 마치 분신인양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렇게 움직이다보면 수틀이 화려한 무늬와 색으로 채워지듯 비워있던 마음에 충만한 환희심이 가득 차옴을 오랜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처음 불교작품을 할 때였어요. 충청도 한 암자에서 천주(千珠)를 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관세음보살 염송만 미친 듯이 했지요. 제 모습을 본 그 암자의 스님이 ‘당신은 기도를 잘하니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씀에 새벽이면 천주를 들고 촛불을 밝혀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낮에는 수놓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했던 그 기도 덕택인지 불교작품으로 큰 상을 탔지요.”81년 제6회 전승공예대전에서 그는 단청장 이만봉스님의 지도로 괘불(掛佛)을 수놓아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냥 수를 잘 놓아서 받은 상이 아니었다. 전통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니며 한국 전통수의 기법을 연구하던 그는 선암사 대각국사의 가사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자수기법인 자리수를 발견하고, 이를 괘불에 응용했던 것이다. 수를 돗자리모양으로 놓는다 하여 자리수라 하는 이 기법은 조선시대 이후 단절됐던 것으로 한씨가 다시 복원해 냄으로써 우리나라 전통수의 특징을 하루아침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 자수의 원형을 찾다보면 불교수가 우리나라 수의 역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생활용품 등을 중심으로 자수 자료를 수집하다가,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자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시대 작품의 대부분이 수불(繡佛)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남들이 하지 않는 수불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게 된 거예요.”한상수씨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신명을 바쳐 일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긴다. 밤낮을 구분하지 않은채 온 정열을 작품에 쏟고, 숨어있는 옛 자수룰 찾기위해 꾸준히 자료를 모은다. 대만 일본 등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에서 고유한 기법과 문양을 발견하여 정리해 그동안 <기초자수> <이조자수> <흉배> <수불>등의 저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가 전통자수의 맥을 잇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미술시간에 모란꽃 무늬가 박힌 귀주머니를 만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조선수를 놓는 그를 담임선생님이 크게 격려했고, 일찍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그는 17세때 고향인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본격적인 자수공부를 시작했다. 광화문을 지나다가 전봇대에 ‘자수강습, 기술자 구함’이라고 적힌 광고를 보고 찾아간 어느 수예점에서 “자수를 평생공부하고 싶다”는 한마디가 자수연구가 故 조정호씨(전 이화여대교수)를 은사로 모시게 되는 큰 인연이 되었다. 그로부터 20년간 조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자수의 기초부터 차근히 배워나갔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수의 외길을 한눈 팔지않고 걸어 왔다. “84년 자수부문에서 첫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고는 위암으로 돌아가신 선생님이 유물로 남기신 바늘 한쌈을 안고 엉엉 울었지요.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지금도 마음먹고 큰 작품을 할 때면 선생님이 주신 바늘을 사용합니다.” 얼핏 보기에 자수는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디어 구상에서부터 천 선택, 도안본 그리기, 실 준비하기, 실 염색하기, 수 기법 정하기, 수 놓기 까지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만 놓았다고 또 다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를 다 놓은 후 먼지를 털고, 실밥을 정리하고 뒷면에 풀칠을 해야 한다. 그리고 풀이 마르면 뜨거운 김을 쏘여 잘 펴고, 다시 그늘에서 하룻밤 동안 말려 수 속에 습기가 없게 완전히 건조한 다음 액자나 주머니 등 원하는 형태로 제작하는 것이다.
“처음 초보때는 오로지 곱고 매끄러운 수 놓기에만 신경을 쓰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륜이 쌓이게 되면 자수 기법과 터치도 새로워지고, 완숙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바늘끝에서부터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거침없는 바늘이 나와 천을 뚫고 실을 옮겨다니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게 됩니다. 수는 손으로만 놓는 것이 아니란 것을 터득하게 되는 거지요. 마음 가는대로 바늘이 움직이고, 마음에 한점 흐린 구석이라도 있으면 자수에 그게 나타납니다.”지난 세월 동안 우리 수의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자부심과 사명감 하나로 오늘의 일가를 이룬 자수장 한상수씨. 바늘에 실을 끼워 한번 시작한 자수는 뒤로 가는 후퇴란 없다. 후퇴 할 수 없기에 한땀 한땀에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하듯 한씨는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한다. 되돌아 갈 수 없는 우리의 삶, 그렇기에 인생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사는 방법을 자수에서 배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수의 기능적인 측면만을 보고, 학문으로 보려는 데는 인색합니다. 자수는 섬유와 실과 염색, 도안, 형태 구상 등 모든 것을 필요로 하는 종합예술입니다. 기술만 있다고 되는게 아니예요. 저는 남은 세월을 우리 전통자수를 체계적이고 학문적으로 완성하는데 바칠 생각입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이면 자수와 관련한 자료들을 모아 글로써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또 매년 자수국제교류전도 열어 세계 곳곳에 우리 나라의 전통수를 계속 전할 생각입니다. 내가 만든 수가 하나라도 영원히 남는다면 이 험한 시대를 살아온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그는 내년 3월 천3백여년전에 백제인과 고구려인의 지도로 완성돼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는 ‘천수국만다라수상’을 보러 일본에 간다. 민간인에게 그것도 자국인이 아닌 타국인인 한씨에게 자기나라의 최고국보를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한상수씨를 세계적인 자수의 대가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상수씨는 대가의 눈으로 우리나라 전통수의 특징을 살피고, 그또한 자수법으로, 작품으로, 책으로 남겨 후대에 남길 것을 지금 구상중이다.
한땀한땀 정성 쏟다보면
어느덧 무념무상의 세계
수틀엔 삼라만상 드러나
평생을 오로지 우리나라 전통자수(刺繡)의 맥 잇기에 바쳐온 한상수씨(68·중요무형문화재 제80호 자수匠)의 삶은 마치 깨달음의 경지를 향해 끊임없이 참구하는 수행자의 그 길과 맞닿아 있다.
그는 자수에 발을 들여놓은 이후 한시도 전통자수 복원에 대한 발원을 놓아 본 적이 없다. 생계조차 어려웠던 시절에도, 아이를 낳아 등에 업고 다니면서도 그녀는 실잣는 법 하나, 염색하는 법 하나 놓치지 않으려 시골 할머니의 수틀까지도 살펴 보았다. 우리나라 전통 자수의 복원 그것은 평생의 화두였고, 오늘의 그를 있게 한 원천이었다. 70을 바라보는 나이지만 그는 아직도 수틀앞에 앉는 것을 거르는 날이 없다. 바늘에 실을 끼워 한땀 한땀 수백 수천번을 움직여 삼라만상의 대역사를 수틀에 빚어낸다. 작은 보자기에서부터, 노리개, 주머니, 병풍, 수불(繡佛)에 이르기까지 바늘과 실, 그리고 지극한 정성과 심미안으로 자수를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킨다. 단조로우면서도 복잡한 작업이고 긴 인고의 시간을 필요로 하지만 그에게 있어 수놓는 일은 마치 밥먹고 잠자는 일상사처럼 자연스러운 일이 되었다.
그는 바늘 한땀을 시작할 때 우선 호흡을 고른다. 자세를 곧추하고 입정에 들어 마음에 어떠한 잡념도 없도록 한다. 오로지 바늘 한땀 한땀에 정성에 정성을 다하다 보면 어느덧 무념무상에서 오로지 바늘만이 마치 분신인양 자유자재로 움직인다. 그렇게 움직이다보면 수틀이 화려한 무늬와 색으로 채워지듯 비워있던 마음에 충만한 환희심이 가득 차옴을 오랜 경험으로 깨닫게 된다.
“처음 불교작품을 할 때였어요. 충청도 한 암자에서 천주(千珠)를 들고 아무것도 모르면서 그저 관세음보살 염송만 미친 듯이 했지요. 제 모습을 본 그 암자의 스님이 ‘당신은 기도를 잘하니 열심히 하면 된다’는 말씀에 새벽이면 천주를 들고 촛불을 밝혀 관세음보살을 염송하고, 낮에는 수놓는 작업을 계속했는데, 작품을 완성할 때까지 한번도 빠지지 않고 했던 그 기도 덕택인지 불교작품으로 큰 상을 탔지요.”81년 제6회 전승공예대전에서 그는 단청장 이만봉스님의 지도로 괘불(掛佛)을 수놓아 대통령상의 영예를 안았다. 그냥 수를 잘 놓아서 받은 상이 아니었다. 전통수에 대한 깊은 관심과 열정으로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니며 한국 전통수의 기법을 연구하던 그는 선암사 대각국사의 가사에서 우리만의 독특한 자수기법인 자리수를 발견하고, 이를 괘불에 응용했던 것이다. 수를 돗자리모양으로 놓는다 하여 자리수라 하는 이 기법은 조선시대 이후 단절됐던 것으로 한씨가 다시 복원해 냄으로써 우리나라 전통수의 특징을 하루아침에 알리는 계기가 됐다.
“우리나라 자수의 원형을 찾다보면 불교수가 우리나라 수의 역사에 끼친 영향이 대단하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저 또한 처음에는 생활용품 등을 중심으로 자수 자료를 수집하다가, 삼국시대 고려시대의 자수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현재까지 남아있는 그시대 작품의 대부분이 수불(繡佛)이었어요. 그래서 그때부터 남들이 하지 않는 수불에 온갖 정성을 기울이게 된 거예요.”한상수씨는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에 신명을 바쳐 일할 수 있다는 것을 가장 큰 행복으로 여긴다. 밤낮을 구분하지 않은채 온 정열을 작품에 쏟고, 숨어있는 옛 자수룰 찾기위해 꾸준히 자료를 모은다. 대만 일본 등지에 소장되어 있는 작품에서 고유한 기법과 문양을 발견하여 정리해 그동안 <기초자수> <이조자수> <흉배> <수불>등의 저서를 편찬하기도 했다.
그가 전통자수의 맥을 잇게 된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미술시간에 모란꽃 무늬가 박힌 귀주머니를 만든 것이 계기가 되었다. 어린 나이에 어려운 조선수를 놓는 그를 담임선생님이 크게 격려했고, 일찍이 자신의 재능을 발견한 그는 17세때 고향인 제주를 떠나 서울에서 본격적인 자수공부를 시작했다. 광화문을 지나다가 전봇대에 ‘자수강습, 기술자 구함’이라고 적힌 광고를 보고 찾아간 어느 수예점에서 “자수를 평생공부하고 싶다”는 한마디가 자수연구가 故 조정호씨(전 이화여대교수)를 은사로 모시게 되는 큰 인연이 되었다. 그로부터 20년간 조교수의 지도를 받으며 자수의 기초부터 차근히 배워나갔고,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자수의 외길을 한눈 팔지않고 걸어 왔다. “84년 자수부문에서 첫 인간문화재로 지정받고는 위암으로 돌아가신 선생님이 유물로 남기신 바늘 한쌈을 안고 엉엉 울었지요. 선생님이 없었더라면 오늘의 저는 없었을 테니까요. 지금도 마음먹고 큰 작품을 할 때면 선생님이 주신 바늘을 사용합니다.” 얼핏 보기에 자수는 간단한 것처럼 보이지만 아이디어 구상에서부터 천 선택, 도안본 그리기, 실 준비하기, 실 염색하기, 수 기법 정하기, 수 놓기 까지 아주 복잡하고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한다. 수만 놓았다고 또 다 작품이 되는 것은 아니다. 수를 다 놓은 후 먼지를 털고, 실밥을 정리하고 뒷면에 풀칠을 해야 한다. 그리고 풀이 마르면 뜨거운 김을 쏘여 잘 펴고, 다시 그늘에서 하룻밤 동안 말려 수 속에 습기가 없게 완전히 건조한 다음 액자나 주머니 등 원하는 형태로 제작하는 것이다.
“처음 초보때는 오로지 곱고 매끄러운 수 놓기에만 신경을 쓰게 되지만 시간이 지나고 연륜이 쌓이게 되면 자수 기법과 터치도 새로워지고, 완숙의 경지에 다다르게 되지요. 그렇게 되면 바늘끝에서부터가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거침없는 바늘이 나와 천을 뚫고 실을 옮겨다니며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게 됩니다. 수는 손으로만 놓는 것이 아니란 것을 터득하게 되는 거지요. 마음 가는대로 바늘이 움직이고, 마음에 한점 흐린 구석이라도 있으면 자수에 그게 나타납니다.”지난 세월 동안 우리 수의 전통을 지켜나간다는 자부심과 사명감 하나로 오늘의 일가를 이룬 자수장 한상수씨. 바늘에 실을 끼워 한번 시작한 자수는 뒤로 가는 후퇴란 없다. 후퇴 할 수 없기에 한땀 한땀에 온 정성을 기울여야 하듯 한씨는 모든 사람들이 그와 같은 삶을 살았으면 한다. 되돌아 갈 수 없는 우리의 삶, 그렇기에 인생에서도 최선을 다하며 사는 방법을 자수에서 배우기를 바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자수의 기능적인 측면만을 보고, 학문으로 보려는 데는 인색합니다. 자수는 섬유와 실과 염색, 도안, 형태 구상 등 모든 것을 필요로 하는 종합예술입니다. 기술만 있다고 되는게 아니예요. 저는 남은 세월을 우리 전통자수를 체계적이고 학문적으로 완성하는데 바칠 생각입니다. 그래서 매일 저녁이면 자수와 관련한 자료들을 모아 글로써 정리하는 작업을 하고 있어요. 또 매년 자수국제교류전도 열어 세계 곳곳에 우리 나라의 전통수를 계속 전할 생각입니다. 내가 만든 수가 하나라도 영원히 남는다면 이 험한 시대를 살아온 보람이 있지 않겠습니까.”그는 내년 3월 천3백여년전에 백제인과 고구려인의 지도로 완성돼 현재 일본 국보로 지정돼 있는 ‘천수국만다라수상’을 보러 일본에 간다. 민간인에게 그것도 자국인이 아닌 타국인인 한씨에게 자기나라의 최고국보를 보여주는 것은 그들이 한상수씨를 세계적인 자수의 대가로 인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상수씨는 대가의 눈으로 우리나라 전통수의 특징을 살피고, 그또한 자수법으로, 작품으로, 책으로 남겨 후대에 남길 것을 지금 구상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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