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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는 보셨나요, '와인 폭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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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방아풀 댓글 0건 조회 3,122회 작성일 12-05-09 1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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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종종 화이트 와인에 소주를 섞어 마시곤 합니다. "아니, 자칭 와인 애호가라는 사람이 어떻게 와인에 다른 술을 섞어 마신단 말인가?"라고 힐난하실 분들, 계실 줄 압니다. 하지만 맛있습니다. 특히 생선회와 같이 곁들이면 말이죠.
 
사실, 포도나무는 자연이 제공해 준 정수기입니다. 땅 속의 수분을 걸러서 포도 알갱이 속에 저장하기 때문에, 그 즙으로 만든 와인은 그 어떤 음료보다도 깨끗합니다. 양질의 식수가 부족했던 유럽에서 와인이 널리 보급되었던 큰 이유 가운데 하나도, 청결한 음료의 확보였습니다. 특히 고대 로마의 군대가 유럽 곳곳의 점령지에다가 포도나무를 심은 것은 깨끗한 군용 음료로 사용할 와인을 확보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오늘날 시중에 팔리는 와인도 산화 방지를 위해 약간 첨가되는 이산화황을 제외하고는 첨가물이 전혀 없는 자연 그대로의 무공해 액체입니다.
 
하지만 와인의 역사를 살펴보면 와인에 이물질(?)을 섞어 마시는 행위는 고대로부터 존재했습니다. 이란과 이라크 국경 부근에 있는 자그로스 산맥에서 발견된 7천여년전의 신석기 유물에서는 포도즙과 함께 송진 찌꺼기가 발견되었습니다. 신석기인들이 방부제로 와인 속에 송진을 넣어 마신 증거입니다. 이 전통은 지금도 계속되어, 그리스 일부 지역에서는 와인에 송진을 첨가하고 있습니다.
   
송진을 넣어 만든 그리스의 화이트 와인인 레트시나(Retsina). 사진 출처: http://en.wikipedia.org/wiki/Retsina
 
뿐만 아니라 유럽의 고대 유물에서는 와인에 꿀이나 허브, 향신료 등의 첨가물을 넣어 마신 흔적이 발견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전통은 그리스를 거쳐 로마시대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스 시대에 성행했던 심포지움에서 철학을 강의하던 소크라테스의 와인잔 속에는 달콤한 꿀이 첨가되었을 공산이 큽니다. 또한 그리스와 로마 시대에는 와인을 물로 희석시켜서 오늘날의 맥주와 비슷한 도수의 알코올 음료로 만들어 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같은 전통은 오늘날 유럽에서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여름이 유난히 무더운 스페인에는 ‘샹그리아’라는 음료가 인기를 끕니다. 와인에다가 레몬과 오렌지를 썰어 넣고 약간의 설탕을 타서 냉장고에 넣어뒀다가 차게 마십니다. 기호에 따라서는 약간의 탄산소다(사이다 혹은 쎄븐업)도 첨가하면 맛있습니다.
반대로 한겨울 프랑스의 스키장에서는 뱅쇼(Vin Chaud; 독일에서는 글뤼바인 Gluehwein)라는 와인 기반의 따뜻한 음료를 마십니다. 레드 와인에다가 오렌지, 복숭아 등 과일과 함께 꿀과 정향을 넣고 보글보글 끓여서 따뜻하게 즐기는 음료입니다. 물론 샹그리아나 뱅쇼를 만들 때 고급와인을 사용해서는 안 되고 저렴한 와인을 써야겠지요.
 
물론 와인에 다른 물질을 섞어 넣는 행위가 비난 받아 마땅한 경우가 있습니다. 와인 붐이 한창이던 1990년대, 일본의 부호들 사이에서는 한 병에 수백만원 하는 ‘로마네 콩티’에다가 최고급 샴페인인 ‘동 페리뇽’을 섞어서 마셨다고 합니다. 그리고 최근에는 중국의 갑부들이 최고의 보르도 와인 가운데 하나인 ‘라피트 로스칠드’에 콜라를 섞어 마신다는 소문도 들었습니다. 이런 경우는 섬세하고 복합적인 고급 와인의 풍미를 파괴하는 행위일 뿐만 아니라, 와인을 즐기는 목적 보다는 자신의 부를 과시하는 그릇된 돈질에 불과합니다. 한마디로 와인에 대한 모독이지요.
   
이탈리아 서북부 피에몬트 지역에 위치한 가비(Gavi) 마을에서는 코르테세(Cortese)라는 품종으로 화이트 와인을 만든다.  사진은 피오 세자레(Pio Cesare)에서 만든 2004년산 가비 와인.
 
화이트 와인에 소주를 섞어 마시는 저의 기이한 취향으로 돌아가 봅니다. 생선회에 어울릴만한 와인을 한동안 찾았습니다. 일식집에서 회를 시켜놓고, 샴페인도 마셔보고, 각종 화이트 와인들도 마셔봤습니다.
하루는 이탈리아의 가비(Gavi)라는 저렴한 화이트 와인을 일식집에 들고 갔습니다. 가비는 풍미가 강하지 않고 가벼운 바디감을 갖고 있어서 생선회와 잘 어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와인이 너무 가벼운 나머지 생선회의 풍미에 밀리더군요. 일행 분께서 "그냥 소주나 시켜 마십시다"하며 소주를 주문했는데, 순간 소주를 여기다가 섞으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군요.
결과는 대성공이었습니다. 소아베 4 대 소주 1로 배합을 했더니, 와인의 약했던 바디감이 묵직해지면서, 생선회와 좋은 궁합을 이루더군요. 이렇듯 와인과 첨가물이 상호보완작용을 하여 입을 즐겁게 해준다면, 와인에 이물질을 넣는 행위를 신성모독으로 생각하셨던 분들도 저를 용서해 주시지 않을까요?
이석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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